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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技는 내 唯一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신동아

“演技는 내 唯一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

데뷔 43周年 ‘辯護人’ 女傑 김영애

  • 김지영 記者 │kjy@donga.com

    入力 2014-02-20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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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큐 같은 映畫를 누가 보나 했는데…미안하고 부끄러웠다
    • 精神科 治療 받다 出演한 ‘黃眞伊’로 憂鬱症 治療
    • 내 選擇 尊重한 아들과 날 숨 막히게 했던 아버지
    • 膵臟癌 手術 後 過食과 爆彈酒 끊고 ‘꿈의 體重’
    • 年下 異性 親舊와 3年째 戀愛 中, 結婚은 안 해
    • 家族 扶養하느라 平生 가장 노릇, 이제 나를 위해 살고파
    “연기는 내 유일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
    드라마 ‘해를 품은 달’(以下 ‘해稟達’)의 邪惡한 大王大妃에서 映畫 ‘哀子’의 죽음을 앞둔 엄마까지 善惡(善惡)과 施工(時空)을 넘나들며 演技 幅을 넓혀온 지도 어느덧 43年째. 그 사이 두 番의 結婚과 離婚, 事業家로서의 大成功과 失敗에 이어 膵臟癌이라는 絶體絶命의 危機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還甲이 지난 只今까지 안房劇場과 스크린의 出演 要請이 끊이지 않는다. 올해 첫 1000萬 觀客 突破 消息을 傳한 映畫 ‘辯護人’의 헤로인 김영애(63) 얘기다.

    김영애는 宋康昊, 오달수, 곽도원, 임시완 等 男子俳優가 大部分인 이 映畫에서 女主人公이나 다름없는 국밥집 主人 殉愛로 登場한다. 순애는 市場에서 돼지국밥을 팔아 홀로 大學生 아들 軫憂(임시완 分)를 뒷바라지하는 平凡한 小市民이다. 大學에 다니며 夜學 敎師로 奉仕하던 아들이 容共造作事件에 連累돼 소리 所聞 없이 끌려간 뒤 순애가 보이는 애끓는 母性愛는 客席을 여러 番 눈물바다로 만든다.

    特히 그가 아들을 面會하러 갔다가 모진 拷問으로 온몸에 피멍이 든 아들을 보고 失神하는 場面과, 단골손님이던 송우석 辯護士(송강호 분)를 찾아가 “내 아들은 빨갱이 아니다. 辯護를 맡아달라”며 무릎 꿇고 哀願하는 場面은 ‘催淚 强盜 1級의 名場面’으로 뽑혔다. 송우석이 人權辯護士로 變貌하는 重要한 契機였던 이런 場面에서 김영애의 好演이 돋보인다는 評價가 나오는 理由다.

    “처음 보는 宋康昊 잡고 울고불고”

    “연기는 내 유일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

    映畫 ‘辯護人’의 한 場面.

    43年次 베테랑 俳優도 自身의 演技가 洽足할까. 설을 하루 앞둔 1月 30日 서울 江南에서 만난 김영애는 性에 차지 않는 듯 아쉬움을 나타냈다.



    “난 캐릭터를 設定하지 않아요. 그냥 臺本을 자꾸 읽어보면서 그 人物을 생각해요. 6個月짜리 TV드라마 같은 境遇는 한 달 程度 그러면 人物에 完全히 同化되죠. 代身 처음엔 많이 헤매요. ‘辯護人’에서 처음 찍은 神이 송우석 辯護士를 찾아가 哀願하는 場面이었고, 두 番째가 面會 神이었죠. 映畫에서 큰 比重을 차지하는 두 場面을 난生처음 보는 俳優들과 찍으려니까 내가 잘못해서 映畫를 망칠까봐 걱정이 많았어요. 臨時莞島 ‘해稟達’을 찍을 때 붙는 場面이 없어서 못 보고, 송강호 氏도 그때 처음 봤어요. 그런 사람을 붙잡고 울고불고 한다는 게 難堪하더라고. 속이 많이 탔죠.”

    ▼ 完成된 映畫는 만족스러웠나요.

    “2次 編輯本을 봤을 땐 걱정을 좀 했는데 言論市社會 때 보고 놀라웠어요. 너무 고마워서 監督을 안아줬을 程度로요.”

