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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動車는 信仰” 李健熙가 꿈꾼 未來 自動車 [映像]|新東亞

“自動車는 信仰” 李健熙가 꿈꾼 未來 自動車 [映像]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 車는 네 바퀴 달린 컴퓨터 될 것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4-01-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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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新經營 發信地 프랑크푸르트, 實行지는 오사카”

    • “日本에 기죽지 마라”는 强烈한 한 마디

    • 아키하바라 進入障壁 뚫은 三星 LCD TV

    • LCD 戰爭 勝利 祕訣, 三星의 突破力

    • 乘用車 事業 20餘 年間 投身한 李健熙

    • 1995年 資本金 1000億 원으로 始作한 三星自動車

    • “機械工業의 꽃이 바로 自動車産業”

    [映像] 半導體 戰爭 中인 只今은 '李健熙' 다시 읽을 때



    [Gettyimage]

    [Gettyimage]

    이승현 代表가 經營하는 인팩코리아는 電子機器 部品業體로 一般人에겐 生疏하다. 2008年 臺灣 人팩테크롤로지와 合作한 韓國 法人이다.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TV, 自動車 等 電流가 흐르는 電子製品에 揷入돼 雜音 等을 막아주는 受動 素子類와 GPS 信號를 보내는 RF 안테나를 만들어 삼성전자, LG電子 等에 納品하고 있다. GPS 안테나 部分에서는 世界市場 占有率 1位라고 한다.

    李 代表는 元來 三星맨이었다. 배 만드는 일에 꽂혀서(?) 현대중공업에서 첫 職場 生活을 始作한 뒤 三星重工業으로 移職했다. 6個月 만에 삼성그룹 內 核心 會社로 막 크기 始作한 三星半導體通信으로 發令이 나면서 人生行路가 바뀐다.

    三星電子 오사카 駐在員으로 일하며 삼성자동차의 始作과 끝을 함께하기도 했던 그는 디지털 LCD TV를 日本 市場에 팔았다. 그러다 歸國해 三星이 世界 最初로 내놓은 40인치 LCD TV를 만드는 核心 멤버로 일하다 2006年 獨立했다.

    그가 最近 펴낸 冊 ‘最强 소니 TV 꺾은 執念의 샐러리맨’에는 韓國 電子製品의 不毛地나 다름없던 日本 市場에서 三星TV가 어떻게 소니를 꺾었는지에 對한 생생한 現場 經驗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만나고 싶었던 건 그에게 늘 挑戰의 動力을 심어줬다는 ‘李健熙 생각法’ 때문이었다. 年初 그를 서울 양재동 事務室에서 만났다.

    삼성맨으로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근무하며 삼성자동차의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는 이승현 인팩코리아 대표. 한국 가전의 불모지였던 일본에서 LCD TV로 소니를 꺾은 일화를 담은 책을 펴냈다. [박해윤 기자]

    三星맨으로 日本 오사카와 도쿄에서 勤務하며 삼성자동차의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는 이승현 인팩코리아 代表. 韓國 家電의 不毛地였던 日本에서 LCD TV로 소니를 꺾은 逸話를 담은 冊을 펴냈다. [박해윤 記者]

    오사카, 新經營 宣言 第2發信地 되다

    李 代表가 李健熙 會長을 처음으로 가까이 본 것은 1993年 오사카 新經營 宣言 現場에서였다고 한다. 바로 直前 해부터 오사카 駐在員으로 일하던 그는 “1993年 新經營 宣言이 처음 發信된 곳은 獨逸의 프랑크푸르트이지만, 이 會長이 行動으로 新經營이 뭔지를 보여준 곳은 오사카였다”고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프랑크푸르트 宣言이 이 會長의 哲學을 다 쏟아놓은 메시지的 性格이 剛했다면 곧바로 오사카에서 이어진 한 달 講演은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具體的 타깃을 定하고 ‘敵을 바로 알아야 나를 안다’는 心情으로 現場을 둘러보게 한 거죠.”

