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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陶淵明의 詩, 陶瓷器, 마오쩌둥 新中國|新東亞

한 글字로 본 中國 장시省

? 陶淵明의 詩, 陶瓷器, 마오쩌둥 新中國

中國 히트 商品 製造機

  • 글 · 寫眞 김용한|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7-05-19 10: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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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歷史 속 長詩는 줄곧 邊두리다. 오늘날에도 큰 注目을 받지 못한다. 長詩에 關한 뉴스는 洪水, 가뭄 等 天災地變과 鳥類인플루엔자, 돼지 斃死, 蜜柑 凶作 等 農業 記事가 많다. 그러나 長詩는 世界的 히트 商品을 낳았다. 유럽을 휩쓴 ‘中國 陶瓷器’를 낳았고, 아름다운 場市의 自然은 明示가 되고, 마오쩌둥의 新中國을 품었다.
    長詩(江西)省 廬山에 갈 때 中國人 親舊와 同行했다. 그는 主張(九江)의 大學인 口腔學院(九江學院) 뒷山이 廬山이니까 口腔學院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口腔學院에서 그가 세 名의 女學生에게 “여기 뒷山에 어떻게 가느냐”고 묻자,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우리 學校에는 뒷山이 없다”고 答했다. 그가 “여기 뒷山이 여산 아니었느냐”고 묻자 한 女學生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驚愕하는 表情을 지었다.

    多幸히 口腔學院과 廬山은 實際로 가까운 距離였다. 나는 中國人 親舊에게 “왜 그런 失手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장시省 南部의 中心인 간저우(?州)에서 大學을 다녔는데, 간저우代에는 뒷山이 있으니, 다른 大學에도 뒷山이 있을 것이고, 口腔學院은 廬山과 매우 가까우므로 口腔學원의 뒷山은 곧 廬山日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참 稀罕한 論理 展開였다.

    場市의 또 다른 名物은 우위안(?源)의 油彩畫다. 山골 가득 滿發한 油彩畫는 숱한 이를 끌어들인다. 우위안의 油彩畫가 언제 피냐고 묻자, 그는 6月쯤 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만 믿다가 油彩畫 구경 時機를 놓쳤다. 우위안의 油彩畫는 3月 中旬에 핀다. 그는 美大生이라 寫生 實習으로 優位안에 가봤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記憶하지 못했다. 오늘의 敎訓 하나. “現地人이라고 恒常 現地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장시省의 略稱은 ‘江 이름 감(?)’이다. 장시省 젖줄 감江(?江)에서 따온 글字다. 감江은 산시·후베이의 한手(漢水), 後難의 霜降(湘江)과 함께 長江 中流의 3代 支流다. 감江은 場市의 等을 훑고 올라가 中國 最大의 淡水湖인 鄱陽湖(?陽湖)에서 暫時 숨을 고르고는 長江에 合流한다. 長詩를 ‘감江과 鄱陽湖의 땅(??大地)’이라고 할 만큼, 감江과 鄱陽湖는 場市의 象徵이다.

    江南은 ‘長江의 南쪽’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事實上 ‘江南’이라 할 때 떠올리는 地域은 장쑤省과 貯藏性의 江東(江東)이다. 강동은 오(吳)와 月(越)의 悽絶한 死鬪가 일어났고, 項羽는 江東의 8000 自制를 이끌고 中國을 制霸했으며, 江東의 虎狼이 孫堅을 筆頭로 손책·孫權·注油 等이 活躍한 곳이다.





    吳의 머리, 初의 꼬리(吳頭楚尾)

    그에 反해 長詩, 卽 講書 地方은 生疏하다. 長江의 南쪽에 있으니 江南은 江南이지만 어딘지 江南스럽지 않다. 江南의 要件은 풍요로운 富(富)와 華麗한 文化다. 講書는 江東의 풍요로움이 없어 江南 待接을 받지 못한다.

    이처럼 長詩는 錚錚한 이웃들 때문에 存在感이 弱하다. 長詩는 東쪽으로 貯藏·푸젠성, 南쪽으로 광둥省, 西쪽으로 湖南省, 北쪽으로 후베이·안후이省을 接하고 있다. 長詩는 多彩로운 個性을 자랑하는 이웃들 틈에 끼어 있어서, 다양한 사람과 文化가 뒤섞인다. 그래서 長詩는 ‘吳의 머리이고 秒의 꼬리이며, 月의 집과 民意 뜰(吳頭楚尾,?戶?庭)’이다.

