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율 前 참여연대 共同執行委員長 “靑瓦臺 사람들은 모럴이 없다, 執權386 다 退場해야”|신동아

허문명이 만난 사람

김경율 前 참여연대 共同執行委員長 “靑瓦臺 사람들은 모럴이 없다, 執權386 다 退場해야”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19-11-23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참여연대가 權力集團으로 變質됐다

    • 進步라는 正體性 自體가 흔들리는 龜裂

    • 참여연대가 犯法者 家族까지 걱정하나

    • 權力型 非理 아니라는 건 억지

    • 鄭慶心 WFM 詐欺 投資 모르고 할 수 없다

    • 曺國 公職者倫理法 違反했다

    • 曺國 事態 荒唐 主張 代表的인 게 柳時敏



    ‘曺國 事態’가 輿論을 光化門과 서초동으로 갈랐지만 各 陣營 內部에는 各各의 龜裂이 있다. 갈라진 保守右派 陣營은 光化門에서 합쳐진 듯 보이지만 自由韓國黨에는 마음을 주고 있지 못하다. 

    더 큰 關心事는 左派 陣營 內 龜裂이다. 노무현 政府 時節 分列 ‘트라우마’를 가진 親盧·親文이 最大株主가 되면서 執權 與黨 내 分裂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共感帶가 컸다. 單一隊伍는 굳건해 보였다. 間或 다른 목소리가 불거져 나와도 今方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曺國’이라는 面刀날로 갈라졌다. 

    昨今의 左派 陣營 내 分裂이 深刻해 보이는 것은 目的 達成을 위한 方法論的 立場 差異가 아니라 ‘正義냐 公正이냐’ ‘良心이냐 거짓이냐’는 進步의 正體性을 둘러싼 龜裂이라는 點에서다.

    左派 陣營 內 龜裂의 中心

    김경율 前 참여연대 共同執行委員長 兼 經濟金融센터腸(會計士)은 이 龜裂의 中心에 서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三星 狙擊手’로 財閥改革에 앞장섰던, 참여연대의 얼굴이나 다름없었던 그는 ‘曺國 事態’ 동안 內部 批判을 하다가 結局 참여연대를 떠났다. 



    그와 인터뷰 約束을 하고 나서 ‘얼마나 외롭고 虛脫하고 마음苦生이 甚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實際 만나보니 淡淡하고 차분해 보였다. “온갖 생각에 잠을 잘 못 잔다”고 했지만 表情은 어둡지 않았다. 그가 쓰는 페이스북에서는 가끔 火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辱說이 登場하기도 하지만 인터뷰 내내 憤怒나 攻擊의 言語보다는 內面을 向한 省察의 言語가 많았다. 

    - 요즘 하루 日常은 어떤가. 

    “別로 다르지 않다. 財閥改革과 關聯해 隨時로 튀어나오는 뉴스들을 分析하고 硏究한다. 다만 옛날 같으면 參與連帶 經濟金融센터 팀員들과 함께 했을 텐데 只今은 두세 名 나와 뜻이 맞는 問題意識을 가진 사람들과 따로 텔레그램 房에서 하고 있다. 曺國 前 長官 펀드 關聯 팔로業도 繼續하고 있다.” 

    그는 연세대 哲學과 88學番이라고 했다. 代表的 86世代라 할 만한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 어떻게 參與連帶와 緣(緣)을 맺었나. 

    “大學에서 社會科學 서클 活動을 했다. 卒業 代身 勞動運動의 길을 擇했다. 4學年 때 城南 勞動 現場으로 가서 일했다. 1年 뒤 蘇聯이 亡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現場에 있던 학출(大學生 出身)들이 一齊히 빠져나가면서 各自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섰다. 나 亦是 마찬가지였다. 大學 卒業狀도 없고 이렇다 할 資格證도 없으니 漠漠했다. 學院 講師를 하다 1995年 復學해 卒業했고, 1998年 會計士 試驗에 合格했다. 곧장 내 발로 참여연대를 찾아가 ‘일하고 싶다’고 했다. 少額株主 運動이 막 始作될 때였다.” 

    - 그때 參與連帶 雰圍氣는 어땠나. 

