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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兒痲痹 46歲 딸 임영자 氏, 癡呆 70代 어머니에게 쓴 글 ‘便紙쓰기 大會’ 對象|東亞日報

小兒痲痹 46歲 딸 임영자 氏, 癡呆 70代 어머니에게 쓴 글 ‘便紙쓰기 大會’ 對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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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入力 2010年 9月 3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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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身은 걷지못하는 나에게 어머니란 이름의 守護天使 몇달에 한番 家族 알아볼땐
千萬金을 얻은 것보다 幸福 처음 드리는 이 딸의 便紙 마음으로라도 읽어주세요

본인이 소아마비 장애인이면서도 치매에 걸린 70대 어머니를 모시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편지에 담은 임영자 씨. 임씨는 2일 제11회 전국편지쓰기대회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 제공 우정사업본부
本人이 小兒痲痹 障礙人이면서도 癡呆에 걸린 70代 어머니를 모시며 어머니에 對한 사랑을 便紙에 담은 임영자 氏. 林氏는 2日 第11回 全國便紙쓰기大會 施賞式에서 大賞을 受賞했다. 寫眞 提供 郵政事業本部
“이 딸이 限平生 걸을 수 없듯이 當身 또한 잃어버린 記憶을 永遠히 되찾을 수 없다는 現實이 너무도 서럽고 서럽습니다. 當身에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이 感謝의 時間이 저에게 얼마나 더 許諾될지 只今은 알 수 없지만, 當身이 이승을 떠나는 그날까지, 아니 하느님께서 제 生命을 걷어 가시는 瞬間까지 當身을 尊敬하고 사랑합니다.”

小兒痲痹 障礙人인 40代 딸이 癡呆와 中風으로 病床에 누운 70代 어머니에게 보낸 便紙가 郵政事業本部가 主催한 ‘第11回 全國便紙쓰기大會’ 大賞을 차지했다. 便紙의 主人公은 서울에 사는 임영자 氏(46·女). 林 氏의 便紙는 大會에 應募한 8萬4000餘 桶 가운데 對象으로 選定됐다.

林 氏는 便紙에서 “어머니는 저를 20年을 업어 키우셨고, 當身 몸보다 더욱 커버린 이 딸을 업고 世上구경을 시켜주신다고 南山이며 奬忠壇公園度 數없이 가셨다”며 “當身은 제 삶의 里程標이자 守護天使였다. 하느님이 저를 平生 걷지 못하는 障礙人으로 태어나게 하신 代身 어머니라는 이름의 守護天使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12年 동안 中風으로 누워 있던 男便의 病수발을 하고, 딸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장사가 없는 어머니의 힘겨운 삶에 對한 안타까움도 吐露했다. 그는 癡呆를 겪는 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움 속에서도 “몇 個月에 한 番쯤 家族을 알아보시면 이 世上에서 千金萬金을 얻은 것보다 더 幸福하고 感謝하다”며 “當身에게 처음 드리는 이 딸의 便紙, 비록 눈으로 읽지 못하셔도 마음으로 읽어주세요”라며 끝을 맺었다.

한상준 記者 alwaysj@donga.com

dongA.com 에 便紙 全文

제 목 : 어머니께 드리는 便紙

사랑하는 어머니께.
어머니, 글도 모르시는 當身에게 40年 만에 처음으로 글을 드립니다.
어머니, 어머니란 이름만 입속으로 되 내어도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홀로 가슴을 움켜쥡니다. 슬픔이 나의 生活이 되어버린 요즘 이 딸이 한 平生 걸을 수 없듯이 當身 또한 잃어버린 記憶을 永遠히 되찾을 수 없다는 現實이 너무도 서럽고 서럽습니다.

어머니, 當身에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이 感謝의 時間이 저에게 얼마나 더 許諾될지 只今은 알 수 없지만, 當身이 이승을 떠나는 그 날까지 아니 하나님께서 제 生命을 걷어 가시는 瞬間까지 當身을 尊敬하고 사랑합니다.

