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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 約 달고 산 虛弱 體質 徹底한 自己管理로 天壽|新東亞

平生 約 달고 산 虛弱 體質 徹底한 自己管理로 天壽

朝鮮 最長壽 王 英祖

  • 이상곤 │甲山韓醫院 院長·韓醫學 博士

    入力 2013-07-19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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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영조는 스스로 體得한 健康의 智慧로 朝鮮 最長壽 王이 됐다.

    朝鮮의 最長壽 王이자 52年 歲月 동안 王座에 머문 英祖(李衿·1694~1776, 在位 1725∼1776). 肅宗의 둘째아들이자 警鐘의 異腹同生이었던 그는 蕩平策을 통해 朝鮮 最高의 繁榮期를 謳歌한 王이자 子息을 뒤주에 가둬 죽인 非情한 아버지라는 ‘두 얼굴’의 君主로 알려져 있다. 限平生 卑賤한 무수리(숙빈 崔氏)의 子息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산 不幸한 임금이기도 했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長壽했지만, 英祖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韓藥을 달고 산 ‘國民 弱骨’이었다. 조금만 찬 飮食을 먹어도 배頉이 났고 消化不良에 시달렸으며 腹痛 때문에 小便을 보기 어려워하던 少年이었다. 傳染病에 걸려 죽음의 門턱까지 갔다 奇跡的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歲라는 天壽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大體 그의 健康 祕訣은 무엇일까. 健康 體質을 타고난 걸까, 아니면 後天的으로 가꾸고 養育한 걸까. 이런 疑問에 對한 答을 밝혀가는 過程이 바로 ‘王의 韓醫學’을 連載하는 가장 큰 理由일 것이다.

    實踐으로 옮긴 健康 智慧

    英祖의 長壽와 健康 祕訣을 現代的 視角에서 보면 이렇게 解釋할 수 있다.

    첫째, 自己의 몸 狀態를 正確히 把握하는 것이다. 몸의 어떤 部分에 어떤 弱點이 있는지 把握해 이를 念頭에 두고 過負荷가 걸리진 않는지 徹底히 對備해야 한다. 24時間 變化를 觀察하면서 身體의 弱點을 알고 過負荷의 境界値를 觀察하는 데는 自己 自身이 最高 專門家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平生 腹痛과 消化不良 等 冷氣에 敏感해했다. 自身이 冷症에 가깝다는 事實을 알고 限平生 차가운 자리에 앉지 않고 찬 飮食을 멀리하는 等 溫氣 保存에 神經 쓴 것은 徹底한 自己 觀察의 結果다.



    둘째, 自身을 冷靜하게 注視하면 病이 自己 몸에서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지 方法論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영조는 ‘人蔘 마니아’였다. 여러 番 處方을 實驗한 後 人蔘을 大量으로 넣은 乾空湯을 賞福海 健康을 維持했다.

    현대는 健康知識 洪水 時代다. 많은 사람이 身體 管理를 위한 專門知識에 對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랑歸家 된다. 하지만 科學的 知識보다 더 重要한 것은 自然의 深奧함이다. 健康 知識이 自身의 身體 狀況과 맞아야 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처럼 盲信하는 데서 問題가 불거진다.

    例를 들면 牛乳나 人蔘의 境遇가 그렇다. 牛乳가 普及되자 科學的 分析을 통해 母乳보다 더 豐富한 營養이 包含된 것으로 알려져 한때 母乳보다 牛乳를 選好했지만, 나중에 母乳 成分 가운데 免疫 酵素나 氣分을 좋게 하는 成分이 있다는 事實을 알고는 牛乳 優位설이 자취를 감췄다. 人體의 深奧함을 斷片的 知識의 틀만으로는 評價할 수 없다는 事實을 實證한 例다. 人蔘도 마찬가지다. 體質에 맞지 않으면 熱이 나거나 血壓을 높이는 等 問題가 생길 수 있다. 自身의 體質 特性과 견줘보고 觀察해서 무엇이 몸에 맞고 맞지 않는지 眞實을 確認하는 게 重要하다.

