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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銃彈에 숨진 愛國志士 運柩하며 “獨立萬歲” 悽絶한 抗拒|東亞日報

日 銃彈에 숨진 愛國志士 運柩하며 “獨立萬歲” 悽絶한 抗拒

  • 東亞日報
  • 入力 2019年 11月 2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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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運動 臨政 100年, 2020 동아일보 創刊 100年]
3·1運動 100年 歷史의 現場 2部 <제78화> 忠南 靑陽

충남 청양 출신 독립운동 유공자는 도내 다른 지역보다 인구
대비 3배 이상 많다. 그만큼 많은 주민이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열두 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한 물안이마을 입구에 세워진 열두
기의 태극기가 나부끼는 모습. 청양=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忠南 靑陽 出身 獨立運動 有功者는 道內 다른 地域보다 人口 對備 3倍 以上 많다. 그만큼 많은 住民이 獨立運動 戰線에 參與해 日帝와 맞서 싸웠다. 열두 名의 愛國志士를 輩出한 물안이마을 入口에 세워진 열두 氣의 太極旗가 나부끼는 모습. 靑陽=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지난달 28日 찾은 忠南 靑陽郡 화성면 數整理 물안이마을 入口엔 太極旗 열두 機가 날리고 있었다. 數整理(水汀里)가 우리말로 옮겨진 물안이마을은 住民이 50名도 채 안 되는 곳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열두 名의 愛國志士가 나왔다. 열두 氣의 太極旗는 이들을 象徵한다. 올해 3·1運動 100周年을 하루 앞두고 住民들은 마을 入口에 모여 國旗 揭揚式을 열고 萬歲運動을 再現했다.

물안이마을은 靑陽 獨立運動의 特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靑陽은 日帝强占期 忠南에서 人口가 가장 적을 程度로 軍勢(郡勢)가 劣惡했지만 176名의 獨立有功者(2016年 基準)를 輩出했다. 忠南에서는 두 番째, 全國에서는 세 番째(安東 339名, 洪城 201名)로 많다. 김진호 忠南大 忠淸文化硏究所 硏究院에 따르면 3·1運動 때 日帝에 逮捕돼 笞刑 處分을 받은 靑陽 人士 中 最高 태형인 태(笞) 90道(度)를 當한 사람은 50%가 넘는다. 그만큼 日帝에 對한 抵抗意識이 큰 地域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린다”

3·1運動이 全國으로 擴散될 즈음 정산면 백곡리에 살던 19歲 靑年 洪範섭은 上京한다. 鍾路의 한 旅館에서 獨立宣言文을 入手한 그는 歸家해 이웃 靑年들을 집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洪範섭은 서울의 情勢를 說明하고 “우리도 亡國의 恨을 풀게 되었다”고 밝힌다. 靑年들은 함께 獨立宣言文을 읽어 내려갔고 太極旗 10張을 만들었다. 靑陽에서 가장 큰 規模로 펼쳐진 정산면 서정리 場날 萬歲運動의 始作이었다.

4月 5日 午後 3時 靑年들은 市場에 모인 사람들에게 太極旗를 나눠주면서 大韓獨立萬歲를 외쳤다. 萬歲運動이 全國的으로 擴散되자 日帝는 早期 鎭壓 方針을 세우고 場이 서는 곳마다 警察이나 憲兵을 派遣했다. 精算市場에도 日帝 憲兵들이 境界를 서고 있었다. 洪範섭 等 主導 人士 10餘 名이 서로 손을 잡고 萬歲를 외치면서 市場으로 들어서자 日帝 憲兵들은 卽時 制壓에 나섰다.

하지만 靑年들은 抛棄하지 않았다. 15分 뒤 太極旗를 흔들고 萬歲를 외치면서 다시 市場進入을 試圖했다. 이番에는 場꾼 100餘 名도 呼應했다. 憲兵들이 또다시 制止에 나섰지만 示威隊를 막을 수는 없었다. 鎭壓이 어렵다고 判斷한 憲兵들은 主導 人士들을 逮捕해 派遣隊로 連行했다.(‘청양독립운동사’, 忠淸南道歷史文化硏究院)

이때 권흥규(1852∼1919)가 앞장서기 始作했다. 獨立義軍府 靑陽郡 代表로 活動했던 그는 萬歲運動 當時 精算 鄕校 職員으로 勤務하고 있었다. 죽음을 覺悟한 그는 쌀 한 말을 救해 家族에게 주고 집을 나섰다.(‘독립운동사’,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憲兵隊를 따라가면서 抗議하는 過程에서 示威隊 規模는 700餘 名 水準으로 늘어났다. 精算으로 들어가는 市場 北쪽 길목에 位置한 憲兵隊의 駐在所 앞에서 권흥규는 “우리나라는 獨立하여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니 빨리 물러가라”며 크게 소리쳤다. 拘禁者 釋放 要求가 漸次 거세지자 憲兵들은 空砲彈을 두 次例 發射하면서 解散을 慫慂했다. 이에 67歲 老人 권흥규는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憲兵들 앞으로 나서며 連行者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憲兵이 그를 向해 銃擊을 加했다. 권흥규는 왼쪽 팔에 銃傷을 當하고도 繼續 앞가슴을 내밀면서 抗拒했다. 憲兵이 다시 권흥규의 앞가슴을 向해 銃을 쏘았고 그는 現場에서 숨졌다. ‘이날 밤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다’고 ‘獨立運動史’는 적고 있다.