    ‘辯護人’ 撮影은 그가 드라마 ‘메디컬 塔팀’에 出演하기 前인 지난해 5~7月 進行됐다. 中間에 ‘眩氣症’이라는 映畫도 찍었다. ‘眩氣症’은 2億 원을 들여 만든 低豫算 映畫다. 그는 “이런 獨特한 시나리오의 映畫 主人公을 또 언제 할까 싶어 노 개런티로 出演했다”며 “體力을 생각지 않고 스케줄을 無理하게 잡아 지난 1年間은 집과 撮影場만 오갔다”고 했다.

    ▼ 作品 選擇 基準이 캐릭터인가요.

    “作品 全體를 봐요. 作品이 좋으면 比重 같은 건 안 따지고 해요. ‘모래時計’도 처음에 2回 나오는데 했어요. 이番 映畫도 울림이 커서 좋았고.”

    ▼ ‘辯護人’을 본 所感은?

    “30~40代 知人들은 映畫 보고 未安했대요. 나도 未安했지. 부끄러웠고. 熱心히는 살았지만 내 家族과 自身만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眞實이나 正義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싶어요. 난 上告(釜山女商)를 나와서 바로 社會生活을 했기 때문에 데모할 機會도 없었고. 1970~80年代는 먹고 살기 힘든 때잖아. 거기다 집안 形便도 좀 어려워서 내가 家長이었거든. 3男1女 中 長女인데 長男 노릇을 只今까지 해왔지. 只今은 다 자리 잡았지만 몇 十 年 동안 그랬지.”

    ▼ 1000萬 觀客 突破, 豫想했나요.

    “난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나봐. 盧 大統領 이야기가 70~80%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다큐 같은 映畫를 누가 보나 싶었어요. 期待에 副應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죠. 그래도 시나리오는 感動이 있었어요. 처음에 훅 읽었어. 눈물이 났지. 근데 처음엔 出演을 좀 망설였어요. 한댔다가 안 한댔다가 하면서.”

    ▼ 왜요?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나는 시끄러운 데 들어가는 게 두려웠어요. 그럴만한 勇氣가 없었어.”

    ▼ 그럼에도 出演 決定을 한 理由는?

    “世上이 참 公平한 게, 事業한다며 밖에서 딴 짓 할 동안 俳優로서의 立地가 많이 좁아져 있더라고요. ‘辯護人’의 국밥집 아줌마 순애는 事實 예전에 많이 했던 캐릭터인데도 그걸 다 잊어버리고 最近作인 ‘黃眞伊’ ‘로열패밀리’ ‘해稟達’에서 드센 役을 하면서 그 이미지로 굳어져 있었어요. TV드라마에서는 그런 캐릭터만 들어와서 내 나름대로 變化를 주고 싶은 欲求가 强했는데 순애가 딱 좋겠더라고요. 송강호 氏가 出演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더 기울었고. 송강호 氏 映畫는 關係者들이 많이 보니까 이미지 變身에 좋은 契機가 되겠다, 했지.”

    잔재미와 큰 感動

    ‘辯護人’은 盧 前 大統領이 辯護士 時節 맡았던 부림사건을 素材로 한 映畫여서 開封 前부터 論難이 많았다. ‘釜山의 學林事件’이라는 意味인 부림사건은 1981年 發生한 釜山地域 最大 容共造作事件. 映畫가 開封하자 政治人들 사이에서는 이 事件에 對한 甲論乙駁이 이어졌고, 누군가 映畫 티켓을 大量 豫買했다가 上映 直前 取消하는 일도 벌어졌다.

    ▼ 映畫 評點을 0點 處理하는 ‘評點 테러’도 있었는데.

    “神經 안 썼어요. 그런 사람이 全體의 100分의 1도 안 되더라고. 映畫를 보지도 않고 評價한다는 게 어이없잖아요. ‘辯護人’ 反應을 보면서 이 世上에는 常識的인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았어요. 映畫 보고 내게 電話한 사람들은 거의 다 普通 사람들이에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正말 가슴이 먹먹했다’ ‘울컥했다’며 울면서 電話했어요. 世上이 險해도 좋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世上이 굴러가는 거라는 생각을 오래前부터 해왔는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

    ▼ 興行 要因이 뭘까요. 盧 前 大統領의 映畫라서?

