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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共軍, 精巧한 ‘덫’의 戰術[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東亞日報

中共軍, 精巧한 ‘덫’의 戰術[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7月 14日 11時 00分


코멘트

[11回]

동아일보 傘下 花亭平和財團은 停戰(停戰) 70周年을 맞아 6·25 戰爭 3年을 再照明하는 企劃 ‘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를 連載합니다. 아픈 過去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趣旨로 回顧錄과 硏究資料를 바탕으로 戰爭을 통해 各國이 追求했던 目標의 虛實을 眺望하고 아울러 全國에 散在한 6·25 激戰 現場을 찾아 當時 激戰 狀況도 再構成합니다.
‘수풍댐 上流, 零下 10度의 鴨綠江 물속으로 防寒服과 신발 洋襪을 벗어 등 뒤에 묶은 半裸體의 兵士들이 걸어 들어갔다. 江을 건너왔을 때는 온몸에 얼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銀色 甲옷을 着用한 幽靈 같았다. 應急處置를 擔當하는 女軍도 마찬가지였다. 江이 얼어붙기 前 이렇게 數 萬名이 건넜다. 晝間에는 洞窟, 汽車 線路 터널, 炭鑛 坑道, 마을 草家집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지면 移動했다.’(웨이트라웁, 43쪽)

中共軍은 北韓에 들어온 뒤 美軍의 空軍力을 두려워해 夜間에 兵力을 이동시켰다. 낮에는 兵士 한사람 한사람이 野山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移動하다가 美 空軍機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 놓고 주저앉아 攻襲을 避했다. 山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煙氣로 煙幕을 形成해 美軍 操縱士의 視野로부터 숨기도 했다.(백선엽 1卷, 196쪽)

中共 抗美援朝支援軍 훙쉐즈(洪學之) 第1副司令官은 “1950年 10月 19日 4個郡과 3個 砲兵師團이 안둥(安東·以下 단둥), 창뎬허커우(長甸河口) 지안(集安) 3곳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朝鮮으로 들어갔다”고 했다.(훙쉐즈, 64쪽). 하지만 많은 兵力은 夜陰을 틈타 다리가 아닌 江물을 直接 건넜다.

中國 랴오닝城 단둥 ‘鴨綠江 斷交’위에 中共人民支援軍 司令官 펑더화이가 兵力을 이끌고 渡江하는 場面을 再現해 놓았다. 參戰 中共軍을 ‘人民支援軍’이라고 한 것은 國家가 戰爭에 나선 것이 아니라 各 個人이 支援해서 나선 것이라는 意味다. 全國에서 延人員 120萬 名 以上을 動員한 戰爭에 맞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式 名分일 뿐이다. 단둥 = 홍진환 記者


● ‘13日의 再結晶’, “鴨綠江 다리 爆破 前 一擧에 投入”
유엔軍이 38線을 突破해 빠른 速度로 北進해 中共軍의 參戰은 時間 問題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間 中共軍 派兵을 둘러싼 막판 神經戰 끝에 派兵이 最終 再結晶된 것은 10月 13日 0時 以後여서 中國側 硏究書는 ‘13日의 再結晶’이라 부른다고 한다. 蘇聯軍 空軍 支援이 없어 마오쩌둥이 갑자기 出兵 中止 命令을 내리는 迂餘曲折이 있어 出兵 날짜는 19日로 늦춰졌다. 初期 投入 兵力은 1次 25萬餘 名, 2次 15萬 名, 3次 20萬 名으로 總 60萬 名이었다.(이상호, 252쪽)

北韓 派兵 準備를 위해 단둥(丹東)에 온 中國人民支援軍 副司令官 훙쉐즈는 10月 7日 美軍 戰鬪機가 단둥이나 鴨綠江大橋를 爆擊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戰爭 擴大를 避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後에 알았다. 그는 美軍 戰鬪機가 鴨綠江 鐵橋를 爆破하기 前에 4個郡(軍團)을 投入하기로 했다고 述懷했다.(훙쉐즈, 53쪽)