    “장하성·金起式 氏를 中心으로 서울 안국동 鍾路警察署 앞에 社屋을 얻어 막 活動을 始作할 때였다. 이슈를 繼續 만들면서 言論의 注目도 많이 받았다. 나는 常勤者는 아니었다. 敎授 辯護士 會計士들이 中心이 된 專門 諮問役으로 어떤 이슈가 터지면 財務的 問題 提起와 分析에서부터 資料 提供까지 非常勤 自願奉仕者로 일했다. 株主總會場에도 많이 다녔다. 그러다 2007年인가, 2008年에 金尙祚 現 靑瓦臺 政策室長이 이끌던 經濟改革連帶가 分離·獨立해 나가면서 人力의 80%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참여연대가 打擊을 많이 입었다.” 

    - 金 政策室長이 獨立한 理由는? 

    “元來 參與連帶 設立 때부터 經濟改革連帶는 分離·獨立 運營한다는 게 趣旨였다. 생각의 差異도 있었다. 張夏成, 金尙祚 氏가 株主 資本主義 見解에서 財閥 改革을 이야기했다면 參與連帶는 株主뿐 아니라 勞動者까지 생각하는 이른바 ‘利害關係者 資本主義’ 見解로 事案을 넓게 봤다. 나는 金起式 先輩가 ‘너는 남아’ 한마디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20名 中 16名이 나가버려 相當히 애를 먹었다. 그러다 론스타 ‘먹튀’ 論難, 雙龍車 會計粉飾, 제일모직 三星物産 合倂, 三星바이오 件으로 存在感을 되찾았고 다시 똘똘 뭉쳐 일했다.”

    허술할 대로 허술했던 積弊淸算

    - 이 政權이 出帆하면서 期待感이 컸을 텐데. 

    “4年 前 參與連帶 執行委員長이 될 때 ‘民主 勢力이 國會 多數가 되고 政權을 잡는다는 것을 公約으로 삼겠다. 公約에 失敗하면 連任하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럴 可能性이 全혀 없었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繼續 일하겠다’는 意味였다. 

    그런데 彈劾 事態가 왔고 進步 陣營 執權 可能性이 커지면서 市民團體가 權力 監視 機能뿐 아니라 積極的으로 權力을 創出하는 일에 一助하는 게 必要하다는 말들이 나오기 始作했다. 마침내 政權交替에 成功했을 때 文在寅 政府의 改革政策을 樹立하고 實行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 暗默的 同意도 當然히 있었다. 나도 勿論 그런 생각들의 延長線上에 있었고. 

    文在寅 政府가 出帆했을 때 집사람에게 ‘이제 우리 같은 市民團體가 할 수 있는 監視와 牽制라는 게 뭐가 있을까’ 弄談처럼 한 말이 기억난다. 돌이켜보면 放心日 수도 있는데 그때는 참여연대가 할 일이 正말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程度로 새 政府에 對한 期待가 컸다. 하지만 그런 期待가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이番 曺國 事態로 期待가 깨진 게 아니라 그前부터 失望했다는 말로 들린다. 具體的인 經驗이 있었나. 

    “알다시피 이番 政府가 들어서면서 部處別로 積弊淸算태스크포스(TF)팀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나는 産業資源部 敎育部 中小벤처企業部 3군데를 뛰었다. 내가 積極的으로 나선 게 아니라 提案이 왔다. 

    主로 活動한 産資部의 境遇 部處와 靑瓦臺에서 同時 提案이 왔다. 내가 워낙 資源外交 問題에 時間을 많이 投入해 그 나름대로 專門家라는 評判이 있었고 나도 自信感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新聞에 난 TF 名單에 내 이름이 없었다. 荒唐했다. 이름이 빠져서가 아니라 委員 12名 中 問題意識이나 專門性을 가진 사람은 單 두 名에 不過했다. 雪上加霜으로 大多數가 資源外交와 利害關係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壓倒的 支持로 出帆한 政府가 이래도 되나”

    하도 火가 나서 페이스북에 ‘性犯罪者 조두순한테 性犯罪 根絶 委員을 맡긴 것과 뭐가 다르냐’고 썼다. 靑瓦臺에서 다시 電話가 왔다. ‘왜 이름이 빠졌느냐’는 거였다.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나는 서운한 거 없고 내 생각은 페북에 다 썼으니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나를 뺀 사람이 민주당 某 議員인데 다시 넣으라고 했으니 다시 들어갈 것이라는 答이 왔다. 産資部에서도 電話가 왔다. 깜빡 失手로 까먹었다는 거였다. 어떻든 내가 뒤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가스公社 石油公社 鑛物資源工事 세 곳에 各各 4名씩 12名이던 委員이 13名이 됐다.” 

