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競技 安城에 사신다. 日曜日마다 나는 그곳을 家族들과 함께 찾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只今도 아버지와 나는 서로 할 말이 別로 없다.
철없던 時節에는 아버지를 몰라서 그랬지만 속속들이 헤아리고 있는 只今에 와서는 목이 메어 말門이 잘 열리지 않는다. 그래도 週末이면 어김없이 달려가는 것은 거기에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아버지는 따라가기에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한 男子가 태어나서 어떻게 뜻을 세우고 實行에 옮겨야 하는지에 對한 模範答案과도 같은 분이었다.
初等學校 入學式부터 大學 卒業式까지 아버지는 한 番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자랑스러웠다. 바깥일에 最善을 다하다 보면 집안일은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고, 干涉하기보다는 願하는 길을 말없이 밀어주는 것이 참된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30代에 藝術大學과 音樂大學 學長을 連任하면서 學校 살림을 直接 꾸려나갔고 國立 오페라團의 主役으로 누구보다 많은 舞臺를 堪當해야 했다.
그것도 不足해 女學生들만의 오케스트라를 組織해서 中央 舞臺에까지 진출시켰고 本格的인 리트 工夫를 위해 뒤늦은 獨逸留學度 躊躇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壁을 넘을 自信이 없는 나는 音樂을 抛棄했지만 끝내 未練을 버리지 못해 다시 音樂으로 돌아갔다.
音樂學을 專攻해서 音樂評論을 할 때도 아버지의 그림자는 恒常 내 周圍를 맴돌았다. 이런저런 紙面에 실렸던 아버지의 글을 發見하기 前에는 글까지 아버지를 빼닮았다는 事實은 斟酌조차 하지 못했다. 藝術經營으로 方向을 돌리면서 아버지의 存在로부터 꽤나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錯覺이었다. 그 點만은 正말이지 다른 줄 알았는데 나서기 좋아하는 性格이 내게도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진작에 아버지가 내게 그 點을 일러주셨다면 그토록 오랜 時間 彷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怨望하기에는 남은 時間이 別로 없다. 그래서 週末이면 늘 安城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