中國 단둥의 鴨綠江 斷交, 江 中間부터 北韓쪽으로 다리가 끊겨 橋脚만 남아있다. 江 건너便은 北韓 新義州. 단둥 = 홍진환 記者


● 유엔軍의 빠른 北進으로 作戰 變更
中共軍은 當初 鴨綠江을 건넌 뒤 北韓의 허리部分까지 進擊해 防禦線을 構築하려고 했으나 유엔軍 北進 速度가 빨라 作戰을 變更했다. 鴨綠江을 넘어오기 前부터 北쪽 山岳地帶에서 陣地戰과 機動戰을 配合한 反擊 襲擊 埋伏 等을 構想했다.(훙쉐즈, 68쪽).

美軍은 中共軍이 鴨綠江을 넘어와 山岳地帶에 숨어있는 것을 몰랐고 中共軍은 美軍과 國軍이 鴨綠江에 그렇게 빨리 到達할지 豫想 못했다. 初盤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狀態였다. 하지만 그後 相反된 對處가 戰況을 갈랐다. 中國은 現代化된 裝備와 해空軍을 갖춘 美軍과 正面 對決하기 보다 迂廻 攻擊과 分散, 隱蔽 等으로 對應했다.

<中共軍의 美軍 對應 戰術 指針 >
  • 持久戰, 敵 側面 迂廻 各個 擊破
  • 接近前, 夜間戰, 速戰速決, 敵의 强한 火力의 長點 發揮 防止
  • 낮에는 兵力 分散 隱蔽해 攻襲 回避
  • 戰鬪機 活動 制限되는 夜間戰鬪
  • 爆擊 憂慮있는 鐵路 道路 移動 回避
  • 진지 埋伏後 北進하는 相對 攻擊

<中共軍의 7次例 攻勢>
順序
時期
期間( 日)
特異 事項
1
1950年 10月 25日?11月 5日
12
攻勢 後 中共軍 潛跡
2
〃 11月 25日?12月 10日
15
長津湖 戰鬪
3
〃 12月 31日?1951年 1月 10日
11
1·4 後退
4
1951年 2月 11?18日
7
유엔軍 37度線까지 後退
5
〃 4月 22?30日
9
1次 春季攻勢, 最大 單一 軍事作戰으로 70萬 名 動員
6
〃 5月 16?20日
5
2次 春季攻勢, 攻勢 失敗 後 本格 持久戰, 電線 膠着 狀態 持續
7
1953年 7月 13 ?27日
15
休戰 署名 直前 最後 攻勢
中國 랴오닝城 단둥 抗美援朝記念館 外部에 中共軍 中包가 大規模로 展示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記者


● ‘7次例 攻勢’를 알리는 信號彈 雲山 戰鬪
美軍이 中共軍의 攻勢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次例나 當한 뒤였다. 1週日에서 보름 假量 ‘人海戰術(人海戰術)’로 攻擊을 해오다 一定 期間 休紙 期間을 지난 뒤 다시 攻擊하는 패턴이 反復됐다.

中共軍 出兵을 申告한 韻産戰鬪(1950年 10月 25日~11月 3日)에서 中共軍에게 一擊을 當한 뒤에도 中共軍의 實體를 把握하는데 失敗하고 敎訓을 얻지 못한 對價는 ‘無事安逸 北進’하던 美軍과 國軍의 戰況을 훅 뒤집을 程度로 컸다.

