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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題 原因 찾으려는 對話法을 共感 위한 相互反應적 疏通으로|신동아

問題 原因 찾으려는 對話法을 共感 위한 相互反應적 疏通으로

  • 허태균 │고려대 心理學科 敎授

    入力 2014-02-19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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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意思傳達이라는 言語의 技術的 機能은 漸次 설자리를 잃는다. 오히려 話者(話者)와 靑瓷(聽者) 間 相互反應이 더 重要해졌다. 韓國語는 意思傳達뿐 아니라, 相對方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確認하는 相互反應 시스템을 함께 갖고 있다.
    • 韓國에서 疏通이 더 어렵고 不通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理由다.
    문제 원인 찾으려는 대화법을 공감 위한 상호반응적 소통으로

    英語는 韓國語보다 생각과 事實을 傳達하는 데 더 充實하다.

    中·高等學校 때 筆者가 가장 싫어하고 못하는 科目 中 하나가 英語였다. 나의 高等學校 親舊들은 아직도 내가 英語圈인 美國에서 博士學位를 받았다는 事實을 믿기 어려워한다. 美國에서 銃 8年 程度를 살았고, 大學院을 다니고 學位도 받고 職場生活까지 한 나는 英語를 웬만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如前히 헷갈려서 正確히 答하기 어려운 英語 質問이 바로 “Didn‘t you have dinner?(너 밥 안 먹었니)”다. 우리말로 對答은 너무나 쉽다. 밥을 먹었을 때는 “아니오, 먹었어요”, 안 먹었을 때는 “네, 안 먹었어요”라고 하면 된다. 안 먹었냐고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英語 對答은 全혀 다르다. 밥을 먹었을 때는 “Yes, I did.”, 안 먹었을 때는 “No, I didn‘t.”다. 더 荒唐한 것은, 英語로 “Did you have dinner?(너 밥 먹었니)”로 물어봐도 英語의 對答은 똑같다. 우리말로는 ‘먹었니’와 ‘안 먹었니’라는 質問에 다르게 對答해야 하고, 英語에서는 質問에 相關없이 對答은 한결같다.

    처음 美國에 가서 한동안 眞짜 헷갈렸다. 나중에 艱辛히 英語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안 먹었니” 하는 質問에 英語로 “No, I didn‘t”라고 完璧한 否定文 對答을 하면서도 머리는 더 熱心히 끄덕이며 肯定의 사인을 보냈다. 이런 些少한 質問은 괜찮다. 國家 元首들 間의 重要한 協商過程에서 美國 大統領이 “同意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나라 大統領이 末路는 “아니오, 同意하지 않습니다”라고 正確히(하지만 語塞하게) 얘기하면서 熱心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얼마나 헷갈리고 危險한 瞬間이 되겠는가. 이런 言語的 差異는 單純히 文法의 差異가 아니다. 本質的으로 言語 機能의 差異이고, 窮極的으로는 文化의 差異를 反映한 것이다.

    相互的 反應

    普通 우리는 言語를 생각과 事實을 正確하고 效率的으로 傳達하는 手段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觀點에서 본다면 英語가 韓國語보다 그 目的에 더 忠實하다. 相對方이 어떻게 (肯定이든 不正이든) 물어보건 相關없이, 그 質問은 結局 나의 食事 與否를 묻는 質問이라는 것을 把握하고 나의 食事 與否에만 根據해서 答하면 된다. 밥을 먹었으면 無條件 Yes (네), 밥을 안 먹었으면 No (아니오). 相對方의 質問 形態는 重要하지 않고, 正確히 나의 食事 與否만 考慮해서 肯定과 否定을 決定하면 된다. 따라서 나의 狀態를 正確하고 效率的으로 記述하는 方法으로 가장 誤謬가 적은 意思疏通法이다. 더구나 質問을 듣지 않고 答만 들어도 食事 與否는 明確히 드러난다. 그래서 英語의 窮極的인 目的은 ‘技術(description)’李 된다.



    反面 韓國語는 나의 食事 與否보다는 相對方이 나에게 어떻게 물었느냐가 더 重要하다. 나에게 肯定으로 물어보면, 나의 狀態가 肯定이면 肯定으로 答하고, 不正이면 不正으로 答하면 된다. 하지만 不正으로 물어봤을 때, 나의 狀態가 不正이면 肯定으로 答하고 나의 狀態가 肯定이면 不正으로 答해야 한다.

