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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面刀칼을 休紙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신동아

그들이 面刀칼을 休紙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채널A 다큐 ‘特別取材 脫北’ PD 育成 證言

  • 口述·양승원│채널A 製作本部 PD swyang@donga.com 整理·남윤서│채널A 經營戰略室 記者 baron@donga.com

    入力 2013-02-21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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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境 8次例 넘나들며 脫北者들과 同行
    • 갓난아기 업고 漆黑 같은 密林 속 밤새 뛰는 母性
    • 소시지와 콜라 잘 먹던 꽃제비 진혁, 南韓 適應 잘 하길
    그들이 면도칼을 휴지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韓國 放送 史上 最初로 集團 脫北 現場을 생생하게 담아낸 채널A ‘特別企劃 脫北’主要 場面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11月 어느 날 밤, 나는 脫北 案內人 K氏와 乘用車를 타고 鴨綠江을 낀 道路를 달렸다. 불빛 하나 찾아볼 수 없는 道路 옆으로는 鬱蒼한 숲이 이어졌다. 낮에는 純白의 山과 江이 어우러져 한 幅의 山水畫 같지만 밤이 되면 脫北者들이 목숨 걸고 江을 건너는 恐怖의 땅으로 變하는 곳.

    입이 자꾸만 바싹 말랐다. 수풀 어딘가에 일곱 살 꽃제비 진혁이(假名)가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진혁이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鴨綠江을 건너온 지 3時間이 넘었다. 바깥 氣溫은 零下 25度. 그 어린아이가 酷寒 속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當初 計劃대로라면 진혁이는 사흘 前에 江을 건너 우리와 만나야 했다. 하지만 저쪽 狀況이 如意치 않은지 날짜가 繼續 미뤄졌다. 진혁이를 도와줄 北韓 側 브로커와 連絡을 주고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진혁이가 江을 건넜다”는 連絡이 온 것이다. 나는 K氏와 부랴부랴 國境으로 向했다.

    “야! 빨리 나오라!”

    만나기로 한 場所에 到着했지만 진혁이는 보이지 않았다. 多急해진 K氏가 소리를 질렀지만 人기척이 없었다. 그때 멀리서 自動車 불빛이 보였다.



    “車 온다! 숨어!”

    K氏와 나는 車 始動을 끄고 풀숲에 몸을 숨겼다. 中國 公安이 “이 밤에 國境에서 뭐하느냐”고 물으면 뭐라 答한단 말인가. 多幸히 車는 우리를 發見하지 못하고 멀어졌다. 우리는 다시 北韓 側 브로커와 連絡을 하며 진혁이를 찾았다. 길 위에는 브로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標示가 드문드문 있었다.

    “저기 있다, 빨리빨리!”

    거짓말처럼 어둠 속에서 진혁이가 나타났다. 다른 脫北者의 등에 업힌 채였다. 카메라를 든 손이 떨렸다. 진혁이가 타자마자 K氏는 急히 車를 몰았다.

    “괜찮아? 이름이 진혁이 맞아요?”

    온몸을 오들오들 떨던 아이는 艱辛히 “네”라고 答했다. 分明히 일곱 살이라고 들었는데 몸집은 서너 살로밖에 보이지 않을 程度로 작았다. 팔다리는 얼음張처럼 차가웠다. 입고 있던 꼬질꼬질한 옷은 鴨綠江의 겨울을 버티기엔 한참 不足해 보였다. 다운점퍼를 벗어 아이의 몸에 덮었다. 추위와 恐怖에 시달렸을 아이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살얼음 낀 江 건넌 일곱 살짜리

    진혁이를 만나기 두어 週 前, 나와 강태연 PD는 생생한 脫北 過程을 取材하라는 指示를 받았다. 우리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 프로를 만들며 잔뼈가 굵었다. 監視의 눈을 避해 脫北 過程을 撮影하는데 커다란 裝備를 가져갈 수는 없다. 작은 핸디캠과 그보다 더 작은 몰래카메라를 챙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혁이의 寫眞을 봤다. 瞬間 PD로서의 감이랄까, 어떤 强烈한 느낌이 傳해졌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이 아이를 반드시 韓國으로 데려오겠다’는 確固한 目標가 생겼다.