어머니, 조금 前 當身은 귀저기 갈기를 頑强히 拒否하시며 아직 조금 남아있는 한 쪽 발의 힘으로 마구 발길질을 하시며 발버둥을 치셨지요. 그런 當身을 小兒痲痹로 兩쪽다리를 못 쓰는 저의 몸으로 한참을 실랑이 하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발버둥 치시던 當身이 이 딸과 실랑이하기도 지치셨는지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壁에 기대앉아 주름으로 거북이 등처럼 되어 버린 當身이 너무도 작아져 버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주르르 눈물이 볼을 타고 떨어졌습니다. 저의 서러움 吐해내는 소리에 주무시는 줄 알았던 當身이 휑하니 깊게 패인 눈을 뜨시며 깜짝 놀라물으셨죠? "아가, 왜 울어? 걷고 싶어서 우는 거니? 아가 울지 마라 내 다리 빌려 줄 테니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이 할미 가슴이 너무 아파 죽겠어." 하시며 연신 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감춰뒀던 것인지 寢臺 매트 밑에서 沙糖 하나를 꺼내어 제 입속에 넣어주셨지요.

가엾은 當身, 이 世上 어느 父母가 家族을 위해 熱心히 살지 않은 분 없겠지만 當身은 正말 熱心히 사셨습니다. 그런 當身이기에 이 딸의 가슴이 더욱 아프고 서럽습니다. 12年을 中風으로 누워있던 男便과 小兒痲痹로 걷지 못하는 딸을 키우며 當身은 열 손가락을 몇 番을 꼽았다 펴야할 程度로 안 해본 壯士가 없으셨지요. 그 歲月 동안 當身이 겪어온 삶의 힘겨움을 어찌 제가 想像이나 할 수 있을까요.

病席에 계셨던 아버지가 저 世上으로 떠나시고 저는 착한 男便을 만나 結婚했습니다. 저는 男便과 이렇게 約束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힘겹게 살아오신 불쌍한 當身께 正말 孝道 많이 하자고요. 그러나 當身의 苦生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낳은 딸아이가 白血病으로 죽음의 門턱을 수 없이 드나들었고, 오랜 歲月 病院에서 지내야했기에 그 歲月동안 當身은 걷지 못하는 딸 代身 暫時도 바닥에 누워 있지 않는 孫女를 등에 업고 허리뼈가 물러나는 줄도 모르고 지내셨습니다. 回生이 힘들겠다는 醫師 말에 어머니 當身은 내 목숨 거둬가고 우리 孫女 살려달라고 病室 바닥에 주저앉아 痛哭하셨습니다. 그날의 當身 모습乙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苦痛이 밀려옵니다. 그런 當身의 눈물겨운 看病 德으로 저의 딸은 그 무서운 病魔에게 이겨 只今은 健康한 大學生이 되어 하루에도 몇 番씩 當身 귀에 입을 대고 "할머니 사랑 한다." 라고 속삭이는데 野俗한 當身은 왜 아무런 反應도 보이지 못하시는지요?

