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2/커버스토리]‘李舜臣 將軍, 스스로 목숨 버렸나’ 400年 論難 追跡한다|동아일보

[O2/커버스토리]‘李舜臣 將軍, 스스로 목숨 버렸나’ 400年 論難 追跡한다

  • 東亞日報
  • 入力 2012年 4月 28日 03時 00分


코멘트

甲옷·投球 벗었다? 本來 防彈效果 없어
政爭 犧牲될 바엔? 生死 超然했던 將軍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동아일보 DB
김미옥 記者 salt@donga.com·동아일보 DB
1598年 陰曆 11月 19日 午前 2時頃 露梁 앞바다 관음포에서 朝鮮 三道水軍統制使 李舜臣(李舜臣)은 日本 水軍의 鳥銃에 맞아 숨졌다. 이 戰鬪에서 日本軍은 敗退했고 壬辰倭亂(壬辰倭亂)은 幕을 내렸다. 壬辰倭亂은 자칫 ‘世界大戰’으로 飛火할 수 있는 戰爭이었다. 西海를 當時 日本이 掌握했다면 베이징(北京)까지 쳐들어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는 게 史學界의 一般的인 分析이다. 그 西海를 事實上 李舜臣 혼자서 막아냈다. 한 軍事學者는 이 때문에 李舜臣을 ‘東아시아 平和의 守護者’라고 불렀다. 中國 大陸까지 電話(戰禍)가 번지는 것을 事前에 遮斷해 世界大戰을 未然에 막은 人物이라고 해도 過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李舜臣의 戰歿(戰歿)에는 오래前부터 어울리지 않는 꼬리票가 달려 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는 說(說)李 그것이다. 24日 忠南 牙山 順天鄕大 李舜臣硏究所가 主催한 ‘第14回 李舜臣 學術세미나’에서도 自殺說에 對한 論駁이 하나의 發表 主題를 차지할 程度였다. 왜 民族의 英雄인 그의 죽음에 對한 異說(異說)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李舜臣防戰免 自丸而死(李舜臣은 바야흐로 敵과 싸울 때 綿紬·免하여 스스로 彈丸을 맞고 죽었다)’

-이민서(李敏敍), ‘金將軍傳(金將軍傳)’

事實 ‘李舜臣 自殺說’의 모든 發端은 위의 文章이라고 볼 수 있다. 더 正確하게 말한다면 ‘綿紬(免)’라는 單語가 端初라고 할 수 있다. 朝鮮 肅宗 때 吏曹·禮曹·戶曹 判書를 지낸 이민서(1633∼1688)는 壬辰倭亂 當時 義兵將으로 活躍하다 謀陷을 받아 숨진 김덕령(1567∼1596)을 기리는 評傳 ‘金將軍傳’을 썼다. 그中 한 대목에서 李舜臣이 面奏하였다고 쓴 것이다.

李舜臣의 自殺을 論하는 사람들은 金將軍傳의 綿紬 대목을 ‘甲胄(甲·甲옷과 투구)를 벗다’ 乃至는 ‘甲옷을 벗다’고 풀이한다. 그前까지의 戰鬪에서는 甲옷과 투구를 벗은 적이 없던 李舜臣이 왜 마지막 戰鬪에서 이렇게 했어야 했느냐는 主張이다. 그것도 추운 겨울바다에서 말이다. 그때까지 連戰連勝했던 그가 自己 목숨을 지키려 했다면 얼마든지 可能했을 텐데도 敵의 彈丸에 맞은 理由가 잘 理解되지 않는다는 見解이기도 하다. 스스로 삶을 등지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果然 그런 行動을 했을 理가 있겠느냐는 論旨다.

또 다른 根據는 李舜臣과 當時 調整(朝廷)과의 不和에서 찾아진다. 李舜臣은 最後의 勝戰을 거둔 뒤에는 黨爭의 結果로 어떤 謀陷이나 謀略을 받아 願하지 않는 죽음을 맞기 쉬울 것임을 미리 斟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의 意志에 따라 목숨을 내놓았던 것 아니냐는 主張이다. 1993年 季刊誌 ‘創作과 批評’에 ‘李舜臣의 戰死와 自殺說에 對하여’라는 글을 發表한 故(故) 박혜일 서울대 原子核工學科 敎授는 ‘同族의 謀陷과 迫害, 그리고 祖國에 배신당한 悲劇의 英雄 李舜臣’이라며 이 같은 主張을 뒷받침했다.