    타깃이라고 하면 日本을 말하는 거겠군요.

    “그렇습니다. 오사카에서 李 會長이 主宰한 新經營 會議에 祕書室 戰略企劃팀과 함께 進行을 맡았습니다. 李 會長이 이끄는 革新이 엄청난 颱風이 될 것이라는 걸 豫感했고, 그 始作을 함께 한 것이죠. 이 經驗은 以後 저를 이끄는 가장 重要한 마음의 動力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이 會長이 新經營 宣言 2彈을 쏘아 올릴 場所로 오사카를 찍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한 달餘 동안 三星 任員들이 모여 있던 곳은 오사카 中心部에 있는 뉴오타니 호텔이었는데 거의 折半을 우리가 빌려 썼죠.

    호텔은 三星電子 日本 支社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建築한 오사카城 近處입니다. 저는 平素에 三星電子가 知事를 省 近處에 세운 것 自體가 커다란 메시지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말하자면 朝鮮을 侵略한 主犯의 城 앞에 前進基地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李 會長은 왜 新經營 宣言의 두 番째 場所로 도쿄가 아닌 오사카를 찍었을까요. 當時는 몰랐지만 나중에 새겨보니 ‘日本을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剛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겉으로는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을 場所를 통해 하려는 거였습니다.

    호텔이 있던 一帶는 오래된 荒蕪地였는데 파나소닉 會長이던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城郭과 周邊을 再開發해 新都市로 탈바꿈시켰습니다. 李 會長은 日本에서 꼭 가봐야 할 名所 100곳을 整理해서 任員들에게 가보라고 했어요. 空港, 道路, 港灣 같은 인프라도 體驗하라고 具體的으로 指示했습니다.

    會議 처음에는 變化와 革新의 强度가 너무 세서 分任 討議 때 反撥의 뜻을 내비치는 任員도 있었어요. 그런 말을 하는 任員에게 會長은 ‘當身들이 三星에 平生을 바쳤다고 하는데 職場은 永遠한 곳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職場을 求해서 나가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목숨을 걸었다’고 해서 雰圍氣가 一瞬 얼어붙은 적도 있습니다. 그 悲壯함은 正말 무서울 程度였어요.

    그때 이 會長의 ‘목숨 걸고 한다’는 말이 月給쟁이일 때는 實感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事業을 해보니까 悽絶하게 다가오더군요. 저 나름대로 오랜 苦悶 끝에 創業을 했지만 金融危機로 初期 資本金을 다 까먹고 앞이 보이지 않아 極端的인 생각까지 한 적이 있으니까요. 多幸히 危機를 잘 넘겨 只今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特히 그는 中央日報 局長級 以上 幹部들에게 보여준 이 會長의 메시지가 記憶에 남는다고 했다.

    “記者들 特有의 若干 冷笑的 雰圍氣가 있었어요. 그러자 이 會長은 祕書室을 통해 ‘中央日報가 왜 다른 新聞社에 뒤지고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낱낱이 보여주라. 自己들이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新聞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여기(오사카) 一週日 넘게 있어도 新聞 나오는 데 支障 없지 않으냐. 全 世界 主要 新聞을 샅샅이 把握해서 競爭力의 뿌리가 뭔지를 파고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李 會長의 改革 對象은 이처럼 上級 幹部들이었어요. 組織 內에서 部下 職員들 위에 君臨하면서 溫室에서 사는 데 익숙해지면 變化를 싫어하니 改革 對象이라고 생각한 거죠. 系列社 管理本部長들을 오사카에 불러 모을 때에도 ‘祕書 시키지 말고 直接 飛行機, 호텔 豫約하고 오라’고 했어요. 그 渦中에도 ‘내가 누군데’ 하며 支店長에게 電話해 指示한 本部長들이 있었지요(웃음).”

