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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夫婦가 펜싱 뒤 와인 한 盞… 올림픽 첫金 金映豪 “펜싱은 浪漫”[이헌재의 人生홈런]|東亞日報

老夫婦가 펜싱 뒤 와인 한 盞… 올림픽 첫金 金映豪 “펜싱은 浪漫”[이헌재의 人生홈런]

  • 東亞日報
  • 入力 2024年 3月 17日 12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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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映豪 韓國중고펜싱聯盟 會長이 2000 시드니 올림픽 金메달을 背景으로 記念 寫眞을 찍었다. 이헌재 記者 uni@donga.com


韓國의 활의 나라다. 韓國 洋弓 代表팀은 歷代 올림픽에서 金메달 27個, 銀메달 9個, 銅메달 7個로 모두 合해 43個의 메달을 땄다. 世界 어떤 나라도 올림픽에서 이만큼 좋은 成跡을 올리지 못했다.

韓國은 銃의 나라다. 韓國 射擊 代表팀은 歷代 올림픽에서 모두 7個의 金메달을 合作했다. 銀메달 9個, 銅메달 1個를 合하면 올림픽 메달 個數는 17個나 된다.

大韓民國은 또 칼의 나라이기도 하다. 펜싱은 最近 들어 韓國 代表팀의 代表的인 메달밭이 됐다. 韓國 펜싱 代表팀은 2012年 런던 올림픽에서 金메달 2個, 銀메달 1個, 銅메달 3個를 따낸 데 이어 2016年 리우데자네이루, 2021年 도쿄 올림픽에서도 各各 金메달 1個씩을 追加했다. 最近 세 大會 連續 올림픽 金메달을 딴 種目은 洋弓과 펜싱밖에 없다.

低出産 餘波로 國內 大部分 種目들이 選手難에 시달리고 있지만 펜싱은 例外다. 곳곳에서 펜싱클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全國的으로 運營 中인 펜싱클럽은 100個를 훌쩍 넘는다. 只今도 여러 곳이 門을 열 채비를 하고 있어 受講生들을 가르칠 코치가 不足하다.

펜싱部가 있는 中學校와 高等學校는 370곳이 넘는다. 中古 大會가 열릴라치면 選手와 指導者들을 합쳐 2000餘 名이 한곳에 모인다. 여기에 學父母들도 비슷한 數字가 따라온다. 여기에 펜싱은 來年부터 少年體典 正式 種目이 된다. 이에 따라 펜싱部를 創團하는 學校나 클럽은 더 늘어날 展望이다.

김영호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펜싱 남자 플레뢰에서 금메달을 딴 뒤 환호하고 있다. 이 금메달 이후 한국 펜싱의 역사가 바뀌었다. 동아일보 DB
김영호가 2000年 시드니 올림픽 펜싱 男子 플레뢰에서 金메달을 딴 뒤 歡呼하고 있다. 이 金메달 以後 韓國 펜싱의 歷史가 바뀌었다. 東亞日報 DB


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1990年代까지만 해도 펜싱은 非人氣 種目 中의 非人氣 種目이었다. 選手層은 얇았고, 펜싱클럽이라는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었다. 當時 펜싱은 宗主國인 프랑스를 비롯한 西유럽에서나 하는 ‘高級’ 스포츠였다.

하지만 2000年 시드니 올림픽 以後 모든 게 달라졌다. 金映豪 韓國중고펜싱聯盟 會長(53)이 그 大會 男子 플뢰레 個人戰에서 金메달을 딴 게 決定的이었다. 김영호의 金메달은 大韓民國 펜싱 史上 最初의 金메달이자 아시아 男子 펜싱 歷史上 最初의 金메달이었다.

