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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내 人生을 바꾼 그곳]죽음이 日常인 印度 江邊 火葬場에서 平安을 얻다|동아일보

[O2/내 人生을 바꾼 그곳]죽음이 日常인 印度 江邊 火葬場에서 平安을 얻다

  • 東亞日報
  • 入力 2012年 2月 11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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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家 홍신자의 ‘印度 苦行’

그녀는 이제 웃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든 무용단의 이름도 ‘웃는돌’이다. 무용가 홍신자가 8일 경기 안성에 자리 잡은 ‘웃는돌’ 사무실 앞에서 “생명이 없어 보이는 돌에서도 나는 웃는 모습을 본다”며 활짝 웃었다. 안성=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그女는 이제 웃을 수 있다. 그래서 그女가 만든 舞踊團의 이름도 ‘웃는돌’이다. 舞踊家 홍신자가 8日 競技 安城에 자리 잡은 ‘웃는돌’ 事務室 앞에서 “生命이 없어 보이는 돌에서도 나는 웃는 모습을 본다”며 활짝 웃었다. 安城=김미옥 記者 salt@donga.com
《검붉은 大地를 뒤덮은 뿌연 먼지. 퀴퀴하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윽고 그들이 보였다. 鎔鑛爐처럼 타오르는 太陽 아래 그 사람들은 이리저리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偶然히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動物園 원숭이 보듯 뚫어져라 나를 凝視했다. 그곳 사람들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황소의 그것처럼 焦點이 없고 커다란 눈. 그 눈에 빠져, 그들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발가벗겨진 氣分이 들어 괜히 부끄러워지곤 했다. 銅錢을 求乞하는 이, 屍體를 수레에 싣고 無表情하게 걸어가는 李, 큰 나무 밑에 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는 이…. 勿論 ‘내가 이런 곳에서 살 수 있을까’란 걱정 따윈 必要가 없었다.》
於此彼 죽을 覺悟까지 하고 왔으니까. 그렇다 해도 想像만으로 머리에 그렸던 ‘그곳’과 實際 눈앞에 펼쳐진 ‘이곳’은 달랐다. 野生 그대로인 삶의 現場 속에서 만난 理解 못할 그들, 印度 사람들의 餘裕.

1976年의 어느 날, 引渡의 ‘델리 空港’(인디라 간디 國際空港)에 到着해 空港 門을 나서는 瞬間 온몸에 戰慄이 일면서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때렸다. ‘아, 人生은 幻影일 뿐이구나.’

頂上에 서다, 그리고 떠나다

1966年 美國으로 건너가 그 1年 뒤부터 舞踊에 미쳐 精神없이 살았다. 말 그대로 온몸을 바쳐 舞踊만 했다. 그러면서 넘치는 사랑도 받았다. 뉴욕이든 서울이든 어디를 가도 홍신자란 이름 석 者는 前衛舞踊家의 代名詞가 됐다. 드디어 ‘成功’이란 두 글字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頂點에 섰을 무렵 마음속 깊이 ‘무언가’가 싹텄다. 歡呼와 喝采 속에 公演이 끝난 뒤 텅 빈 觀客席을 보면서 느끼는 虛脫함은 그 ‘무언가’를 더욱 키웠다. ‘나는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疑問이 내 안에서 꿈틀댔다. 그리고 直感했다. 이런 疑問을 解決하기 위해선 苦行이 必要하다는 事實을.

그 무렵 印度가 보였다. 生命을 건 苦行을 위한, 또 나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기 위한 最適의 場所. 떠나기 前 어렴풋이 느낀 印度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다 1975年 印度 文化部 招請으로 얼마 동안 그곳에서 巡廻公演을 하면서 決心을 굳혔다. 最小限 10年, 아니 答이 나오지 않는다면 平生을 머물 생각을 가지고 印度로 떠나기로.

쌓아온 모든 걸 버리고 未練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건 事實 타고난 氣質 때문이기도 했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이제 됐다’고 생각될 때쯤 어디론가 떠나려는 氣質. 누군가는 驛馬煞 때문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철이 없어서랬다. 하지만 나는 굳이 어떤 修飾語를 붙이고 싶진 않다. 但只 떠남으로써 하나를 버릴진 몰라도 그 代身 새로운 하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게 理由라면 理由일까.

平安을 찾다

뭔가에 홀려 印度에 간 뒤 한동안은 미친 듯 彷徨했다. 아니, 일부러 어떤 目的地를 定해놓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는 게 正確한 表現일지 모른다. 며칠 동안 斷食을 하고, 맨발로 걷고, 冥想만 해보기도 하고. 젊은 女子가 홀로 여기저기 險한 곳도 많이 다녔다. 貧民街 어디에 到着해 밤이 이슥하면 그냥 近處에서 잠을 請했다. 當然히 險한 瞬間도 많았을 터. 누가 재워준다 해서 갔다가 危險한 狀況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經驗만도 여러 次例였다.

