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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築家 김원, 京畿道 구리시에 박완서 資料館 짓는다|신동아

建築家 김원, 京畿道 구리시에 박완서 資料館 짓는다

콘셉트는 品格·내실, 겉치레 싫어한 故人 뜻 따라 公共圖書館 附屬 建物로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1-09-21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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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故) 박완서 作家가 他界 前까지 살았던 京畿道 구리시에 故人의 삶과 文學을 기리는 資料館이 建立된다. 國立國樂堂, 獨立記念館 等을 設計한 建築家 김원氏가 責任을 맡았다.“떠들썩한 文學觀은 싫다”던 作家의 生前 뜻에 따라 管內 圖書館 附屬 建物 形式을 擇했지만, 金氏는 “素朴하되 壅塞하지 않은 空間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건축가 김원, 경기도 구리시에 박완서 자료관 짓는다
    “先生님은 언제 어디서나 웃으셨다. 素朴한 웃음의 原形 같은 表情. 그리고 가냘프면서도 若干 움츠린 어깨. … 움츠린 어깨 아래로 兩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곳 웃는 분이 박완서 先生님인 것이다.”

    作家 구효서氏가 故 박완서 先生을 追慕하며 ‘현대문학’에 寄稿한 에세이 ‘지난 겨울은 추웠네’의 한 部分이다. 지난 1月 박완서 先生이 他界했을 때 公開된 影幀 속에서도 作家는 이렇게 웃고 있었다. 故人을 記憶하는 이들은 作家가 그 微笑만큼이나 素朴하고 ‘가지런한’ 이였다고 말한다.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그는 生前에 지어놓은 이야기만 남긴 채 먼 길을 떠났다. 애初에 구리시는 故人이 他界 前까지 살았던 管內 아치洞에 ‘박완서 文學마을’을 造成하려 했다. 自宅 周圍에 文學觀, 文學公園, 文學碑를 만들고 作家의 散策路를 따라 ‘文學 둘레길’을 닦겠다는 計劃도 세웠다. 그러나 맏딸인 隨筆家 呼冤叔氏 等 遺族들이 “어머니가 願치 않으실 것”이라며 鄭重하게 拒絶함으로써 作家는 冊으로만 이름을 남기게 됐다.

    9月 中旬, 秋夕을 앞두고 故人의 自宅에서 胡氏를 만났다. 只今은 代를 이어 딸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는 “어머니가 生前에 ‘나중엔 네가 여기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記念館이나 文學館 만들지 말고 그냥 살아라’ 하신 게 돌아보면 어머니의 遺言이었다”고 했다. 作家의 他界 後 出刊된 冊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序文에서도 胡氏는 이러한 어머니의 뜻을 밝혔다.

    “차가운 돌로 된 名牌와 記念館보다는 따뜻하게 家族이 모여 숨을 쉬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食卓을 차리고 葡萄酒 盞을 부딪히기를 바라新 게 아닌가. 새 生命 아기가 태어나고 자라 盧할머니가 무릎을 꿇고 가꾸던 잔디 위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발에 흙을 묻히기를 꿈꾸신 게 아닐까.”



    冊 쓰는 할머니

    건축가 김원, 경기도 구리시에 박완서 자료관 짓는다
    特히 作家는 當身의 이름이 華麗한 文學觀을 통해 記憶되는 것을 避하려 했다. 胡氏에 따르면 生前에 地方自治團體 等에서 文學觀을 짓자는 提案을 해올 때마다 “나는 冊으로 充分하다”며 拒絶했다.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림 같은 건 保管하려면 空間이 必要하지만 冊은 얼마나 심플하냐. 나는 冊으로 남는다. 冊이 있으니 나를 記憶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作家가 生前에 單 한 番, 自身의 이름을 許諾한 곳이 있다. 구리시 刃創圖書館의 ‘박완서 資料室’이다. 구리시는 2009年 圖書館 內에 66㎡ 規模의 房을 만들고 作家를 記念하는 空間으로 꾸몄다. 데뷔作 ‘羅牧’의 初版을 비롯한 出刊 書籍과 親筆 原稿, 寫眞 等을 展示한 이 資料實은 只今도 그 모습 그대로 運營 中이다. 胡氏는 “事實 그때 나는 反對하는 마음이 있었다. 已往 하실 거라면 좀 더 좋은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마을에 있는 公共圖書館 아니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고 回顧했다.

    作家는 生前에 自宅 近處 마을會館에 冊 1000卷을 寄贈했을 程度로 ‘洞네 圖書館’을 아꼈다. 胡氏는 구리시에서 ‘박완서 마을’ 造成 計劃을 發表했을 때 어머니의 그 資料館이 떠올랐다고 했다.

    “아이들이 와서 冊을 읽으며 ‘作家 할머니’에 對해 알게 되는, 작지만 알찬 空間을 願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兄弟들 意見도 마찬가지여서 구리시에 ‘새로 뭔가 짓는 것을 願치 않는다. 이미 마련돼 있는 資料室을 잘 가꿔달라’는 뜻을 傳했습니다.”