2002年 釜山 아시안게임 團體戰 銀메달 後 이듬해부터 約 6年間 代表팀 코치를 맡았던 김영호는 “예전엔 아시안게임 金메달이 選手들의 꿈이자 目標였다. 그런데 내가 시드니에서 金메달을 딴 後 後輩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며 “選手들은 올림픽이라는 더 큰 꿈을 向해 죽기살기로 努力하기 始作했다”고 말했다. SK그룹이 2003年부터 펜싱協會 會長社를 맡아 全幅的인 支援을 아끼지 않은 것도 펜싱 發展의 밑거름이 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극적인 승부의 연속이었다. 사진은 김영호가 준결승에서 15-14 한 점 차로 승리한 뒤 환호하는 모습. 동아일보 DB
2000年 시드니 올림픽의 劇的인 勝負의 連續이었다. 寫眞은 김영호가 準決勝에서 15-14 한 點 差로 勝利한 뒤 歡呼하는 모습. 東亞日報 DB


韓國 펜싱의 올림픽 첫 金메달은 더 일찍 나올 수 있었다. 金映豪 本人이 말하는 全盛期가 2000年 시드니 올림픽 때가 아니라 1996年 애틀랜타 올림픽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1992年 바르셀로나 올림픽 1回戰에서 탈락한 김영호는 애틀랜타 大會 때 메달을 기대봤다. 8强戰에서도 30秒를 남겨두고 13-11로 앞서고 있었다. 4强 相對는 김영호가 以前에 한 番도 진 적이 없는 選手였다. 그때 瞬間的으로 파고든 放心이 逆轉敗의 原因이 됐다. 그는 “競技 中 메달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좀 前까지 크게 보이던 相對 選手가 손가락만하게 보이더라. 結局 自慢心 때문에 敗하고 말았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크게 失望한 김영호는 隱退까지 생각했다.

約 2個月間 놓았던 칼을 다시 잡은 金映豪에게 反戰의 舞臺가 된 건 1997年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世界選手權이었다.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 남아공은 멀고 먼 나라였다. 韓國 選手團은 2泊 3日間 飛行機를 5番 갈아타고 겨우 남아공에 到着했다.

딱히 메달을 期待하지 않았던 選手團은 大會 하루 前 버스를 빌려 喜望峯엘 갔다. 다들 “죽기 前에 언제 다시 여기 와 보겠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喜望峯에 함께 오른 김영호는 달랐다. 그는 “生涯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番 大會, 나아가 다음 올림픽에서 꼭 좋은 成跡을 내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祈禱가 效果가 있었던지 그 大會에서 김영호는 깜짝 銀메달을 따냈다. 決勝에서 1-10으로 뒤지다 14-14 同點을 만든 뒤 마지막 1點을 내주며 14-15로 졌다. 金메달은 놓쳤지만 韓國 펜싱 歷史上 첫 世界選手權 銀메달이었다. 김영호는 “그 메달 以後 펜싱 代表팀에 對한 待遇가 달라졌다. 支援이 늘면서 世界大會에 出戰할 機會도 많아졌다”며 “시드니 올림픽에 갈 때쯤에는 世界랭킹 1位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勿論 過程은 쉽지 않았다. 準決勝에서 드미트리 체프첸코(러시아)를 15-14 한 點差로 이겼고, 決勝에서도 랄프 비스도르프(獨逸)를 15-14, 한 點 差로 겨우 꺾었다.

김영호와 아내(오른쪽)은 펜싱 國家代表 出身이다. 딸 김기연度 펜싱 選手로 活躍하고 있다. 김기연은 지난해 全國體典에서 銀메달을 땄다. 金映豪 提供


김영호는 올림픽 메달에서만 先驅者였던 게 아니다. 代表팀 코치를 그만둔 2008年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펜싱클럽의 門을 열었다. 2003年 設立된 遊學 專門 컨설팅 會社 로러스엔터프라이즈 傘下에 로러스 펜싱클럽을 오픈한 것. 10餘年間 펜싱클럽을 運營하다가 只今은 이 會社의 文化 스포츠 部門 副社長職만 맡고 있다. 그는 “美國 名門 大學에 入學하려면 工夫와 스포츠를 다 잘하는 게 유리하다. 펜싱은 몸을 쓰는 運動인 同時에 頭腦 싸움이기도 하다. 오히려 머리 싸움이 더 重要하다”며 “經驗上 工夫를 잘하는 애들이 펜싱度 잘하는 것 같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相對에게 한 番 當한 技術을 두 番 當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 亦是 ‘펜싱 대디’이기도 하다. 亦是 펜싱 國家代表를 지낸 아내 김영아 氏 사이에 낳은 딸 김기연(24) 亦是 女子 펜싱 플뢰레 選手로 뛰고 있다.