    - 이 政府가 거의 올인하다시피 한 積弊淸算TF가 그렇게 허술하게 構成됐다는 게 잘 理解되지 않는다. 

    “막상 活動을 始作하니 더 可觀이었다. 내게는 ‘가스公社가 第一 크니 거기 넣겠다’고 했다. 事實 가스公社가 第一 問題가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더 웃겼던 건 活動을 始作하지도 않았는데 現場 踏査次 마다가스카르에 1週日 다녀오자는 거였다. 오고 가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리는 그 먼 곳에 가서 기껏 한다는 일도 大使 晩餐 等 別 意味가 없어 보였다. 나는 안 간다고 했다. 꼭 가야 한다면 活動이 끝난 後 가는 게 맞지, 일도 하기 前에 海外부터 가느냐 따졌다. 初場부터 내가 이렇게 나오니 要注意 人物이 됐다. 産資部는 내가 指摘하는 件件마다 反駁 資料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局長級 幹部가 아예 會議 前에 따로 만나자고 했다. 내가 만남을 拒絶하면 ‘便한 動線 어디든 말해주면 맞추겠다’며 執拗하게 붙었다.” 

    - 그렇게 해서 만나면 무슨 對話를 나눴나. 

    “다음 會議에 다룰 案件이라며 미리 說明하면서 諒解를 求한다는 거였다. 例를 들어 ‘멕시코 볼레誤 鑛山’ 이야기를 할 건데 이런 點은 이러하니 내가 理解해줘야 한다는 式이었다. 以前 政府에서도 이런 式으로 公務員들이 일했겠구나 하는 생각에 改革이란 것이 참으로 힘든 作業이겠구나 하는 것을 切感했다. 어떻든 그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듣되, 내 생각을 바꾼 적은 한 番도 없다.” 

    그는 그러다 漸漸 會議에서 왕따가 되기 始作됐다고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내가 뭘 指摘하면 反應 없이 進度를 쭉 뺐다(웃음). 그러다 쉬는 時間이 되면 自己들끼리 모여 속닥거리기 始作했다. 지나가다 언뜻 들리는 말들이 ‘資源外交는 꼭 해야 한다’ ‘김경율은 너무 現實을 모른다’는 거였다. 官僚와 利害關係者들이 모여서 나를 왕따시키겠다는 雰圍氣가 歷歷했다. 及其也 내게 會議가 열리는 것조차 알리지 않았다. 이른바 물을 먹이는 戰略이었다. 會議 始作 初中盤까지만 해도 說得 모드였는데 아예 버리고 가자고 決定한 거였다. 마지막 報告書는 얼마나 또 그럴듯하게 包裝돼 나왔는지 內容은 하나도 없는데 대단한 成果를 이룬 것처럼 펴냈다. 하긴 官僚라는 사람들이 보고서 내는 건 鬼神 아닌가. 敎育部나 中企不渡 遲遲不進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政府 出帆 後 6個月餘가 지나면서부터 文在寅 政府에 對한 期待感이 많이 깨진 狀態였다”고 했다. 

    “올 初 參與連帶가 文在寅 政府 2周年을 맞아 積弊淸算 이슈 리포트를 세 卷으로 發行했다. 열 몇 個 部分으로 나눠보았는데 모두 落第點이었다. 내가 介入했던 部處뿐 아니라 모든 部處가 다 그랬다. 市民團體에 몸담고 있는 專門家들은 다 알고 있는 事實이다. 더구나 나는 經濟金融센터所長으로서 財閥改革이나 經濟民主化에서 進陟이 全혀 없으니까 國民의 壓倒的 支持를 받고 出帆한 政府가 이래도 되나 하는 自愧感이 컸다.”

    熊東學院은 어땠나? “正말 險했다”

    9월 2일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사모펀드에 관한 질문에 자료를 보여주며 답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9月 2日 曺國 當時 法務部 長官 候補者가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記者懇談會에서 私募펀드에 關한 質問에 資料를 보여주며 答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記者]

    - 積弊淸算 컨트롤타워가 曺國 前 長官 아니었나. 