    李 代表는 “오사카 會議 때 이 會長에게 質問할 機會가 생겨서 ‘마누라와 子息 빼고 다 바꾸자고 하셨는데 왜 마누라를 빼셨느냐’고 했더니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하는 答을 하셔서 모두 웃었던 일이 있다”고도 했다.

    日本에서 처음 始作한 TV 인터넷 販賣

    駐在員으로 일할 때 主로 무슨 일을 했나요.

    “企劃이었습니다. 市場을 돌며 商品을 살펴보고 關聯 雜誌를 읽거나 뉴스를 체크해 日本 産業界 狀況을 迅速하게 本社에 報告하는 게 主 業務였지요.

    當時로서는 日本 政府와 企業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 自體가 宏壯한 情報였습니다. 每日 主要 뉴스를 把握하고 核心을 짚어내고 記事에서 暗示하는 深層 情報를 알아내기 위해 발로 뛰어다녔습니다.

    電子王國 日本의 技術力은 우리보다 20~30年 앞서 있었으니까 技術과 情報에서 日本 도움이 絶對的으로 必要한 時節이었습니다. 새 部品이 나오면 購入할 수 있는 方法을 뚫는다든지, 三星과 同一한 種類의 商品을 生産하는 工場도 直接 訪問해 部品 調達을 打診하기도 했습니다. 勿論 여기에는 契約을 성사시키는 것만 目的이 아니라 日本 企業들이 생각하는 未來 方向과 現 狀況을 把握하자는 目的도 컸습니다.”

    李 代表는 “李 會長의 新經營 宣言 中 나에게 가장 强烈하게 꽂힌 한 마디가 있었다”며 “그것은 바로 日本에 기죽지 말라는 거였다”고 했다.

    “日本은 到底히 따라갈 수 없는 레벨의 나라였죠. 소니만 해도 두렵고 부러운 對象이었습니다. 特히 디자인을 보면 壓倒됐지요. 오죽하면 우리끼리도 ‘三星은 착한 男便, 소니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愛人’이라고 했겠습니까(웃음). 하지만 三星은 소니를 뛰어넘었습니다. ‘日本에 기죽지 마라, 日本을 이기자’던 ‘李健熙 精神’이 만든 結果라고 생각합니다. 1993年 오사카 會議 以後 ‘소니를 잡아라’는 메시지가 제 內面에도 깊이 새겨졌으니까요.”

    그는 삼성전자가 내놓은 最尖端 製品이던 TV 兼用 LCD 液晶 모니터를 日本 市場에 팔 때도 이런 精神에서 出發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빌 수 있었다고 했다.

    “1999年으로 記憶되는데 三星이 日本에 進出한 지 꼭 50年이 되는 해였지요. 低價(低價) 製品이라는 이미지가 强해 苦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會長이 왔는데 ‘日本에 進出한 지 50年이 됐는데 어떻게 아키하바라(韓國의 龍山電子商街)에 三星 製品이 보이지 않느냐’면서 크게 火를 내고 갔어요.

    이 일이 있은 後 도쿄에 新規 事業팀이 만들어지면서 제가 팀長이 됐습니다. 最優先 課題는 日本 內에 三星 브랜드 認知度를 높여 低價 이미지를 脫皮하는 것이었습니다.

    事實 日本 市場은 外部 世界에 매우 排他的인 데다 特히 弱者에게는 進入障壁이 더 높은 市場이어서 競爭力 낮은 製品이, 그것도 짧은 時間에 注目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생각해 낸 게 인터넷으로 팔자는 거였습니다. 只今이야 너무도 一般化된 것이지만 當時만 해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實行하지 못하던 거였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日부터 注文 接受, 配送, 還拂, 交換, 애프터서비스까지 인터넷上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經驗을 가진 IT 會社가 없어서 難堪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次에 이 代表는 美國系 컨설팅 會社 脈켄나 그룹을 알게 된다.

    “‘e비즈니스’라는 말을 처음 만든 會社이기도 하죠. 도쿄 支社를 찾아가 컨설팅을 依賴했는데 費用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들을 相對로 ‘三星의 첫 프로젝트가 成功하면 當身들에게도 業績이 되니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說得했죠. 結局 샌프란시스코 本社까지 날아가 컨설팅을 받았습니다.