    “그 點도 作用했겠죠. 나도 辯護士 노무현에 對해선 몰랐는데 이番 映畫를 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 좀 알았어요. 그렇다고 그게 全部는 아니에요. 난 感動과 재미를 다 주는 映畫가 最高라고 생각하는데, ‘辯護人’은 잔재미와 큰 感動을 주죠. 게다가 正義가 뭔지, 난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런 點이 保守와 進步를 떠나 普通 사람들을 입所聞으로 끌어들인 게 아닌가 싶어요.”

    ▼ 映畫가 잘 만들어졌다기보다 演技者들의 힘이 컸다는 評價도 나오던데.

    “共感해요. 映畫를 보고 나서 危機感, 氣分 좋은 競爭心을 느꼈어요. 달랑 한 新 나오는 親舊까지 어찌나 演技를 잘하든지. 어떤 監督이 ‘이렇게 出演陣의 演技에 구멍이 없는 映畫는 첨 봤다’고 하더니 正말 그런 것 같아요. 난 映畫를 보면 作品에 빠지기보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俳優들의 演技를 보는데 아쉬울 때도 많아요. 내가 認定하는 사람은 따로 있죠.”

    ▼ 그게 누군가요.

    “송강호 氏, 김용림 先輩, 尹汝貞 先輩, 김영옥 先輩, 河正宇. ‘베를린’과 ‘더 테러 라이브’ 보면서 정우한테 홀딱 반했어요. 정우가 監督하고 主演하는 ‘허삼관매혈記’라는 映畫가 곧 크랭크인 해요. 特別出演으로 한 新 나오게 됐어요. 꼭 하고 싶은 作品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막 설레요.”

    ▼ ‘辯護人’의 송강호와 임시완을 俳優로서 評價한다면.

    “송강호 氏가 元來 演技를 잘하는 건 알았지만 옆에서 보니 그 以上이었어요. 映畫 全體를 꿰고 있는 點도 놀라웠고. 시완이는 아직 未完이지만 最善을 다한 點을 높이 評價해요. 拷問 神이 如干 힘든 게 아닌데, 왜 이런 걸 한다고 했지 싶을 程度로 안쓰러웠어요.”

    ▼ 俳優 生活을 40年 넘게 하면 煙氣 道士가 되지 않나요.

    “只今껏 한 番도 煙氣가 쉬웠던 적이 없어요. 많이 해본 캐릭터라도 作品이 다르니까 每番 새로워요. 그래서 늘 힘든가 봐. 사람들은 오래 하면 저절로 된다고들 하는데 난 타고난 天才가 아니라서 그런지 캐릭터가 내 안에 어느 程度 자리 잡기 前까지는 너무 힘들어요. 演技가 便하게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便이에요.”

    俳優는 내 運命

    記者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맑고 선했다. 젊은이의 그것 못지않은 生氣가 감돌았다. 祕訣을 묻자 그는 “철이 안 들어서 그렇다”며 웃음을 빵 터뜨렸다.

    “正말 堪當하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比較的 닳지 않아서 아직도 鐵 안 든 얼굴을 갖고 있나봐요. 일도 戀愛도 그래서 더 고달팠지만.”

    그가 달려온 俳優 人生은 其實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는 1971年 MBC 3期 公採 탤런트로 데뷔해 드라마 ‘閔妃’(1973)로 스타덤에 오르지만 有婦男이던 밴드마스터 이종석 氏와 사랑에 빠져 20代 中盤 俳優人生의 危機를 맞는다. 1978年 李氏와 結婚한 뒤 브라운管과 스크린을 오가며 더욱 活潑한 活動을 펼쳤지만, 中年俳優로 絶頂의 人氣를 누리던 2001年 離婚 消息을 傳해 周圍를 안타깝게 한다. 2003年 黃土팩 事業을 함께하던 5歲 年下인 박장용 氏와 再婚한 後에는 富와 名譽를 同時에 거머쥐며 幸福한 나날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事業 失敗로 이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2008年 두 사람은 남남으로 갈라선다. 以後 演技 活動을 再開한 김영애는 여러 作品에서 存在感을 發揮하지만 ‘해稟達’에 出演하던 2012年 膵臟癌 判定을 받는다.

    女子로서 견디기 힘든 歲月을 보내면서도 지난 43年間 그는 드라마 56篇, 映畫 53篇에 出演했다. 데뷔 後 해마다 두세 篇의 作品을 꾸준히 해온 셈이다. 배우는 選擇받는 職業이기에 이 程度로 오랜 生命力을 維持하기란 쉽지 않다. 祕訣이 뭘까.