    “맞다. 그에 對한 失望感은 이番 事態 前부터 이미 市民團體 안에서도 澎湃했다. 조 前 長官이 民政首席 就任 1年 程度 됐을 때인가, 自身이 積弊淸算 總括 責任者로서 成果를 내겠다고 公式的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評價해보니 너무 형편없었다. 權力의 核心으로 責任이 莫重한데 寒心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 참여연대 常任執行委員會에서도 ‘형편없다. 失望이다’ 이런 評價가 많았다. 이런 狀況에서 法務長官으로 指名됐다.” 

    - 그러다 私募펀드니, 熊東學院 問題가 터져 나왔는데. 

    “그때만 해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뉴스만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平素 알고 지내던 記者가 (鄭慶心 氏가 借名去來 疑惑을 받고 있는) WFM을 좀 들여다봐달라 해서 2017年 삼일회계법인이 낸 WFM 監査報告書를 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强調事項’ 項目에 普通 監査報告書라면 到底히 들어갈 수 없는 內容이 있었다. (携帶電話 寫眞을 보여주며) 다 公開된 資料이니 누구라도 볼 수 있다.” 

    - 內容이 뭔가. 

    “2016年, 2015年 財務諸表 모두 엉망이다, 最大株主 變更, 代表理事 變更 等은 말할 것도 없고 會社를 引受했다가 곧바로 處分하고 新規事業을 推進했다가 또 곧바로 處分하고 機械裝置를 사겠다고 20億 원 내주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또 回收하고…. 一般 會社라면 있을 수 없는 거고 質이 매우 안 좋은 境遇다. 監査報告書에 會社에 對한 나쁜 評價를 그대로 摘示하는 境遇가 別로 없는데 얼마나 問題가 많으면 一一이 적어놓았겠나. 사람에 比較하면 ‘이 사람을 調査해보니 性犯罪 前科가 있고 竊盜 嫌疑가 있으며 집 周邊에서는 盜難事故가 많이 났다’는 것을 摘示해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 記者에게 그대로 말해줬나. 

    “조 前 長官이 參與連帶 前職 任員(司法監視센터所長)이니 오프 더 레코드를 前提로 ‘辭退가 맞다고 본다’는 意見을 냈다. 事實 코스닥에는 WFM처럼 장난치는 詐欺꾼이 너무 많다. 鄭慶心 敎授가 이런 걸 모르고 投資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作戰하는 사람들과 親하지 않고는 不可能한 投資다. 코링크는 흔하디흔한 作戰 勢力으로 判斷됐다. 當然히 조 前 長官 指名은 不適切해 보인다는 게 結論이었다.” 

    - 熊東學院은 어땠나. 

    “正말 險했다.” 

    - 무슨 말인가. 

    “긴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조 前 長官에게 責任을 물을 수 없는 것은 오로지 公訴時效 滿了 때문이라고 본다. 學校法人이나 公益法人은 國稅廳 公示 事項이라 누구나 다 들여다볼 수 있다. 흔히 負債가 많은 걸로 알고 있지만 書類上으로 負債가 全혀 없다. 모두 동생을 위한 거짓 債務, 만들어진 債務라고 생각한다. 荒唐할 뿐이다.” 

    - 참여연대 內部에서 그런 部分에 關해 討論하지 않았나. 

    “當然히 問題 提起를 했다. ‘過去에 이런 疑惑들이 나오면 100% 辭退하지 않았느냐, 조 前 長官도 例外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처음엔 내 말에 首肯하는 듯하더니 어느 時點부터 엉뚱한 反應이 나오기 始作했다. ‘그게 무슨 罪가 되냐’는 反應에서부터 甚至於 ‘熊東學院은 子息에게만 債務를 남긴 거니 美談으로 紹介될 만하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公開된 資料를 건성으로 봐도 앞뒤가 안 맞는데 疑惑을 美談으로까지 바꿔 말하니 나중에는 熱이 치받아 올랐다. 하기야 펀드도 ‘블라인드 펀드’라는 新槪念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그가 혼잣말처럼 말하더니 목이 마른지 컵에 담긴 물을 單숨에 들이켰다.

