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代 大法院長 金炳魯는 20歲 때 김동신 義兵部隊에 合流하여 淳昌의 日本人 官廳을 襲擊한 抗日鬪士이다. “日程의 迫害를 받아 悲慘한 桎梏에 呻吟하는 同胞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行動을 하려”고 辯護士가 되었고 수많은 獨立運動 關聯 事件을 無料로 辯論했다. 主導하던 新幹會가 解體되고 思想事件의 辯論에서도 制限을 받게 되자 시골에 내려가 農事를 지으면서 光復될 때까지 13年間 隱遁生活을 했다. 大法院長 在任 9年 3個月 동안 司法府 밖에서 오는 壓力과 干涉을 뿌리치고 司法權 獨立의 基礎를 다졌다. 退任 後에는 獨裁에 맞서 싸웠다.
김병로 글씨의 가장 큰 特徵은 작은 크기와 넓은 行의 間隔이다. 작은 글씨는 매우 緻密함, 愼重함, 現實感覺, 冷靜한 抑制力, 注意力, 警戒心, 謹愼, 謙遜, 節制를 意味한다. 넓은 行 間隔은 남에게 被害 주는 것을 싫어함, 조심스러움, 思慮 깊음, 節約 等을 뜻한다. 이처럼 先生은 思慮가 깊고 愼重하며 節制할 줄 알고 남에게 被害 주는 것을 싫어했으며 誇示欲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弼善이 부드럽고 筆壓이 强하지 않은 것을 보면 人品이 훌륭하고 모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規則的인 글씨는 論理的이고 一貫되며 豫測 可能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母音 마지막 部分의 삐침은 剛한 忍耐力을 뜻한다. 先生은 司法權 獨立을 위해서는 李承晩과의 摩擦도 不辭했다. 1952年 釜山政治波動 直後 大法官들에게 “暴君的인 執權者가 마치 正當한 法에 依據한 行動인 것처럼 形式을 取해 立法機關을 强要하거나 國民의 意思에 따르는 것처럼 造作하는 手法은 民主 法治國家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抑制할 수 있는 길은 오직 司法府의 獨立뿐이다”라고 强調하였다. 先生에게 있어서 司法權과 裁判의 獨立은 한 치도 讓步할 수 없는 絶對 命題였다. 平生 節槪를 지킨 삶의 軌跡은 後人들에게 깊은 感銘과 敎訓을 준다.
구본진 辯護士·筆跡 硏究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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