    韓國語는 왜 이렇게 複雜하고 非效率的이고 헷갈리는 文法을 가질까? 바로 韓國語의 本質的 機能이 技術에 머무르지 않고 ‘相互的 反應(interactive response)’에 있기 때문이다. 이 反應의 機能을 確認하는 方法은 韓國에서 韓國말로 英語처럼 對答해보면 確實해진다. 누군가 “밥 안 먹었니”라고 물어볼 때, “아니, 안 먹었어”라고 對答해보라. 十中八九는 다시 물어본다. “밥 안 먹었냐고?”라고. 다시 “아니, 안 먹었어”라고 對答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다음 우리가 들을 말은 빤하다.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어찌 보면 韓國語는 意思傳達의 機能뿐 아니라, 相對方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確認하는 시스템을 같이 가지고 있다. 이래서 韓國에서 疏通은 어렵고, 不通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事實 그런 反應 確認 시스템은 韓國 社會를 더 어렵게 하는 要素가 아니라, 關係主義的 韓國文化에 더 잘 들어맞기에 우리 스스로가 발전시켜온 것이다.

    韓國 社會를 東北亞文化圈에 屬하기에 흔히 集團主義로 一般化하는 傾向이 있다. 勿論 韓國 文化는 個人主義와 集團主義 側面에서 보면 分明 集團主義的이다. 個人의 特性이나 固有性보다는 集團의 調和와 和合을 重要視하고, 個人의 權利나 自由보다는 集團을 위한 義務나 責任을 强調하고, 個人의 成就와 自我實現보다는 集團의 利益과 集團正體感이 더 優先視되는 傾向을 가진다. 하지만 世上의 모든 集團主義 國家가 똑같지 않다. 特히 수많은 心理學的 硏究가 日本과 美國을 比較한 資料들에 根據하기에 一般的인 集團主義的 特性은 日本人의 文化的 特性을 가장 잘 描寫하는 것으로 理解할 수 있다.

    集團主義 vs 關係主義

    日本과 韓國을 比較한 心理學的 硏究에 따르면 日本人들의 集團主義는 組織에 對한 集團主義다. 卽, 組織 속의 한 個人으로 自身의 役割과 組織의 目的과 利益에 符合하는 行動規範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韓國의 集團主義는 組織이 아닌 사람에 對한 集團主義였다. 父母, 子女, 親舊, 親戚과 같은 重要한 사람들이나 組織이 아닌 組織의 同僚들과의 關係와 和合이 삶에서 重要한 文化的 特性을 갖는다. 이것은 心理學에서 韓國人의 固有한 心理的 特性으로 밝혀진 關係主義다.

    關係主義는 組織과 人間의 關係가 아닌, 一對一의 對人關係적 脈絡에 더 焦點을 맞춘다. 自身의 存在와 正體感은 他人과의 關係 속에서 規定되며, 따라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自身을 다른 사람으로 規定하는 脈絡成果 力動性을 보여준다. 組織이나 社會 속에서 自身의 位置와 任務보다 오히려 他人과의 個人的 關係를 重要하게 여기는 것이다.

    문제 원인 찾으려는 대화법을 공감 위한 상호반응적 소통으로

    2008年 7月 狂牛病對策委員會가 主導한 촛불示威.

    自身의 後輩가 會社의 商社로 올 때 公的인 上司와 部下의 關係보다 私的인 先後輩 關係가 社會的으로 더 重要하기에, 韓國 사람들은 더 不便해하고 싸가지 없는 後輩 上司가 되기도 더 쉽다. 그래서 年齡, 學緣, 地緣 等이 매우 重要한 要因이 되고, 人間關係를 利用한 請託과 腐敗와 非理가 相對的으로 일어나기 더 쉬운 文化的 環境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自身의 知人에게 若干의 惠澤을 配慮할 때는 當然한 人之常情으로 여기지만, 自身의 公的인 處地와 役割을 考慮하면 緣故主義와 非理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關係主義的 特性이 바로 우리 言語를 相對方과의 脈絡에 따라 더 力動的으로 反應하는 形態로 만들었다. 흔히 尊待語의 體系를 關係主義를 反映한 韓國語의 特性으로 얘기하지만, 組織 속의 集團主義에서도 組織 內 役割과 序列에 따른 尊待語의 機能이 存在하므로 그리 適切한 說明은 아니다.