    셋째, 健康의 智慧를 實踐하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모자란 듯 飮食을 먹으면서 새롭지는 않으나 智慧로운 知識을 實踐하는 것이다. 大部分의 사람이 작은 努力으로 크게 健康을 얻고자 게으름을 부린다. 하지만 英祖는 술을 거의 먹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밥을 제때 챙겨 먹으면서 自身만의 努力으로 健康의 智慧를 體得했다.

    大多數 王이 先代 王을 여읜 슬픔에, 或은 힘겨운 葬禮節次 渦中에 健康을 잃어버린 反面 영조는 아들인 思悼世子 事件 앞에서도 穀氣를 끊거나 飯饌 數를 줄이는 減膳(減膳)을 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 普及과 權力鬪爭을 徹底하게 區分짓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國家的 危機狀況이나 臣下들과의 葛藤 때 飯饌 數를 줄이거나 斷食鬪爭을 했지만 時間을 定해놓고 鬪爭의 根本 目標에 符合한 것에만 充實했을 뿐 鬪爭 그 自體에 埋沒되진 않았던 怜悧한 王이다.

    영조는 무수리 出身인 숙빈 崔氏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王이 되기까지의 行步가 如干 險難하지 않았다. 그의 出生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說이 나돌았다. 肅宗의 아들이 아니라 金春澤의 아들이라는 說도 있었다. 많은 野史(野史)가 好奇心어린 눈으로 肅宗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推定하면서 영조를 바라본다.

    못 말리는 ‘人蔘 마니아’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等 各種 記錄을 통해 살펴보면 英祖의 體質은 特異한 데가 있다. 그는 83歲에 世上을 뜰 때까지 人蔘이 든 處方을 愛用했다. 甚至於는 末年 10年 동안 服用한 人蔘이 100斤이나 될 程度였다. 그의 豐盛한 鬚髥은 아버지 肅宗의 風貌와 全혀 달랐고 오히려 숙빈 崔氏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가 金春澤의 아들로 疑心받는 한 理由가 됐다.

    性格도 아버지 肅宗이나 異服兄 警鐘, 아들 思悼世子, 孫子 正朝와 全혀 달랐고 疾病의 樣相도 이들과 달랐다. 朝鮮時代 王들은 武裝인 李成桂의 血統을 이어받아 大槪 불꽃같은 性質을 보이거나 火病을 앓았다. 甚至於 畫家 內部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腫氣를 앓다 죽는 境遇가 많았다. 肅宗度 例外가 아니었다. 朝鮮王朝實錄의 肅宗 14年 7月 16日 記錄엔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暴發하여 漸次로 煩惱가 甚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煩惱가 甚하다”고 쓰여 있다. 極度의 火病을 呼訴한 대목이다.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영조는 平生 人蔘이 든 處方을 愛用했다.

    玄宗도 마찬가지다. 1721年 10月 記錄엔 “深化가 불어나 禍熱이 오르내리면서 精神이 아득하고 倦怠가 있어 治療하기 힘든 地境이니 調攝을 위해서 洗劑로 하여금 代理淸淨을 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警鐘도 卽位 後 2年에 都承旨가 올린 上訴를 읽다 火熱이 오르고 心氣가 暴發했다는 記錄이 있는 것을 보면 李成桂와 아버지 肅宗의 體質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하지만 英祖는 달랐다. 一生 동안 火熱을 돋우는 人蔘을 달고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服用한 것도 韓醫學 處方 中 人蔘이 가장 많이 包含된 乾空湯이었다. 英祖 41年의 處方 記錄에 依하면 每日 8.8돈(30g)이나 되는 엄청난 量의 人蔘을 服用했다. 英祖 스스로도 “製造에게 人蔘의 精氣를 얻어 健康하다”고 말할 程度로 대단한 人蔘 愛好家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思悼世子와 孫子 正祖는 肅宗과 警鐘 等 轉貸 王들처럼 火熱이 많은, 따라서 人蔘이 맞지 않는 體質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思悼世子의 境遇를 보자. 영조는 思悼世子를 불러 왜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물었다. 이에 思悼世子는 “마음에 火症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答했다. 結局 이 病이 커져 悲劇的인 思悼世子의 죽음을 불렀다는 데는 歷史的으로 異議가 없다.