    장시省에는 감江과 鄱陽湖를 爲始해 2400餘 줄기의 河川이 흐르고 곳곳에 湖水가 있어 生産力도 제법 있다. 그러나 平野地帶가 20%에 不過해 山은 많고 밭은 적다(山多田少). 어정쩡한 位置에 曖昧한 生産力. 그래서 長詩는 中國史에서 主人公이 아닌 助演이었다.

    그래도 場市의 아름다운 算數는 큰 사랑을 받았다. 中國人들은 말한다. “장시省에 餘산이 없으면 쓸쓸한 長江과 湖水만 남고, 안후이省에 黃酸이 없으면 하늘의 神仙들이 내려올 곳이 없다.”

    蘇東坡는 變化無雙한 廬山을 보고 “여산의 참모습 알기 어렵다(不識廬山眞面目)”고 讚歎했고, 二百은 廬山瀑布를 誇張되게 描寫했다.

    “瀑布가 나는 듯 곧바로 떨어져 三千 隻, 銀河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무엇보다도 場市의 大詩人 陶淵明이 武陵桃源의 傳說을 담은 ‘桃花源記(桃花源記)’를 남겨 場市의 神祕로운 이미지를 限껏 부풀렸다. 게다가 陶淵明은 縣令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호기롭게 말했다.

    “내 어찌 닷 말의 쌀에 허리를 굽히겠는가?”
    陶淵明의 말은 ‘쥐꼬리’만 한 月給에 매여 사는 月給쟁이들의 心琴을 울린다. 닷 말의 쌀을 버리고 武陵桃源을 擇한 사람. 이렇게 보면 陶淵明은 俗世에 關心 없는 田園詩人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狀況이 그리 簡單하지는 않다.


    “어찌 닷 말 쌀에 허리 굽히나”

    私馬氏의 秦나라가 三國을 統一한 지 얼마 안 돼 안으로는 ‘八王의 난’(八王之亂·제위 繼承 問題를 둘러싸고 벌어진 皇族들의 內亂)이 일어나고 밖으로는 異民族들이 쳐들어왔다. 秦나라는 長江 아래로 내려가 避難 政府를 꾸린다. 이것이 東進(東晉)이다. 長杠 너머 異民族의 威脅은 多少 줄어들었지만, 皇帝는 虛弱했고 叛亂이 잇따랐다. 이때 陶淵明의 曾祖父인 道間은 叛亂 鎭壓에 큰 功을 세워 寒微한 家門 出身이면서도 兵權을 掌握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權門勢族들은 微賤한 家門이 떠오르는 것을 極力 沮止했다. 한 貴族은 度看過 함께 수레를 탄 貴族을 비웃었다.

    “어찌 이런 小人과 함께 수레를 탑니까?”
    도간이 죽은 後 權門勢族의 逼迫은 더욱 심해져 그 後孫들은 謀陷으로 殺害當하기도 했다. 陶淵明이 태어났을 때 陶氏 家門은 힘없는 선비 一族에 不過했다. 陶淵明은 道間의 曾孫子이며 名士 孟哥의 外孫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陶氏 一族의 中興에 對한 野望도 隱密히 품고 있었다. 靑年 陶淵明은 “큰 뜻은 死海를 달리고, 날개를 활짝 펴고 멀리 날아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歲月은 好意的이지 않았다. 동진은 환縣과 劉裕 等의 잇따른 叛亂을 겪으며 假死狀態에 이르렀고, 叛亂이 또 다른 叛亂에 依해 엎어지는 渦中에 反逆者의 嫌疑를 쓰고 處刑되는 일이 茶飯事였다. 그렇다고 無酌定 出仕를 拒否하기도 힘들었다. 謀反者는 自身의 쿠데타를 正當化하기 위해 有名 人士를 招聘했고, 이 招聘을 拒絶하면 禍를 입게 마련이었다. “가을 풀 아직 노랗게 시들지 않았지만, 따뜻한 바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下水上限 時節이었다.

    그런 亂世 속에서도 權門勢族의 텃勢는 決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陶淵明은 靑雲의 꿈을 안고 29歲에 朝廷에 나아갔으나, 41歲에 縣令職에서 물러났다. 陶淵明의 12年 官職 生活은?? 위태롭고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陶淵明은 官職에서 물러나며 노래했다.

    “오랫동안 새欌 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다시 自然으로 돌아왔네.”

    陶淵明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이 自傳的 隨筆은 이렇게 始作한다. 出身과 家門을 重視하던 當代 社會를 限껏 비웃은 말이다.

    “先生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또 그의 姓과 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以後 陶淵明은 悠悠自適한 田園生活과 술을 樂으로 삼았다. “世上에 바라는 바 없고, 오직 좋은 술과 오래 사는 것”만을 바랐다. 後날 白居易는 陶淵明을 이렇게 追慕했다.

