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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政權交替 準備 안됐다 젊은층 誘引 시스템 만들어야”|신동아

“민주당 政權交替 準備 안됐다 젊은층 誘引 시스템 만들어야”

안경환 文在寅 캠프 새政治委員長

  • 송화선 記者 | spring@donga.com

    入力 2012-12-24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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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月 20日 午前 안경환 서울대 法學大學院 敎授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밤새 못 주무신 것 같다’고 하자 “그 사내 생각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安 敎授는 이番 大選에서 문재인 캠프 새로운政治委員長을 지냈다.‘정권교체와 새政治를 위한 國民連帶’ 常任代表를 맡아 汎野圈의 文 候補 支援을 이끌기도 했다. 著名한 法學者이자 人文主義者로 平生 政治權과 距離를 두고 살았던 그는 왜 選擧 한복판에 뛰어든 걸까. 그곳에서 무엇을 꿈꿨고, 무엇에 挫折했을까. 18代 大選에 對해 ‘人生의 마지막, 잠깐의 꿈이었다’고 말하는 그와 짧았던 政治 體驗에 對한 이야기를 나눴다.
    “민주당 정권교체 준비 안됐다 젊은층 유인 시스템 만들어야”
    投票率은 높았다. 文在寅 民主統合黨 候補가 勝機를 잡은 듯 보였다. 朴槿惠 새누리당 候補가 文 候補를 1.2% 差로 누른 出口調査 結果가 發表됐을 때까지도 雰圍氣는 괜찮았다. 薄氷의 勝負가 되리라 豫想됐다. 하지만 開票가 始作되면서 隔差는 벌어졌다. 12月 19日 午後 11時 40分께 結局 文 候補는 大選 敗北를 公式 認定했다. 그와 더불어 ‘새 政治’를 이루고자 했던 안경환 서울대 法學大學院 敎授(65)의 꿈도 꺾였다.

    安 敎授와의 인터뷰는 두 番에 걸쳐 이뤄졌다. 選擧戰이 한창이던 12月 15日 그는 希望에 차 있었다. 選擧戰 初盤 壓倒的인 優位를 지키던 朴槿惠 當選人의 支持率이 주춤하던 때다. 連日 繼續된 强行軍 때문인 듯 얼굴이 해쓱했지만 눈빛만은 반짝였다. “文在寅 候補가 當選된다면 社會的인 意味에서 내 平生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平生 特定 政黨에 關與한 적 없다. 後進 養成을 통해 내가 願하는 世上을 만드는 데 間接的으로 寄與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그 原則을 깨고 나온 건 朴槿惠 새누리당 候補의 當選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朴 候補 個人은 훌륭한 分이겠지만, 支持者의 世代와 性向은 過去 政府와 다르지 않다. 그의 當選은 곧 李明博 政府의 延長이다. 우리 社會의 分裂과 反目이 深化되고 少數가 多數를 支配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더해야 한다는 歷史的 召命意識으로 캠프에 合流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없다. 父母 財産을 물려받지 않으면 自身의 未來가 暗鬱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꿈을 돌려주고 싶다.”

    靑年 世代의 挫折

    文在寅 候補의 落選이 確定된 뒤 그는 또 한 番 靑年에 對해 얘기했다. “박근혜 當選人의 勝利는 舊體制의 勝利다. 그들이 議會까지 갖고 있다. 經驗과 힘으로 靑年들을 밀어붙일까봐 걱정이다. 그럴 境遇 憤怒한 젊은이들이 모여 또 한 番 ‘촛불’ 같은 現象이 일어날 수 있다.”



    安 敎授는 李明博 政府에서 젊은 世代가 느낀 挫折과 憤怒에 對해 深刻한 問題意識을 갖고 있었다. ‘새 政治’를 꿈꾸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朴 當選人에게 ‘包容과 相生’을 注文하면서, 特히 ‘安哲秀 現象’을 통해 드러난 젊은이들의 ‘새 政治’에 對한 熱望을 실현시킬 方法을 苦悶해야 할 것이라고 助言했다.