    關係主義를 더 잘 反映하는 韓國語의 特性은 바로 質問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技術의 機能을 超越한 相互反應의 機能이라고 볼 수 있다. 個人主義와 組織的 集團主義는 效率性과 目的 中心的 特性을 가지니 正確하고 效率的인 技術的 言語가 重要하다. 하지만 關係 自體가 더 重要한 韓國人에게는 記述되는 內容보다는 내 말을 듣는다는 主觀的 느낌이 훨씬 더 重要해진다. 그래서 會社에서도 내가 멍청하게 물어봐도 恒常 正確한 內容을 가장 效率的으로 記述하는 사람은 왠지 차가운 人情머리 없는 놈이 된다. 하지만 내가 멍청하게 물어보면 같이 멍청하게 反應하는 同僚는 왠지 情이 가는 便安한 相對가 된다.

    大韓民國은 現在 不通 社會다. 各種 言論에서는 政府와 大統領이 不通이라는 國民의 認識을 連日 傳한다. 젊은 層과 386世代, 그리고 老年層 間의 異見과 不通은 社會的 葛藤의 重要한 要因이다. 家族 內에서도 子女와 父母, 夫婦間에도 不通이라는 하소연이 흔하다. 이런 우리 社會의 不通 原因은 正確한 技術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期待하는 만큼 相互反應의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韓國 社會에는 예전에도 疏通의 問題에 對한 言及은 있었지만, 아마 疏通의 問題가 社會的 키워드로 本格的으로 登場한 것은 2008年의 狂牛病 事態인 것 같다. 政府가 推進한 美國産 소고기 輸入再開協商에 對한 많은 國民의 反對 示威로 始作해 거의 政權 退陣運動으로까지 擴散됐고, 歷史的 結論은 後날 내리겠지만 李明博 政府가 執權 初期부터 國內 政治力을 喪失하게 된 매우 決定的인 事件이라고 評價된다. 많은 政治評論家는 狂牛病 事態에 對해 左派와 右派의 政治판, 反美와 親美의 激突, 保守와 進步의 葛藤, 世代 間 衝突 等의 다양한 解釋을 내놓지만, 心理學者로서의 分析은 技術的 疏通과 相互反應적 疏通의 問題였다. 

    只今의 時點에서 보면, 美國産 소고기에 對한 狂牛病 事態는 여러 非合理的인 面이 있었다. 實際 美國産 소고기를 먹어서 狂牛病에 걸릴 確率을 考慮하거나 유럽, 日本 같은 나라들보다 狂牛病 發病 頻度가 더 낮은 美國産 소고기에 對해서만 類달리 反應이 激했던 事實, 소에게 이미 오래前부터 動物性 飼料를 禁止해 狂牛病은 거의 100% 統制가 可能하고 實際로 發病이 急激히 줄어들었던 點은 그 非合理性을 어느 程度 確認해준다. 더구나 只今은 美國産 소고기가 實際로 別問題 없이 流通된다. 하지만 그 當時 많은 國民이 보인 美國 소고기에 對한 否定的 態度를 非合理性에서만 찾기에는 뭔가 不足하다. 왜냐하면 政府가 合理的인 情報를 繼續 提供했는데도 事態가 鎭靜되기는커녕 오히려 惡化됐기 때문이다.

    韓國的 疏通

    人間이 特定 對象에 對한 態度를 形成하는 根本的 理由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實用的 理由다. 어떤 對象에 對한 肯定的 또는 否定的 態度를 形成하는 것이 實質的 利得이나 生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一般的으로 實質的 利得이 損害보다 큰 社會的 對象에 對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肯定的인 態度를 形成하게 된다. 그 反對인 對象에게는 否定的인 態度를 形成한다.