    正祖는 더욱 熾烈하게 內面의 花甁과 싸웠다. 火를 내리는 加味逍遙山과 牛黃, 金銀貨를 밥 먹듯 먹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고 少量의 人蔘도 極度로 警戒해 服用하지 않았다. 죽는 瞬間까지 人蔘을 忌避했다는 건 잘 알려진 事實이다. 이런 點을 勘案하면 英祖는 숙빈 崔氏의 體質을 이어받아 少陰人에 가까운 體質이었음을 알 수 있다.

    英祖가 一生 동안 보인 政治的 行態는 매우 自虐的이었다. 大臣들과 問題가 생기면 이를 爭點으로 湯藥 服用을 拒否해 略字로서 彈壓받는 임금의 모습을 浮刻했다. 王權과 神權의 衝突에서 能動的으로 相對를 制壓하는 게 아니라 受動的으로 輿論을 喚起시키는 少陰人의 特徵을 보인 것이다. 英祖 50年엔 儒生과 百姓들을 모아놓고 懸賞金을 내걸어 湯劑 停止 與否를 묻는 行事도 벌였다. 또한 消息(小食)을 즐기고 기름진 飮食과 술을 避하는 等 節制된 食生活을 이어나갔다. 消化 機能이 弱한 騷音인 體質이 아니고선 實踐하기 힘든 食習慣이다.

    受動的 騷音인 特徵 뚜렷

    王位에 오르는 過程도 順坦치 못했다. 그는 異服兄 警鐘 밑에서 王世弟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板을 걸었다. 英祖의 어머니 숙빈 崔氏는 宮女들의 女종인 무수리였다. 王의 어머니라곤 想像하기 힘든 賤한 身分을 딛고 영조는 出發點에 섰다. 警鐘의 어머니 張禧嬪이 仁顯王后를 相對로 詛呪의 굿판을 벌인 後 죽임을 當한 것은 숙빈 崔氏가 眞實을 알린 德分이었다. 張禧嬪이 死藥을 받고 죽고 난 後 警鐘과 英祖는 葛藤關係에 突入한다. 自己 어머니를 죽인 怨讐의 子息인데 예뻐 보일 理가 萬無할 터.

    警鐘이 王位에 오르면서 ‘門고리 權力’인 實勢 宦官 박상검과 英祖 間에 불거진 葛藤은 1因子와 2人者의 間隙을 보여주면서 不安한 王位 繼承者로서의 地位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의 告變은 王과 王世弟 間 一觸卽發의 瞬間瞬間으로 이어졌다.

    警鐘의 죽음을 둘러싼 毒殺 疑惑은 南人과 少論 强勁派에 依해 더욱 增幅됐다. 警鐘은 相剋의 飮食인 게醬과 단감을 먹고 죽었는데, 英祖 31年 5月 20日 少論의 先頭走者로 叛亂을 꾀했던 신치운은 스스로 “神은 英祖 卽位年인 甲辰年부터 게醬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神의 易心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當했다. 景宗 毒殺說의 疑惑이 英祖 在位 31年까지 뻗친 것이다. 게다가 아들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둬 죽인 罪責感은 決코 다른 王들보다 작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英祖가 앓은 疾病은 大部分 消化力 不振이나 腹痛 等 寒冷性 疾患이었다. ‘골골百歲’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體質이었다. 다만 宮闕 밖에서 生活하던 18歲에 痘瘡을 크게 앓은 것을 除外하면 本人의 判斷과 先制的 對處로 疾病을 豫防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괴롭힌 疾患은 疝症(疝症)이었다. 景宗 在位 時節 王世弟였던 그는 疝症으로 競演(經筵)을 자주 쉬어야 할 程度로 痛症이 甚했다. 疝症은 韓醫學的 病名으로, 現代醫學으로는 說明하기 어려운 하복冷통症候群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消化不良과 前立腺疾患이 複合된 것이며, 女性으로 말하면 生理痛과 冷待下로 인한 子宮 下服桶 疾患을 의미한다.

