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年 6·25戰爭이 勃發하자 韓醫師였던 아버지는 人民軍에 財産을 强制로 빼앗기고 虐殺당했다. 火病으로 쓰러진 어머니는 곧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孑孑單身 南下해 職業 軍人과 結婚했지만 男便은 1961年 5·16軍事政變에 加擔하지 않았다는 理由로 不利益을 當하고 心臟痲痹로 世上을 떴다. 서른셋 나이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린 3男妹였다.
釜山 해운대구 禹1洞에 사는 이길녀(李吉女·70·寫眞) 氏는 이달 初 七旬을 맞아 가슴 속 응어리진 恨을 한 卷의 詩集으로 엮어 냈다. ‘사랑이 담긴 그림.’
李 氏는 詩集에 廣安大橋의 밤바다, 동백섬, 太宗臺, 오륙도 等 第2의 故鄕인 釜山의 모습과 가슴 저린 思父曲(思夫曲)을 실었다.
“서른세 해 동안 나를 支撐한 건 거의 모진 바람이었다/그가 떠난 빈자리에/어떤 이는 내 눈에서 찬이슬 느꼈을 테고/…나는 아무것도 後悔하지 않는다/황령산 百高地에/판자로 바람壁 한/號얏불 밑에/눈동자 초롱한/삼남매의 어미였으니….”
李 氏는 男便과 死別한 뒤 釜山의 황령산 기슭에 손수 板子집을 지었다. 獨學으로 地方公務員 試驗을 치러 合格한 그는 25年間 부산의료원 等에서 勤務했다.
3男妹가 長成하고 生活의 基盤이 잡힌 그는 2001年 釜山文人協會에 加入해 詩人으로 登壇했다. 어릴 적부터 所願이던 詩作(詩作)에 沒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아랑文化祭 全國白日場 優秀賞, 參與文學 作品賞 等을 受賞했다. 그는 홀로 3男妹를 길러낸 ‘底力’에 對해 “혓바닥 늘어뜨린 싸움개처럼 살았다”고 表現했다. 李 氏의 長男은 檢察의 大選資金 搜査 때 大檢察廳 中央搜査部 搜査企劃官이었던 문효남(文孝男·50) 大檢 監察部長.
文 部長은 “師範學校에서 러시아語와 日本語를 배운 어머니가 몇 年 前부터는 英語를 배우시더라”며 “나의 어머니는 少女와 같은 勇氣와 挑戰意識을 가진 분”이라고 했다.
조수진 記者 jin06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