저를 20年을 업어 키우셨고 當身 몸보다 더욱 커버린 이 딸을 업고 世上구경 시켜 주신다고 南山이며 奬忠壇公園度 數없이 가셨습니다. 어머니, 생각나세요? 當身과 제가 40年을 살고 있는 우리 洞네에 매봉 산 이란 이름의 山이 있는 것, 과히 높지도 낮지도 않은 山인데 봄이면 유난히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疲困했지요. 살을 에는 추운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벌거숭이山은 노란 개나리꽃으로 옷을 입고, 군데군데 진달래와 벚꽃이 어우러지면 이 世上 그 어떤 솜씨 좋은 畫家가 그 風景과 같은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제 나이 예닐곱 살 때부터라 생각됩니다. 어느 봄날 外出했다 돌아오신 當身이다짜고짜 저에게 등을 업히라고 하셨습니다. 푸른 山이 아닌 노란 山을 구경시켜주신다며, 온 山이 노란 개나리꽃으로 덥혀있는 것을 當身 혼자만 보고, 걷지 못해늘 房에서 歲月 보내는 딸이 當身은 안타까우셨던 거지요. 그런데 平素에는 저를잘 업으셨던 當身이 그 날은 어찌 된 일인지 大門 밖에서 몇 발자국 걷더니 무엇엔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이마를 다쳐 많은 피를 흘렸고, 當身은 피를 흘리는 저를 부둥켜안고 "未安해, 未安해" 하며 우셨습니다. 저는 傷處의 아픔보다 어린나이에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서럽게 울었지요. 어머니와 저는 그렇게 길바닥에 주저앉아 얼마를 많이 울었던가요?

그 다음 날부터 當身은 혼자 山에 올라가 노란 개나리 한 움큼에다 진달래 몇 송이를 섞어 꺾어 와서는 꽃甁代身 우리 집 마당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缸아리에다가 꽂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길 山에 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않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카시아 꽃이 피면 꽃을 따와서는 먹어보라고 成火도 하셨고, 봉숭아꽃이 피면 그 꽃을 따다 아주까리 잎으로 손톱을 감싸 물도 들여 주셨지요. 첫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조그마한 계집아이에게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씀도 해주시며…. 개나리가 피었던 山에 나무들이 빨갛게 고운 빛으로 옷을 갈아입으면 그 나무 잎을 주워와 고이고이 冊갈피에 끼워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 當身을 통해 季節의 變化를 느끼며 幼年의 歲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 當身은 제 삶의 里程標이자 守護天使였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이 저를 平生 걷지 못하는 障礙人으로 태어나게 하신 代身 어머니라는 이름의 守護天使를 보내 주셨다고. 山은 그렇게, 어머니 當身이 이 딸을 사랑하는 表現의 山이었습니다. 當身의 눈물과 기쁨이 묻어 있는 山, 꽃을 꺾으러 山에 오르실 때 當身이 느꼈을 그 슬픔의 깊이를 千金 萬金보다 더 貴한 저의 두 아이의 어미가 된 只今에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꽃을 꺾어 山자락을 내려오시며 이 딸이 꽃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을 想像하며 當身이 맛보았을 기쁨 또한 크셨을 겁니다. 어머니, 當身의 기쁨과 恨이 서려있는 每峯山을 저는 永遠히 제 가슴속 寫眞帖에 寶物처럼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그런 當身이 늘 泰山처럼 느껴졌고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제 삶의 튼튼한 버팀木이 되어주시리라 믿고 또 믿었습니다. 當身에게 있는 것 다 주고도 더 못주어 늘 가슴 雅麗하셨던 當身, 내 어머니, 그랬던 當身이 너무도 힘겨웠던 지난 歲月을 잊고 싶으셨는지 只今은 모든 記憶을 잃어버리셨습니다.

아직 한참 사실 年歲에 癡呆라는 病魔 앞에 젖먹이 어린 아이보다 더욱 懦弱한모습으로 이 딸의 億丈이 무너져 千길 萬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십니다. 過去의 모든 記憶을 잃은 當身을 모시고 사위가 벌써 7年째 이 病院 저 病院 ¤아 다니지만 조금도 差度를 보이지 않아 저를 너무도 슬프게 합니다. 몇 個月 前에는 當身 다니시는 病院에서 다시 한 番 精密 檢査를 받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當身은 入院해 여러 檢査를 받았지요. 入院해 계시는 中에 當身의 일흔일곱 番째 맞으시는 生辰이었습니다. 生辰 날 미역국도 못 드시고 病院에 계시는 當身을 생각하니 到底히 견딜 수가 없어 쇠고기 조금 넣고 미역국을 끓여 男便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當身이 入院해 계신 病院으로 갔었습니다.