    “술을 사랑하지 名譽 사랑하지 않고, 술 깨는 것 걱정하지 가난 걱정 않았다네. 다른 點은 따르지 못하겠지만, 얼큰히 醉하는 건 본받으려네.”



    陳友諒, 張士誠, 朱元璋

    ‘三國志演義’에서 형주(후베이)의 遊標가 죽고 曹操가 형주를 攻掠하기 始作할 때, 孫權은 이미 施賞(장시省 主張)에 軍隊를 이끌고 와 있었다. 형주를 차지하고 曹操의 南進을 막을 생각이었으나, 형주의 油種이 싸우지도 않고 曹操에게 降伏하는 바람에 손쓸 틈이 없었다.

    이때 曹操가 孫權에게 降伏을 提議하자, 孫權 陣營은 싸우자는 波와 降伏하자는 派로 갈렸다. 孫權 亦是 莫强한 曹操의 軍勢 앞에 決斷을 내리지 못했다. “나라 안의 일은 場所와 相議하고, 나라 밖의 일은 周瑜와 相議하라”는 손책의 遺言을 떠올린 孫權은 罷養에 사람을 보내 注油를 불렀다. 그러나 急迫한 情勢를 感知한 注油는 이미 孫權에게 오고 있었다.

    整理해보자. 孫權은 根據地인 會計(장쑤省 쑤저우)를 떠나 시상에 前進配置했다. 注油는 장시省 鄱陽湖에서 水軍을 훈련시키다가 시상에 와서 曹操와 싸우자고 主張했고, 곧바로 후베이省 赤壁으로 출격해 曹操의 軍隊를 擊破했다. 卽, 長詩는 오나라 政治의 中心 장쑤省과 防禦의 中心 후베이를 잇는 地域으로 平素 軍隊를 훈련시키다가 有事時 어디로든 수월하게 갈 수 있는 地域이었다.

    長江의 要旨를 잇는 장시省 鄱陽湖는 元나라 末에 大激戰의 現場이 된다. 元나라의 苛酷한 政治에 大飢饉까지 겹치자, 中國 各地에서 群雄이 일어났다. 그中 長詩 主張(九江)의 陳友諒, 장쑤省 쑤저우(蘇州)의 張士誠, 난징(南京)의 朱元璋이 돋보였다.

    陳友諒은 후베이·後難·長詩에 안후이省 南部 一帶를 掌握해 最大 勢力을 자랑했다. 張士誠이 차지한 장쑤省 쑤저우와 저장省 一帶는 長江 三角洲의 穀倉地帶이자 으뜸가는 商業地域이어서 當時 中國 總 租稅額의 3分의 1을 내던 地域이었다. 그러나 朱元璋은 이처럼 엄청난 兩大 强敵 사이에 包圍됐음에도 屈하지 않았다. 卽, 陳友諒은 剛했고, 장사姓은 富裕했으며, 朱元璋은 鬪志가 넘쳤다.

    모든 與件은 陳友諒에게 유리해 보였다. 陳友諒은 지용(智勇)을 兼備한 豪傑이었고, 이미 群雄 最大의 版圖를 構築했다. 長詩에서 長江의 順流(順流)를 타면 朱元璋의 난징을 거침없이 攻略할 수 있었다. 또한 장사成果 함께 東西에서 挾攻한다면, 가뜩이나 勢力이 弱한 朱元璋을 깰 수 있다.

    陳友諒은 큰 戰艦만 100隻, 작은 傳함 數百 隻을 이끌고 朱元璋을 쳤다. ‘一齊히 槍을 던지면 江물을 끊고, 배는 꼬리를 물고 千里를 잇는’ 威勢 앞에 朱元璋 軍隊도 크게 怯을 먹었다. 投降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몰래 달아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朱元璋의 張子房人 遺棄는 毅然했다. 張士誠은 큰 野心이 없고 奢侈享樂에 젖어 있어 軍隊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재빨리 陳友諒을 擊破한 뒤 장사性을 平定하고 北으로 中原을 醉해 王業을 이룬다는 戰略이었다. 朱元璋은 陳友諒의 軍隊를 거짓 降伏으로 꾀어낸 다음 埋伏 攻擊으로 全軍을 殲滅하고 2萬餘 名을 捕虜로 잡았다. 陳友諒은 疑心이 많고 度量이 작아 재주 있는 사람을 꺼리고 못난 사람을 감쌌기 때문에 內部에 不和가 잦았다. 朱元璋은 陳友諒의 不滿勢力을 吸收해가며 貰를 不利니, 朱元璋의 勢力은 날로 剛해졌고 陳友諒의 勢力은 날로 弱해졌다.