    또는 實際 스스로 어떤 損失을 計算하지 못하는 狀況에서도, 態度를 통해 行動을 統制하게 된다. 例를 들어, 電氣플러그를 만지면 왜 危險한지를 두 살짜리 어린아이는 理解하지 못한다. 이런 아이가 危險한 行動을 못하게 하는 方法은 電氣의 危險性을 說明하는 것보다 電氣플러그를 싫어하게 만드는 게 效率的이다.

    하지만 이런 實用的 理由가 없이도 우리는 態度를 形成하는데, 그것은 바로 象徵的 理由 때문이다. 卽 어떤 態度를 가짐으로써 自身이 追求하는 어떤 象徵的 價値를 强調하거나 드러내려 하는 境遇다. 흔히 우리가 어떤 政治 候補를 支持한다고 얘기할 때, 實際로는 그 候補에 對해 잘 모르는 境遇도 많다. 오히려 그 候補를 支持함으로써 自身이 어떤 價値를 追求하는지를 確認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境遇에 該當한다. 名品을 消費하는 것도 같은 脈絡이다. 그 物件의 實用的 價値보다, 그 態度와 行爲를 통해 自身 삶의 價値와 意味를 드러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狂牛病 事態는 表面的으로 美國 소의 危險性과 같은 實用的 理由를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韓國의 自尊心, 美國에 對한 反感, 李明博 政府에 對한 牽制 等의 다양한 象徵的 價値를 드러내는 行爲였다. 그래서 이런 象徵的 價値에 對해서는 技術的 疏通이 아닌 相互反應의 疏通이 必要했다. 象徵的 價値에는 正確性이나 效率性은 適用되지 않기에 技術的 疏通은 意味가 없다.

    그런데도 政府는 繼續 美國産 소고기가 얼마나 安全한지에 對한 正確하고 客觀的인 情報만을 反復的으로 얘기했다. 國民은 自身들이 追求하는 象徵的 價値들에 對한 質問에 政府가 反應해주길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危險한지에 對한 客觀的이고 一貫性 있는 對答이 아니라, 自身들이 물어보는 方式에 對해 力動性 있게 反應해주는 그런 疏通을 願했을지 모른다. 

    이런 不通의 論難은 아직도 進行 中이다. 카드情報 流出 事件에 對해 현오석 副總理는 “金融消費者度 情報를 提供하는 段階에서부터 操心해야 한다. 우리가 情報提供에 다 同意해주지 않았느냐”는 發言으로 紅疫을 치르고 謝過까지 했다. 1月 31日 發生한 麗水 기름流出事件에 對해 윤진숙 海洋水産部長官은 “기름 流出의 1次 被害者는 精油社, 2次 被害者는 漁民”이라고 말해 非難을 받더니 及其也 更迭됐다.

    이분들의 말은 技術的 機能으로 보면 거의 틀린 것이 없다. 情報 流出에서 核心內容인 金融會社가 다른 機關에 情報를 提供한다는 部分에 大部分의 사람이 同意한 것도 事實이고, 油槽船이 精油社 港灣施設을 들이받아 流出事故가 났으니 時間的으로나 因果關係를 따지면 1次 被害者는 精油社가 맞다. 이분들의 말을 全體的인 脈絡이 아닌 部分만 煽情的으로 記事化하는 言論의 誤謬도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그 모든 點을 考慮하더라도 相互反應의 機能을 考慮하면, 於此彼 原因을 물어본 말이니 原因만 正確히 얘기하면 된다는 自己中心的 對話法에 依存한 發言 當事者도 一部 責任을 면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當事者들은 眞意가 歪曲되었다고 抑鬱하다고 얘기하겠지만, 言語와 對話의 窮極的인 目的은 情報 傳達이 아니라 相對方의 생각에 影響을 미치는 것이다. 他人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으면 하는 目的性을 가지고 大部分 對話가 이루어진다. 그런 생각을 떠오르게 하지 못하는 모든 對話는 結局 失敗로 看做될 수밖에 없다. 