그날은 當身이 받은 檢査 結果가 나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엄마 저 왔어요.엄마가 第一 사랑하는 딸 저요." "뭐라고? 우리 딸이 왔다고, 내 딸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그 먼데서 뭐를 타고 왔어?" 하시며 연신 딴소리만 하셨지요. 當身은 이 딸에게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시고, 姨母라고 부르기도 하시더니 나중에는 어머니라고까지 呼稱을 하셨죠. 當身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苦痛이 밀려와 億丈이 무너졌습니다. 當身은 링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하시며 當身의 한 많고 서러웠던 一生을 필름처럼 되감았다 풀었다 하셨습니다.

醫師가 저희 夫婦를 잠깐 보자고 해, 왠지 모를 佛韓을 느끼며 擔當 醫師房으로 갔습니다. 醫師가 너무도 가볍게 하는 말이 "할머니는 老人性 癡呆가 아니라 오른쪽 腦에 腫瘍으로 인한 치매십니다." 醫師의 조금은 無責任하게 들리는 그 말에 저는 "아니에요. 絶對 그럴 理 없어요. 先生님 다시 한 番만 더 檢査해 주세요.정말 우리 어머니가 腦腫瘍이라면 어서 手術해 주세요." 라고 哀願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저에게 醫師는 "할머님은 年歲도 계시고, 이미 왼쪽 腦도 많이 傷害 手術이 어렵습니다. 放射線 治療를 받아도 6個月 以上은 견디기 힘드실 것 같네요." 저는 두 손을 모으고 눈물로 哀願했습니다. "先生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 이대로 우리 어머니 떠나시게 하면 안돼요. 到底히 그럴 수는 없어요. 腎臟도 移植하고, 눈도 移植하고, 肝도 移植하는데 왜 腦는 안 돼 나요? 저의 腦 우리 어머니께 移植해 주세요. 사람이 달나라度 가고, 動物도 複製하며 人間까지도 複製한다고 떠드는 이 時代에 어떻게 우리 어머니 머릿속에 있는 조그마한 혹 하나 떼어내지 못 한단 말에요? 말도 안 되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부모의 道理가 있다면 子息 또한 子息의 道理가 있잖아요. 저 우리 어머니께 아직갚아야 할 빚이 너무 많아요. 이대로는 正말 안돼요." 하며 울부짖었지요. 醫師는 저의 이런 絶叫에 더 以上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습니다. 저는 醫師의 房을 무슨 精神으로 나왔는지 모르게 나와서는 周圍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病室 複道에서 엉엉 痛哭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서러움을 吐해낸 뒤 어머니 當身 계시는 病室로 갔습니다.

붉게 充血 된 저의 눈을 補身 當身은 飮料 캔 하나를 건네시며 "姨母, 걷고 싶어 또 울어? 姨母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제발 울지마, 울지마" 하시며 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當身 입으신 患者옷소매 끝으로 연신 닦아주셨지요. 그런 當身 앞에서 복받치는 서러움을 목구멍이 아프도록 꾸역꾸역삼키는 저에게 看病하시는 아주머니 위로 하며 하시는 말씀이, "너무 속상해 하지말아요. 그래도 어머님 精神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세요. 醫師만 보시면 손을 붙들고 우리 딸 다리 고쳐달라고 때를 쓰기도 하시고, 病院에서 휠체어 탄 사람을 보면 우리 딸 휠체어니까 망가지지 않게 操心해서 타라고 어찌나 當付를 하시는지 몰라요." 아주머니의 그 말에 저는 어금니가 아프도록 참고 있던 서러움을 結局 터뜨리며 嗚咽하고 말았지요. 저의 그런 痛哭에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當身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只今까지의 제 人生에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몸속에 있는 눈물을 모두 다 쏟아버리려는 듯 말입니다.
저는 가슴속에서 懇切히 두 손을 모았습니다. 자리에다 大小便을 보아도 좋고,저를 견딜 수 없이 힘들게 해도 좋으니 제발 어머니가 제 곁에 살아만 계셔달라고, 어머니 當身이 제게 주신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機會를 주십사고.