    그때 重要한 메시지를 얻었는데 TV에서 가장 重要한 건 ‘모니터’라는 거였습니다. 當時 世界 TV市場을 主導했던 日本의 尖端 會社들은 모니터에 神經 쓰기보다 TV 機能을 높이는 소프트웨어 開發에 注目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脈켄나 그룹 사람들은 ‘疲勞에 지쳐 집에 돌아온 사람들이 가장 便安하게 생각하는 親한 장난감 槪念으로 TV를 만들어야 한다. 結局 모니터가 重要하다’는 아이디어를 주었습니다.”

    콧대 높던 아키하바라를 뚫다

    이런 그에게 마침 三星 서울 本社에서 새로운 TV를 내놓았다는 消息이 들려왔다. LCD 液晶으로 만든 PC 모니터에 TV 機能을 接續하면 TV도 되는 ‘多技能 모니터’였다. 그는 ‘바로 저거다, 저걸 日本 市場에 팔아보자’는 決心을 하게 된다.

    “當時 TV는 只今처럼 얇은 게 아니고 두꺼운 브라운管 TV였습니다. 하지만 TV에서 重要한 건 ‘모니터’라는 槪念을 裝着하고 보니 市場性이 보였어요. 아키하바라에 바로 入店하는 건 不可能하니 인터넷 쇼핑과 椄木한 거죠.

    가장 큰 難關은 物件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보지도 않은 物件을 先拂로 산다는 건 當時로서는 想像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어떻게 할까 苦悶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키하바라 게임 소프트웨어 販賣商들에게 보여주자는 거였죠. 소프트웨어를 모니터에 連結해 보여주니 아니나 다를까, 旣存 TV로 볼 때와는 次元이 다르게 畫質이 좋으니까 깜짝 놀라더군요.

    저는 ‘모니터를 無料로 빌려줄 테니 陳列만 해달라’고 했고 마침내 아키하바라 賣場에 空짜로 商品을 展示하는 機會를 얻게 됩니다.”

    이는 日本 미디어에서도 큰 注目을 받는다.

    “날짜도 잊히지 않습니다. 2000年 3月 29日 오쿠라 호텔에서 홈페이지 사이트 開幕 行事를 했는데 니혼게이자이 新聞을 비롯해 아사히TV, 韓國 言論 媒體까지 60餘 個 言論社가 取材를 왔습니다. TV도쿄 國際 衛星放送에서도 ‘韓國의 파워, 韓國의 威脅’이라는 題目으로 톱뉴스로 다뤘습니다.”

    三星 LCD TV 神話를 쓰다

    前無後無했던 인터넷 販賣에 모든 것을 건 그에게 試鍊이 닥친다. 急性肝炎으로 應急室에 실려 간 것. 多幸히 몸은 몇 個月 뒤 回復됐고 그는 本社 發令을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 보니 디지털 TV에 對한 論議가 한창이었어요. 美國, 日本을 어떻게 이길지 計劃을 세우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家電部門 總括社長을 하던 분이 저와 日本에서도 거의 每日 國際電話 通話를 했던 분이라 저더러 家電部門으로 오라고 勸誘했습니다.”

    그는 2001年 5月 三星의 LCD TV 事業을 책임지는 그룹長이 된다.

    “2000年 初만 해도 TV는 20인치, 30인치 브라운管이 大勢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未來에는 브라운管 時代가 끝나고 LCD TV가 大勢가 될 것이라고 確信하고 있었습니다. 日本에서 LCD 모니터를 팔 때 디지털 放送 規格 責任者들과도 因緣을 맺었는데 소니와 도시바가 캐논과 協力해 새로운 TV用 디스플레이를 祕密裏에 開發하고 있다는 情報도 알게 됐습니다.