    진혁이는 양강도 혜산시에서 有名한 꽃제비였다. 진혁이 어머니는 中國으로 도망쳤고 아버지는 진혁이가 보는 앞에서 自殺했다고 한다. 꽃제비들은 普通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진혁이는 나이가 너무 어려 무리에 끼지 못했다. 낮에는 市場과 쓰레기場을 돌아다니며 땅에 떨어진 쌀알이나 과일 껍질을 주워 먹고 밤에는 남의 집 담牆 밑에서 잤다. 氣溫이 零下 20度 밑으로 떨어지는 惠山의 겨울을 버티기란 不可能할 것이다.

    좀처럼 하기 어려운 經驗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興奮됐지만 걱정이 없진 않았다. 中國으로 떠나면서 우리 둘은 “現地 軍人이나 警察에 잡히면 어쩌느냐”는 얘기를 나눴다. 苦悶해봐야 答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잡히면 苦生은 하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現地에 到着해보니 13名의 成人 脫北者 그룹은 이미 江을 건넌 狀態였다. 江 PD는 이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中國 某處의 安全家屋(安家)으로 向했다. 나는 鴨綠江 近處에 남아 열네 살 少女 윤정이(가명)와 일곱 살 진혁이가 넘어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윤정이는 豫定대로 넘어왔지만 진혁이가 늦어지면서 鴨綠江 隣近에서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江 PD는 鴨綠江에서 이틀 거리쯤 떨어진 安家에서 13名의 成人 脫北者와 함께 숨죽인 채 지내고 있었다. 近處 住民들의 疑心을 避하기 위해 窓門은 커튼으로 가렸고 불도 거의 켜지 않았다.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목소리는 最大限 낮춰야 했다.

    그들이 면도칼을 휴지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北韓 양강도 解産時의 最近 寫眞.

    “딩동”

    갑자기 들려온 玄關벨 소리에 一同은 瞬間 굳어버렸다. 사람들이 불을 끄고 房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名이 조심스럽게 門 밖을 確認했다. 아무도 없었다. 윗집 아이들이 벨을 잘못 누른 模樣이다. 脫北을 試圖하다 北送된 經驗이 있는 윤경 氏(26·女)는 特히 緊張된 表情이었다. 한 番 더 北送된다면 그땐 더 强力한 處罰을 받기 때문이다.

    安家에서 머무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緊張感은 漸漸 高調됐다. 한곳에 오래 머무를수록 發覺될 危險도 커진다. 떠나야 할 날이 다가왔다. 安家를 떠나기 前, 脫北者들은 面刀器에서 面刀날을 떼어내 休紙에 쌌다. 危機의 瞬間이 닥치면 차라리 面刀날을 삼키고 죽겠다는 그들에게 江 PD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美國놈’이 만든 約

    脫北者들의 다음 目的地는 中國과 國境을 接하고 있는 A國. 國境까지는 버스를 갈아타며 5, 6日을 가야 한다. 13名이 集團으로 움직이면 어딜 가나 눈에 띄기 쉽다. 對話 소리가 들리면 들키기 十常이다. 脫北 브로커는 一行에게 몇 番이고 “말을 하지 마라”고 强調했다. 버스는 하루에 單 한 番 休憩所에 들른다. 나머지 時間에는 버스 안에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버텼다.

    危機는 불쑥 찾아왔다. 江 PD는 脫北者 粉紅 氏(30·女)와 休憩所에 내려 一行의 먹거리를 사러 가고 있었다. 그때 中國 公安이 다가와 身分證을 要求했다. 多幸히 江 PD는 身分證이 든 가방을 들고 있었다. 또 粉紅 氏가 中國語를 할 줄 알았던 德에 두 사람은 適當히 觀光客이라고 둘러댔고 公安은 자리를 떴다. 萬若 가방을 車에 두고 내렸다면 公安이 버스 안까지 따라와 脫北者들을 發見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와 두 名의 아이는 成人 脫北者들이 出發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國境으로 向했다. 公安이 우리를 疑心한다면 子女를 데리고 旅行 中이라고 할 作定이었다. 버스 멀미로 苦生하던 진혁이의 눈이 가장 아이답게 반짝거리는 瞬間은 하루 한 番 들르는 休憩所에서였다. 休憩所에 있는 가게에 아이를 데려간 뒤 말했다.

