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世紀 後半 朝鮮에서 ‘開化’는 이미 全般的인 時代의 흐름으로 자리잡는다. 當時 知識人들 사이의 爭點은 朝鮮社會의 內的인 政治 經濟 社會的 矛盾과 帝國主義의 外的인 壓力 사이에서 社會 制度의 改革을 어떤 方向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였다.
이 때 制度 改革의 關鍵은 무엇보다도 ‘專制君主制의 改革’이었고, 實際로 現實 政治에 干與했던 이들의 思想的 差異가 가장 尖銳하게 드러나는 것도 政治體制의 改革 方式에서였다.
하지만 西歐文物의 流入 속에서 이 激變期를 헤쳐나가야 했던 知識人들은 理論的이고 體系的인 思想을 세우기가 어려웠고, 急變하는 社會의 흐름에 따라 한 사람의 생각이 여러 次例 變化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政治 體制에 對한 根本的 改革이 論議의 對象에 오른 것은 큰 變化였다. 人間의 尊嚴性과 社會的 平等에 關해서는 朝鮮後期 實學者들 사이에서도 많은 論議가 있었지만, 專制君主制까지는 論難의 對象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跛行的인 勢道政治期를 겪고 西歐의 立憲君主制나 共和制 等이 傳해지면서 國力 弱化의 가장 큰 要因으로 政治 體制의 肥效率性이 指目됐다. 開化期 知識人들은 大體로 留學의 人本主義와 實學의 平等 思想을 基盤으로 하면서, 朝鮮 社會의 現實的 力量을 어떻게 評價하느냐에 따라 具體的인 制度 改革의 方向을 달리했다.
朴珪壽의 思想을 가장 忠實히 따르면서 時務開化派에 屬했던 金允植은 寡婦의 再嫁 禁止나 禁錮第(禁錮制) 및 緣坐制 廢止 等을 主張하며 個人의 權利를 重視하면서도 王道政治의 基本 秩序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宰相 中心의 政治體制를 志向했다.
時務開化派 中 젊은 世代에 屬했던 兪吉濬의 境遇는 立憲君主制뿐 아니라 共和制까지 바람직한 政治制度로 認定했지만, 이에 對한 明確한 立場을 밝히는 것보다 于先 時急한 것은 國民이 政治에 參與할 수 있는 力量을 기르는 것이라고 主張했다.
甲申政變을 主導했던 變法開化派의 金玉均은 王權을 極度로 制限하고 少數의 改革 官僚가 實質的인 政治를 擔當하는 革命政府를 構想했다.
亦是 變法開化派에 屬했던 朴泳孝는 生命保存과 自由 및 幸福 追求를 人間의 共通된 特性으로 보면서, 政黨活動과 顯晦(縣會)까지 保障하는 君民同治(君民同治)의 立憲君主制를 主張했다.
여기서 一旦 制度를 바꾸자는 變法開化派와 制度를 제대로 바꿀 準備가 必要하다는 時務開化派의 見解差를 볼 수 있다. 하지만 注目할 것은 이들이 開化의 方式에서 다양한 見解差異를 보이면서도, 모두 仁義禮智(仁義禮智)로 象徵되는 道德의 敎育과 敎化를 바탕으로 實事求是(實事求是)에 立脚한 學問을 追求함으로써 國難을 克服하고 西歐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中國 中心의 世界觀에서 벗어나 西歐 文物을 受容하면서도, 程度의 差異는 있을지언정 儒敎的 價値 理念에 對한 自負心을 共有해 西歐 文化를 主體的으로 受容하는 精神的 바탕으로 삼았다. 이는 바로 實學의 改革 思想과 脈을 같이 하는 開化派의 思想的 特性이었다.
김형찬記者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