    이런 疏通과 不通의 問題는 最近 ‘우리 社會에서 왜 女性 指導者들이 急浮上하는가’라는 이슈와 直接 連結된다. 모든 男性과 女性이 반드시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많은 心理學的 硏究는 平均的으로 男性은 問題中心的 思考와 對話를 하고, 女性은 情緖中心的 思考와 對話를 한다고 밝혀왔다. 進化의 過程에서 資源을 救하고 家族을 지키기 위해 사냥을 하고 싸움을 하는 等의 役割을 擔當했던 男性은 危急한 狀況에서 效率的인 事故와 對話의 機能이 더 發達할 수밖에 없었다.

    女性 리더의 出現

    문제 원인 찾으려는 대화법을 공감 위한 상호반응적 소통으로

    서로에 對한 잘못된 對話法은 돌이킬 수 없는 不和를 낳기도 한다. 寫眞은 夫婦 葛藤을 素材로 한 映畫 ‘薔薇의 戰爭’.

    反對로 出産과 育兒를 擔當했던 女性들은 表現이 不足한 子女와 疏通하고 反應해주는 心理的 機能이 相對的으로 發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側面에서 男性들은 問題를 解決하기 위한 技術的 機能의 疏通法에 더 익숙하고, 女性은 心理的 交流 自體를 重要視하는 相互反應의 疏通法에 더 뛰어날 수밖에 없다. 儒敎的 文化的 背景에서 膈한 産業化의 近代 歷史를 겪으면서 韓國의 男性과 女性의 이런 性向은 더욱 强化되는 效果를 가져왔다.

    當場 大部分의 夫婦싸움을 보면, 슬퍼하는 아내에게 男便은 자꾸 왜 그러냐고, 原因이 뭐냐고만 물어본다. 그래야 問題를 解決하고 슬플 일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自身이 只今 슬프다는 그 自體가 더 重要하다. 그래서 아내들은 自身이 슬프다는 것을 表現하기 위해, 過去 20年 前에 일어났던 일을 얘기한다. 그럼 男便은 왜 直接 關聯도 없는 過去의 일을 다시 얘기하냐고 火를 낸다. 아내는 男便이 自己 말을 듣고 있는지, 自己가 火가 나 있는 狀態를 理解하는지를 確認하고자 繼續 質問을 바꿔본다는 事實을 大部分의 男便은 理解하지 못한다. 그냥 自身을 더 窮地로 몰아넣으려는 아내의 異常한 對話法 程度로 생각하고 原因을 알아내려고 더욱더 執拗하게 이렇게 對答한다. “그러니까 都大體 왜 그러냐고?”

    時代가 變하면서 모든 世上사는 너무나 複雜하게 얽히고설켜 이제 原因과 結果가 明確해지지도 않은 社會가 돼간다. 미디어의 發達과 社會的 傳播 速度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의 思考 速度는 이미 情報의 速度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런 時代에는 眞實을 파헤치는 執拗함은 漸漸 줄어들 수밖에 없고, 實際로 다 알 수도 없다. 大部分 事件의 因果關係를 把握하는 데 普通 6個月이나 몇 年, 甚至於 永遠히 밝혀지지 않는 境遇도 許多하다. 이런 狀況에서 言語의 技術的 機能은 그 설자리를 잃어버린다. 오히려 相互反應의 機能이 더 重要해지고 있으며, 關係主義 文化를 가진 韓國 社會에서 그 重要性은 더욱 커진다.

    문제 원인 찾으려는 대화법을 공감 위한 상호반응적 소통으로
    허태균

    1968年生

    고려대 心理學科 卒業, 美國 일리노이 주립대 文學碩士(一般心理學)·노스웨스턴대 哲學博士(社會心理學)

    著書 : ‘가끔은 제精神’


    最近에 따뜻한 리더, 女性 리더의 急浮上은 어찌 보면 當然한 現象으로 理解될 수 있다. 過去에는 女性이 리더가 되려면 男性 리더의 德目을 갖춰야 한다고 心理學的 硏究 結果들이 主張했다. 하지만 이제는 反對로 成功한 男性 리더들이 女性리더의 德目을 갖추고 있다고 얘기한다. 바로 그 女性 리더의 特性 核心에 ‘相互反應적 疏通’이 있다.

    오늘도 차마 “왜 그래?”라는 質問은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唐慌하는 나에게 나의 아내는 얘기한다. “只今 내가 슬프다고!” 當身에게 그런 疏通을 請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볼 時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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