雲山戰鬪는 國軍 第1師團과 美軍 第1起兵師團이 中共軍과 처음으로 치른 戰鬪다. 中國은 첫 戰鬪가 벌어진 10月 25日을 參戰 記念日로 삼고 있다. 中共軍은 “美軍의 최정예라는 第1起兵 師團의 콧대를 꺾어 興奮되는 일이었다”고 評價했다.(훙쉐즈, 108쪽)

國軍 1師團 15聯隊는 25日 金鑛으로 有名한 雲山에서 迫擊砲 洗禮를 받았다. 첫날 戰鬪에서 35歲 假量의 捕虜 한 名이 생포됐다. 두툼하게 누빈 無名 防寒服으로 겉은 카키色, 속은 흰色이어서 눈이 오면 僞裝服度 됐다. 그는 自身이 제39군 所屬으로 광둥省 出身이라고 밝힌 뒤 隣近에 2萬 名 假量의 中共軍이 있다고 술술 털어놨다. 直接 訊問한 白善燁 師團長은 美 8軍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司令部에 報告했다. 도쿄 司令部는 朝鮮族 의용병이 加擔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5聯隊는 雲山에서 ‘戰鬪部隊로서 存在하기를 멈췄다’고 할 程度로 壞滅됐다. 美 第8起兵 連帶도 中共軍에게 包圍돼 兵力 過半數를 잃었다. 中共軍 捕虜 한 名의 陳述을 흘려버린 對價였다.

中共軍은 雲山 戰鬪 後 潛跡했다. 兵士들이 携帶한 食糧과 彈藥이 바닥나 再充電의 時間이 必要했다. 하지만 더 重要한 理由는 中共軍의 大規模 投入 事實을 모르는 것을 逆利用해 더 큰 勝利를 할 수 있다는 判斷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훙쉐즈, 111쪽). 一時的 後退로 一種의 眞空狀態를 만든 다음 戰鬪力이 더욱 優秀한 敵을 追加로 誘引해 埋伏戰術로 殲滅하려는 計略이었다. 中共軍의 노림數는 敵들에게 怯을 먹고 後退하고 있다는 그릇된 印象을 주는 것이었다.유엔군은 이런 中共軍의 計略에 말려들었다. (웨이트라웁, 45쪽)

애치슨은 中共軍과의 戰鬪에서 가장 重要한 時期는 10月 26日부터 11月 17日까지 3主日이라고 했다. ‘韓國에서 災難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마지막 機會를 잃었다’고 했다.(애치슨, 602쪽). 1次 大攻勢 以後 中共軍의 實體를 把握하지 못한 것을 指摘한 것이다.

中國 랴오닝城 단둥 抗美援朝記念館에 中共軍 各 部隊의 出兵 및 歸國이 詳細히 記錄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記者


● ‘미끼 던지고 보름달 計算하고’, 精巧한 덫
1次 攻勢 後 埋伏하고 있던 中共軍은 유엔軍의 北進 速度가 느려진 것을 걱정했다. 陷穽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敵이 먼저 밀고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中共軍은 意圖的으로 비호산, 德川 等을 抛棄해 相對를 誘引했다. 後退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作戰이 露出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主力 部隊는 10餘km 後方에 있고, 小規模 部隊로 奇襲攻擊을 해 攻擊開始線까지 쫓아오도록 했다. 中共軍 總司令官 펑더화이(彭德懷)는 雲山 戰鬪 後 바로 자취를 감추는 等 일부러 弱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敵을 교만하게 만들어 깊이 誘引하려는 戰術이었다는 것이다.(펑더화이, 426쪽).

2次 攻勢를 앞두고는 核心 精銳部隊를 ‘미끼’로 던졌다. 抗日戰爭과 國共 內戰에서 ‘撤軍(鐵軍)’으로 알려진 112師團을 敵의 攻擊해 露出시켰다. 對備가 허술하다고 判斷하고 敵이 進擊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

3次 大攻勢 前에는 달뜨는 時期를 살폈다. “보름달 뜨기 며칠前이 攻擊 開始에 가장 좋다. 戰鬪가 最高潮에 이를 때 보름달이 되어 가장 밝다.” 우리에게 新正 攻勢로 알려진 12月 31日 3次 攻勢 開始 날짜는 그렇게 定해졌다.(훙쉐즈, 192쪽). 크리스마스 雰圍氣도 채 안가고, 年末年始 警戒心이 풀어진 틈을 利用하자는 計算도 있었다. 中共軍은 밤에 山岳을 移動할 때는 고무 軍靴를 신고 어두운 山허리를 소리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侵入해 왔다.(리지웨이 回顧錄, ‘鄕軍’ 3月號, 122쪽)

