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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聞과 놀자!/임형주의 뮤직다이어리]光復의 기쁨-6·25의 아픔 함께 노래해|동아일보

[新聞과 놀자!/임형주의 뮤직다이어리]光復의 기쁨-6·25의 아픔 함께 노래해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8月 12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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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光復 70周年 記念 特輯
韓國歌曲의 歷史③

1945年 8月 15日 大韓民國 光復은 國內音樂界에도 큰 變化를 몰고 왔습니다. 日帝强占期에 表現의 抑壓은 勿論이고 많은 苦楚를 겪은 韓國歌曲이 光復을 맞아 固有의 民族性과 主體性을 띤 자유로운 創作活動을 통해 飛躍的으로 發展하게 됩니다. 特히 이 時期에는 1920, 30年代 主를 이루던 祖國을 잃은 슬픔과 哀歡을 달래준 抒情的인 스타일과는 다른, 當時의 社會相을 反映한 民族的인 노래와 愛國的인 歌曲이 多數 發表되었습니다. 또 進步的이고도 자유로운 形式의 作品과 多少 實驗的인 曲들도 作曲되어 韓國歌曲의 다양한 可能性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애국가가 포함된 자신의 교향곡 ‘한국 환상곡’을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 선생. 동아일보DB
愛國歌가 包含된 自身의 交響曲 ‘韓國 幻想曲’을 指揮하고 있는 安益泰 先生. 東亞日報DB
임형주 팝페라테너
임형주 팝페라테너
○ 安益泰의 ‘愛國歌’

1945年 光復 後 3年 뒤인 1948年 8月 15日과 9月 9日에 우리나라는 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國家를 各各 세우고 政府를 樹立하게 됩니다. 光復의 기쁨도 暫時, 나라가 둘도 갈라지는 믿지 못할 光景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 民族은 悲痛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슬퍼할 겨를도 없이 大韓民國의 희망찬 未來를 위해 遠大한 愛國心을 갖고 앞만 보며 더욱 精進해 나아가도록 한마음 한뜻으로 努力하였습니다.

한便, 그 時節 많은 國民에게 큰 힘이 되어주며 愛國心을 鼓吹한 노래가 한 曲 있는데요, 바로 安益泰의 ‘愛國歌’입니다. 平壤 出身 音樂家인 安益泰는 1919年 3·1運動에 加擔한 것이 드러나 숭실중學校에서 退學당한 뒤 美國으로 留學을 떠나 그곳에서 音樂活動을 하게 됩니다. 以後 美國 僑民들이 스코틀랜드 民謠인 ‘올드랭사인’의 曲調에 맞추어 大韓帝國의 國家를 부르는 것을 目擊하고, 이를 매우 안타까워하여 1935年 愛國歌를 作曲했다고 합니다. 이듬해인 1936年에는 自身이 作曲한 交響曲 ‘韓國 幻想曲’의 마지막 部分에 愛國歌를 揷入하여 1938年 2月 20日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국립교향악단의 演奏로 初演을 하였습니다. 그는 全 世界를 돌며 自身의 指揮로 海外 有數의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이 交響曲을 연주하며 우리나라 國家 멜로디를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렇듯 뜨거운 祖國愛를 품고 活躍하던 民族音樂家 安益泰의 愛國歌는 1948年 大韓民國 建國 및 政府 樹立과 함께 大韓民國 國家로 公式 制定되었습니다.


○ 6·25戰爭과 韓國歌曲의 正體

光復과 大韓民國 建國의 餘韻이 채 가시기도 前인 1950年 6月 25日, 靑天霹靂처럼 6·25戰爭이 일어납니다. 大部分의 音樂人은 여느 國民과 마찬가지로 釜山과 大邱로 避亂을 가거나, 越北하거나 北韓으로 被拉되었고 作品의 樂譜와 樂器들은 불타거나 紛失되어 버렸습니다.

狀況이 이렇다 보니 國內音樂界는 正常的인 活動조차 할 수 없는 實情이었지요.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 音樂人들은 日帝强占期라는 最惡의 現實도 견뎌냈던 不屈의 意志와 鬪志로 生死를 오가는 戰爭 통에서도 創作活動을 繼續합니다. 當時 音樂人들은 避亂地 釜山에서 慰問演奏會를 開催하는 熱情을 보이며 戰爭으로 苦痛받는 많은 國民에게 큰 慰勞와 感動을 膳賜해 주었습니다.

○ 韓國 最初의 女性 作曲家 김순애

우리 音樂人들은 이러한 慰問公演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文總救國대 傘下 陸軍從軍作家團, 海軍從軍作家團, 空軍從軍문인단 等을 組織하여 軍部隊로 直接 自願해 들어가 宣撫工作 等 정훈 分野에서 活躍했습니다. 또 9·28 서울 收復 以後 音樂人들은 海軍의 協助로 海軍문화선舞臺를 組織해 文化藝術 및 音樂活動을 基盤으로 한 安保活動의 礎石을 다지기도 했습니다.

또 6·25戰爭이 한창이던 1951年 여름, 陸軍本部 陸軍士官學校創設委員會의 陸士 校歌 公開募集에서 韓國 最初의 女性 作曲家 김순애의 作品이 採擇되기도 했는데요. 戰爭 속에서도 民族에 希望과 勇氣를 주고 音樂으로 國家安保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김순애의 마음을 오늘날 陸軍士官學校의 校歌에서 確認할 수 있을 것입니다. 以後 陸士는 1986年 김순애가 이화여대에서 停年退任을 할 때, 校歌를 作曲해 준 데 對한 感謝의 뜻으로 그女를 招請해 特別査閱式을 擧行하기도 했습니다.

○ 戰爭 속에서 더 孤軍奮鬪했던 國內音樂界


戰爭 中이던 1951年 6月 30日 全北 群山劇場에서는 테너 千길量의 첫 獨唱會가 열렸습니다. 7月에는 玄濟明이 作曲한 韓國 最初의 創作오페라 ‘春香傳’李 1950年 서울에서의 成功的인 初演에 이어 釜山과 大邱에서 公演됐습니다. 같은 해 10月에는 김대현의 創作오페라 ‘콩쥐 팥쥐’가 初演되면서 韓國的 創作오페라를 確立하고 國內音樂界와 韓國歌曲 發展에도 큰 影響을 미쳤습니다.

1952年 6月에는 釜山 男性女高 講堂에서 김순애의 두 番째 作曲發表會가 있었습니다. 特히 ‘歌曲의 밤’이라는 이름 아래 ‘물레’ ‘芭蕉’ ‘진달래’ ‘눈’ 等 歌曲만을 연주해 當時 젊은 女性 觀客들에게 큰 呼應을 얻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12月에는 나운영의 歌曲集 ‘아흔아홉量’李 出版되었는데 民俗的인 雰圍氣를 現代的으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作曲 技法과 音樂的 傾向을 보여줘 많은 注目을 받았습니다.

임형주 팝페라테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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