    “너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골라.”

    진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가 뭔지 잘 몰라 머뭇거리더니 빵이며 菓子를 하나씩 주워 담기 始作했다.

    진혁이가 고른 것들은 하나같이 量만 크고 맛은 없었다. 빵은 종잇張처럼 뻣뻣했다. 아이에게 내가 고른 소시지를 줬더니 큰 눈이 더욱 커졌다.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콜라도 건네줬다. 진혁이는 물인 줄 알고 들이켜고는 톡 쏘는 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다음부터 진혁이는 休憩所에 들를 때마다 소시지와 콜라부터 챙겼다. 한番은 윤정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가지고 있던 아스피린을 半으로 잘라줬다. 藥을 받아먹은 윤정이는 今方 머리가 나았다며 물었다.

    “그거 무슨 藥입니까?”

    “이거 美國에서 만든 藥이야.”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美國놈”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희 잘 먹는 콜라도 美國에서 만든 건데?”라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그래서 목을 그렇게 쏘는 것”이라는 對答이 돌아왔다.

    먼저 出發한 成人 脫北者 그룹과 A國 國境地域에서 만났다. 江 PD와 헤어진 지 열흘 만의 再會였다. 脫北 브로커는 우리가 中國에서 A國으로 密入國하는 길에 同行하는 것을 限死코 拒否했다. 루트가 公開되면 안 된다는 理由였다. 나와 江 PD는 撮影을 抛棄하고 合法的으로 먼저 國境을 넘었다. 15名의 脫北者는 브로커와 함께 山을 넘어 A國으로 들어올 것이다.

    ‘아들아 所重히 너를 키워서…’

    나는 A國을 넘자마자 바로 脫北者들의 다음 目的地인 B國으로 갔다. B國의 安家를 踏査하고 脫出 루트를 미리 가보기 위해서였다. B國을 둘러본 뒤 다시 A國으로 돌아온 나는 脫北者들이 기다리고 있을 安家로 向했다. 監視가 弱해진 새벽에 비를 맞으며 山을 넘어온 一行은 지친 얼굴이었다. 10個月짜리 딸을 업고 山을 넘은 粉紅 氏는 特히 지쳐 있었다. 아기가 비에 맞지 않도록 비닐을 뒤집어씌우고 왔다고 했다.

    “山에서 내려오니까 처음 보는 글씨로 써진 看板이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우리가 成功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中國을 벗어나자 이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 녹아내린 듯했다. 一行은 진혁이에게 노래를 해보라며 拍手를 쳤다. 진혁이는 한番 빼는 法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래를 始作했다.

    그들이 면도칼을 휴지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양승원 PD와 진혁이. 진혁이는 南韓에 無事히 들어온 것으로 確認됐다.

    눈비에 젖을까 바람에 질까

    고여온 그 사랑으로

    아들아 所重히 너를 키워서

    어머님의 자랑이란다.

    진혁이는 여기 오지 않았다면 어느 집 담牆 밑에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北韓 사람들에게 꽃제비는 길고양이와 다름없다고 한다. 죽은 고양이를 돌보지 않듯이 죽은 꽃제비가 放置되는 일도 許多하다고 했다. 只今 노래를 부르는 이 아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끔찍한 現實에 나는 戰慄했다.

    진혁이와 단둘이 앉은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操心스레 물었다. 머리에 난 커다란 傷處가 于先 궁금했다. 아이는 躊躇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저씨들이 고기 사 먹고 남긴 찌끄러기 주워 먹다가….”

    “진혁이는 뭐 먹고 살았어요?”

    “사람들이 국수 먹다가 국수물 남긴 거, 아침에는 먹을 게 없으니까 뼈다귀 주워 먹고 無껍질 버린 거 먹고….”

    “밖에서 자면 춥잖아. 추우면 어떻게 해요?”

    “…울었어요.”

    아이는 밖에서 살면서 눈치가 늘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어려울 때 울고 있으면 間或 따뜻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있었던 模樣이다. 눈물은 어린 꽃제비의 本能的인 生存 方法이었던 셈이다.