○ 運柩 行列이 萬歲示威가 되다

정산면사무소 입구에
세워진 ‘기미의사 권흥규선생
순열비’. 청양군청 제공
精算面事務所 入口에 세워진 ‘幾微醫師 권흥규先生 順列非’. 靑陽郡廳 提供
권흥규의 殉國은 정산면 示威가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起爆劑가 됐다. 市場 사람들이 권흥규의 屍身을 憲兵들로부터 引受해 木綿 안심리에 있는 故人의 自宅으로 運柩했다. 권흥규의 親戚 權泳臻이 銘旌(銘旌)에 다음과 같이 썼다. ‘排日私權共地球(排日士權公之柩·日本을 排斥했던 선비 ‘卷’公의 管).’ ‘大韓獨立萬歲’ 旗발과 많은 萬張(輓章)들이 運柩行列을 이뤘다. 憲兵 派遣隊를 떠난 群衆 300餘 名은 精算市場에서 大韓獨立萬歲를 소리 높여 부르고 自宅으로 가는 길목마다 路祭(路祭)를 지내고 痛哭했다. 집으로 가는 15里(藥 6km) 길을 群衆들이 뒤따르며 大韓獨立萬歲를 외치고 太極旗를 흔들며 行進했다. 運柩 行列이 萬歲示威가 된 것이다.

雰圍氣가 尋常치 않다고 여긴 派遣隊 憲兵들은 靑陽 憲兵分遣所와 公主 守備隊에 支援을 要請한다. 公州에서 出動한 憲兵과 守備隊 步兵들이 住民들과 맞부닥쳤다. 號哭(號哭) 代身에 獨立萬歲를 부르는 運柩 行列이었다. 無差別 射擊이 加해졌고, 그 자리에서 故人의 조카딸과 喪輿꾼 等 5名이 숨졌다. 故人의 딸은 敵의 칼날을 손으로 막다 손가락이 잘렸고 볼에 銃알이 貫通했지만 겨우 죽음은 면할 수 있었다.(‘독립운동사’)

運柩 行列은 밤이 돼서야 故人의 自宅에 닿았다. ‘靑陽獨立運動史’에 따르면 이날 萬歲를 부르며 運柩 行列에 參與한 人士와 問喪客은 1000餘 名에 達했다. 곧 大大的인 檢擧가 始作됐고 權泳臻이 ‘排日私權共地球’를 썼다는 理由로 붙들리는 等 166名이 逮捕됐다. 옷에 黃土흙이 묻은 사람은 示威한 證據로 붙잡힌다는 所聞이 나돌아 옷을 갈아입는 住民들도 있었는데, 갈아입은 사람도 殊常하다며 檢擧됐다. ‘獨立運動史’에서는 정산면 萬歲運動 때의 殉國者와 獄苦를 치르고 笞刑을 받은 사람들의 名單을 2쪽에 걸쳐 紹介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청양
정산면에서 열린 만세운동 재현행사. 청양군청 제공
3·1運動 100周年을 맞아 靑陽 정산면에서 열린 萬歲運動 再現行事. 靑陽郡廳 提供
‘幾微醫師 권흥규 先生 順列非’가 精算面事務所 入口에 세워져 있다. 1953年 정산중 校庭에 만들어졌다가 1966年 初等學生 2萬餘 名이 義捐金을 모아 다시 세운 것이다. 올 3月 권흥규의 自宅이 있던 木綿의 木綿初等學校 運動場에서는 住民들과 初等學生 等 400餘 名이 參席해 100年 前 日帝에 맞서 故人이 불렀던 大韓獨立萬歲를 다시 외쳤다.


○ 身分과 職業을 超越한 萬歲運動

정산면 場터에서 萬歲運動이 벌어진 4月 5日 화성면에서도 萬歲의 喊聲이 울려 퍼졌다. 화성면 山整理 마을 住民 30餘 名이 太極旗 2基를 세워 놓고 큰 鐘을 울리면서 大韓獨立萬歲를 외친 게 화성면 示威의 始作이었다.

화성면의 萬歲運動은 사흘 동안 繼續됐다. 이튿날인 4月 6日에는 前날 萬歲運動을 主導한 人士들이 午前 10時 火星面事務所에 모였다. 面事務所에서는 增築 工事가 한창이었다. 作業 人夫 20餘 名을 向해 示威隊는 “朝鮮은 이미 獨立하였으므로 增築하는 것은 必要하지 않다”면서 工事를 中斷시켰다. 이어 이미 增設된 部分을 부수면서 獨立萬歲를 외쳤다.(독립기념관 韓國獨立運動情報시스템, ‘韓國獨立運動의 歷史’) 4月 7日에는 華城面 농암리에서 隣近 화암리와 數整理 住民 70餘 名이 함께 모여 萬歲 運動을 벌였다. 數整理는 물安易마을이 있는 곳이다.