    鄱陽湖 最後의 決戰

    火가 난 陳友諒은 큰 戰艦을 數百 隻 만들었다. 큰 배는 3000名, 작은 배는 2000名을 태울 수 있는 巨大 戰艦이었다. 陳友諒과 朱元璋은 鄱陽湖에서 最後의 決戰을 벌였다. 陳友諒이 自稱 60萬 大軍을 이끌고 오자, 朱元璋은 20萬 軍隊로 36日間 싸웠다. 朱元璋 君의 배는 작지만 機動性이 좋아 火砲 武器를 十分 活用해 化工(火攻)과 ‘치고 빠지기’ 戰法을 竝行했다.

    그러나 朱元璋의 被害도 적지 않았다. 7月 21日 하루 동안 陳友諒軍은 6萬 名, 주원將軍은 7000名이 죽었다. 朱元璋이 戰鬪를 督勵할 때 몇 次例나 곁에 있던 僞史(衛士·警護員)들이 戰死했고, 타고 있던 배가 擊沈되고 坐礁되는 等 朱元璋 스스로도 숱한 危機를 겪었다.

    鄱陽湖 大田은 原말 群雄戰爭 中 가장 돋보이는 한판 勝負였고, 朱元璋 一生 最大의 고비였다. 危急한 狀況이었던 탓일까. 이때 長詩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朱元璋은 흰소리를 했다. “내가 皇帝 자리에만 오르면 長詩 사람 모두를 四寸兄弟(老表)로 모시겠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後날 朱元璋은 明 太祖가 된 後, 長詩가 深刻한 洪水 被害를 입어 長詩 村老들이 歎願瑕疵 장시省의 稅金을 3年間 免除했다. 이때부터 ‘場市의 四寸兄弟(江西老表)’라는 呼稱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美談의 끝은 그다지 깔끔하지 않다. 1398年 朱元璋은 長詩 사람들이 “些少한 일도 잘 참지 못하고 直接 首都까지 와서 訴訟狀을 提出한다”고 叱責했다. 明나라 末 장시省의 한 評論家는 장시省의 聖徒 난창(南昌) 사람들이 “부지런하지만 베푸는 데에 인색하고, 義務感은 작은데 爭論을 좋아하며, 狡猾하게 말을 잘하고 送辭와 中傷謀略을 좋아한다”고 批評했다.



    場市의 四寸兄弟(江西老表)

    長詩人들에 對한 非難은 現代에도 相當히 남아 있다. 왕하이팅은 ‘넓은 땅 中國人 性格指導’에서 말했다.

    “長詩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辨明이 많다. 말에는 가시가 있고 刻薄하며 今方이라도 싸울 態勢다. 食堂에서 손님이 飮食을 注文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從業員에게 事情을 알아보면 그제야 注文한 飮食의 材料가 다 떨어졌다는 對答이 돌아온다…(중략)…변명만 잔뜩 늘어놓을 뿐 未安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왜 長詩 사람들에 對한 印象이 이토록 안 좋을까. 長詩는 平地가 적고 山이 많아 사람들이 일찍부터 外地로 나가 일했다. 明나라 선비 王舍城은 말했다.

    “장쑤·貯藏·푸젠 세 姓은 人口가 많은 데 비해 土地가 좁아 세 性을 다 合쳐도 중원의 한 性 面積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技術을 習得하지 못하면 입에 풀漆을 할 수가 없고, 技術이 있어도 外地로 나가지 않으면 팔 才幹이 없는 形便이다. 特히 長詩 地域은 그런 傾向이 더욱 두드러졌다.”

    明나라 旅行家 徐霞客은 天下 곳곳에 張詩人들이 있음을 알고 相當히 놀랐다. 明末淸楚 장헌충이 叛亂을 일으키며 쓰촨人을 大虐殺瑕疵, 淸나라는 쓰촨省 復舊를 위해 外地人의 移住를 奬勵했다. 그러자 “後光人(湖廣人)李 쓰촨을 채우고, 張詩人이 다시 後光을 채운다”는 말이 생겼다. 후베이·後難人들이 大擧 쓰촨으로 이주하子, 그 빈자리를 張詩人이 채웠다는 뜻이다.