中共軍이 70萬의 大規模 兵力을 動員해 5次 大攻勢를 편 것은 美軍이 東海岸 通川 元山 等으로 上陸할 可能性이 있다는 情報에 따라 反擊하기 爲한 것이었다. 38線을 치고 올라오면서 上陸作戰으로 39度線의 按酒~원산선으로 側面 攻擊해오면 主要 補給線이 遮斷돼 큰 威脅이 된다고 봤다.

中國 랴오닝城 단둥 鴨綠江 上流에 中共軍이 盜講했던 地點이라며 標識石과 兵士들 銅像을 세워놓았다. 뒤의 鴨綠江에는 當時 臨時 다리를 세웠던 痕跡이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記者


● ‘北韓의 山岳地帶로 誘引’
中共軍이 仁川上陸作戰을 할 때부터 유엔軍을 北韓의 山岳地帶로 誘引했다는 分析도 있다. 中國은 洛東江 戰線까지 밀고 내려간 北韓에 後方 逆襲을 警告했지만 上陸作戰이 成功한 後에는 美軍이 北韓까지 進擊하도록 地上軍 投入을 늦췄다는 것이다. 北韓 最北端 山岳地域에서 맞붙는 것이 中共軍의 普及先導 짧고 防禦에도 유리하다고 判斷했다. 미리 投入해 中共軍이 38線까지 내려간 뒤 美軍이 咸興이나 南浦 等 더 北쪽으로 上陸하면 不利하다고 判斷했다는 것이다.(쑤이, 155쪽)

美軍이 鴨綠江으로 進軍할 때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固執과 傲慢을 부릴수록 우리에겐 유리하다. 傲慢한 敵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면서 美軍이 最大限 北쪽으로 올라와 補給路에 問題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핼버스탬, 569쪽)

中國 단둥 抗美援朝記念館에 展示되어 있는 美 陸軍 2師團 마크. 단둥 = 홍진환 記者
<戰爭 期間 中共軍 兵力 數 增加>
區分
1950.10.28
1950.12月 初
1951.7.10
1953.7.27
社團 個數
18
31
51
58
兵力(名)
203,640
531,500
948,299
1,221,058
時期
첫 參戰
2次 攻勢
休戰會談 始作
停戰協定 署名


● 美 2師團, 군우리 戰鬪 ‘인디언 笞刑’ 屈辱
中共軍의 ‘埋伏과 덫’의 戰術에 悽絶한 敗北를 當한 것이 군우리 戰鬪다. 國軍 6師團을 始作으로 美軍과 國軍이 鴨綠江에 到達한 直後부터 中共軍의 猛烈한 氣勢로 이제는 包圍網을 뚫고 後退하기 汲汲했다. 鴨綠江에 처음 到達했던 國軍 2軍團 6師團은 楚山에서 埋伏 포위당해 壞滅됐다. 7師團과 8師團 亦是 中共軍 攻擊에 하룻밤 사이 무너졌는데 두 師團의 師團長은 部隊를 離脫한 뒤 서울 거리를 떠돌다 憲兵에 逮捕돼 軍法裁判에서 무거운 判決을 받았다.

洛東江 戰線에서 一齊히 北進할 때 湖南地方을 돌며 後方 게릴라 잔病 掃蕩을 하던 美 2師團이 國軍 2軍團이 무너져 뚫린 곳에 急遽 投入됐다. 美 2師團은 淸川江邊의 平南 价川郡 군우리의 좁은 溪谷에서 中共軍 第42軍의 包圍網에 걸려들었다. 미리 埋伏하고 있던 中共軍이 偵察을 맡은 戰車 小隊를 通過시켰고, 뒤따르는 憲兵 偵察隊와 搜索中隊 偵察隊, 本隊를 分離 打擊했다.

