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日報 4月 25日子 A8面에 실린 한석호 全泰壹財團 事務總長 인터뷰에서 紙面事情上 미처 다 담지 못했던 內容들을 온라인에 揭載합니다.“조국(전 法務部長官) 一家(一家)의 行爲는 不平等이고 不公正이었어요. 上位 1%의 삶, 最上位 1% 成就 안의 삶을 子息들에게 代물림하기 위해 不公正한 行爲를 한 거잖아요. 그걸 進步가 擁護하면서 曺國은 無罪다, 鄭慶心(朝 前 長官의 아내)은 無罪다 이런거죠. 그때부터 激烈하게 進步가 汚染됐다고 생각해요.”● 昌信洞 縫製거리에서 만난 한석호 20日 午後 서울 동대문구의 一名 ‘창신동 縫製거리’. 이 곳은 零細한 小規模 縫製工場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들어앉은 골목이다. 大部分 社長과 勤勞者를 合해도 서너 名에 그치는, 一名 ‘5人 未滿 事業場’李 密集해있다. 우리나라 勤勞基準法(勤基法)에서 5人 未滿 事業場은 그늘과 같은 곳이다. 賃金, 勤勞時間, 休暇, 休業手當, 解雇 等과 關聯된 條項들이 適用되지 않는다. 零細 事業場을 僅僅이 꾸려가는 社長은 勤勞者에게 넉넉한 賃金을 支拂하지 못하고, 勤勞者는 最低賃金 或은 그를 밑도는 時給을 모아 月 最低生計費를 確保하기 위해 ‘超長時間’ 勤勞를 自處하고, 法은 이런 狀況을 合法으로 看做한다. 그렇게 24時間 365日 縫製거리는 合法的 默認 下에 쉴 새 없이 作動한다. 이 거리 어느 골목 끝에 열려있는 工場 門틈으로 ‘드르륵, 드르륵’ 裁縫틀 돌아가는 소리가 機關銃 演士音처럼 흘러나왔다. 안에서 裁縫師의 作業 現場을 바라보고 있던 한석호 全泰壹財團 事務總長(59)李 記者에게 말했다. “週 69時間 勤勞時間, 最低賃金 이런 것들은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世上이야기예요.” 바깥일을 보고 作業場으로 復歸하던 工場 社長이 한 事務總長과 記者를 보더니 꾸벅 人事했다. 全泰壹財團 近處에 있는 工場이라 두 사람은 서로 오래 지켜본 이웃이었다. 勞動運動家와 縫製工場 社長은 平素처럼 安否를 나눴다. “여기서 일하는 분들은 定해진 出退勤 時間이 없어요.” 한 事務總長이 말했다. “아침 8時나 9時에 와서 일하곤 定해진 退勤時間도 없이 밤늦게까지 하다가는 ‘아, 오늘 이 程度 整理하고 간다’ 싶을 때 가는 거예요. 우리 社會에서 報酬, 進步라고 하는 사람들이 봐야 할 곳은 이러한 밑바닥이예요.”● ‘火焰甁과 쇠파이프’에서 ‘連帶’로 한 事務總長은 全國民主勞動組合總聯盟(民勞總) 社會連帶委員長, 민노총 傘下 全國金屬産業勞組聯盟(現 전국금속노조) 組織室長을 지냈다. 本人은 “勞動運動을 한 건 35年 쯤, 學生運動까지 合치면 40年 쯤 했다”고 한다. 그는 1983年 서울시립대 都市行政學科 在學 時節 學生 運動에 뛰어들어 1987年 ‘6月 抗爭’ 때 처음으로 拘束됐다. ‘組織’ 所屬으로 勞動運動을 한 건 민노총의 前身인 ‘全國勞動組合協議會(전노협)’ 時節이었다. 그는 “전노협의 先鋒隊, 組織爭議 專門家, 一名 ‘火焰甁과 쇠파이프’”라고 本人을 紹介했다. 그런 그가 只今은 民勞總으로부터 ‘뭇매’를 맡고 있다. ‘運動’ 年次나 履歷으로 보면 勞總 委員長, 雇傭勞動部 長官, 經濟社會勞動委員會 委員長, 或은 國會 環境勞動委員會 所屬 ‘金배지’라도 됐어야지 싶은데 只今 그의 事務室은 昌信洞 골목의 雅淡한 事務室이다. 煩雜한 大路에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그리고 그 골목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始作되는 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왼쪽便 구석에 그의 事務室, 全泰壹財團이 나온다. 