病院에서 더 以上 손쓸 게 없다고 해 當身은 退院 하셨지요. 그리고 當身을 病院에 그대로 계시게 하고는 저의 마음이 到底히 便치가 않아 힘들어도 제가 當身 곁을 지켜 드리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오신 當身은 40年을 살아온 이 집을 너무도 낯설어하시며 집에 가자시며 莫無可奈로 조르십니다.

어머니, 저는 只今까지 障礙人으로 살아오면서 제 삶 自體를 障礙를 갖고 살았거나 제 삶이 힘겹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가장 祝福의 膳物이 저의 生命이라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當身이 몹쓸 病을 앓으신뒤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밖으로만 나가자 市는 當身을 밖에 모시고 갈 수 없어저에게 꼬리票처럼 붙어 있는 障礙가 너무 서럽고 자꾸자꾸 원망스럽습니다. 어쩌다 휠체어를 타고 當身과 밖에 나가면 우리 母女를 보며 周圍 사람들의 알 수 없는 憐憫의 눈빛과 끌끌 혀 차는 소리는 저의 귀에 참을 수 없는 拷問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自身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重症의 障礙人 處地에 癡呆와 中風까지 앓으시는 當身을 看病하기가 너무도 힘에 겨워 문득문득 죽음과도 같은 苦痛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제가 요즘 얼마나 感謝하는 마음으로 사는 줄 모르시지요? 자꾸자꾸 망가져 가는 當身을 보면슬프고 몸은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마음은 하염없이 평화롭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懇切한 祈禱를 들어 주시니까요.

只今 當身은 모든 記憶을 잊고 젖먹이 어린 아기 모습으로 當身 分身이었던 이딸마저 못 알아보시고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줌마라고 부르기도 하는 기막힌현실이지만, 當身의 病名이 腦腫瘍에서 血管性 癡呆로 바뀌었으니 이보다 더 感謝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어머니, 저의 只今 所望은 제 人生에서 5年 아니 10年쯤 깎아서 當身에게 드릴수만 있다면 하는 所望입니다. 어머니. 世上 사람들이 말합니다. 當身이 앓고 계시는 癡呆라는 病은 團欒한 家庭을 破壞시킬 程度로 무서운 病이라고요. 그래요 癡呆 正말 무섭고 힘겨운 病임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몇 個月에 한番쯤 家族을 알아보시고 누구 아니냐고 當身이 물으시면 우리家族 모두는 이 世上에서 千金萬金을 얻은 것 보다 더욱 幸福하고 監査하답니다.

어머니, 저녁에 歸家한 사위가 當身 귀에다 입을 대고 "엄마, 사랑해 엄마. 사랑해엄마. 사랑해" 하며 數없이 속삭이고, 핸드폰 바탕畵面에 丈母님의 無表情한모습을 寫眞 찍어 담아 넣고 다니는 사위에 눈물겨운 사랑과 全國中高生 自願奉仕隊會에 뽑혀 賞金 200萬원을 받아와서는 그 돈을 몽땅 할머니 맛난 것 사드린다고말하는 저의 아들, 호세아의 孝道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도 너무도 感謝하고 또 監査하니까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계셔주세요.

어머니, 먼 後날 제 삶 끝자락에 섰을 때 저 스스로에게 어머니께 못해드린 孝道 後悔 없도록 저 正말 어머니께 잘해드리리 다시 한 番 約束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어머니, 當身에게 처음 드리는 이 딸의 便紙 비록 눈으로는 읽지 못하셔도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어머니, 當身을 尊敬하고, 當身 딸임을 永遠히 感謝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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