    “우리나라는 保守와 地域主義가 結合돼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젊은이들이 政治에 對해 冷笑할 수밖에 없다. 與黨政治는 돈 벌고 旣得權 갖고 適當히 墮落한 後에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野黨政治는 透射的인 것 程度로 여긴다. 健全한 意味의 政治에 對한 賞(像)이 없다. 只今까지 野圈은 談合이나 聯合作戰 같은 ‘특별한 事件’을 통해 이를 突破해왔지만 限界가 있다. 根本的으로 젊은 層에게 希望을 줘야 한다. 大學生 때부터 政治에 關心을 갖고 參與하는 文化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새 政治다.”

    그는 이를 위한 出發點으로 參政權 擴大를 들었다. 15日 인터뷰 때도 그는 “選擧運動 過程에서 가장 아쉬운 點이 뭐냐”는 質問에 朴 當選人의 討論 回避와 더불어 ‘參政權 行事의 制約’을 들었다.

    “첫째로 指摘할 것이 選擧 年齡 問題다. 民主 市民은 敎育을 통해 길러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른 分野에서는 滿 18歲를 成年으로 認定하면서 選擧權은 滿 19歲부터 附與한다. 妥當하지 않다. 投票 時間도 問題다. 野黨은 ‘더 많은 國民이 選擧에 參與할 수 있도록 投票 時間을 延長해야 한다’고 主張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文 候補는 選擧 中 發表한 ‘人權 10大 公約’ 中 2番에 ‘參政權 擴大’를 넣었을 만큼 이 問題에 큰 關心을 기울였다. 安 敎授는 大選이 끝난 뒤에도 이 問題意識만큼은 이어져 다음 選擧 때는 이런 部分이 改善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議員들 自己 입지만 생각해”

    그는 민주당에 對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特히 “議員들이 政權交替에 對한 熱望이 없어 보였다”며 直擊彈을 날렸다. 文在寅 캠프 새政治委員長에 就任하던 날 安 敎授는 ‘민주당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저는 市民의 이름으로 警告하고 國民의 이름으로 歷史의 責務를 注文하고 命令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고 했다. 以後 민주당의 革新을 위해 뛰었다. 黨 外 組織으로 ‘政權交替와 새政治를 위한 國民連帶’를 만들기도 했다. 安 敎授는 “文 候補는 새 政治에 對한 意志와 眞情性이 분명했다. 그러나 黨이 그것을 充分히 支持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在野 等을 中心으로 ‘民主黨만으로는 안 된다’는 얘기가 나왔다. 文 候補가 當選되려면 民主黨 支持者 外에 安哲秀 前 候補와 심상정 前 候補의 支持者, 나아가 合理的인 報酬까지 아우를 組織이 必要했다”고 했다. 하지만 力不足이었다. “大選 勝利보다 個人 立地를 더 생각하는 사람들”은 끝내 힘을 보태지 않았다.

    “ 國會議員 任期가 3年 半이나 남지 않았나. 다음 選擧는 새 大統領 任期 後半에 있다. 그때는 與黨 人氣가 떨어질 때니까 차라리 野黨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根據 없는 생각은 아닐 거다. 安哲秀 候補를 支持한 靑年들이 민주당을 새누리黨과 다를 바 없는 舊勢力으로 본 데는 理由가 있다. 이런 黨의 體質을 改善해야 한다. 旣得權을 내려놓고 外延을 넓히지 않으면 希望이 없다.”

    그러나 安 敎授는 本人이 이 過程에 參與할 뜻이 없음을 分明히 했다. 15日 인터뷰 때 그는 “나는 50日짜리 期間制 臨時職이다. 選擧가 끝나면 結果에 關係없이 硏究室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番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만 문재인이라는 사람에 對한 믿음과 애틋함 때문에 暫時 함께 꿈을 꿨을 뿐”이라고 했다.