한 事務總長은 요즘 자꾸 ‘賃金鬪爭’이 아니라 ‘連帶’를 말한다. ‘우리 賃金을 올리자’가 아니라 ‘너희 것을 나누자’고 한다. 그래서 民勞總과 葛藤 中이다. ‘나눠야 할 것’을 가진 大企業 正規職, 民勞總 內 高所得이나 元請 勤勞者도 그를 ‘異端視’ 한다는게 本人의 말이다. 尹錫悅 政府에서 相生(相生)賃金委員會에 參與한 뒤 한 事務總長은 “事務總長職에서 辭退하라”는 要求를 民勞總으로부터 받았다. 한 事務總長은 記者에게 “地上波 放送社 正規職 平均 賃金이 1億 원 쯤 됩니다. 그런데 5年次 以下 막내뻘 非正規職 作家, 스테프들은 3000萬 원이 될까말까예요”라고 했다. 고(高)임금 正規職 勤勞者는 위에, 低賃金 非正規職 勤勞者는 아래에 있다. 이걸 우리나라 勞動市場의 ‘二重構造’라고 한다. 한 事務總長은 “二重構造와 兩極化를 解消할 수 있다면 내 靈魂이라도 팔 것”이라고 말했다. 縫製工場과 財團에서 한 事務總長이 생각하는 兩極化, 勞組와 進步의 問題點, 韓國의 雇傭 現實에 對해 들어봤다.● “不平等을 放置했고 나는 失敗했다”―40년 가까이 勞動運動에 投身했는데 本人을 ‘失敗했다’고 스스로 規定했다.“이런거다. 勞動運動을 熱心히 하긴 했는데…. 上層(高賃金 勤勞者)만 處遇가 좋아지고 저 밑바닥(低賃金 勤勞者)은 放置되도록 놔둔, 그런 勞動運動이었다. 不平等은 深化됐다. 勞動者들도 上位 10%와 下位 50%는 하나의 勞動者 階級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分斷 階級이 됐다.”―11년 前 인터뷰에서 ‘젊은 靑年과 勞動者에게 많이 未安하고 아프다’고 한 적이 있다. 只今은 어떤가“흐….” 그는 한숨을 쉬다 입을 열었다. “只今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合計)出産率 0.78’ 속을 쭉 파고들면 所得 不平等이 있다고 본다. 上位 10%, 20% 일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靑年들은 結婚도 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그런데 나머지 80%, 或은 最低賃金 勞動을 하는 靑年들은 結婚을 할 엄두를 못 낸다. 勞組가 ‘組織된 이들’의 賃金과 雇用條件을 지키는 데에만 集中하고 沒頭해온 것이 만든 現象이다. 勞組 밖의 現實을 못 보고 있었다.” 한 事務總長이 말하는 組織된 이들은 充分한 賃金을 받고 勞組를 結成해 社側과 同等한 立場에서 交涉을 할 수 있는 集團을 뜻한다. ‘勞組 밖의 現實’은 그런 處地에 있지 못한 勤勞者들을 말한다.―임금 兩極化가 언제부터 벌어졌다고 보는가.“1996, 1997年 國際通貨基金(IMF) 外換危機 直前부터 그런 現象이 많이 나타난 것 같다. 經濟 危機로 大量解雇 事態가 벌어지자 勞動運動 안에서 ‘나부터 좀 살고 보자’, ‘내 賃金 좀 지키자’는 氣流가 剛해졌다. 이들이 總罷業을 벌이자 資本과 企業 立場에서는 매우 놀랐고 이들 ‘組織된 勞動者들’을 敵으로 돌리지 말아야겠다는 判斷이 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賃金을 올려주고 處遇를 改善하고, 그 賃金을 마련하기 위해 下請·非正規職 人件費를 쥐어짜게 된 것이다. 그게 30年 넘게 繼續됐다.”―당시 勞動運動을 할 때는 그걸 몰랐나.“당시 民主金屬聯盟 組織部長이었다. 그때는 그 問題(兩極化)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前景(戰鬪警察)들, 그 뒤에 있는 政權, 그리고 財閥, 이런 것 만 보였다. 2001年 다시 投獄되면서 讀書를 하고 생각을 할 時間이 많아졌는데 그때서야 ‘아, 뭔가 異常하다. 