初等學校 5學年 때 펜싱을 始作한 김기연은 어릴 때부터 頭角을 나타내다 2021年에 처음 國家代表로 選拔됐다. 大邱大에 在學 中이던 지난해 全國體典에서 銀메달을 딴 김기연은 올해 城南市廳에 入團했다. 現在는 靑少年 國家代表로 太極마크를 달고 있다.

김영호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딸에게 目標는 크게 잡자고 말한다. 萬若 基軟餌가 올림픽에서 金메달을 따면 우리나라 最初의 父女 올림픽 金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다”며 “當場 올해 열리는 파리 올림픽은 쉽지 않다. 2032年 브리즈번 大會쯤에는 한 番 노려볼 만 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濠洲에서 金메달을 땄는데 基軟餌도 같은 濠洲에서 金메달을 땄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골프장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은 김영호   김영호 제공
골프場을 背景으로 셀카를 찍은 金映豪 金映豪 提供


23年間 國家代表 選手 生活을 한 그는 只今도 健康한 몸을 維持하고 있다. 그가 꼽은 健康의 源泉 中 하나는 태릉選手村의 단골 메뉴였던 佛巖山 訓鍊이다. 그는 “選手村을 出發해 불암산 頂上을 35分 안에 찍고 돌아와야 外泊을 받을 수 있었다. 當時에는 네발로 기어갔을 程度로 힘들었지만 當時에 쌓은 體力이 中年이 된 只今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엔 골프와 테니스를 趣味로 한다. 그는 “當時 山을 너무 많이 타서 그런지 요즘에는 登山 빼고 다른 運動을 좋아한다”며 웃었다.

일 關係上 골프를 자주 치는 便이다. 따로 레슨을 받은 적 없이 혼자 獨學을 했지만 싱글을 친다. 下體가 워낙 탄탄한 德分에 드라이버 飛距離가 260m나 나갈 程度로 長打者다. 함께 태릉選手村에서 運動을 했던 다른 種目 出身 選手들과도 種種 라운드를 하는데 다들 長打者들이다 보니 화이트티가 아닌 백티를 使用한다. 下體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테니스 亦是 그에게 잘 맞는 種目이다.

하지만 如前히 그가 가장 많이 하는 運動은 如前히 펜싱이다. 따로 競技 出戰을 위해 訓鍊을 하는 건 아니지만 딸을 個人的으로 가르치면서 週 3回는 칼을 잡는다. 그는 “道服과 자켓, 掌匣과 마스크를 쓰고 5分 程度만 움직이면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럴 땐 옛날 생각이 나면서 ‘準備해서 클럽 大會라도 出戰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했다.

김영호가 딸 김기연과 여행중 함께 찍은 사진. 김영호 제공
김영호가 딸 김기연과 旅行中 함께 찍은 寫眞. 金映豪 提供


平生 칼과 함께 살아온 그에게 펜싱은 如前히 浪漫 가득한 種目이다. 그는 國家代表 코치 時節 프랑스에 갔다가 新鮮한 衝擊을 받았다. 午後 늦은 時間 白髮의 老夫婦가 葡萄酒 한 甁을 들고 펜싱長에 나타나 펜싱을 즐기던 모습이었다. 그는 “프랑스에는 成人들을 위한 펜싱클럽도 적지 않다. 老夫婦들끼리 와서 펜싱으로 땀을 흘린 뒤 와인 한 盞 마시고, 샤워하고, 집에 가는 모습이 너무 印象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0年쯤 後 完全히 隱退한 뒤에는 나만의 펜싱클럽을 만들어 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펜싱의 재미와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記者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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