    民政首席 일인데 權力型 非理가 아니라고?

    “周邊 反應이 너무 어이없기도 하고 豫想外여서 내가 뭘 잘못 봤나 하는 생각에 아예 作定하고 밤을 새워가며 펀드를 들여다봤다. 法人登記簿謄本, 電子公示시스템(金監院)은 勿論 有料 企業信用情報까지 사서 다 뒤졌다. 4泊5日 밤새워서 資金 흐름을 엑셀 파일로 만들었더니 흐름이 너무 不透明하다는 게 드러났다. 돈이 恒常 中間에 사라졌다. 이런 根據 資料를 내세우며 참여연대 內部에서 問題 提起를 했다. 그랬더니 亦是 또 ‘그게 뭐 어쨌다고?’ 하는 反應이었다. 

    그나마 물러선 反應들이 ‘設使 그렇다 해도 그게 權力이 介入한 權力型 犯罪냐? 돈이 조 前 長官한테 갔다는 證據가 있냐. 참여연대는 權力型 非理, 財閥 關聯 事案에만 介入한다. 神經 쓸 必要 없다’는 거였다. 내가 아무리 ‘非正常的 去來로 보여 疑心을 가져야 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았다. 언뜻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民情首席이 關聯돼 있는데 權力型 犯罪 아니면 뭐란 말인가. 過去 같으면 無條件 首肯했을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反應을 보이는 걸까. 더구나 나 같은 會計 專門家가 指摘하는데 말이다. 한마디로 醫師가 ‘病이 있다’고 하는데 ‘몸속에 들어가 봤느냐, 癌도 아닌데 무슨 相關이냐’ 이런 式 아닌가. 내가 異常한 게 아니라 그들이 異常한 거였다.” 

    - 檢察 公訴狀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搜査의 眞情性이 느껴졌다. 내가 把握한 犯罪的인 手段이 다 드러나 있었다. 조 前 長官 집 押收搜索 過程에서도 禮遇를 갖췄다고 본다. 11時間이라고 하지만 辯護士 세 名이 立會했고 問題 提起도 다 받아들여졌다. 나는 以前부터 私募펀드를 利用한 證券 LBO(借入買收), 株價造作 等을 嚴斷할 必要가 있다고 主張해왔다. 그 側面에서 보면 檢察이 搜査 잘한 거다. 鄭 敎授 錄取錄度 나오지 않았나. WFM 株式 買入에 使用되는 걸 알았다는 게 다 드러났다. 이건 조 前 長官이 公職者倫理法을 어긴 거다. 名의 如何에 關聯 없이 배우자 것도 申告해야 하는데 안 하지 않았나.”

    “曺國이 시원하게 말아 드셨다”

    2006년 4월 6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참여연대 강당에서 김상조 당시 한성대 교수가 ‘38개 재벌 총수일가의 주식거래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병기 동아일보 기자]

    2006年 4月 6日 서울 鍾路區 안국동 참여연대 講堂에서 金尙祚 當時 漢城大 敎授가 ‘38個 財閥 總帥一家의 株式去來에 對한 記者會見’을 하고 있다. [강병기 동아일보 記者]

    그는 이 대목에서 “事實 참여연대 內部가 좀 異常하다고 느낀 건 이番이 두 番째였다”고 했다. 

    - 첫 番째는 뭔가. 

    “유선주 前 公正去來委員會 審判管理官(局長級)李 金尙祚 委員長의 ‘違法行爲 隱蔽 指示’ 疑惑을 提起했을 때였다. 經濟金融센터가 보기에 問題가 있으니 質疑書를 作成해 보내자고 했다. 平素 같으면 곧바로 實行됐을 텐데 執行部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質疑書가 나가면 이른바 保守 言論과 自由韓國黨만 좋은 일 시킨다는 거였다. 荒唐했다. 내가 繼續 主張하니까 ‘聲明書 表現이 過하다, 斷定的’이라며 自求 하나하나를 問題 삼았다. 너무 火가 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程度였다. 結局 完全히 톤다운된 狀態에서 質疑書가 나갔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前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權力과 財閥 監視를 잘 遂行해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없었다.”(신동아 2018年 12月號 유선주 局長 인터뷰 參照) 

    - 왜 그랬다고 보나. 