나의 勞動運動은 失敗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始作했다.”―저임금·비정규직 勤勞者들은 왜 高賃金·正規職 勤勞者들처럼 勞組를 勢力化 못 했나“고용노동부 統計를 보면 30人 未滿 事業場의 勞組 加入率은 0.2% 程度다. 그곳에 屬한 勞動者들이 勞組를 몰라서, 아니면 勞組 하면 監獄 갈까봐 무서워서 안 하는 게 아니다. 勞組를 해도 賃金을 못 올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 한다. 新種 코로나바이러스 感染症(코로나19) 때 零細 事業場은 社長들이 勤勞者보다 더 힘들어했다. 賃貸料는 내야 하는데 일은 없고. 이런 處地를 彼此 서로 아는 거다. 零細한 食堂이나 工場, 中小工團, 始興 半月 東豆川 等 地方의 農工團地 같은 곳들은 社長들이 勤勞者에게 賃金을 더 주고 싶어도 못 준다.”● “韓 國民所得 3萬 달러 時代라는데…”―양극화가 어느 程度 深刻하다고 보는가.“한국이 國民 所得 3萬 달러(藥 4007萬 원) 時代라고 한다. 換率에 따라 變하지만 大略 4000萬 원이다. 이는 갓 태어난 新生兒든, 八旬 어르신이든, 집에서 家事 勞動하는 主婦든, 初中高生이든 누구나 年 4000萬 원 假量의 經濟的 惠澤을 입는다는 意味 아닌가. 그런데 하루에 8~10時間 씩 一週日 일하고면서도 年 3000萬 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統計廳 發表 基準으로 勤勞者의 折半 假量을 차지한다. 말이 되나.” ―그 속事情은 勞組가 第一 잘 알 텐데, 왜 對策 마련에 나서지 않았나.“오래된 慣性이다. 1990年代부터 勞組는 賃金引上 鬪爭이 가장 쉬웠고, 罷業하자하면 너도나도 모였다. 그렇게 이어지면서 ‘起承轉 賃金引上 鬪爭’이 됐다. 그게 社會的 現象이 돼버렸다.”―‘고임금’, ‘罷業’하며 現代車가 第一 먼저 膾炙되는데.“현대차는 오히려 安定되어가는 中이다. 2018年度에는 下請 賃金 引上額을 더 높게 策定하는데 合意하기도 했다. 2020年度에는 基本給을 스스로 凍結했다. 最近의 賃金 引上 競爭은 오히려 ‘판교 밸리’로 代辯되는 情報技術(IT) 企業들과 삼성전자, SK, LG 이런 곳에서 불 붙고 있다.”―양극화 解消를 위해 政府, 企業, 勞組는 무엇을 해야 할까.“노동계는 兩大勞總을 中心으로 ‘下厚上薄’을 해야 한다. 高賃金 勤勞者는 賃金을 천천히 올리고, 低賃金 勤勞者는 두텁게 올리고. 經營界는 富裕한 會社라고 해서 자꾸 賃金 올리는 競爭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社會를 봐야 한다. 兩大 勞總이 먼저 나서 低賃金 勤勞者를 위한 基金을 만들면 財閥 總帥들이 내는 것보다 더 큰 基金을 만들 수 있다. 兩大 勞總 組合員 250萬 名이 每달 1萬 원씩 基金을 모으면 單純 計算해도 年 3000億 원이다. 이건 企業 社內留保金 다 털어도 안 되고, 財閥 總帥 株式 다 털어도 안 되는 問題다. 勞動界가 이렇게 먼저 나서면 企業과 政府도 따라올 것으로 믿는다. 그 過程에서 勞動界는 韓國의 經營者와 財閥體制를 認定해주고, 企業은 勞組의 자유로운 權利와 交涉權을 認定해주는 式의 妥協이 必要하다.”● “兩極化, 政府-經營界 責任만 물어선 안 돼”―민노총에 이러한 提案을 해본 적은 없는가.“사회연대위원장을 하면서도 主張했는데 執行部는 同意하지 않았다. 財閥이 책임져야지 政府가 책임져야지 왜 우리가 그걸 責任 지냐고 한다. 只今 이 얘기는 經營界와 政府의 責任만 물어서 解決 되는 게 아니다. 勞使政을 中心으로 全 社會가 앞으로 20年 플랜, 30年 플랜을 가야지만 이룰 수 있다. 