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少年軍을 創設한 趙喆鎬 先生(왼쪽). 1922年 10月 5日 중앙고보 뒤뜰에서 중앙고보 體育敎師 趙喆鎬 先生(맨 오른쪽)과 學生 8名이 朝鮮少年軍 發隊式을 가졌다. [寫眞 提供 ·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 準備委員會]
1922年 10月 5日 午後 4時 30分쯤 중앙고보(現 중앙고) 뒤뜰 솔밭에 學生 8名이 모였다. 중앙고보, 배재고보, 輸送普通, 協成學校, 第一高普 等 所屬 學校도 제各各이었다. 韓國스카우트의 始初로 불리는 朝鮮少年軍이 誕生한 瞬間이다. 이들을 모은 사람은 獨立運動家이자 중앙고보 體育敎師였던 趙喆鎬 先生. 朝鮮少年軍 創設者인 趙喆鎬 先生은 平素 “너희는 이 民族의 畫廊이다. 民族을 일깨우는 先鋒이 돼라”고 訓育했다. 이날 學生 8名으로 始作된 朝鮮少年軍은 15年 만에 1萬餘 名 單元을 가진 全國 組織으로 成長한다.
8名이 1萬餘 名 되기까지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 記念式’李 10月 5日 中央校友會·韓國스카우트聯盟 主催로 서울 鍾路區 중앙고에서 열린다. 정문헌 鍾路區廳長과 강태선 韓國스카우트聯盟 總裁(비와이엔블랙야크 會長) 等이 祝辭를 하는 이番 行事에는 記念 獻花式과 朝鮮少年軍 發隊式 再演 等이 豫定돼 있다. 行事 白眉는 中學生부터 시니어 모델까지 多樣한 年齡帶의 사람이 全 世界 스카우트 團服을 입고 벌이는 퍼레이드다. 主催 側인 中央校友會의 性互換 事務局長은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을 祝賀하는 뜻깊은 자리인 만큼 行事場이 즐거운 雰圍氣가 되도록 準備했다”고 말했다.
“먼저 사람이라는 그 自體의 改造로부터 始作해 이 社會의 모든 虛飾과 惡習을 바꾸고자 函이외다. 사람의 始初인 少年의 改造에 着手해 그들로 하여금 社會를 위하고 自己를 위하기에 최適切한 自覺과 試鍊을 갖게 하고 函이외다.”
朝鮮少年軍을 創設한 獨立運動家 關山(冠山) 趙喆鎬 先生의 持論이 담긴 말이다. 大韓帝國 황립武官學校 生徒였던 그는 日帝가 學校를 廢校하고 生徒 43名을 日本 陸軍士官學校로 編入시키자 卒業 後 休職將校 身分으로 歸國한다. 지청천 韓國光復軍 總司令官이 그의 動機다. 當時 황립武官學校 同期들은 “旣往 軍事 敎育을 배우려고 왔으니 끝까지 배워 任官 後 中尉가 되는 날 모두 脫出해 光復에 나서자”고 뜻을 모았다고 한다. 祖國에 돌아온 그가 始作한 일은 少年軍 育成이었다. 1919年 파리講和會議 消息을 듣고 少年軍 勃起를 꿈꾼 趙喆鎬 先生은 중앙고보에서 敎鞭을 잡으며 이를 本格化한다.
趙喆鎬 先生은 중앙고보에서 옛 韓國軍 敎鍊 方式인 體育敎鍊을 하며 學生들의 獨立思想을 북돋았다. 카이저 鬚髥을 기른 채 軍隊式 걸음으로 闊步하는 모습에 ‘季冬 虎狼이’라는 別名이 붙기도 했지만 學生들은 趙喆鎬 先生을 積極的으로 따랐다. 그의 가르침 아래 朝鮮少年軍 1號對 隊員으로 活動하던 오봉환은 6·10 萬歲運動 當時 趙喆鎬 先生과 함께 逮捕되기도 했다. 오봉환은 脫獄 後 義烈團에 入團해 獨立運動을 이어갔다.
朝鮮少年軍 創設 舞臺였던 중앙고 前景. [寫眞 提供 ·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 準備委員會]
日帝가 問題 삼은 朝鮮少年軍 揮帳. [寫眞 提供 ·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 準備委員會]
日帝 彈壓에도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
朝鮮少年軍의 命脈이 이어진 데는 뜻을 같이한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特히 중앙고보 校長이던 인촌 金性洙 先生의 役割이 컸다. 獄苦를 마친 趙喆鎬가 중앙고보에서 體育敎師로 活動할 수 있도록 도와준 人物도 그였다. 仁村 先生은 朝鮮少年軍 發隊式에 參席하는 等 物心兩面으로 도왔다.
趙喆鎬는 朝鮮少年軍 創設 以後에도 숱한 苦楚를 겪었다. 及其也 日帝의 彈壓 탓에 故國을 떠나 北間島에서 學生들을 指導하는 處地가 됐다. 當時 資金 마련을 위해 歸國했다 日帝에 逮捕되는 일이 있었는데, 仁村 先生의 身元保證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以後에도 仁村 先生은 事情이 딱한 趙喆鎬가 東亞日報 發送部長으로 일하도록 配慮하는 等 支援을 아까지 않았다.
朝鮮少年軍 亦是 日帝의 彈壓을 비켜가지 못했다. 1937年 7月 파고다公園에서 開催된 時局講演會에서 奉仕活動을 하던 朝鮮少年軍 隊員들이 着用한 項建議 太極文樣과 無窮花 揮帳 等을 트집 잡아 日帝가 彈壓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朝鮮少年軍을 日本 보이스카우트 ‘건아단’에 編入할 것을 强要했는데 이는 親日團體로 轉換을 의미했다. 結局 朝鮮少年軍은 같은 해 9月 3日 自進 解散을 決定한다. 祖國 獨立을 보지 못한 채 世上을 떠난 趙喆鎬 先生은 永眠 直前 “나는 일을 다하지 못하였는데”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만 趙喆鎬 先生이 뿌린 씨앗은 如前히 祖國에 남아 있었다. 朝鮮少年軍은 光復 以後 大韓少年團으로 再組織됐고, 보이스카우트韓國聯盟으로 名稱을 變更해 오늘날에도 活動을 이어가고 있다. 只今도 중앙중·중앙고 보이스카우트 出身들은 趙喆鎬 先生의 號를 따 ‘關山會’를 組織하고 그의 忌日마다 追慕式을 가지며 精神을 기린다. 關山會는 이番 朝鮮少年軍 創設 100周年 記念式도 後援한다. 關山回 一員인 김정호 世宗大 시니어産業學科 講師는 “所屬 學校를 不問하고 未來 先覺者들을 發掘하려 한 趙喆鎬 先生의 ‘多樣性 重視’는 오늘날에도 如前히 有效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韓國 스카우트運動에 關心이 있다면 負擔 없이 朝鮮少年軍 100周年 行事에 參席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