    “委員長이 金尙祚여서일 수 있다 생각했다.” 

    - 이 대목에서 묻고 싶다. 金尙祚는 어떤 사람인가. 

    “正말 尊敬했던 분이다. 그런데 5年 前부터 完全히 色彩를 달리했다. 내 主觀的 느낌이 아니라 公的인 칼럼이나 發言을 보면 親(親)財閥 性向이 剛해졌다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다. 代表的인 게 2015年 3月 三星SDS 上場으로 三星 總帥 一家와 專門經營人이 얻은 數兆 원臺 不當利得을 還收하기 위한 ‘李鶴洙 特別法’을 反對하지 않았나. 以後 三星 사람들을 여차저차 만나게 된 적이 있는데 金 敎授 칼럼이 실린 파일을 보여주면서 나더러 ‘김상조 敎授님도 이렇게 생각하신다. 事故를 柔軟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을 程度였다.” 

    - 왜 그가 變했을까. 

    “理由는 모르겠고. 5年 前쯤부터 參與連帶와도 날을 세웠다. 2年 동안 公正委員長으로서, 政策室長으로서의 成果? 財閥改革에 關한 限 可視的인 成果는 全혀 없다고 본다. 오히려 親企業 親財閥 行步를 露骨化했다.” 

    - 다시 祖國 事態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9月 29日 페이스북에 “文在寅 政府 出帆 2年 半 동안 조국은 民政首席 자리에서 시원하게 말아 드셨다”면서 조 前 長官을 擁護하는 勢力에 對해 “僞善者” “지저분한 X들” “嘔逆질 난다”는 直說을 쏟아냈다. 그러고는 바로 이튿날 懲戒위에 回附됐는데.

    “犯法者 家族까지 걱정하나”

    “내가 ‘曺國 펀드’ 問題點을 指摘하는 論評을 내자고 했을 때 센터 10名 中 6~7名이 同意했는데 두 분이 極烈 反對해 意見一致를 보지 못했다. 言論에도 報道가 됐지만 이분들 論理가 ‘그럴 거면 (尹錫悅) 檢察總長 私生活 問題라든지, 某 檢事의 妻가 問題라든지 그런 것도 같이 論評에 넣을 때만 나갈 수 있다’고 했다. 

    執行委에서도 처음엔 ‘辭退가 맞다’가 7, ‘아니다’가 3 程度였다. 그러다 이틀 뒤 雰圍氣가 完全히 바뀌었다. ‘反對 論評 나가면 參與連帶 亂離 난다. 會員 다 빠져나간다’는 거였다. 正말 前後 脈絡이 없는 反對들이었다.” 

    - 왜 갑자기 雰圍氣가 바뀌었을까, 

    “문득 든 생각이 이 사람들 靑瓦臺에서 電話받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조 前 長官이 일했던 司法監視센터度 오락가락 行步를 보였다. 맨 처음 論評(8月 22日)에선 ‘疑惑에 對해 誠實히 疏明하라’고 하더니 며칠 뒤엔 檢察 非難 論評을 냈다. 이렇게 態度가 바뀌면 國民들이 어떻게 보겠느냐 말하니 ‘앞으로는 執行위를 거치겠다’ ‘聽聞會를 보고 論評을 내자’는 式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는 過程에서 司法監視센터 한 關係者로부터 ‘平生 檢察改革에 목을 매왔는데 當身 行動에 火가 많이 난다’는 文字를 받았다. 火가 난 사람은 누군데…. 正말 荒唐했다. 來年 2月까지인 執行委員長職을 그만둬야겠다고 決心한 契機였다.“ 

    - 그랬더니? 