    A國에 到着한 날 밤, 우리는 B國으로 密入國하기 위해 密林으로 向했다. 나는 脫北者들과 함께 密林을 건너기로 했고 江 PD는 미리 B國으로 가서 一行을 태울 車輛에서 待機하기로 했다.

    密林을 案內할 B國 브로커는 出發 直前에 웃돈을 要求했다. 脫北者의 切迫한 事情을 훤히 꿰고 있는 것이다. 脫北 過程을 總 指揮한 中國 브로커도 B國 브로커의 要求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一行의 목숨은 그에게 달려 있으므로.

    “兩 室長님(脫北者들은 브로커를 社長, 나를 室長이라 불렀다), 密林 같이 갑니까?”

    “그럼요, 같이 가야죠.”

    脫北者들의 表情이 밝아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말도 통하지 않는 現地 브로커만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解消되는 模樣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密林 속 ‘戰鬪’

    그들이 면도칼을 휴지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양승원 PD가 윤경氏(맨 왼쪽), 진혁이와 함께 포즈를 取했다.

    密林에는 軍人 哨所가 곳곳에 設置돼 있다. 監視를 避하려면 最大限 險한 길을 選擇해야 한다. 15名의 無理가 눈에 띄지 않으려면 더욱 險한 길을 골라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安全을 위해 가장 危險한 길을 選擇해야 했다.

    10個月짜리 아기 혜미가 걱정거리였다. 密林에서 울기라도 한다면 發覺될 수 있기 때문이다. 密林을 案內할 B國 브로커는 “술에 雪糖을 타서 먹이거나 睡眠劑를 먹이자”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되받았다. 어느 父母가 아기에게 술을 먹인단 말인가.

    “우리 혜미 잘 할 수 있어요.”

    혜미 엄마 粉紅 氏도 一行에게 諒解를 求했다. 그 누구도 異議를 提起하지 않았다.

    밤 12時의 密林은 30cm 앞도 보이지 않는 漆黑이었다. 불을 켜면 發覺될 수 있다는 브로커의 警告에 아주 危急한 때가 아니면 불을 켜지 않았다. 나는 赤外線 感知 機能이 달린 小型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카메라 錄畫(REC) 버튼에 들어오는 빨간 불을 가리기 위해 껌을 씹어 붙였다.

    나무와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을 反復하는 길은 身體 健康한 男性인 내게도 쉽지 않았다. 더 큰 恐怖는 어둠이었다. 내디디는 발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오로지 소리와 감에만 依存해서 앞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

    “악!”

    외마디 悲鳴과 함께 누군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윤경 氏인 것 같았다. 呻吟조차 나지 않았다. ‘크게 다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0餘 m 낭떠러지였지만 등 쪽으로 떨어진 德에 메고 있던 가방이 에어백 노릇을 해준 模樣이었다.

    密林을 빠져나가는 데 2時間 半 程度 걸릴 것으로 豫想했지만 時間이 遲滯되면서 꼬박 4時間이 걸렸다. 혜미는 4時間 동안 한 番도 울지 않고 조용히 粉紅 氏의 등에 업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粉紅 氏였다. 아이를 업고 長靴를 신은 狀態였는데도 늘 맨 앞에서 달렸다. 登山靴를 신은 나보다도 빨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被害를 주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달렸으리라. 危機에서 더 빛을 發하는 놀라운 母性愛였다.

    흙湯물 벌컥벌컥 들이켜고

    그들이 면도칼을 휴지에 쌌다 “들키면 삼키고 죽갔습네다”

    脫北者들의 목숨 건 脫北 루트를 同行 取材한 채널A 製作本部 양승원(왼쪽), 강태연 PD

    密林에서 빠져나가니 江 PD가 기다리고 있는 乘合車가 보였다. 脫北者들은 安堵의 한숨을 쉬며 車에 올라탔다. 나는 마음이 躁急한 狀態였다. B局에서는 나도 脫北者들과 마찬가지로 密入國者 身分이기 때문에 날이 밝기 前에 密林을 거슬러 A國으로 돌아가야 한다. 두어 時間 뒤면 날이 밝는다. 密林 속에서 날이 밝으면 現地 軍人들에게 들킬 憂慮가 크다.