    東醫寶鑑은 ‘疝症은 部位別 分類에 따라 全音(前陰)에 配屬하였다. 全音은 종근이 모이는 곳이며 종근이란 陰府의 털이 나는 곳에 가로놓인 뼈의 위아래에 있는 힘줄이다’라고 說明했다. 아랫배에 病이 생겨 배가 아프고 大小便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疝症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다. 宋나라 양사영의 ‘職地方(直指方)’은 보다 具體的으로 描寫했다. ‘疝症이란 陰囊과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오한과 發熱이 생기다가 大小便을 보지 못하거나 泄瀉가 나기도 하는데 積聚(積聚·몸 안에 쌓인 氣로 因해 덩어리가 생겨 아픈 病)가 생겨 술盞 같거나 팔뚝 같거나 錚盤 같기도 하다.’

    “만 가지 補藥이 헛것”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語義들은 胃腸의 溫氣를 보태려고 英祖에게 뜸 治療를 積極 勸했다.

    承政院日記 英祖 元年 10月 12日 記錄에선 英祖 스스로 疝症이 생긴 原因을 仔細히 說明한다. 要旨는 이러하다.

    ‘紅塵(紅疫) 以後에 처음에는 産氣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滯氣가 있어서 淸熱小도지制를 多福하여 下部가 厥冷하고 海域이 竝發해 讀音에 뜸을 뜨고 防風産을 써서 效果를 보았으나 그 찬 藥이 問題였다.’

    그로부터 50年이 지난 承政院日記 英祖 50年 5月 8日 記錄에서 영조는 “紅塵 때 쓴 牛黃과 찬 藥이 疝症을 誘發했다”고 回顧한다. 영조는 生活習慣 問題도 告白한다.

    ‘예전 같으면 여름에는 生冷물을 먹지 않았으나 요즘은 過人이 스스로 過食한 側面이 있고, 겨울이 되어서도 오히려 手足을 차게 하는 等 온몸을 두루 차갑게 했다. 平常時 過人의 處身이 몸을 차갑게 한 것이다.’

    疝症의 形態에 對해서도 ‘只今 腹部는 손으로 만져보면 옆으로 橫斷知己가 있는데, 衣服이 단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只今 여름에 덥다고 生冷(生冷)한 것을 過食한 所致’라고 밝혔다.

    疝症은 小便을 보기 어렵거나 참기 힘들게 해 영조를 繼續 곤란케 했다. 英祖 2年 10月 14日 承政院日記엔 ‘어릴 때부터 小便을 자주 보았는데 最近에는 더욱 심해져 하룻밤에 數次에 걸쳐 들락날락했다. 特히 요番 祭祀 때 初獻을 보는데 小便이 甚히 마려워 失禮를 할 뻔했다’라고 곤혹스러운 經驗을 밝혔다. 甚至於 ‘小便이 방울방울 떨어져 苦痛스럽다’라고 苦悶을 털어놓은 게 한두 番이 아니다.

    小便에 關한 한 아버지 肅宗은 아들 영조와 꼭 닮았다. 肅宗 10年엔 社深度敵産과 三湖作藥湯 等에 對한 處方을 注文했는데 이들 處方은 모두 小便을 순조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찬 藥물이나 生活習慣에서 疝症의 原因을 찾지만 同意寶鑑은 이 病의 原因을 火病으로 說明한다.