    오늘날 허난省 사람들이 外地에서 가난한 農民공(農民工·農村을 떠나 都市에서 일하는 勞動者)으로 일하면서 外地人들에게 蔑視받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래도 허난은 人口扶養力이 뛰어난 中院이라 農民功을 輩出한 歷史는 改革開放 以後로 매우 짧다. 反面 張詩人들은 옛날부터 外地로 나가 일하면서 따가운 蔑視의 눈총을 받아왔다. 張詩人에 對한 偏見에는 이처럼 오랜 歷史가 있다.
    산시(山西)成果 안후이省度 狀況은 비슷했지만, 이 地域은 商業에 成功해 巨大 商人 組織인 眞相(晉商)과 휘上(徽商)을 탄생시켰다. 이에 反해 長詩는 商業에 그만큼 成功을 거두지도 못해 이미지를 改善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陶瓷器 메카’ 징더전

    그러나 場市의 自然이 決코 가난과 逆境만 안겨준 것은 아니다. 場市의 江山은 豐富하고 優秀한 陶瓷器 原料를 膳賜했다. ‘陶瓷器의 메카’ 징더전(景德?) 附近의 馬昌山은 ‘맑고 透明한 것이 玉과 같은’ 馬昌토를 주었고, 고령산(高嶺山)은 高嶺土를 주었다. 英語 카올린(kaolin)은 ‘陶瓷器를 製作하는 데 쓰이는, 부드럽고 고운 흰色 粘土’를 뜻하는데, 바로 高齡의 中國 發音 ‘가오링(高嶺)’에서 나온 말이다. 地名이 ‘陶土(陶土)’라는 普通名詞가 될 만큼 長詩는 卓越한 陶瓷器 生産地였다.

    場市의 潛在力은 豐富했고 일찍부터 個性 있는 陶瓷器를 만들었지만, 中原이 中國의 中心일 때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北方 遊牧國家人 金나라에 首都 카이펑을 함락당한 뒤, 南宋이 저장省 항저우를 首都로 삼으면서 江南은 中國의 中心이 됐다. 特히 南宋은 危機 狀況을 克服하고 政府와 軍隊의 財源을 마련하고자 輸出 産業을 育成했다. 징더전은 中國 陶瓷器의 中心으로 成長했다.

    元나라의 世界 征服은 單純히 領土 擴張이 아니라, 國境 없는 自由貿易 時代를 열었다. 원이 南宋을 征服한 後 陶瓷器는 重要 輸出品이 됐다. 징더전 陶瓷器는 크기, 模樣, 色깔, 裝飾 等에서 一大 變化를 겪었다. 元나라 特有의 遊牧文化에 主要 顧客인 아라비아·페르시아 文化가 스며들었다.

    中國은 傳統的으로 작고 얇은 個人 그릇을 選好했으나, 몽골族은 왁자지껄한 잔치와 祝祭에 쓸 크고 튼튼한 그릇을 좋아했다. 宋나라는 聽者를 좋아했지만, 元나라는 白瓷를 좋아했다.

    한便 中東의 이슬람敎는 奢侈를 警戒하기 위해 金·銀 食器를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自身을 誇示하고 싶은 것은 人間의 欲望이고, 손님을 잘 待接하고 싶은 것은 人之常情이다. 富者들은 金·銀 食器 代身 陶瓷器를 썼다. 當時 中東 陶瓷器의 品質은 中國 水準에 미치지 못해, 흰 바탕色을 漆하고 그 위에 페르시아山 코발트블루를 써서 멋을 냈다. 흰 바탕에 푸른 文樣의 페르시아 樣式이 징더전의 陶瓷器 技術과 만나 靑華白瓷를 탄생시켰다.

    ‘玉같이 희고 하늘처럼 푸르며, 거울처럼 透明하고 종이처럼 얇으며, 種과 같이 맑은 소리를 내는’ 징더전의 陶瓷器는 世界的 히트 商品이 됐다.

    明나라 淨化의 大遠征은 大帝國 中國을 東南아시아, 南아시아, 中東, 아프리카까지 널리 알려 中國 商品에 對한 需要를 觸發했다. 中東에서 큰 人氣를 얻은 陶瓷器는 유럽에서도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다.



    ‘中國 烈風’ 시누아즈리(Chinoiserie)

    近代 유럽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17~18世紀 유럽 貴族 사이에 일어난 中國風 趣味), 卽 中國 烈風이 불었다. 유럽의 貴族들은 中國의 緋緞옷을 입고, 中國의 陶瓷器에 中國의 茶를 따라 마셨다. 포르투갈 皇帝의 여름用 別宮인 리스본 산토스 宮殿에는 靑華白瓷房이 있다. 피라미드형 天障의 4面을 靑華白瓷 260點으로 빽빽하게 뒤덮은 房이다.

    네덜란드 東印度會社는 船長들에게 “中國 自己를 얻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라”는 命令을 내렸고, 유럽의 帆船들은 每年 數百萬 點의 陶瓷器를 輸入했다. 셰익스피어 戱曲에 나오는 한 俗物은 “中國 접시는 아니지만 宏壯히 좋은 거”라며 自身의 “3펜스짜리 접시”를 자랑했다. 빛을 사랑한 畫家 베르메르는 과일을 담은 中國 陶瓷器의 아름다운 形象과 文樣을 그리고, 접시 위에 反射된 窓門의 形象까지 섬세하게 담아냈다. 靜物畫家들에게 과일을 담은 中國 陶瓷器는 그림에 優雅한 氣品을 더해주는 必須要素였다.