    “‘會議는 안 나와도 좋으나 텔레그램 房에는 들어와라, 萬若 조 前 長官이 起訴되면 罷免하라는 論評을 내자’고 했다. 一旦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느 날 辯護士 한 분이 ‘텔房’에 檢察改革 에세이 비슷한 글을 쓴 뒤 마지막에 ‘祖國과 祖國 家族에게 未安하다’는 말을 쓴 거다. 머리가 확 돌아버릴 程度로 不快했다. 내가 ‘이제 參與連帶가 犯法者 家族까지 걱정해줘야 하느냐’고 댓글을 달자 辯護士 曰 ‘犯法者 아니다. 起訴도 안 됐다’고 했다. 나는 ‘經濟金融센터는 財閥 問題에 關한 限 合理的 疑心이 있으면 곧바로 論評을 내왔다. 여태 三星을 問題 삼을 때 起訴된 것 가지고 했냐. 제일모직, 三星바이오로직스度 작은 疑惑에서 始作한 거다. 참여연대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權力 監視, 財閥 監視라는 本然의 業務를 잊어버렸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나도 부끄럽다’고 答했다. 以後 바로 會員 脫退했고 日曜日이던 9月 29日 새벽, 페북에 ‘曺國 長官이 말아 드셨다’는 글을 올린 거다.”

    “참여연대가 權力集團으로 變質됐다”

    - 自己가 책임지던 組織을 向해 公開的인 批判의 날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이른바 政務的 判斷이란 것도 있고 말이다. 하루이틀 참여연대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안에 있다 보면 內部 사람들의 생각도 充分히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政務的 判斷? 나 亦是 尊重한다. 하지만 그걸 내세울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거다. 최순실 國政壟斷 때 保守言論과 自由韓國當 相當數도 彈劾에 贊成했다. 나 亦是 集團 利益을 먼저 생각하고 그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曺國 事態가 그런 事案인가. 이건 判斷의 問題가 아니라 眞實을 덮을 것이냐, 事實에 눈감을 것이냐 하는 問題다. 여기에 어떻게 政務的 判斷이란 게 있을 수 있나. 뻔히 眞實이 드러났는데 거짓을 말한다면 그건 隱蔽다. 曺國 事態 때 荒唐한 主張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代表的으로 유시민 前 長官이 第一 먼저 떠오른다. 自己가 公開한 鄭慶心 錄取錄이 내 主張을 ‘빽業’하는 거였는데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서 正말 어이가 없었다.” 

    - 參與連帶를 비롯한 左派 陣營 內部가 왜 그런 非良心的 行動과 判斷을 한다고 보나. 

    “權力과 自己를 同一化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政府 初期에 支持者들의 反應을 보며 걱정한 적이 있다. 어느 포털에서 ‘朴槿惠 政權 時節 19代 國會 때 민주당이 勞動改革 다 이뤄냈다’는 글을 읽었을 때였다. 支持者들에 둘러싸여 自身들이 만든 世上만 보면 이렇게 모든 걸 自己式대로만 解釋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式이면 좀 誇張해서 말하면 김일성이 나뭇잎 타고 鴨綠江 건넜다는 말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돌이켜 보면 結局 理念도 아니었고 權力 싸움이었다. 마침내 權力을 갖게 되자 그걸 自己 것으로 一體化한 거다.”

    “只今 靑瓦臺 사람들은 모럴이 없다”

    - 조혜경 참여연대 經濟金融센터 實行委員度 10月 30日 指導部 總 辭退를 要求하며 참여연대를 떠났다. 國民들이 이제는 참여연대를 監視해야 하는 狀況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改革해야 하나. 

    “참여연대가 經實聯과 더불어 ‘運動’의 새 地平을 연 것은 分明하다. 只今은 權力의 한 軸 或은 補助軸이 돼버린 모습이다. 本然의 任務인 ‘權力 監視’機能을 잃어버렸다. 나나 조혜경 博士님이나, 希望的인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뛰쳐나오지 않았겠나. 曺國 事態의 顚末이 드러나고 있는 只今조차 ‘反省’이 없다는 건 期待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나와 조 博士를 向해 事務處長이 ‘異見’이라고 하는데 異見이란 건 事實을 共有한 以後에 發生하는 ‘解析’의 問題이지 事實에 등 돌리는 게 어떻게 見解 差異인가. 眞實 隱蔽地.” 

    그는 ‘罪悚한 表現이지만’ ‘제가 絶對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란 말을 反復的으로 썼다. 담백하고 깔끔하면서도 謙遜한 性格이란 생각이 들게 했다. 

    - 얼굴이나 表情이 밝아 보이고 車分解 意外다. 

    “元來 나는 혼자 싸웠다. 쌍용차도 혼자 始作한 거고. 現代建設, 제일모직, 三바…. 처음부터 혼자였다. 하지만 힘들다. 拷問을 甚하게 받다 보면 물방울만 봐도 아프다고 하지 않나. 댓글 보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해온 말에 責任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參與連帶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과 意見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큰 意志가 된다.” 