    ‘大體로 성을 몹시 내면 肝에서 禍(火)가 생긴다. 火가 몰린 지 오래되면 內部가 濕氣로 차가워지며 痛症이 심해진다.’

    肅宗의 境遇 변덕스럽게 火를 내는 境遇가 잦았던 點을 考慮하면 武裝의 後裔다운 疾病이었다. 事實 英祖도 自家診斷과 달리 各種 스트레스로 인한 花甁에 시달렸다. 앞에서 본 대로 卽位할 때까지의 스트레스와 激化된 黨爭의 渦中에서 臣下들 사이에 끼여 自虐的인 發言을 자주 했다.

    朝鮮王朝實錄 英祖 7年의 記錄엔 ‘만 가지 補藥이 헛것이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하거나 英祖 9年엔 ‘온갖 補藥이 다 헛것이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要房이다’라며 괴로운 心境을 表現했다. 英祖 44年의 記錄에도 ‘아, 나의 病은 첫째도 心氣이고 둘째도 心氣에서 비롯된다’라고 吐露했다. 英祖 13年엔 眩氣症을 呼訴하면서 古庵心腎丸이라는 處方을 내리는데 그때 眩氣症의 原因을 火라고 規定한다.

    火가 原因이 된 疝症을 治療하는 方法은 다른 原因으로 發生한 것과 差異가 있다. 肅宗과 英祖의 小便에 關한 處方은 比較의 基本店이 된다. 韓醫學의 基本的인 治療 原則은 虛와 실을 가리는 데 있다. 두 임금의 疾病 樣相은 虛와 실 사이에서 差異가 크다. 肅宗은 小便이 붉고 渴症을 자주 呼訴했는데 度赤山 系列의 찬 藥물을 爲主로 攻擊的인 處方을 한 反面, 小便을 보기 힘들거나 참기 힘들어하며 泄瀉가 잦은 虛症 症狀을 보인 英祖의 境遇는 內部를 따뜻하게 데우는 蟠葱散을 爲主로 處方했다. 영조는 ‘蟠葱散을 나의 主人으로 삼는다’고 할 程度로 愛用했다.

    消火器 冷症 治療하려 배꼽 뜸질

    蛔蟲에 依한 相衝(上衝·慰勞 치밀어오름)감과 嘔逆感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症狀은 英祖 20年에서 41年까지 이어진다. 蛔蟲을 治療하는 藥물은 모두 매운 藥이다. 胃腸의 溫氣를 올려 蛔蟲이 살 條件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處方이었다. 語義들은 胃腸의 溫氣를 보태기 위해 한便으로는 뜸 治療를 積極的으로 勸했다. 英祖도 自身의 健康上 弱點이 消火器 冷症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連除法(煉臍法)으로 이를 克服하고자 애썼다. 連除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方式은 直接區가 아닌 間接灸에 가깝다. 쑥뜸과 皮膚 表面 사이에 소금이나 藥材를 넣어 熱氣가 皮膚에 直接 닿아 傷處를 내거나 苦痛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人體를 보는 智慧가 東西洋에서 一致하는 것은 배꼽이다. 왜 배꼽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人體圖는 醫學과 藝術의 融合點을 보여준다고 評價받는다. 人體圖는 다빈치의 力作이지만, 그 속에 있는 四角形과 원을 통한 比例는 로마의 建築家 비트루비우스의 人體 比例에 對한 생각을 具現한 것이다.