군우리 戰鬪는 敵이 埋伏하고 있을지도 모를 골짜기를 夜間에 移動한 것부터 큰 失策이었다. 낮이라면 美軍의 空軍 및 火力支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夜間에는 홀로 敵과 맞서야 한다. 카이저 師團長은 곧 바로 現職에서 물러났다. 美軍의 戰士(戰史)는 카이저 所長의 失手를 詳細히 記錄해 敎訓으로 삼는다고 한다. (白善燁 1卷, 125쪽).

美 2師團은 앞뒤가 遮斷된 狀況에서 溪谷 위에서 集中 砲擊과 射擊을 받아 사흘만에 兵力의 20% 만이 살아남았다. 戰鬪가 끝난 뒤 트럭과 裝備, 野砲와 各種 武器 그리고 莫大한 量의 物資가 고스란히 中共軍에 넘어갔다. 그中 相當數는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等이 있는 最高 指導部에게도 傳해졌다고 한다.(핼버스탬, 131쪽)

美 2師團의 部隊 마크가 ‘인디언 헤드’이고 인디언들이 溪谷 兩側에서 攻擊하는 戰術과 닮아 ‘인디언 笞刑’을 當했다고 美 戰士는 記錄한다. 군우리 戰鬪(1950年 11月 29日~12月 1日)는 6·25 當時 美軍의 師團級 部隊가 當한 最惡의 被害였다.(남도현, 279쪽).



● 南珍(南進) 速度와 範圍두고 共産側 內部 異見
美軍이 中共軍 攻勢에 38線 南쪽으로 撤收한 것은 12月 16日이지만 中共軍이 뒤따라 넘은 것은 열흘 뒤인 26日이다. 마오는 12月 4日 平壤에 들어온 뒤 서울까지 占領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펑더화이는 너무 멀리 내려가는 것은 普及先導 길어지고 誘引 作戰에 걸릴 수 있어 서울 占領은 北韓軍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쑤이, 248쪽).

1951年 1月 8日, 펑더화이는 部隊의 眞空을 멈추고 全軍 2個月間의 再整備를 命令했다. 中共軍이 38線을 넘고 서울을 재점령한 뒤에는 中共軍을 南쪽으로 더 誘引한 다음 陸海共 共同 上陸作戰을 펴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려는 計劃인지도 모른다고 憂慮했다. 펑더화이는 “37度線에서 攻擊을 멈췄는데 우리를 洛東江으로 깊이 誘引하려던 敵은 우리 防禦가 堅固하게 完成되지 않은 것을 알고 1月 下旬 反擊을 加했다”고 當時를 分析했다.(펑더화이, 429쪽)

北韓駐在 蘇聯大使 라자例프는 “戰鬪에 이기고도 敵을 追擊하지 않는 作戰을 指示하는 司令官은 누구냐?”고 抗議하다 스탈린에 依해 早期 歸國當했다.(훙쉐즈, 203쪽).

中國 랴오닝城 단둥의 ‘鴨綠江 斷交’에서 觀光客들이 寫眞을 찍고 있다. 斷交 왼便으로 北中 交易의 主要 通路인 ‘重遭遇의교’로 불리는 鴨綠江 鐵橋가 보인다. 鐵路와 道路로 쓰인다. 단둥 = 홍진환 記者


● 中蘇의 ‘際限戰’
美國에서도 맥아더의 滿洲 爆擊 等 擴戰論과 트루먼의 際限戰론 間에 葛藤이 있었지만 中小度 擴戰을 避하고자 했다. 1951年 4月 11日 트루먼이 맥아더를 解任하자 中國 共産黨 指導部는 ‘恐怖로부터 解放됐다’고 반겼다고 한다. 戰爭이 韓半島에 局限될 것이라고 確信했기 때문이었다. 美國이 參戰하지 않을 것이라는 豫想에 따라 김일성의 南侵을 承認하고 支援했던 蘇聯과 中國은 美軍이 迅速히 地上軍을 보내 參戰하자 直接的인 對決이나 擴戰을 막으려고 했다.