    “먹고살기 힘드니까 繼續 일한 거예요. 돈이 急해서. 늘 家長이었으니까. 親同生 中에 잘된 애도 있고 좀 힘든 애도 있어요. 結婚하고 나서 民友(親아들)의 배다른 누나와 兄도 내가 건사했어요. 民友 아빠에게 아이 셋이 있었으니까 그 아이들도 내가 다 공부시키고 結婚시켰죠. 그래서 늘 사는 게 팍팍했고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마흔아홉까지. 먹고살려고 多作을 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事業할 생각을 한 거예요. 돈을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作品만 하는 近似한 俳優가 되려고.”

    ▼ 처음에 俳優가 된 것도 먹고사는 게 目的이었나요.

    “그땐 탤런트 試驗에 붙으면 放送局에서 月給 주는 줄 알았어요(웃음). 서울 親戚 언니가 한番 挑戰해보라며 願書를 갖다줬어요. 元來 財數를 하려고 했는데 붙었어요. 이제 月給 받을 수 있겠구나 했지. 俳優가 된 건 내 生涯 最大의 幸運이자 祝福이라고 생각해요.”

    ▼ 俳優가 天職이란 생각이 드나요.

    “그런 생각한 지는 오래됐어요. 事業한답시고 演技를 못하는 동안 病이 났어요. 前男便이 ‘김영애의 男便’으로 비치기 싫다며 내가 演技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죠. 난 演技를 해야 活力이 생기는데 그걸 못하니 憂鬱症이 甚했어요. 그래서 精神과 治療를 6個月 동안 받다가‘황진이’라는 드라마를 한 거예요. 그 作品을 하며 憂鬱症을 治療했어요. 다 죽어가다가도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지죠(웃음).”

    ▼ 子息 때문에 離婚을 망설인 적이 있나요.

    “있죠. 실은 30代 初盤에 離婚하려고 했어요. 그때는 憂鬱症이 甚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알코올 中毒에 藥물中毒이었고 精神과 治療도 여러 番 받았어요. 1970年代 末부터 睡眠劑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으니까. 근데 서른네 살 때 民友가 태어났어요. 아이를 위해 참고 살다 마흔아홉 살에 離婚을 했지. 내가 죽어서 없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아서 民友 옆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天運’으로 키운 사랑

    思春期에 父母의 離婚을 겪었는데도 엄마의 걱정을 덜기 위해 늘 어른스럽게 굴던 民友는 어느덧 장성해 家庭을 꾸렸다. 世界的인 料理 名門인 프랑스 파리의 르코르동블루에 이어 美國 뉴욕의 CIA (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를 卒業하고 只今은 美國 맨해튼에서 一流 레스토랑의 셰프로 일한다. 김영애는 “두 番째 離婚할 때도 그 아이는 엄마만 幸福하면 된다며 내 決定을 尊重해줬다”며 “지나치게 嚴格한 아버지 밑에서 傷處를 많이 받으며 자랐는데 나 亦是 아들을 嚴하게 키워 未安하다”고 털어놨다.

    ▼ 離婚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勿論이죠. 結婚할 때는 좋아서 했지만 헤어질 때는 오죽하면 헤어졌겠어요. 같이 사는 게 많이 힘들고 憂鬱했어요. 참고 살기 싫어서 離婚했어요. 근데 헤어지고 나서 많이 밝아졌어요. 近來 몇 年 동안 이렇게 便安하고 밝았던 적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女人의 香氣가 났다. 火葬해서 풍기는 분 냄새와는 또 다른. 異性 親舊가 생겼다더니 그 德分인 듯했다.

    ▼ 새로운 만남을 始作한 相對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軟하지만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親舊랄까. 2011年 ‘로열패밀리’를 始作할 때 偶然히 알았는데 ‘해稟達’ 撮影 끝내고 膵臟癌 手術하면서 가까워졌어요. 그 親舊가 病구완을 해줘서 큰 힘이 됐거든요. 지나치게 樂天的인 性格이라 가끔 흉도 보지만 내 어리광과 투정을 다 받아줄 만큼 따뜻하고 肯定的인 사람이에요. 내가 짜증 내도 感情 起伏이 甚한 職業이라 그런 것 같다며 理解해줘요.”