    安 敎授는 文 候補를 매우 信賴하고 있었다. ‘문재인 大統領 만들기’에 모든 것을 바쳤다. 合理的인 保守主義者이자 불편부당한 社會 元老로서의 名聲을 기꺼이 내려놓았다. ‘特定 政權의 創出이나 延長에 關與하지 않겠다’는 삶의 原則도 깼다. 첫째 理由가 ‘政權交替’에 對한 使命感 때문이었다면, 둘째 理由는 ‘人間 문재인’에 對한 信賴였다. 15日 인터뷰에서 安 敎授는“문 候補와 私的인 因緣은 거의 없다. 다만 그분이 辯護士로 活動하던 時節부터 얘기는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所謂 制度圈에 있는 辯護士들은 民權辯護士를 높게 評價하지 않는 傾向이 있는데 어느 누구도 ‘文在寅 辯護士’에 對해서는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청렴하고 바르고 성실하고 辯論 實力도 뛰어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人間 문재인

    그렇게 이름 程度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2004年 盧武鉉 大統領 彈劾事件 때다. 文在寅 候補가 憲法理論으로 彈劾의 不當性을 뒷받침해줄 專門家를 찾다가 安 敎授를 만나러 온 것. 安 敎授의 回顧다.

    “法律家의 常識으로 볼 때 當時 彈劾은 宏壯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 當時 우리나라 法大 敎授들, 特히 내가 在職하고 있는 大學의 敎授들은 盧武鉉 大統領에 對해 不便한 感情 같은 걸 갖고 있었다. 그러다 내게 相議하러 온 거다. 當時 나는 서울對 法大 學長이었다. 비록 작은 機關일지라도 現職 機關長이 特定 事件에 直接 關與하는 것은 問題가 있다고 생각했다. 文 候補도 나를 만나러 왔을 때는 도움을 請하려 한 게 分明한데, 내놓고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더라. 結果的으로 直接的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以後 많은 사람이 나섰고, 얼마 지난 後 나는 그 일을 잊게 됐다.”

    安 敎授가 그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2012年 文在寅 候補가 펴낸 自敍傳 ‘운명’에 그 일과 關聯된 部分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當時 法學者들이 나서는 데 내가 어떤 役割을 한 것처럼 썼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 내가 直接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러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고, 그래서 弟子들을 움직여 돕도록 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實相을 말하자면 全혀 事實이 아니다. 그때 나선 學者들은 모두 自發的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冊의 內容을 듣고 나는 이미 잊고 있던 일을 文 候補가 記憶하고 있다는 데 고마움을 느꼈다. ‘이 사람은 自己가 어려웠던 時節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 記憶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選擧는 깨끗했다”

    노무현 政府 人權委員長 時節 받은 印象도 있다. 人權위는 政府의 人權侵害를 指摘하는 부처라 行政府와 關係가 圓滿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도 文 候補는 公的인 業務를 原則的으로 遂行하면서 同時에 相對를 配慮하는 人物로 보였다. 信賴가 생겼다. 그는 選擧 過程에서도 文 候補에게 失望한 적이 없다고 했다.

    “12月 10日 世界人權의 날을 맞아 文 캠프에서 ‘人權 10代 政策’을 發表한 날이 생각난다. 그날 遊說 日程이 워낙 바빠 내가 發表를 代身해야 할 狀況이었다. 그런데 文 候補가 人權 政策만큼은 直接 發表해야 한다며 틈을 냈다. 놀랍고 고마웠다.”

    安 敎授는 노무현 政府와 李明博 政府에서 國家人權委員長을 지냈다. ‘政權은 짧고 人權은 길다’는 所信을 갖고 있다. 이番에도 門 캠프의 人權 公約 마련 等에 參與했다. 그는 “새누리당은 딱히 人權 公約이랄 것 自體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다른 分野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뭔가를 내놓으면 ‘우리도 하겠다’는 式으로 가져갔을 뿐, 元來부터 그쪽에서 主導的으로 만든 公約이 別로 없다. 政策보다는 그저 人物로 選擧를 치른 것”이라고 했다.