    “自然이 낸 人體의 中心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中心을 배꼽에 맞추고 圓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손발을 뻗은 人體의 中心이 배꼽이라는 생각은 東醫寶鑑에도 類似하게 記錄돼 있다. 東醫寶鑑 배꼽便은 “팔을 위로 올리고 땅을 디디고 서서 줄로 재보면 中心이 바로 배꼽에 該當된다”라고 했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배꼽이 人體의 中心이라는 데는 東西洋이 一致된 見解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배꼽이라는 純粹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月印釋譜’에선 배꼽을 ‘빗福’으로 적고 있는데 배의 한복판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人體의 中心이라는 表現이다. 聖書 욥기 40張 16節은 “이제 보라. 그의 氣力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꼽에 있느니라”고 했다. 東醫寶鑑은 더욱 具體的으로 배꼽의 意味를 解釋하면서 治療 效能까지 덤으로 적었다.

    ‘배꼽 줄은 마치 과일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 養分이 果實꼭지를 통하는 것과 같다. 배꼽에 더운 김을 쏘여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뜸을 뜨고 더운 김을 쏘이는 것은 배꼽이 차갑다는 뜻이다. 이런 認識엔 韓醫學 固有의 陰陽論이 뿌리내리고 있다. 배꼽은 子宮 속 胎兒 狀態에서 營養分을 받는 唯一한 通路다. 어머니는 배꼽을 통해 胎兒의 淫刑을 기르는 物質的 基礎를 供給한다. 出生 後 닫혀 있어도 배꼽은 人體의 精血이라는 陰氣가 모이는 軸이다.

    영조는 배꼽 뜸질을 健康을 回復하는 普遍的 治療法의 하나로 選擇했다. 東醫寶鑑은 배꼽을 데우는 方法으로 몇 가지를 提示했다. 소금이나 회화나무 껍질로 배꼽을 덮고 난 뒤 배꼽에 쑥뜸을 뜨는 方法, 富者를 비롯한 따뜻한 藥으로 膏藥을 만들어 붙이는 方法, 배꼽을 藥쑥으로 덮는 方法 等이 그것이다. 배꼽을 데우면 ‘冷待下와 月經이 고르지 못해 妊娠하지 못하는 것을 治療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體質에 맞는 食習慣 實踐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英祖가 가장 좋아한 飮食은 사슴꼬리 飯饌이었다.

    이렇듯 영조는 連除法으로 胃腸의 冷症을 없애는 한便으로 湯藥을 積極的으로 服用해 體內의 溫氣를 끌어올리려고 努力했다. 그는 胃腸의 溫氣를 북돋우기 위해 人蔘과 桂枝, 健康 等이 들어간 理中湯을 服用했는데 한番 먹어본 後 效果가 確實하자 自身에게 가장 맞는 處方으로 確信했다. 以後엔 理中湯에 鹿茸과 牛膝, 附子를 넣어 건공탕이라고 불렀다. 乾空湯은 나라를 建國한 功勞와 같은 處方이라는 뜻이다.

    영조는 그만큼 理中湯을 사랑했다. 그는 理中湯을 自身이 가장 아끼던 萬能 技術者 최천藥의 神技에 가까운 技術과 같다며 常服하면서 健康 지킴이로 삼았다. 英祖 41年 12月 29日 製造들이 “乾空湯의 效果로 얼굴이 和暢해졌다”고 하자 英祖 스스로 “人蔘의 精氣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對答했다. 한 해 人蔘 20斤을 消費할 程度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모두가 英祖가 每日 韓藥을 服用할 程度로 健康을 챙긴 德分이었다.

    英祖가 기름진 飮食이나 飮酒를 멀리한 건 잘 알려진 事實이다. 禁酒令을 徹底히 지킨 탓인지 處方에 술이 들어가지 않아 效果가 떨어진다고 臣下들이 建議할 程度였다. 飮食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은 英祖가 減膳이나 鐵線(撤膳·國喪이 났거나 나라에 災殃이 들 때 임금이 謹愼하기 위해 肉饍(肉膳)을 들지 않던 일)을 하면서 徹底히 儉約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自身이 좋아하는 飯饌 4가지를 꼽는 모습은 全혀 달랐다. 松耳버섯, 生全鰒 새끼, 꿩고기, 苦楚長(苦草醬·고추醬)李 그것이다.