    16世紀를 前後로 中東과 유럽의 힘이 逆轉돼, 17世紀 以後로는 유럽 市場의 消費가 이슬람圈을 앞질렀다. 自然스레 징더전의 自己에도 顧客의 要求에 따라 유럽 王室·貴族 家門의 文章, 라틴語, 宗敎畫 等이 새겨졌다. 징더전은 유럽 輸出用 가마를 따로 만들어 유럽 趣向의 自己를 大量生産했다. 이 自己들은 “Sapienti Nihil Novum(賢者에게 새로운 것이란 없다)” 等의 라틴語 經句, 예수의 誕生·十字架刑·復活·昇天 等 4代 테마가 그려졌고, 種類도 一般的인 食器부터 麥酒盞, 촛臺, 겨자 缸아리 等 유럽式 生活에 必要한 다양한 物品을 網羅했다. 個中에는 접시 밑바닥에 치마를 걷어 올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美女가 그려져 있는 自己도 있었다.


    新中國을 품은 정강산(井岡山)

    固有名詞 ‘China’는 ‘中國’을 말하지만, 普通名詞 ‘china’는 ‘陶瓷器’를 뜻한다. 어느새 中國과 陶瓷器가 同一視되기에 이르렀다. 中國의 邊두리 長詩는 逆說的으로 中國을 代表하는 商品을 낳았다. 그러나 永遠한 것은 없다. 文化의 힘도 結局 國力을 따라간다. 産業革命 以後 유럽의 힘은 中國을 凌駕했다. 中國은 더 以上 羨望과 東京의 對象이 되지 못했고, 陶瓷器 亦是 예전처럼 魅惑的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英國은 動物의 뼛가루를 利用한 본차이나(bone china)를 發明하고 工場制 大量生産을 통해 陶瓷器 最强者로 떠올랐다.

    淸나라가 崩壞한 後 中國은 列强에 威脅당하고, 안에서 地域 軍閥들이 割據하는 內憂外患에 시달렸다. 中國의 國富 쑨원(孫文)은 中國의 混亂을 종식시키기 위해 北伐을 斷行했다. 쑨원은 政派를 超越해 國共合作(國共合作)을 하며 統一된 中國을 꿈꿨다.

    쑨원의 後繼者 장제스는 順調롭게 北伐을 이끌어갔다. 그는 一旦 國共合作을 維持하기는 했으나, 쑨원과 달리 共産黨을 國民黨의 癌 덩어리로 여겼다. 1927年 3月, 南中國의 中心地인 난징과 상하이까지 손에 넣자, 北伐의 完成이 코앞에 다가왔다. 장제스는 1927年 4月 12日 상하이 共産黨과 勞動組合을 襲擊했고, 以後 勢力이 닿는 모든 곳에서 共産黨 撲滅 作戰을 벌였다.

    危機에 빠진 共産黨은 賭博을 벌였다. 中國의 都市와 農村 全域에서 蜂起를 試圖했다. 그러나 勝算 없는 싸움이었다. 國民黨 軍隊는 맨주먹 民衆의 散發的 蜂起를 簡單히 鎭壓했다. 自暴自棄性 自殺行爲와도 같은 8~9月 蜂起 中에 저우언라이의 난창 蜂起와 마오쩌둥의 湖南省 秋收 蜂起가 있었다. 秋收 蜂起의 失敗로 마오쩌둥과 1000名의 同志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軍事力의 重要性을 切感한 마오는 主張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軍事 問題에 最大의 關心을 기울여야 한다. 權力은 銃口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水滸誌’ 梁山泊의 再現

    黨 中央은 마오가 軍隊에 執着하며 ‘自中之亂을 일으킨다’며 批判했지만, 마오는 糖이 ‘軍事的인 問題를 無視하면서 同時에 大衆을 武裝化하려는 矛盾된 政策’을 펼친다고 批判하며 創社 攻擊 命令에 따르지 않았다. 마오는 90%의 勢力을 잃었고, 國共合作 崩壞로 國民黨 職銜을 잃었다. 命令 不服從으로 共産黨의 職責마저 잃었고, 甚至於 한때 共産黨員의 黨籍이 剝奪되기도 했다.