自殺說의 歷史는 길다. ‘李忠武公全書’를 便역한 老産 李殷相은 ‘공(李舜臣)李 죽음을 스스로 取한 것이라고 보는 見解와 그것을 反駁하는 見解는 忠武公이 全歿하던 當時부터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민서의 ‘金將軍傳’ 같이 自殺說에 기우는 글이 있는가 하면 肅宗 때 右議政까지 지낸 이이명(李命·1658∼1722)처럼 ‘…나라가 亡하면 같이 亡하고 나라가 살면 같이 살려 했거늘 공(李舜臣)이 어찌 차마 스스로 죽음을 醉하여 길이 國家를 中興하려는 큰 뜻을 저버렸을까보냐’(이은상 驛)고 反駁하는 境遇도 적지 않았다. 李舜臣이 숨을 거둔 以來 約 100年 동안 그의 죽음을 놓고 朝鮮社會에서 論駁이 있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李舜臣이 事實上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는 說은 1990年代와 2000年代를 거치며 妙하게 변용되어 나타났다.

‘나는 世上의 侮蔑과 恥辱을 살아 있는 몸으로 堪當해 내면서 이 알 수 없는 無意味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運命에 關해 말하고 싶었다.’

-金薰, ‘칼의 노래’(2001年) 表紙 글

1990年代 以前까지 李舜臣은 民族의 英雄이었다. 事實上 나라를 빼앗긴 狀況에 놓여 있던 1908年 丹齋 申采浩가 ‘大韓每日申報’에 連載한 ‘李舜臣傳’에서 李舜臣은 民族의 危機를 打開한 英雄으로 그려졌다. 日帝强占期에 李舜臣을 英雄의 模範으로 떠올린 데에는 동아일보의 役割이 컸다.
▼ 朝鮮社會에 對한 不信-偏見이 ‘忠武公 自殺說’ 擴大 再生産 ▼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1598년 11월 17일(음력)자가 마지막이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출전 준비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李舜臣의 亂中日記는 1598年 11月 17日(陰曆)字가 마지막이다. 마지막 戰鬪를 앞두고 出戰 準備를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양회성 記者 yohan@donga.com
동아일보는 1931年 牙山 李舜臣 將軍 墓域이 競賣 處分될 危機에 이르자 社說과 企劃記事를 連續 報道해 李舜臣을 再照明하고 遺跡을 永久保存하자는 運動을 主導했다.

編輯局長이던 春園 李光洙는 忠武公 遺跡地를 탐방하는 連載 記事를 直接 썼고, 小說 ‘李舜臣’을 連載했다. 李光洙는 李舜臣을 自己犧牲的이며 충성스러운 愛國者로 描寫했다. 노영구 國防大 國家安全保障問題硏究所 硏究企劃室長은 “英雄은 英雄이되 忠의(忠義)를 强調하며, 人格의 힘으로 劣等한 民族을 改造하는 英雄으로 그려졌다”고 說明했다.

朴正熙 大統領 時代에 聖雄(聖雄)으로 자리매김한 李舜臣은 1990年代 들어 漸漸 人間의 모습을 띠기 始作했다. 小說家 홍성원의 ‘달과 칼’(1993年)에서 탈(脫)영웅의 面貌가 나타났던 李舜臣은 ‘칼의 노래’(2001年)와 小說家 김탁환의 ‘不滅’(1998年) ‘不滅의 李舜臣’(2004年)을 통해 한 個人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裝置가 바로 ‘李舜臣 自殺說’이었다.

自身의 敵(敵)을 日本 水軍과 賃金으로 設定한 ‘칼의 노래’의 李舜臣은 恒常 自身이 죽을 자리와 그 方式을 念頭에 둔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내가 受諾할 수 없는 方式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칼의 노래, 261쪽), ‘나는 結局 自然死 以外의 方式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敵彈에 쓰러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結局 自然死人 것이다.’(칼의 노래, 301쪽)

이를 두고 허명숙 崇實大 國語國文學科 敎授는 “設令 목숨을 保存했다 하더라도 戰爭에서 敗했다면 政治力에 依해 다시 죽을 危機에 處하게 되는 한 個人의 실존적 危機인 것이다”라고 풀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이는 300餘 年 前부터 自殺說의 한 背景이 되는 ‘調整과의 不和’ 主張을 反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90年代 以後 이처럼 自殺설이 ‘流行’한 것은 以前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李舜臣의 다양한 面貌, 苦惱하는 李舜臣을 알고자 하는 欲求가 噴出된 데서 理由를 찾을 수 있다. 이는 韓國 社會의 民主化 履行과 聯關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當時 歷史學界의 潮流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의 餘波로 그만큼 李舜臣에 對한 微視的인 接近이 可能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노영구 室長은 “朝鮮社會에 對한 否定的인 評價도 같이 깔려 있었다”고 分析했다. 朝鮮이 偉大한 英雄을 죽음으로 내몰 수밖에 없는 社會라는 否定的인 烙印을 찍어버렸다는 것이다.