    “그 人物의 힘도, 勿論 本人의 競爭力도 있지만,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起因한 바가 크다는 點에서 아쉽다”는 게 안 敎授의 評價다.

    하지만 過半의 國民이 朴 當選人을 選擇했고, 文 候補는 꿈을 이룰 機會를 얻지 못했다. 安 敎授는 “그래도 文 候補가 내놓은 政策과 選擧를 치르는 동안 새로운 政治文化를 만들기 爲해 最善을 다했던 努力만큼은 評價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15日 인터뷰에서 安 敎授는 朴 當選人 側이 ‘野黨의 黑色 宣傳이 選擧를 混濁하게 만들고 있다’고 指摘한 데 對해 剛하게 反駁했다. “그 部分은 絶對 同意할 수 없다. 支持者 個人 次元에서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選擧캠페인 次元에서는 決코 없었다. 選擧 期間 道德的으로 優位에 있었다고 自負한다”고 했다. “選擧 때마다 네거티브는 뒤지는 쪽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番 選擧에서는 달랐다. 文 候補의 基本 態度는 ‘네거티브 하지 말라’였다. 安哲秀 前 候補는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綜合的인 評價를 해보면 알겠지만 이番 選擧에서 野黨이 主導한 네거티브는 없었다고 본다”고도 했다.

    “나는 自由主義者, 浪漫主義者”

    選擧 막바지 큰 이슈가 됐던 이른바 ‘國精院 女職員’ 事件에 對해서는 “그 問題에는 두 個의 이슈가 婚材돼 있다. 저쪽에서 不法으로 輿論을 誘導한 것은, 事實關係를 볼 때, 全혀 根據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 後에, 問題를 提起하는 過程에서 私生活 侵害 같은 未熟한 部分도 分明히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全혀 다른 問題고 比重도 다르다. 只今까지의 慣行에서 볼 때 選菅委 職員과 警察이 門을 두드리는 것은 사람들이 受容할 수 있는 것 아니었나. 勿論 人權 (侵害), 그런 거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輿論造作 全體를 무너뜨릴 만한 건가. 그건 아니라고 본다”는 意見을 밝혔다.

    어쨌든 選擧는 끝이 났다. 이제 ‘박근혜 政府’가 大韓民國의 向後 5年을 이끌어갈 것이다. 安 敎授는 애初 새 政府의 課題를 일자리와 經濟問題 解決이라고 했다. “누가 大統領이 되든 우리 經濟가 어려울 것이라는 건 이미 豫想되고 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希望을 줄 수 있는 政策을 推進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더불어 ‘東아시아 平和秩序 構築’도 새 政府의 重要한 課題로 봤다. “李明博 政府에서 南北關係가 梗塞되면서 相對的으로 우리 政府의 役割이 많이 縮小됐다. 李明博 政府는 安保를 理由로 댔지만 安保 面에서도 天安艦 爆沈, 北韓軍 노크歸順, 北韓 미사일 發射 事件 等에서 보듯 問題가 많았다. 오히려 東北亞의 主導權만 中國에 넘김으로써 우리나라의 立地가 宏壯히 弱化됐다. 매우 큰 問題고, 이른 時日 안에 正常化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근혜 政府’가 이 課題를 잘 遂行해주기를 期待한다고 했다.

    그 自身은 다시 敎授로, 그리고 著述家로 돌아갈 생각이다.

    “나 같은 自由主義者, 浪漫主義者가 政治는 무슨. 마지막에 한 番, 내게 주어진 舞臺에 다 던져보고 내려가는 거죠.”

    목소리는 如前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홀가분하게 들렸다. 選擧運動 中에도 講義는 꼭 했던 그는 20日 午後에도 大學院 授業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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