中共은 空中戰을 擴大시키지 않아 美國의 核攻擊 또는 中國 本土에 對한 報復行爲의 危險을 避하려고 했다. 트루먼이 中國 本土로 戰爭을 擴大하지 않은 데는 中國이 空軍力 行事에 신중한 것도 한 要因이라는 分析이다.(쑤이, 260쪽) 蘇聯도 美國과의 直接的인 對決을 避하기 위해 空軍 作戰에서 制限을 두었다. 戰爭에 參加했다는 어떠한 痕跡도 남기지 않도록 神經을 썼다. 理由는 다르지만 美國도 蘇聯 空軍의 參戰 事實을 祕密로 했다. 蘇聯 參戰한 것이 浮刻되면 輿論을 刺戟해 戰爭이 擴大될 수 있기 때문이다.(선즈화, 504쪽).

蘇聯 空軍 參戰 및 交戰 守則
  • 蘇聯 領土에서 離陸해 作戰 投入 禁止
  • 中國 或은 朝鮮飛行機로 僞裝, 操縱士는 中國 軍服 着用
  • 朝鮮 作戰 投入 事實 漏泄 禁止 覺書와 宣誓
  • 飛行 中 러시아語 使用禁止
  • 유엔軍 統制區域 或은 戰線 隣接地域 飛行 禁止
  • 西海 上空 交戰 禁止
  • 平壤?元山 南쪽(39度線) 適期 追擊 禁止


折半만 끊어진 ‘鴨綠江 斷交(鴨綠江 斷橋)’
中國 랴오닝城 단둥의 ‘鴨綠江 斷交’. 江 가운데부터 北韓쪽은 1950年 11月 美軍 爆擊으로 부서져 橋脚만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記者
中國 랴오닝(遼寧)省 단둥(丹東)의 鴨綠江 斷交(斷橋)는 北韓쪽이 없고 中國쪽 橋脚만 남아있다. 다리의 折半만 爆擊으로 부서진 것이다. ‘鴨綠江 斷交’로 保存되어 많은 觀光客이 찾는 이곳은 中共軍의 介入으로 인한 6·25 戰爭을 읽는 重要한 코드가 담겨 있다.

다리가 折半만 끊어진 것은 ‘中共軍에 對한 美軍의 攻襲은 저기까지’라는 意味가 담겨있다. 鴨綠江 中間이 國境인데 北韓쪽 折半만 爆擊한 것은 中國으로의 擴戰을 막겠다는 트루먼 大統領과 軍 및 補給品 遮斷을 위해 다리를 끊어야 한다는 맥아더 司令官의 折衷點을 보여준다. 中共軍 介入에 對應하기 위해 다리는 爆擊하지만 折半 밖에 하지 못한 擴戰論과 際限戰의 葛藤이 折半만 破壞된 끊어진 다리에 凝縮되어 있다.

中國 랴오닝城 단둥의 ‘鴨綠江 斷交’ 끝에는 ‘歷史의 龜鑑’으로 삼는다며 爆擊 事實을 記錄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記者
“워싱턴이 내린 制限 命令으로 나는 中共軍의 大量 介入을 沮止하기 위하여 取할 수 있는 한 가지 方法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트레트메이어 將軍에게 B29 爆擊機 90臺로 鴨綠江 鐵橋를 爆破하라고 命令했다. 爆擊을 잘못하여 爆彈이 滿洲 땅에 떨어질 危險이 있어서 나는 그때까지 그 命令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맥아더, 222쪽)