‘後人의 얕은 見解를 가지고 公의 죽음에 對하여 評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은상, ‘李忠武公全書’ 附錄

한 朝鮮時代 專攻 歷史學者는 “몇 年 前, 드라마 ‘不滅의 李舜臣’을 2回까지 보다 TV를 끄고 말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드라마라 해도 考證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事實에 어긋나는 內容을 참고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李舜臣의 自殺說에 對해서도 學界는 비슷한 反應이다. 事實 박혜일 敎授의 글 以後로 自殺說에 關한 硏究論文이나 學問的인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自殺說의 根據 中 하나였던 ‘綿紬’에 關해서는 順天鄕大 李舜臣硏究所 노승석 敎授가 일찌감치 論駁을 했다. 盧 敎授에 따르면 面注意 州()字는 ‘投球’나 ‘甲옷’ 두 가지로 解釋이 可能하다. 다만 옛 文獻上으로는 甲옷보다는 投球로 解釋하는 것이 一般的이고 慣用的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 面注意 出戰인 ‘春秋左氏傳’ 희共 33年 4月 記錄에서 나오는 考査에서도 綿紬는 賃金에 對한 忠誠心으로 敵과 싸우면서 激忿한 나머지 투구를 벗고 決死的으로 싸우는 모습을 形容한 말로 歸結된다고 盧 敎授는 分析했다. 그는 “綿紬라는 行爲가 있기까지는 그 사람의 內面에 憂國忠情이 剛하게 作用했다고 보는 게 옳다”고 論文에서 밝혔다. 따라서 그 動機가 自殺과는 距離가 멀다는 것이다.

設令 李舜臣이 甲옷을 벗었다 해도 이를 自殺과 連結시키는 것은 無理라는 主張도 있다. 정두희 前 서강대 歷史學科 敎授는 冬至달 추위에 甲옷을 벗은 것이 疑訝하다는 自殺說의 主張에 對해 “順川과 泗川 兩쪽에서 日本軍의 挾攻을 받아 生死의 고비를 넘나들며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추위를 問題 삼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反駁했다.

더욱 決定的으로 當時 甲옷에는 防彈效果가 없었다. 그때까지 甲옷은 화살을 막기 爲한 것이지 銃彈을 막기 위한 用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自殺을 하기 위해, 일부러 銃彈을 맞으려고 甲옷을 벗었다는 主張은 語不成說이라는 指摘이다. 韓國에서 事實上 軍事史 專攻 博士 1號인 노영구 室長은 “露梁海戰은 戰艦들이 近距離에서 亂打戰을 벌인 싸움이었다”며 “20∼30m, 길게는 50m 以內에서 쏘았다면 甲옷을 입었어도 充分히 貫通됐을 것”이라고 分析했다. 記錄에 따르면 壬辰倭亂 當時 李舜臣 밑에서 鹿島 萬戶로 服務했던 정운(鄭運)은 大棗總(구경이 좀 더 큰 鳥銃)을 맞고 숨졌다. 그런데 이 彈丸은 정운이 몸을 가리고 있던 나무 防牌를 뚫고 그의 몸을 貫通할 程度로 威力이 대단했다고 한다.

李舜臣이 勝戰 後 닥칠 ‘죽음’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擇했다는 主張도 一面的인 解釋에 不過하다는 指摘이다. 盧 室長은 “죽어도 좋다는 覺悟로 싸웠다는 건 認定할 수 있지만 그걸 自殺說로 連結하는 건 無理”라고 했다. 李舜臣의 死生觀이 분명했던 것에 비추어 그는 오히려 죽음에 超然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더욱이 宣祖와의 葛藤을 그렇게 念慮했다면 그 前에 出征하라는 王命을 죽음을 무릅쓰고 어길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 朝鮮이 李舜臣을 낳았다

정옥자 서울대 國史學科 名譽敎授는 過去 ‘칼의 노래’에 對한 글에서 “植民史觀에서 우리를 集中 세뇌시킨 黨爭論이 濾過 없이, 아니 더욱 甚하게 描寫되어 있다”고 若干의 憂慮를 表示한 적이 있다. 李舜臣이 ‘自殺’에 이르는 過程과 現實을 克明하게 對照시키려다 보니 朝廷 內部의 黨爭과 葛藤을 實際 以上으로 誇張한 側面이 있다는 것이다.

萬若 自殺설이 主張하는 대로 그렇게 朝鮮社會가 썩어 있었다면 朝鮮은 어떻게 戰爭을 事實上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만 朝鮮社會를 이루고 있었다면 어떻게 李舜臣이라는 人物이 그 體制 안에 나타나서 높은 位置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한 硏究者의 指摘대로 自殺說은 朝鮮이라는 숲을 보지 않고 李舜臣이라는 나무만 보는 데서 나타난 突然變異일지도 모른다.

민동용 記者 mindy@donga.com
#李舜臣 #自殺說 論難
  • 좋아요
    0
  • 슬퍼요
    0
  • 火나요
    0
  • 推薦해요

댓글 0

只今 뜨는 뉴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