    1928年 여름, 마오는 故鄕 後難을 떠나 後難과 場市의 境界에 있는 정강산으로 逃亡쳤다. 絶壁으로 둘러싸인 바위투성이 山골 奧地로 길도 없고 수레도 없었다. 정강산으로 도망쳤다기보다 정강산에 갇힌 셈이었다.그러나 한 사람의 眞正한 價値는 逆境에 處했을 때 드러난다. 只今껏 錚錚한 先輩들에게 눌려 있던 풋내기 마오는 정강산에서 眞正한 政治家로 거듭났다. 正統 마르크스주의자인 천두슈 敎授는 ‘프티부르주아지’에 不過한 農民들은 革命의 主役이 될 수 없고, 오직 共産黨과 勞動者階級의 指導를 따를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오는 中國人의 大多數를 차지하는 農民이야말로 中國 革命의 主役이라고 보았다. 마오는 小銃 120梃을 빌리고 정강산 山積 600名과 流浪民을 받아들이며 솜씨 좋게 勢力을 불려나갔다.

    大都市 創社의 共産黨 代表는 “어떻게 山에 마르크스주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一喝했지만, 마오는 오히려 山이 重要한 根據地라고 생각했다. 國民黨이 天下를 支配한다고 해도? 邊두리 山골까지는 힘이 미치지 못한다. 共産黨이 山에 確固한 根據地를 마련하고 漸次 勢力을 넓혀나갈 수 있다. 바로 ‘水滸誌’ 梁山泊의 再現이다. 마오는 말했다.

    “根據地가 자리 잡은 地域과 部隊의 關係는 궁둥이와 사람의 關係와 같다.”

    일하는 것도 重要하지만 쉬는 것은 더욱 重要하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곧 지쳐 쓰러지고, 根據地가 없는 勢力은 곧 消滅한다. 共産黨·紅軍은 물고기와 같고, 人民은 물과 같다.

    마오는 정강산에서 富豪의 土地를 沒收해 農民들에게 分配하고 一律的으로 15%의 稅金을 받았다. 모든 苦難을 함께 똑같이 짊어지는 平等과 民主主義의 精神으로 劣惡한 狀況을 버텨나갔다.

    無謀한 軍事的 冒險을 하지 않고, 잘 도망치다가 재빨리 糾合해서 敵보다 兵力 數字가 많아졌을 때 攻擊하는 게릴라 戰術을 確立했다. 또한 “規律이 거의 없는 1萬 名의 烏合之卒”에게 정강산의 3代 規律을 불어넣었다.

    “命令에 服從하고, 가난한 農夫의 財産은 어떤 것도 빼앗지 말아야 하며, 沒收한 地主의 財産은 卽時 政府에 傳達해서 處理한다.”


    ‘마오의 戀人’ 虛쯔展 vs 장칭

    마오主義의 거의 모든 것이 이때 싹을 틔웠다. 정강산은 마오의 學校이자 梁山泊이었다. 게다가 정강산은 마오의 結婚 紹介所이기도 했다. 여기서 마오는 세 番째 夫人 虛쯔戰(賀子珍)을 만났다. 當時 18歲, 豁達하면서도 氣品 있는 美女 허쯔전은 곧 마오의 ‘革命的 戀人(愛侶)’이 됐다.

    當時 紅軍은 名匠 주더(朱德)와 마오가 이끄는 투 톱 體制였다. 紅軍 사이에서는 流行歌가 떠돌았다.

    “週 軍將(軍長)은 塹壕 사이로 쌀 나르느라 熱心이고, 마오 軍裝은 戀愛 하느라 熱心이네.”

    마오는 허쯔전과의 熱烈했던 사이를 이렇게 回顧했다.

    “(허쯔전은) 나와 함께 산 10年 동안 年初에 아이를 낳고 年末에 또 妊娠을 해 모두 6名의 아이를 낳았다.”

    마오는 정강산의 經驗을 바탕으로 저우언라이·주더 等과 함께 장시省 南部에 長詩 소비에트를 마련했지만, 當時 共産黨 主流의 誤判으로 結局 長詩 소비에트도 潰滅됐다. 共産黨은 살아남기 위해 逃亡쳐야 했다. 後날 ‘大長程(大長征)’이라는 近似한 이름이 붙었지만, 成功했으니 美化된 歷史일 뿐이다. 當時 共産黨은 그 어떤 ‘約束된 땅’도 希望도 없이 도망칠 뿐이었다.

