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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對 崔明吉]斥和-主和派 首長…淸監獄署 友情나눠|동아일보

[김상헌對 崔明吉]斥和-主和派 首長…淸監獄署 友情나눠

  • 入力 1997年 11月 29日 08時 37分


丙子胡亂의 難局에서 主和論 斥和論으로 克明하게 對立했던 崔鳴吉과 김상헌. 그들은 17世紀 最大 라이벌이었다. 모두 西人系列로 처음엔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해군 末期, 崔는 現實을 重視하는 陽明學에 빠졌고 金은 名分과 義理를 崇尙하는 朱子學에 沒頭하면서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이 政治路線의 差異를 드러낸 契機는 仁祖反正. 崔鳴吉은 反正에 參與해 功臣이 됐고 金尙憲은 義理와 名分을 내세워 加擔하지 않았다. 하지만 世上이 바뀌어 西人이 勢力을 얻자 이들은 別 頉없이 成長을 거듭했다. 그것도 暫時뿐. 丙子胡亂은 그들을 決定的으로 갈라놓았다. 崔鳴吉은 주화를, 金尙憲은 斥和를 主張했던 것이다. 當時 絶海孤島(絶海孤島)와도 같았던 남한산성에서 崔가 降伏文書를 만들어 淸軍 陣營을 오갈 무렵, 金은 文書를 빼앗아 찢어버렸고 崔는 그것을 주워서 다시 붙이곤 했다. 崔는 戰後 處理를 위해 廳에 드나들었고 金은 斥和派였다는 理由로 淸나라 선양(瀋陽)에 잡혀갔다. 얼마 後 淸나라 復讐 計劃을 꾸민다 해서 崔도 亦是 붙잡히는 身世가 됐다. 歷史의 라이벌, 그들은 차가운 異域땅에서 捕虜의 몸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은 그들에게 서로를 理解하는 機會가 됐다. 崔는 죽음 앞에서도 堂堂한 金의 毅然함에 歎服했고 金도 崔의 主和論이 眞正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金은 「두 世代의 좋은 友情을 찾고/백년 묵은 疑心 풀리도다」고 읊었고 崔는 「그대 마음 돌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라며 金의 節義를 稱頌했다. 이들은 和解했건만 後孫들은 그 明暗이 뒤바뀌었다. 主和派(實利論) 崔鳴吉의 後孫은 少論이 되어 政治的 힘을 喪失한 채 江華島에서 陽明學派를 形成, 외로운 現實批判의 길을 갔다. 反面 斥和派(名分論) 金尙憲의 後孫은 老論이 되어 勢力을 잡고 後날 安東 金氏의 勢道政治까지 이어졌다. 朝鮮이 實利보다는 名分을 重視한 社會였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광표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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