    當時 世界는 디지털 TV를 先占하기 위해 그야말로 소리 없는 戰爭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畫質을 옷감에 比喩하자면 아날로그 브라운管 映像은 성긴 삼베 옷감, 디지털 LCD 液晶 브라운管은 촘촘한 畫素로 짜인 明紬緋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LCD는 畵面을 크게 만들기가 힘들어 日本 샤프前者가 내놓은 13인치가 最尖端 製品이었죠.

    저는 모니터 事業部와 各 나라 放送 規格을 잘 알고 있는 텔레비전 事業部를 합치자고 提案했고, 技術的으로 가장 앞서 있던 샤프와 技術提携도 提案했습니다. 이런 저의 提案은 經營陣이 LCD 事業에 돈과 사람을 몰아주며 올인하기로 決定하면서 빛을 보게 됩니다.”

    當時 三星前者 代表理事 윤종용 副會長은 ‘LCD TV 一流化 委員會’를 만들어 委員長職을 맡아 投資 現況과 核心部品 開發 狀況을 直接 點檢하며 事業을 督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鬐興工場 라인에서 22인치 텔레비전 패널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어 2002年 6月 나온 40인치는 그동안 LCD TV의 限界로 여겨지던 30인치의 壁을 뛰어넘어 世界를 놀라게 했다. 三星은 그해 11月에는 世界 最初로 46인치를 내놓아 美國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컴덱스(COMDEX)에서 業界 先頭 走者로 자리매김 하는 契機를 만든다. 李 代表의 말이다.

    “當時 TV 市場은 소니와 도시바가 主導하는 프로젝션 TV, 파나소닉이 主導하던 PDP TV, 샤프가 主導하던 LCD TV가 디지털 TV의 標準을 놓고 死生決斷해 가며 戰鬪를 벌이던 時節이었는데 LCD TV를 끝까지 밀어붙인 삼성전자가 마침내 日本의 빅3를 제치고 世界 1等 TV 메이커가 된 것입니다.

    LCD 戰爭에서 이길 수 있었던 祕訣 中 하나가 三星의 突破力이었습니다. 40인치의 境遇 우리나 日本 製品 모두 처음엔 디스플레이 뒷面에 있는 畵面을 밝게 해주는 螢光燈(백라이트) 壽命이 짧아 갑자기 畵面이 어두워지면서 검게 變하는 現象이 자주 나왔습니다.

    日本 業體들은 完璧하지 않은 商品은 出市하지 않는다는 政策을 固守했는데 三星은 一旦 出市하고 補完하는 方式을 擇했어요. 이러다 보니 速度戰에서 앞서게 된 거죠.”

    그가 屬한 팀은 2003年 사내 ‘글로벌 마케팅 어워드’에서 大賞을 받았다. 그리고 2004年부터 三星의 마케팅 主力 商品이 애니콜에서 LCD TV로 바뀐다.

    未來 自動車는 네 바퀴에 올린 컴퓨터

    이승현 代表에게 들은 또 다른 注目할 만한 證言은 삼성자동차에 關聯된 것이었다.

    李健熙 會長과 自動車産業에 對해 記者는 언젠가 集中 探究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 代表가 日本에서 삼성자동차의 始作부터 끝까지 參與했다는 것을 듣고 이참에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李 代表 말이다.

    “電子와 自動車를 融合한 새로운 自動車産業을 해보겠다는 게 이 會長의 宿願 事業이었다는 건 잘 알려진 事實 아닙니까. 迂餘曲折 끝에 1992年 7月 4日 政府가 事業을 承認해 주면서 本格的인 事業팀이 出帆하는데 그 事業팀 初期 名稱이 ‘21世紀 企劃團’이었습니다.

    三星半導體가 世界 메모리 市場에서 막 1等으로 올라서기 始作한 때이기도 합니다. 三星은 일찍이 日本 도요타·혼다, 獨逸 폴크스바겐, 美國 포드 自動車 等에 技術提携를 打診했지만 番番이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던 中 닛산과 技術提携를 하게 되는데 當時 닛산이 經營難에 逢着한 狀態여서 서로에게 윈윈이 된 거죠.