    건축가 김원, 경기도 구리시에 박완서 자료관 짓는다

    九里市 아치울마을 自宅에서 딸 呼冤叔氏와 對話를 나누고 있는 生前의 박완서 作家.

    資料館 建立 計劃은 그 後에 나왔다. 정선자 九里市立圖書館腸은 “박완서 先生 他界 後 資料室을 찾는 이가 크게 늘었다. 더 많은 이가 利用할 수 있도록 規模를 擴大하면 좋겠는데 方法이 없을까 생각했다”고 밝혔다. 亦是 公共圖書館人 구리시 討平圖書館 內 敷地에 ‘資料館’ 形態로 옮겨 짓는다면, 故人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規模를 키우고 品格은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討平圖書館은 作家의 自宅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故人이 圖書館 開館 行事에 參席한 因緣이 있다. 平素 散策 삼아 圖書館 옆 長子湖水公園을 자주 거닐기도 했다. 그 때문에 이 公園은 구리시가 애初에 造成하려던 ‘박완서 文學 둘레길’ 코스에 들어 있기도 했다. 胡氏는 “구리시 쪽의 說明을 듣고 나니 遺族으로서도 拒絶할 理由가 없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生前에 許諾하신 空間인 만큼 잘 運營되도록 돕는 게 子息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以後 資料館 建立은 急물살을 탔다. 구리시는 追更을 통해 豫算을 마련했고, 9月14日 김원 ‘建築環境硏究所 廣場’ 代表가 設計를 맡기로 確定됐다. 國立國樂堂·獨立記念館 等을 지은 金 代表가 525㎡(藥 159坪) 規模로 豫定된 公共圖書館 附屬 建物의 建築을 맡은 것은 異例的인 일이다. 그러나 金 代表는 “구리시의 電話를 받자마자 ‘하겠다’고 했다. 박완서 先生을 記念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 自體가 榮光”이라고 했다.

    “全北 高敞에 있는 미당詩文學觀度 제가 지었습니다. 高敞郡守가 中學校 恩師인데 ‘設計費 工事費 合쳐 4億원밖에 없다. 이래도 할 수 있겠느냐’ 하시더군요. ‘當然하지요’ 말씀드리고 바로 現場에 내려갔어요. 미당의 生家 옆 文學觀 터에 가만히 서 있으려니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집디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割이 바람’이라던 미당의 詩 ‘자화상’李 떠올랐습니다.”

    金 代表의 말이다. 이 첫 느낌이 設計의 端緖가 됐다. ‘높이 올라가는 展望臺를 만들자, 바다가 보이고 바람이 느껴지고 그래서 ‘자화상’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空間을 짓자.’ 미당詩文學觀의 18.35m 展望臺는 이렇게 誕生했다. 꼭대기에 서면 누구나 ‘자화상’의 그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좋은 文學觀이 꼭 巨大한 建物일 必要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當時 豫算 問題로 露出 콘크리트 展望臺에 아무 治粧도 할 수 없었는데, 代身 심은 담쟁이가 壁을 타고 올라가 이제는 어떤 裝飾보다도 近似한 마감材가 됐습니다. 豫算 적고, 땅이 좁은 것은 좋은 建築을 하는 데 아무 障礙가 되지 않습니다.”

    박완서의 네 男子

    金 代表가 記者를 만난 날은 마침 그가 구리시 討平圖書館을 막 踏査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그는 “市 關係者는 圖書館 附屬建物이라 空間이 너무 좁지 않은지 繼續 걱정하던데, 나는 마음에 들었다. 박완서 先生의 名聲에 비춰 決코 壅塞하지 않은 資料館을 만들 自信이 있다”고 했다.

    “景福宮이 紫禁城에 비해 작다고 韓國 建築이 보잘것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巨大한 聖堂보다는 아무 裝飾 없는 프란체스코 聖人의 企圖室이 더 큰 感動을 주는 法이지요.”

    그가 構想하는 ‘박완서 資料館’이 바로 그런 空間이다. 그는 “圖書館 內 敷地에 서니 先生이 살던 아치울 마을이 건너다 보였다. 先生이 散策을 다녔다는 길도 咫尺이더라. 땅을 통해 先生의 삶과 이야기가 傳해져오는 게 참 좋았다”고 했다.

    “아직 建築 콘셉트를 定하지는 못했어요. 오늘이 구리시에서 提案을 받은 지 꼭 7日째 되는 날입니다. 元來 생각하는 게 느린 便이라 한참은 더 熟成시켜야 할 것 같아요. 그 過程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요즘은 하루 終日 先生에 對해 생각하는 것 같아요. 先生의 作品뿐 아니라 文人들이 先生에 對해 쓴 글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건축가 김원, 경기도 구리시에 박완서 자료관 짓는다

    京畿道 구리시 刃創圖書館에 마련된 박완서 作家 資料室. 구리시는 이 空間을 ‘資料館’으로 擴大 移轉할 計劃이다.