    - 政治 같은 것을 해볼 생각은? 

    “全혀 없다. 政治權이란 게 혼자 어떻게 한다고 움직이는 곳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너무 悲慘하게 變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永遠하지 않은 權力 앞에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모습도 짠해 보이고. 議員 배지 달고 있는 동안에는 너무 좋아서 化粧室 가서도 웃는다고 하던데(웃음) 배지 떨어지면 너무 悲慘하다. 나 같은 사람은 自殺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내 밥벌이를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多幸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 나름대로 똑똑하고 正義感도 있었던 사람들이 市民團體에서 일하다 政黨으로, 서울市로, 財閥 企業으로 옮기면서 市民團體를 非難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다 ‘밥벌이’의 問題라는 생각은 들지만 市民團體라면 市民團體의 本業이란 게 있지 않나. 어쩌다 政黨 內에서 다른 목소리가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있는지, 靑瓦臺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곳인지, 市民團體는 왜 이렇게 됐는지, 只今은 모두 불타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反省은커녕 뭐라도 利益 거리를 찾아내려는 모습이 보인다. 正말 絶望的이라는 생각이 든다.” 

    - 왜 이렇게들 뻔뻔해졌을까. 

    “나 亦是 그런 批判에서 絶對 자유로운 世代가 아닌데. 무엇이 저들을 저런 怪物로 만들었는지 理解는 간다.” 

    - 어떤 側面에서? 

    “1970年代 末 남민전이 資金 調達한다며 財閥 會長 집 담을 넘지 않았나. 或如 目的만 옳다면 手段 方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런 생각을 只今까지 갖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80年代 運動圈들은 住民登錄證도 僞造했다. 밖에 나가 데모한다는 理由로 커닝이나 代理出席에도 罪意識이 없었다. 只今도 그런 생각들을 깨지 않고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只今 靑瓦臺 사람들을 보면 道德的 法的 防備 面에서 너무 無防備 狀態다. 한마디로 모럴이 없다. 出帆 初期 노무현 政府와 달리 壓倒的 支持를 받았는데 議會 多數黨, 地自體 싹쓸이했으면 더 남달랐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더 改革的인 成果를 보여야 하는데 結果는 全혀 없다. 오히려 壓倒的 支持를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無條件 선(善)이구나, 世上 사람들이 다 받아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權力化된 86世代 退場해야”

    그가 덧붙여 말했다. 

    “蘇聯이 亡했을 때 깊이 苦悶했다. 왜 그런 훌륭한 以上을 가진 나라가 民衆의 敵이 됐을까. 어떻게 보면 權力의 屬性이란 게 元來 그런 건데 그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異常한 거 아닌가. 只今 支持率이 半 토막 났고 向後 趨勢도 危險한데 잘못에 對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다. 교만하다고 해야 하나, 不足하다고 해야 하나. 指彈받아 마땅하다. 

    페북에서 ‘反省하자’ ‘되돌아보자’는 發言은 曺國에 批判的인 사람들이다. 擁護者들 사이에선 全혀 나오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來日이면 또 새로운 太陽이 뜰 텐데 무슨 反省이냐 이런 式이다. 이건 弱者, 짓눌린 者들의 言語가 아니다. 아무 罪意識 없이 어떻게 새로운 얼굴, 새로운 發言을 할 수가 있나. 어떤 面에서는 ‘曺國 事態’가 逆說的으로 進步 陣營에 千載一遇의 機會를 줬다. 壞滅的인 打擊을 입으면서 變化를 가져올 機會 말이다. 내가 第一 좋아하는 말이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70年을 산다고 할 때 69年을 제대로 살았더라도 1年을 허투루 살면 말짱 도루묵이다. 86世代가 民主化 成果를 云謂하는 것은 이미 휩쓸려갔다. 自身들의 공을 말할 때가 아니라 이제 다 물러날 때가 왔다.” 

    - 물러나야 할 사람들은 86世代가 아니라 ‘權力化된 86世代’다. 그 供給處가 參與連帶 아니었나. 

    “退場할 이들이 權力化된 86世代란 點은 同意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