    江 PD에게 只今까지 撮影한 映像이 담긴 메모리카드를 넘기고 急히 몸을 돌려 어두운 密林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낭떠러지를 데굴데굴 굴렀다. 精神을 차려보니 어둠 속에 혼자였다. 길을 案內했던 브로커와 함께 돌아가야 하는데,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러봤지만 對答이 없었다. 電話機를 켜보니 通話圈 離脫地域이었다. 더 깊은 곳으로 잘못 들어갈까봐 움직이지도 못한 채 20分이 지났다. 더는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떨어졌던 길을 되짚어 움직였다. 멀리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토록 찾던 브로커였다.

    반가움을 表示할 새도 없이 우리는 뛰어야 했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지만 速度는 두 倍였다. 숨이 턱까지 찼지만 조금 있으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 죽어라 달렸다. 2時間 만에 우리는 A國에 無事히 到着했다. 땅에 고인 흙湯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살았다는 安堵感에 歡呼聲이 절로 나왔다.

    날이 밝자마자 A國 出入國事務所를 통해 B國으로 건너갔다. B國 安家에 모여 있던 一行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問題는 어린아이들이었다. 고된 旅程을 겪으면서 아이들의 健康狀態는 많이 나빠져 있었다. 10個月짜리 혜미와 진혁이의 狀態가 特히 좋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과 혜미 엄마를 B國의 大韓民國 大使館에 맡겼다. 最終 目的地인 泰國까지 가서 難民申請을 하는 것이 더 빨리 韓國에 올 수 있는 方法이긴 하지만, 더 以上 아이들에게 힘든 길을 가게 할 수는 없었다.

    脫北 一行은 10名으로 줄었다. 이제 江을 건너면 泰國이다. 江幅은 漢江보다 조금 좁은 程度지만 水深이 깊다. 우리는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3名씩 작은 나룻배에 올라탔다. 멀리 江가에는 飮食店들이 華麗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人跡 없는 江가에 배를 대고 올라갔다. 至難한 旅程이었다. 윤경 氏는 눈물을 훔치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脫北者들은 警察署로 向했다. 나는 다시 배를 타고 B國으로 돌아가야 했다. 배를 타고 가고 있는데 脫北者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兩 室長님! 고맙습니다!”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웃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채널A에서 1月 13日 첫 放送한 ‘特別取材 脫北’의 反應은 뜨거웠다. ‘목숨을 건 PD’라며 分에 넘치는 稱讚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목숨을 건 것은 내가 아니라 15名의 脫北者다. 나는 但只 그들과 同行했을 뿐이다.

    나는 外交通商部와 統一部를 통해 진혁이가 언제 韓國에 들어오는지 每日 確認했다. 그러던 中 진혁이가 韓國에 들어왔다는 情報를 接했다. 外交部를 擔當하는 동아일보 記者가 이 情報가 事實이라고 確認해줬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진혁이는 合同訊問을 받은 後 脫北者 定着支援施設인 하나院에 入所했다고 한다. 앞으로 하나圓 內에 있는 ‘하나둘學校’에서 敎育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뒤에는 未成年者인데다 保護者도 없기 때문에 保護施設에서 지낼 可能性이 높다.

    인터넷에는 진혁이를 入養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感謝한 일이다. 진혁이는 우리가 想像하기 어려운 生活을 해온 아이다. 나는 그 아이가 北韓에서의 生活을 잊고 살아가길 바란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關心이 진혁이만을 向한 同情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視聽者가 “진혁이가 韓國에 돌아온 다음 이야기도 꼭 보여달라”고 要請했다. 나 亦是 ‘特別取材 脫北’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대로 마무리되려면 진혁이가 우리 땅을 밟고 새로운 生活에 適應해나가는 모습까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다.

    ◆ 채널A 다큐 ‘特別取材 脫北’은…

    1月 13日 채널A가 放送한 ‘特別取材 脫北’이 連日 話題다. 放送이 나간 後 製作陣 앞으로는 脫北者들을 돕고 싶다는 問議가 殺到하고 있고, 後續 製作 要請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韓國 放送 史上 最初로 2名의 PD가 20日間 脫北者들과 同行하며 死線을 넘나드는 15名의 集團 脫北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1部 ‘江을 건넌 사람들’, 2部 ‘마지막 國境’ 等 總 2部로 製作된 이 다큐는 채널A 홈페이지(www.ich annela.com)에서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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