그렇게 出發해도 20年 30年, 어쩌면 50年 100年이 걸릴 수도 있다.”―양극화를 어느 水準까지 解消해야 할까.“적절한 水準의 不平等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式 소비에트式 平等主義에 同意하지 않는다. 내가 그걸로 勞動運動 했지만 同意하지 않는다. 그래도 最小限 熱心히 일했는데 年 所得 2500萬 원도 안 되는 이들은 所得은 社會가 뒷받침 해 줘야 하지 않는가. 上位 10% 富者가 社會 全體 富의 30%를 占有하고, 나머지 90%가 70%를 占有하는 程度가 理想的이지 않을까 싶다. 스웨덴이 그렇다.―시간이 흐르면 兩大勞總도 世代交替가 이뤄질까. “當然하다. 物理的으로 只今 執行部는 停年退職하지 않겠나.(웃음) 다만 어떤 方向으로 바뀌느냐가 問題다. 自己 利益만 더 생각하는 ‘歪曲된 能力主義’로 간다면 韓國 社會는 阿修羅場, 萬人에 對한 萬人의 鬪爭이 되는거다. 反面 서로 連帶하는 方向, 서로 손 잡는 方向으로 가면 아주 肯定的으로 가는거다.”―최근 本人 페이스북에서 ‘進步는 汚染됐다’고 썼다. 그 進步는 누군가.“우리 韓國 社會에서 進步라고 하면 더불어民主黨과 그 왼쪽을 말한다. 勿論 勞動運動 안에서는 論難이 있지만 社會的으로 보면 大體로 그렇다. 이들이 汚染됐고 그 出發點은 曺國 事態다. 進步는 自己 價値를 지키기 위해 冷徹해야 하는데, 그들은 ‘내로남不(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不倫)’ 하면서 進步의 價値를 完全히 毁損시켜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只今까지도 如前히 擁護한다. 問題가 드러나면 잘못했다고 反省을 해야했다. 進步가 그렇게 망가지고 汚染됐는데, 내가 굳이 나를 進步라고 固守할 必要가 없다.”―18일 國會 議員會館에서 琴泰燮 前 더불어民主黨 議員, 김종인 前 國民의힘 非對委員長 等과 함께 ‘省察과 摸索’ 첫 討論會에 參席했다. 政治를 할 생각인가“현실 政治를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에게 두 가지 原則이 있다. 하나는 ‘棺(官·政府)밥’ 먹지 않는다. 또 하나는 選擧에 나가지 않는다. 事實 그날 座長은 다른 분을 모시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事情이 如意치 않으셔서 霧散됐다. 그래서 누구를 모실까 하다가 金鍾仁 先生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座長으로 모셨다. 每番 이렇게 나오시는 건 아니고.”●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 한 事務總長은 인터뷰 途中 財團 壁에 걸린 전태일 烈士 寫眞을 보며 말했다. “事實 전태일은 맨 아래 勞動者가 아니라 裁斷師, 卽 中間 管理者였어요. 그 程度의 非常한 머리와 强力한 意志를 가졌던 사람이 ‘위’를 보면서 ‘나도 社長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으면 只今쯤 못해도 대단한 衣類業體 會長은 돼있었을 거예요.” 전태일은 衣類業體 會長이 되는 代身 1970年 11月 13日 평화시장 앞에서 自己 몸에 石油를 뿌린 뒤 焚身했다. 그는 죽어갈 때 “勤勞基準法을 遵守하라! 우리는 機械가 아니다!”고 외쳤다. 한 事務總長은 “전태일은 위가 아니라 아래를 봤어요. 피 吐하는 미싱師, 배 곯는 시다를 봤고 自己 몸을 던졌죠. 그래서 그가 아름다운 靑年으로 歷史에 남은거예요. 우리도 아래를 봐야해요”라고 말했다.이은택기자 nab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