4月 8日 華城面 화강리 김용학의 집에서 열린 結婚式에선 賀客으로 參席한 21歲 靑年 강학남이 球場 이병규에게 萬歲를 勸誘하다 다투는 일도 생겼다. 강학남은 隣接 마을에서 繼續 萬歲運動이 展開되자 自身의 마을에서도 이를 擧行하고자 했다. 젊은 나이였기에 그는 球場 等 支持 勢力이 必要했다.(‘청양독립운동사’)

“화성면의 농암리, 山整理에서는 朝鮮獨立示威 運動이 猛烈하고 對韓國 獨立萬歲를 부르고 있는데도 不拘하고 어찌하여 唯獨 이 마을에서는 行해지지 않는가? 함께 主唱者가 되어 獨立萬歲를 크게 외치자.” 하지만 이병규는 “無益한 일을 하지 말라”며 강학남의 要求를 拒絶한다. 同席한 住民 김학성度 “너 혼자 불러라”라며 그를 叱責했다. 憤慨한 강학남은 歸家하려는 이병규를 붙잡고 “꼭 主唱者가 되어 萬歲를 외치라”면서 옷을 잡아끌고 머리를 붙잡으면서 때렸다. 이병규가 입고 있던 두루마기가 몇 조각으로 찢겨졌다.

다른 地域보다 늦게 萬歲運動을 始作했지만 連日 集中的으로 獨立萬歲運動을 펼친 것은 靑陽 地域의 두드러진 特徵 가운데 하나다. 정산면과 화성면뿐만 아니라 비봉면과 운곡면에서도 이틀에 걸쳐 萬歲 示威가 이어졌다. 더욱이 日帝 當時 軍 居住 人員이 많지 않던 靑陽에서 延人員 5700餘 名이 獨立萬歲 運動에 參與한 것은 地域民들의 뜨거운 抗日精神을 보여주는 證據라는 게 專門家들의 評價다.

김진호 硏究員은 “靑陽 萬歲運動은 郡內 各 面 主要 마을 住民들의 積極的인 參與로 展開됐으며 參與者들은 兩班과 常民, 農民과 白丁, 飮食店 經營者 等을 아울렀다”면서 “身分과 職業 等을 超越해 獨立을 위해 地域民들이 함께 萬歲를 외쳤던 것”이라고 말했다.


▼ 最高齡 義兵將 崔益鉉, 靑陽의 氣 받아 熾烈한 戰鬪

‘靑陽 최익현 押送度’와 ‘…肖像’
忠南道, 有形文化財 指定해 기려

某德士(慕德祠)는 忠南 靑陽地域에 位置한 主要 獨立運動 史跡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木綿 송암리에 있는 이곳은 勉庵 崔益鉉(1833∼1906)의 祠堂이다. 京畿 抱川에서 태어나 23歲에 文科에 及第한 뒤 要職을 두루 거쳤던 그는 丙子修好條約 締結 反對 上疏 等으로 유배당하고 乙未事變이 勃發했을 때 抗日拓士運動에 앞장섰던 愛國志士다. 以後 崔益鉉은 1900年 5月 靑陽에 자리 잡은 뒤 現在의 모德士에서 文人들을 糾合해 抗日意識을 높이고 義兵을 計劃했다.

靑陽의 獨立運動史는 크게 1895年과 1896年에 發生했던 電氣 紅紬衣兵科 1906年의 中期 紅紬衣病 鬪爭, 1919年의 3·1萬歲運動으로 대표된다(박경목, ‘靑陽地域 獨立運動의 記憶과 記念’). 崔益鉉이 乙巳勒約 이듬해인 1906年 全北 정읍시 태인면에서 義兵을 일으키고 最高齡 義兵將으로 앞장설 수 있었던 데에는 熾烈한 義兵戰鬪가 벌어졌던 靑陽에서 보낸 時間이 原動力이 됐다는 評價도 나온다. 軍勢에 비해 激烈하게 펼쳐졌던 靑陽地域 萬歲運動의 뿌리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최익현 초상’.
청양군청 제공
忠淸南道 有形文化財로 指定된 ‘崔益鉉 肖像’. 靑陽郡廳 提供
忠南道는 3·1運動 100周年을 맞아 올해 初 ‘靑陽 최익현 押送度’와 ‘崔益鉉 肖像’을 忠南道 有形文化財로 指定 告示했다. ‘崔益鉉 押送度’는 義兵運動을 하다 日帝에 붙들린 崔益鉉이 서울에서 釜山으로, 釜山에서 다시 쓰시마섬으로 押送되는 過程을 仔細히 담고 있다. ‘崔益鉉 肖像’은 當代 最高의 肖像畫家로 꼽힌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激動의 時代를 살았던 崔益鉉의 風貌를 適切하게 形象化했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두 作品 모두 靑陽 百濟文化體驗博物館에서 만날 수 있다.

靑陽=김지영 記者 kimjy@donga.com
#3·1運動 100年 #忠南 靑陽 #萬歲示威 #권흥규 #최익현 #물안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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