    ▼ 結婚할 생각인가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便安하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지만 이제 죽을 때까지 結婚은 안 할 거예요. 男女보다는 親舊가 좋은 것 같아요.”

    ▼ 更年期 憂鬱症은 안 겪었나요.

    “잘 克服했어요. 그다지 지혜롭지도 못하고 앞으로 또 어떤 진창에 빠질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겪는 모든 일에 다 나름의 理由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每瞬間을 熱心히 살았거든요. 膵臟癌 手術 前 마스크를 쓰는데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너무나도 便安해지더라고. 참 熱心히 살았다, 김영애 수고했다 그랬지. 난 只今이 마지막이라도 원도, 限도 없어요.”

    ▼ 手術 後遺症은 없었나요.

    “手術을 9時間 동안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苦痛의 始作이었어요. 手術하고 나서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半나절 갔겠지 하고 보면 한 時間이 지났어. 地獄이 따로 없더라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아팠어요. 十二指腸부터 담도, 膽管, 膵臟 一部를 다 잘라냈거든. 물만 먹어도 고통스럽더라고요.

    手術 前에는 그나마 견뎌낼 수 있을 程度였어요. 高熱에 시달리며 膵臟炎을 앓았는데도 ‘해稟達’이 끝날 때까지 두 달을 더 찍었죠. 일을 마쳐야 한다는 責任感이 들어서. 나중엔 너무 힘드니까 黃疸이 오더라고. 病院에 갔더니 黃疸은 마지막 瞬間에 오는 거라네. 거의 末期쯤 돼서. 檢査받은 後 깨어보니 이 사람이 너무도 슬픈 얼굴로 잘 이겨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病院에서 마음의 準備를 하라는 얘기를 들은 거지.”

    ▼ 檢査 結果가 안 좋았나요.

    “手術 前날 擔當 醫師가 와서 天運이라고 했어요. 黃疸이 있어서 캐보니 癌을 發見한 거야. 膵臟癌은 이미 다 번져서 손 쓸 수 없을 地境에 알게 되는데 初期에 發見한 건 아주 드문 일이래요. 手術 後 定期的으로 檢診을 받는데 아직은 健康이 괜찮아요. 過食하던 버릇이 없어졌어요. 過食했다가 몇 番 혼났거든. 죽을 때까지 過食하면 안 된대요. 이제는 食事할 때도, 술 마실 때도 ‘스톱’하는 타이밍을 알죠.”

    아버지의 膳物

    ▼ 보톡스 施術로 주름 펴본 적 있나요.

    “適當히 조금씩은 해요. 演技에 妨害가 되지 않는 線에서. 눈가 주름이 너무 싫어요. ‘辯護人’에서 순애가 웃는 場面을 보니 그 주름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더라고. 그래도 안에 뭘 넣고 하는 건 싫어요. 於此彼 난 젊지 않아. 어떻게 잘 늙어갈지가 더 重要하기 때문에 平素 運動을 熱心히 했어요. 헬스와 필라테스, 登山 같은 運動을 6~7年間 꾸준히 했죠. 근데 手術 後 딱 2週 만에 13kg이 줄더라고요. 人間이 얼마나 懦弱한 存在인지 알았어요. 밥을 먹기까지 두 달이 걸렸는데 體重이 크게 줄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 體重이 얼마나 나갔는데요?

    “40kg쯤 됐어요. 只今은 49~50kg 程度高요. 그前에는 어떻게 하면 1kg을 뺄까 苦悶하면서도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抛棄할 수 없었어요. 運動한 目的도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였는데 手術 後에는 살이 안 쪄서 걱정이었지. 醫師 先生님도 膵臟癌 手術을 20餘 年間 했는데 手術하고 나서 살찐 사람을 한 名도 못 봤다고 했어요. 근데 내 體重은 거의 다 回復돼 前보다 3kg 程度 적게 나가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의 體重이 됐죠. 代身 기운은 없어요. 只今은 와인 한 盞이면 氣分 좋게 알딸딸하니까. 얼마 前 ‘辯護人’ 1000萬 파티에서는 300cc짜리 麥酒 2甁을 마시고 해롱거렸어요, 하하. 宏壯히 經濟的으로 됐어.”

    ▼ 예전에는 얼마나 마셨기에.