    닛산과 技術提携가 이뤄지기까지, 또 이뤄진 後에도 本社와 원활한 疏通을 위한 窓口가 必要했죠. 그게 바로 21世紀 企劃團의 重要 任務였습니다. 李 會長은 祕書室 人事팀에 日本語가 可能한 優秀 人力 30名을 도쿄에 配置하도록 指示했고, 오사카에서 事業企劃 및 마케팅 팀長을 맡고 있던 저도 그 中 한 名이 된 거죠.”

    그는 이 대목에서 닛산과의 技術提携에 關聯된 에피소드를 紹介했다.

    “닛산自動車 硏究所長을 日本에서 데려올 때 이 會長께서 專用機를 내줬어요. 金浦空港에 내려 移動할 때도 會長 車를 내주셨지요. 닛산 車를 改造한 것인데 硏究所長이 깜짝 놀라면서 自己가 만든 車보다 더 좋게 만들었다고 車 안 구석구석을 만져보던 記憶이 생생합니다.

    鬐興에 到着해 硏究所를 둘러보고 다시 金浦空港으로 갈 때는 自己 꿈이 파일럿이었다며 操縱칸에 타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해준 일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極盡히 待接하니 漸漸 韓國과의 技術協力에 오픈 마인드가 됐어요. 以後 도쿄로 돌아가서 開發팀을 構成해 技術者 數百 名을 서울로 보내 核心技術을 傳授해 줬으니까요.”

    李 代表는 도쿄에서 本格的으로 닛산과의 技術提携 實務에 나선다.

    “技術 導入 契約에 따른 履行 狀況을 點檢하면서 本社와 調律을 거칠 일이 한두 個가 아니었지요. 初期에 가장 重要한 일은 生産에서 第一 重要한 生産管理시스템 소프트웨어로 어떤 걸 選擇하느냐는 點이었습니다.

    本社 任員들은 市場에 나와 있는 標準 소프트웨어로 充分하다고 했지만 저를 비롯한 도쿄 職員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닛산의 精密하고 革新的인 新型 소프트웨어를 써야 時間을 節約하고 失敗를 막을 수 있다는 걸 持續的으로 建議했습니다.

    結局 이 主張이 받아들여져 닛산의 車體와 엔진 設計圖를 購入하는 것으로 結論이 났습니다. 트렁크나 車體 內部 設計는 韓國型으로 바꿔야 했는데 이 過程에서도 닛산과 많은 協議가 必要했고요. 自動車는 워낙 옵션이 많은 製品 아닙니까. 生産라인 電算化가 先行돼야 했고 資材 供給과 生産에 必要한 全般的 計劃案을 事前에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1970年代 湖巖부터 꿈꾼 自動車 事業

    1993년 8월 삼성중공업에서 처음으로 만든 트럭 발표회. [삼성 60년사]

    1993年 8月 삼성중공업에서 처음으로 만든 트럭 發表會. [三星 60年史]

    삼성그룹이 펴낸 ‘三星 60年史’에 따르면 三星이 自動車 事業에 關心을 가진 건 湖巖 때인 1970年代 後半부터라고 한다. 1978年 初 도요타, 폴크스바겐 等 海外 先進 業體와 함께 自動車 事業 進出을 檢討하는 한便 國內 業體인 신진자동차 引受를 함께 檢討했지만 國內外 事業 未成熟으로 成事되지 못했다는 것.

    그러다 1983年 末 費用 節減 次元에서 開發途上國에 生産基地 建設을 推進하던 美國 크라이슬러社가 三星物産에 合作을 提議했고, 이듬해 4月 아이아코카 會長이 訪韓해 湖巖과 만나 記者會見까지 했지만 以後 크라이슬러가 韓國이 日本보다 技術이 뒤진다며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물 건너가게 된다.