    허쯔전은 셋째를 妊娠한 몸으로 장시省에서 산시省까지 2萬5000里를 걸으며 몸에 스무 군데가 넘는 負傷을 입었다. 糟糠之妻(糟糠之妻)란 쌀겨와 지게미를 함께 먹던 아내, 卽 가난과 苦生을 함께 겪은 아내라는 意味다. 七去之惡(七去之惡)을 犯했더라도 糟糠之妻라면 내칠 수 없었다. 苦難을 함께 겪은 冬至에 對한 義理를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쯔전은 마오와 爆擊을 함께 맞아가며 사지(死地)를 헤쳐 나왔다. 糟糠之妻도 이런 糟糠之妻가 없다. 湖南省 ‘村놈’ 마오가 共産黨 主席이 되고, 新中國을 열 수 있었던 背景에도 허쯔전의 內助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둘 사이의 結末은 좋지 않았다. 마오는 바람氣를 自制하는 男子가 아니었고, 허쯔전은 이를 容納할 女子가 아니었다. 허쯔전은 말했다.

    “우리 둘이 싸울 때, 그가 나무 걸床을 들어 올리려고 하면 나도 바로 椅子를 들어버리지.” 마오 亦是 지지 않았다.

    “허쯔전은 무쇠와 같고 나는 鋼鐵과 같아서 둘이 만나면 크게 부딪치기만 할 뿐이다.”

    1938年 傷心한 허쯔전은 治療 兼 留學次 모스크바로 떠났고, 마오는 곧 산둥省 出身 女俳優인 장칭(江?)을 寵愛했다. 오랜 革命 同志들은 허쯔전과 장칭을 比較하며 걱정했다.

    “허쯔전은 同苦同樂해온 오랜 同志로, 革命의 情이 깊고 서로가 믿고 疏通하는 사이였소. 그러나 장칭은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이고 젊기 때문에, 여러 同志와 共通된 經驗을 나눌 수 없소. 萬若 主席님 곁에서 말썽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큰일일 텐데, 이 또한 問題가 아닐 수 없습니다.”

    後날의 歷史는 그 憂慮대로 됐다. 1947年 허쯔전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마오에게 便紙를 썼다.

    “저는 蘇聯의 戰爭 期間에 生活이 많이 힘들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습니다. 章程 때보다 더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다 過去의 일이죠. 저는 자오자오(嬌嬌·딸 吏民)와 안칭(岸?·아들 마오안칭)을 데리고 베이징에 올라가 主席님을 뵙고 握手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中國共産黨 中央組織富의 特派要員들은 허쯔전이 베이징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吏民과 안칭만을 데려갔다. 마오의 答狀은 薄情했다.

    “革命이 最優先이고, 그다음이 健康이고, 남을 配慮하는 것도 重要하오. 大局的 觀點에서 行動합시다.”



    邊두리 場市의 來日

    허쯔전은 精神分裂 症勢를 보여 상하이에서 治療를 받았다. 두 사람은 1959年 여름 장시省의 여산 會議에서 20餘 年 만에 再會했다. 마오는 짧은 만남 뒤 줄담배를 피우며 歎息했다. “저 女子는 아주 늙고 病이 깊구나.”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여산 會議가 끝난 後 大躍進運動의 失敗를 辛辣히 批判한 펑더화이(彭德懷)는 肅淸됐고 린뱌오(林彪)가 新任 국방부장이 됐다. 마오는 옛 징강산 革命 時節을 再現하려는 듯 文化大革命을 일으켜 一生 最大의 汚點을 남기고 1976年 世上을 떴다. 허쯔전은 1984年 상하이 病院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中國人들은 後難 男子와 長詩 女子가 固執이 세고 다루기 어렵다며 ‘場市의 늙은 妻, 後難의 노새(江西老妻,湖南?子)’라고 말한다. 그러나 長詩 女子 虛쯔展 亦是 겉으로는 씩씩해도 속으로는 사랑을 渴求하는 女子였다. 또한 後難 男子 마오쩌둥과 長詩 女子 허쯔전의 波瀾萬丈한 結婚 生活은 ‘場市의 늙은 妻, 後難의 노새’란 말과 얄궂게 겹쳐져 쓴웃음을 짓게 한다.

    오랜 歷史 동안 長詩는 줄곧 邊두리였고, 오늘날에도 큰 注目을 받지 못한다. 長詩에 對한 뉴스는 洪水, 가뭄 等 天災地變과 鳥類인플루엔자, 돼지 斃死, 蜜柑 凶作 等 農業 關聯 記事가 많다. 聖徒 난창은 長江 中流 開發의 重要 據點이기는 하지만, 후베이의 우한, 後難의 創社에 여러모로 밀린다.

    그러나 長詩는 邊두리이면서도 中國을 代表하는 陶瓷器를 낳아 世界를 휩쓸었고, 아름다운 自然은 많은 이들을 魅惑시켰으며, 숱한 不朽의 名詩를 낳았다. 場市의 豫期치 않은 來日을 期待해볼 수 있는 理由다.




    김용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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