當時 偶然히 만난 한 現地 新聞社 記者의 勸誘로 내 小便을 마시기도 했다. 그 記者는 30代 初盤이었지만 白髮에 가까울 만큼 머리가 샌 사람이었다. 그는 “印度에 오래 머물면 營養失調가 된다”면서 小便을 마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直接 自己가 小便을 받아 먹는 示範까지 보였다. 그걸 契機로 먹어 본 내 小便 맛은 찝찝했다. 特히 前날 野菜가 아닌 다른 飮食을 먹기라도 하면 그 맛은 더욱 不快해졌다. 그럼에도 半年 가까이 小便을 마셨다. 나는 人道 貧民들이 마시는 물을 마시기 힘들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마셔 免疫이 됐을지 몰라도 난 어김없이 배頉이 나 어쩔 수 없이 小便을 마시게 됐다.

그 무렵 나는 印度의 火葬場(火葬場)을 자주 찾았다. 火葬場은 大槪 큰 江邊에 있었다. 한쪽에선 屍體를 태운 뒤 그 재를 江에 뿌렸다. 屍體를 그대로 물 위에 흘려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선 江물로 沐浴을 하고, 빨래를 하고, 또 밥까지 지어 먹는 게 아닌가. 屍體 타는 煙氣와 飮食을 지어 먹는 煙氣가 同時에 타오르는 風景. 말 그대로 江邊은 삶과 죽음이 交叉하는 警戒線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江邊을 찾는 印度 사람들의 表情에선 죽음에 對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만큼 窮乏할지언정 얼굴엔 뉴욕에 사는 富者들보다 더 넉넉한 餘裕가 흘러넘쳤다. 내가 化粧長을 자주 찾은 理由도 그 때문이었다. 난 그곳에서 죽음에 對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共存하는 空間에서 비로소 마음의 平安을 얻었다.

다시 춤을 추고 싶다

또 빼놓을 수 없는 印度에서의 記憶은 두 스승과의 만남이다. 오쇼 라즈니시와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 라즈니시와의 만남은 始作부터 歡喜 그 自體였다. 첫 만남에서 그는 내가 舞踊手라는 말을 듣고 춤을 춰보라고 했다. 10分이 채 되지 않는 짧은 時間. 하지만 나는 춤을 추고 있다는 事實조차 잊을 만큼 벅찬 感激에 젖어 온몸으로 나를 表現했다. 그 춤을 契機로 弟子가 된 내게 라즈니시는 自由를 줬다. 그는 人生은 祝祭라고 表現했다. 죽음도 끝이 아닌 人生의 絶頂이기에 祝祭였다. 그는 온몸의 感覺을 모두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또 다른 聖者 마하라지로부턴 나 自身을 假飾 없이 바라보는 方法을 배웠다. 가난한 農夫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뭄바이 市場 골목에 있는 自身의 담배 가게 2層 다락房에서 訪問客들을 맞았다. 半年 넘는 期間 동안 나는 每日 아침 그를 찾았다. 德分에 나도 隣近 싸구려 다락房에서 지내느라 몸이 急激하게 衰弱해졌지만, 意識만큼은 그 反對였다. 내 意識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살찌고 健康해졌다.

나는 두 스승과의 만남 以後 비로소 質問에 對한 解答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 解答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왔다. 나 自身을 똑바로 凝視하면서 삶을 무겁게 만든 모든 虛僞와 假飾을 버리게 됐다. 나에 對한 執着을 버리고 人生이 幻影에 不過하단 事實을 깨달으니 죽음에 對한 恐怖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無我(無我)의 世界 속에서 眞正한 自由를 만났다.

1979年 여름, 나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스승을 잘 만난 德分일까, 아니면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일 準備가 이미 돼 있었기 때문일까. 最小 10年이란 애初 豫想보다 훨씬 일찍 印度를 떠났다.

뉴욕에 到着했을 때 얼굴은 내 나이로는 믿기 힘들 만큼 많이 傷한 채였다. 몸도 當分間 回復이 힘들 만큼 故障이 났다. 하지만 印度에 가기 前 부글부글 끓던 내 마음속 鎔鑛爐는 平安을 되찾았다. 虛無함과 두려움 代身 삶에 對한 意欲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뉴욕으로 돌아간 첫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춤이 미치도록 추고 싶었다.

安城=신진우 記者 niceshin@donga.com  
홍신자는…

1940年 忠南 演技 出生. 1963年 숙명여대 英文科를 卒業한 뒤 1967年 27歲의 나이로 뉴욕에서 춤에 入門했다. 1973年 舞踊 ‘祭禮(祭禮)’를 통해 “前衛舞踊과 傳統音樂의 再會를 성공시켰다”는 評價를 받으며 單숨에 世界的인 舞踊家 班列에 올랐다. 삶과 죽음에 對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1976∼1979年 印度에 머물렀다. 1993年 永久 歸國한 뒤 舞踊團 ‘웃는돌’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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