    이 過程에서 떠올린 키워드는 ‘박완서의 네 男子’다. 先生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6·25戰爭의 慘禍 속에서, 아버지 代身 믿고 依支하던 오빠를 또 잃었다. 家庭을 꾸리고 安定을 찾은 뒤엔 男便이 肺癌으로 世上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아들마저 20代 中盤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先生은 生前에 한 글에서 “내 새끼 中의 하나가 봄의 絶頂처럼 가장 아름다운 時期에 이 世上에서 突然 사라졌다. 그런 일을 當하고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도 곧 뒤따라가게 될 테고, 가면 만날 걸, 하는 希望 때문이었다. 만나서 第一 먼저 하고 싶은 건 抱擁도 嗚咽도 아니다. 때려주고 싶다. 요놈, 요 나쁜 놈, 뭐가 急해서 에미를 앞질러갔냐 응? 그렇게 나무라면서 내 손바닥으로 그의 종아리를 철썩철썩 때려주고 싶다. 내 손바닥만 아프고 그는 조금도 안 아파하고 싱글댈 것이다. 나는 내 손바닥의 아픔으로 그의 靑銅기둥 같은 종아리를 確認하고 싶다”고 적었다. 金 代表는 이런 글을 읽으며, 예전에 미처 몰랐던 故人의 삶을 ‘工夫하며’ 요즘 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했다.

    “生前에 先生을 몇 番 뵌 적이 있어요. 함께 食事한 記憶도 있고요. 그런데 그 조그만 夫人의 따뜻하고 수줍은 모습 속에 이런 아픔이 있는 줄은 想像도 못했습니다. 自己한테 所重한 것을 누군가가, 하나씩 順序대로 빼앗아간 것 아닙니까. 아버지부터 아들까지 次例次例. 그때마다 當身의 하늘이 무너졌을 거예요. 그 經驗을 하면서 어떻게 그토록 고운 글을 썼을까, 到底히 참을 수 없는 憤怒 같은 게 있었을 텐데 그걸 어떻게 삭였을까,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벌떡 깹니다. 當分間은 先生의 삶에 對해, 또 네 名의 男子에 對해 좀 생각해봐야겠다 마음먹고 있습니다.”

    金 代表는 全南 寶城郡의 太白山脈文學觀도 設計한 人物이다. 이때 그는 山줄기를 끊어 巨大한 洞窟을 波高 建物을 땅 밑으로 집어넣었다. “‘太白山脈’처럼 뼈아픈 이야기를 記念하는 空間을 만들면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면 안 된다. 사람들이 文學觀에서 建築이 아니라 아픔, 分斷, 아직도 끝나지 않은 戰爭을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文學觀 兩옆으로 琉璃 塔을 올리고 밤마다 벌겋게 불을 밝힌 것은 抑鬱한 冤魂들, 수많은 죽은 이의 靈魂이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떠 있는 모습을 表現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文學觀은 이렇게 作品과 作家의 삶을 담는 空間이다. 規模가 작을지언정, 資料館일지언정 박완서 先生을 위한 空間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時間이 갈수록 아름답게

    건축가 김원, 경기도 구리시에 박완서 자료관 짓는다
    金 代表는 “아직은 資料館을 통해 先生의 文學을 보여줄지, 아니면 삶을 보여줄지 決定하지 못했다. 이 資料館이 事實上 文學觀과 같은 구실을 하는 거라면 그 안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돌아갈지 아는 것도 重要하다.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이 ‘박완서 資料館’에 期待하는 內容을 알아보고 하나씩 생각의 갈래를 整理하려 한다”고 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只今은 ‘討平圖書館 內 박완서 資料館’으로 始作하지만, 언젠가는 그 空間이 ‘박완서 資料館이 있는 討平圖書館’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作家의 딸 胡氏의 바람도 그렇다. 그는 資料館이 素朴하지만 精誠과 眞心이 담긴 空間, 歲月이 흐르고 깊이가 담길수록 아름다워지는 空間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直接 가보지는 못했지만 에밀리 브론테나 괴테의 文學觀에 對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作家가 世上을 떠나자마자 그곳이 바로 巨創한 文學觀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後孫들의 삶은 이어지고, 作家를 잊지 못하는 追慕客들은 그곳을 찾아오고…. 그렇게 서로의 時間과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自然스레 永遠히 作家를 記念하는 空間으로 남게 된 거죠. 저는 어머니도 그렇게 記念되면 좋겠어요. 제가 只今 어머니의 집에 繼續 사는 건 어쩌면 그 所任을 하기 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痕跡을 찾아 이곳까지 찾아오는 學生들에게 기꺼이 門을 열어주고 있어요. 언젠가 제가 世上을 떠나면 누군가 또 이 役割을 하게 되겠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곳이 어머니의 記念館이 된다면,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現在 구리시는 討平圖書館 隣接 敷地를 買入해 ‘박완서 資料館’ 規模를 좀 더 擴大하는 方案을 檢討 中이다. 그러나 亦是 基本 바탕은 ‘品格과 內實’이다. 韓國 文學에 큰 足跡을 남긴 大作家이면서도 늘 몸을 움츠린 채 수줍게 웃던 故人의 微笑만큼, 따뜻하면서도 아름다운 空間이 完成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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