    “한때는 爆彈酒를 10盞 마셔도 멀쩡했어요. 取하지만 氣分 좋게 놀았지요. 只今은 그러면 氣絶해서 病院에 있을걸.”

    ▼ 不眠症은 없어졌나요.

    “只今도 있긴 있어요. 몸은 疲困한데 머리가 쉬어지지 않아. 每日 90分씩 運動을 하는데도 所用이 없어요. 先天的으로 銳敏해서 그런가봐요. 中學校 때 惡性貧血로 만날 쓰러지고 그랬는데 洞네 主治醫 말이, 내 神經 굵기가 다른 사람의 半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에 對한 강박증이 더 甚했던 것 같아요.”

    ▼ 아버지가 어쨌는데요?

    “우리가 밖에 나가서 길거리 菓子를 못 먹게 하셨어. 鉛筆도 空冊도 다 쓰면 檢査를 받고 通過돼야 새것을 주셨는데 한 줄이라도 落書가 있거나 건너뛰면 종아리를 맞았지. 鉛筆도 몽당해질 때까지 쓰게 하고. 高3 때는 千字文을 每日 한 字씩 외워서 一週日마다 檢査를 받았어요. 일곱 자를 못 외우면 종아리를 때렸지. 치마 校服을 입고 다니는 딸의 종아리에 줄이 쫙쫙 가게. 正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게 當身의 사랑法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얼마나 날 예뻐하셨으면 만날 公主라고 부르면서 바람 피울 때도 데리고 다녔겠어.”

    ▼ 이제 아버지를 容恕했나요.

    “只今은 고맙고 罪悚하지. 아버지 德에 新聞을 보니까. 漢字를 쓰진 못해도 막힘없이 읽어요. 容恕를 求할 사람은 난데 때를 놓쳤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0年 남짓 됐거든. 내가 工夫하기 싫어서 釜山女商에 願書를 내고 아버지에게 쫓겨나 한 달間 姨母 집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釜山呂尙이 아니라 釜山女高에 願書를 냈다고 거짓말을 했지. 어려서부터 그렇게 唐突하고 앙큼한 구석이 있었어요. 肝이 컸지.”

    戀愛보다 演技가 좋아

    어릴 적 어머니가 “朝鮮八道에 어쩌다 저렇게 앙칼진 게 나왔느냐”고 했던 말을 떠올리던 그는 “內在된 唐突함이 내가 演技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그 나름의 分析을 내놨다.

    “根性 없이는 演技하기 힘들어요. 난 큰일을 만나면 더 大汎하고 沈着해져요. 작은 일에는 오히려 안달하고 怯도 많아요. 무서워서 運轉도 못하잖아.”

    ▼ 大汎하니 事業에 挑戰했겠죠.

    “그 일이 適性에 맞지는 않았어요. 날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래도 後悔는 안 해요. 그런 經驗이 내게 없던 배짱을 키워줬거든.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져보고. 俳優로서 그런 삶도 해볼만한 經驗이었던 것 같아요. 前男便과는 同業者로만 지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처음에는 너무 미워서 좋았던 時節이 생각 안 났는데 5~6年 지나니까 새록새록 떠올라요.”

    “연기는 내 유일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
    ▼ 俳優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있을까요.

    “想像이 안 가. 그러면 詩集을 한 다섯 番은 가지 않았을까, 하하. 난 좋은 엄마도 못 되고 좋은 와이프도 못 돼. 좋은 愛人은 될 수 있는 것 같아.”

    ▼ 戀愛와 演技 中 하나만 고르라면.

    “그야 延期죠. 只今도 戀愛 中이지만 戀愛보다 演技가 좋아요. 演技는 내 숨구멍이니까. 난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傷處를 演技로 풀어내는 것 같아요. 演技할 때의 喜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程度예요. 그 맛에 演技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俳優 人生을 빛내준, 잊지 못할 作品은?

    “내 生涯 첫 主演을 맡은 ‘閔妃’라는 드라마가 먼저 떠올라요. 1973年 1年 가까이 放映했는데 대단한 人氣를 끌었죠. 김영애를 俳優로 만들어준 MBC 週末劇 ‘夜想曲’도 잊을 수 없죠. 김수현 先生님의 作品인데 그걸로 백상藝術大賞度 받고, 稱讚도 많이 들었어요. 도회적인 이미지를 벗고 韓國의 어머니像을 延期한 드라마 ‘兄弟의 江’과 ‘파도’, 企業 總帥로 出演한 ‘로열패밀리’는 演技 幅을 넓혀준 고마운 作品이에요. 憂鬱症을 낫게 한 ‘黃眞伊’, 映畫의 맛을 알게 해준 ‘辯護人’도 平生 記憶에 남을 作品이지요.”