1950年 11月 6日 맥아더의 命令에 따라 鴨綠江 大橋 等을 爆擊하겠다는 스트레이트마이어 極東空軍司令官의 電報를 받고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中間選擧 前날 캔사스市에 있던 트루먼에게 애치슨이 緊急 電話를 걸었다. “事案이 重大해서 卽刻的인 決定이 必要하다”고 했다. 트루먼은 “我軍에 對한 卽刻的이고 深刻한 威脅이 있을 境遇에 한해서 許諾할 것”이라고 했다. 美 合參은 도쿄에서 爆擊機가 離陸하기 1時間 20分 前 全文을 發送했다. 英國과 協議없이 滿洲에 影響을 미치는 行動을 取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命令이 있을 때까지 國境 5마일 以內 標的에 對한 爆擊을 延期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番에는 맥아더가 “大規模 兵力 및 物資가 鴨綠江 前 橋梁을 통해 滿洲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麾下 部隊를 위태롭게 하고 窮極的으로 瓦解되도록 威脅하고 있다”며 爆擊의 必要性을 强調한 긴 電文을 보냈다. “合參의 指示는 重大한 災難을 招來할 수 있기 때문에 이 問題를 卽時 大統領이 提起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애치슨, 600쪽)

브래들리 合參議長이 맥아더의 專門을 電話로 트루먼에게 그대로 읽어주었다. 部隊가 威脅을 當하고 있다는 點이 마음에 걸린 트루먼은 決定을 飜覆했다. 다만 “鴨綠江 橋梁의 韓半島側 連結 部分을 包含하는 恨만 國境에 對한 爆擊을 許諾한다. 鴨綠江의 댐이나 水風發電所 爆擊을 許諾하는 것은 아니다” “滿洲의 領土와 領空을 侵犯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北韓 新義州의 鴨綠江 건너便의 中國 랴오닝城 단둥은 變更 觀光都市 中 하나다. ‘鴨綠江 斷交’가 變更 10代 觀光名所 中 한 곳이라는 案內文과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記者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워싱턴은 不可能하다는 것을 알고 許可했다. 다리 折半만 爆擊하려면 鴨綠江 下流에서 一直線으로 飛行하면서 爆擊해야 한다. 그러면 敵은 飛行 코스를 알고 高射砲를 發射할 것이다”고 했다. 實際로 이 作戰으로 對空砲 射擊을 받아 負傷을 입은 操縱士는 “워싱턴과 유엔은 都大體 누구 便입니까”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折半 爆擊’ 指示에 反撥해 自身을 解任하라고 要請하는 電報 文案을 準備했다가 參謀들의 挽留로 찢어버리고 보내지 않았다.(맥아더, 224쪽). 맥아더는 “美國 歷史上 野戰 司令官에게 주어진 決定 中에서 이처럼 融通性이 없고 無謀한 決定은 類例를 찾아볼 수 없다”고 不滿을 吐露했다. 映畫 ‘디보션’에는 美 航母에서 출격한 飛行機가 對空 射擊을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橋脚 사이를 지나며 爆擊하는 場面이 나온다.

1950년 11월 미군의 압록강 철교 폭격 장면.
1950年 11月 美軍의 鴨綠江 鐵橋 爆擊 場面.
트루먼의 修正 命令에 따라 鴨綠江 橋梁에 對한 爆破가 11月 8日부터 14日까지 進行됐다. 8日 스트레이트마이어의 日記는 이렇게 記錄했다. “첫 飛行에서 B-29 3臺가 橋脚 사이의 水面위로 飛行하며 爆擊을 했다. 中共軍은 (實力은) 보잘 것 없었지만 對共砲擊을 해왔다. 두 番째 飛行에서는 4代의 B-29街 다른 쪽 橋梁 첫 番째 橋脚 사이 水面위로 飛行했는데 結果에 만족한다. 來日은 B-29街 남은 橋梁들을 휩쓸고 지나갈 豫定이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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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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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善燁 지음, 유광종 整理, 『白善燁의 6·25 戰爭 懲毖錄』 1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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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長津湖 戰鬪와 興南 撤收作戰』, 北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韓國戰爭』, 푸른역사, 2012.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李榮敏 옮김, 『나, 펑더화이에 對해 쓰다』, 앨피, 2018.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中國이 본 韓國戰爭』, 韓國學術情報, 2008.
『鄕軍』 1991年 3月號,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구자룡 花亭平和財團 21世紀平和硏究所長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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