    英祖가 四足을 못 쓸 만큼 좋아한 것은 사슴꼬리였다. 79歲에 이르러서도 “飯饌 中에서 사슴꼬리만 손을 댈 수 있다”라고 할 程度였다. 그가 特히 즐긴 것 中 하나는 죽은 驍將世子의 夫人 현빈이 準備해준 밤이었다. 反面 그가 싫어한 것은 生鮮膾나 기름진 飮食 等 自身의 消化力으로는 堪當하기 힘든 것이었다. 自身의 體質에 맞게 잘 먹은 것이 健康管理의 포인트였던 셈이다.

    朝鮮時代까지 藥茶는 嗜好飮料처럼 먹는 요즘과 달리 治療의 補助手段으로 쓰였다. 하나의 處方이었다. 英祖가 다리 힘이 모자라면서 즐겨 먹은 것이 송節次다. 承政院日記는 松節에 對해 ‘松節은 솔뿌리를 가리키는데 筋肉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瘀血을 없애는 藥材다. 黃土에서 자란 어린 소나무의 東쪽으로 난 뿌리를 主材料로 五加皮 牛膝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一部 硏究者 中엔 ‘송節次를 마시고 술에 醉했다’는 實錄 文句를 根據로 송節次가 禁酒令을 避하기 위한 英祖의 눈속임 술의 한 種類라고 主張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英祖가 술을 즐긴 적이 없다는 點으로 미뤄볼 때 이는 臆測에 가깝다. 영조는 송節次의 效驗을 많이 본 탓인지 5年 동안 飮用한 後 服用을 中止했다.

    ‘앎’으로 克服한 虛弱 體質

    어깨 痛症도 영조를 오랫동안 괴롭힌 疾病이었다. 鍼療法은 勿論 膏藥 種類를 直接 붙이거나 다른 補助療法度 使用했다. 솔잎을 쪄서 따뜻하게 감싸는 方法, 누에고치를 볶아서 붙이는 것, 天草를 술과 달여서 팔에 手巾으로 감싸는 方法 等이 動員됐다. 英祖의 體質에 맞게 湯藥度 服用했는데, 特記할 點은 아침에 일어나 팔을 前後로 흔들고 난 뒤 갑자기 좋아졌다며 運動治療의 效驗을 强調했다는 點이다.

    영조는 허약한 ‘低質 體力’임이 분명했다. 平生 疝症으로 인한 腹痛과 泄瀉, 小便障礙 症狀으로 苦痛받았다. 特히 卽位 初期엔 疝症과 消化不良으로 힘들어했으며 中年期엔 어깨 痛症과 蛔蟲으로 인한 消化不良을 呼訴했다. 末年엔 極甚한 疲勞와 夏至無力感, 健忘症에 시달렸다.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이상곤

    1965年 慶北 慶州 出生

    前 大邱한의대 안耳鼻咽喉皮膚科 敎授, 大韓韓醫師協會 外觀科學會 理事

    現 甲山韓醫院 院長, 韓醫學 博士, 東亞日報·農民新聞·프레시안 칼럼 進行

    著書 : ‘콧속에 健康이 보인다’ ‘코 博士의 코 이야기’ ‘낮은 韓醫學’ 等 多數


    그러나 그가 朝鮮 王들 中 他의 追從을 不許할 만큼 長壽에 成功한 王이 된 祕法은 平凡했다. 그는 自身의 體質을 알고 疾病에 對備하며 스스로 健康을 지키기 위해 온갖 努力을 기울였다. 영조는 政治的, 胎生的으로 加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健康 祕訣이 自己를 바로 알고 弱點과 短點을 끊임없이 補完하고 實踐하는 平凡한 것임을 證明한 唯一한 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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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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