    ▼ 或是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只今껏 計劃을 세워놓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家族과 4週 동안 이탈리아 旅行을 한 적이 있는데 배를 타고 한 時間 半 동안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나 自身을 위해 살아본 적이 있던가, 허겁지겁 山을 오르면서 달음박질만 쳤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살았나 하고. 어른이 되고 보니 40年이란 歲月을 빨리 지나왔더라고요. 그래서 두 番째 結婚生活을 마감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앞으로 10年을 더 살지, 20年을 더 살지 모르는데 이제 날 위해 살자, 나 自身을 幸福하게 하려는 努力을 아끼지 말자고.”

    旅行과 우물의 꿈

    “연기는 내 유일한 숨구멍 카메라만 보면 쌩쌩해져요”

    KBS 드라마 ‘黃眞伊’.

    ▼ 아직 살날이 많지 않을까요. 100歲 時代인데.

    “오래 살고 싶은 欲心은 없어요. 다만 나이 먹는 게 좀 무서워. 내 四肢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까봐. 내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만 살면 좋겠어요. 그것 亦是 欲心이지, 알아요. 그러기 위해 내가 努力할 거예요. 只今도 努力하고 있고. 이러다 뜻하지 않은 狀況에 處하더라도 人工的으로 壽命을 延長하는 일은 絶對 없을 거야. 애들한테도 말해뒀어요. 酸素 呼吸器를 달거나 人工的으로 飮食을 넣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죽기 前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뭔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旅行을 꼽았다. “旅行을 좋아하는데 너무 바삐 사느라 가본 데가 別로 없다”는 理由였다.

    “볼거리가 많은 터키와 스페인도 가보고 싶고, 車를 타고 한 달 程度 計劃 없이 國內를 마구 돌아다니는 自由旅行도 해보고 싶어요.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는 그런 旅行이요. 두 달은 外國에 나가 한군데다 旅裝을 풀고 그 周邊을 悠悠自適하며 돌아보고 싶어요. 1年에 두 달 程度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아이들하고 外國에 나가보니까 旅行도 기운 있을 때 다녀야겠더라고요. 旅行하면서 살이 찐 줄 알았더니 부은 거였어요. 밤에 다리가 쑤셔서 잠을 통 못 잤어요. 熱心히 돈 벌어서 물 不足에 시달리는 世界 곳곳에 우물도 파주고 싶어요. 우물 100個 파는 게 目標죠.”

    이제 삶이 許諾하는 時間을 穩全히 自身을 위해 쓰고 싶다는 그의 꿈은 아직 現實의 壁에 갇혀 있다. 그를 찾는 映畫와 드라마가 많아 餘裕를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辯護人’李 1000萬 觀客을 突破한 後 劇場을 돌며 舞臺 人事를 다니던 그는 얼마 前부터 명필름에서 製作하는 映畫 ‘카트’를 찍고 있다. 3月부터는 MBC 새 週末드라마 撮影에 들어간다.

    이랜드 킴스클럽의 不當解雇 事件을 素材로 한 ‘카트’에서 그가 맡은 配役은 大型마트 勞組가 示威하는 現場에 빠지지 않고 登場하는 淸掃夫 할머니. 그는 “데모해서 길이 막힐 때마다 안 좋게 생각했는데 映畫 臺本을 보니 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理解가 됐다. 觀客이 나처럼 생각해주면 ‘辯護人’이 그랬듯 이 映畫도 成功할 것”이라며 웃었다.

    ▼ 몸도 생각해야지, 이렇게 繼續 달려도 괜찮은 건가요.

    “‘카트’에서는 大使도 적고 움직임이 크지 않아 걱정할 일이 別로 없어요. 드라마 撮影도 一週日에 사흘만 하면 될 것 같고. 난 正말 運이 좋은 사람이에요. 60歲가 넘으면 黃金期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날 認定하고 써주는 사람이 繼續 있잖아요. 좋은 作品에서 큰 部分을 擔當하는 것도 意味 있지만 작은 部分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感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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