    湖巖은 抛棄하지 않고 닛산, 도요타는 勿論 이탈리아 피아트, 獨逸 폴크스바겐까지 提携線을 찾았으나 갑작스러운 逝去로 스톱이 된다. 그러다 李健熙 會長이 就任한 뒤인 1989年 7月 다시 挑戰하게 되는데 이番에는 獨逸 폴크스바겐과의 合作이 相當한 進陟을 이뤘지만 통독으로 因한 內部 事情 때문에 決裂된다. 하지만 이 會長은 抛棄하지 않았다.


    1995년 4월 부산 신호공단 삼성자동차 부지에서 열린 부산공장 기공식. [삼성 60년사]

    1995年 4月 釜山 신호工團 삼성자동차 敷地에서 열린 釜山工場 起工式. [三星 60年史]

    1992年 7月 트럭 等 商用車 技術導入申告書가 政府에 依해 受理된 後 乘用車 事業 專擔팀이 꾸려졌고, 1994年 4月 비로소 닛산과 技術提携를 하기에 이른다(앞서 紹介한 이승현 代表가 日本에서 活躍하던 때가 바로 이 때다).

    하지만 政府의 正式 事業 承認은 이보다 6個月 뒤에나 이뤄진다. 國內 業體들의 反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迂餘曲折 끝에 三星은 乘用車 事業에 進出하지만 또 다른 難關이 있었으니 工場을 어디로 할 것이냐였다. 大邱와 釜山이 熾烈한 誘致 競爭을 벌였으나 釜山 강서구에 造成 中이던 신호工團 約 1.8㎢(55萬 坪)로 決定이 난다. 自動車 部品業體들이 釜山과 慶南圈에 集中돼 있고 釜山이 가까워 高級 人力 誘致와 닛산 규슈 工場으로부터 茶나 部品을 들여오기가 쉽다는 判斷에 따른 것이었다. 다시 이 代表 말이다.

    “國內 會社들의 牽制가 너무 甚해서 部品은 大部分 自體 生産하는 쪽으로 方向을 잡았습니다. 旣存 自動車 業體들이 三星에 部品을 주기로 한 業體에 ‘去來를 끊겠다’고 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모든 걸 自體 生産할 覺悟로 出發할 수밖에 없었죠. 엔진도 向後 國産化한다는 方針 아래 엔진 生産 施設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初期에는 日本 會社 部品을 供給받는 戰略으로 갔습니다. 日本 會社들은 우리에게 技術도 주고 敎育도 해주었습니다.”

    닛산은 敎育에 協助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三星 60年史’에 따르면 三星 技術硏修團은 1995年 6月 닛산 요코하마와 吳파마 工場으로 날아가 現場體驗, 製造技術, 設備 및 生産管理 敎育硏修를 始作으로 本格的인 技術敎育을 받는다. 1997年 9月 基準 釜山工場 1700名 人力 中 無慮 1100名이 닛산에서 3~4個月 課程으로 敎育을 받았다. 韓國에도 닛산 技術者들이 訪韓해 1995年부터 每年 最多 200餘 名이 釜山에 常住할 程度였다.

    삼성자동차는 1995年 3月 資本金 1000億 원으로 法人 登記 設立을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 4月 信號工場 起工式을 치르고 6個月 만인 1996年 10月에 完工하는데 이는 豫定된 空氣를 3個月이나 앞당긴 速度戰의 結果였다.

    1995년 4월 부산 신호공단 삼성자동차 부지에서 열린 부산공장 기공식. [삼성 60년사]

    1995年 4月 釜山 신호工團 삼성자동차 敷地에서 열린 釜山工場 起工式. [三星 60年史]

    李 代表는 釜山 신호工團에 얽힌 逸話도 紹介했다.

    “신호工團은 完全 뻘밭이었습니다. 땅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갯벌에 40m짜리 巨大한 鐵棺 안에 모래를 메워 넣은 쇠말뚝 數十萬 個를 박아 地盤을 다지는 ‘샌드 트레인 公法’을 썼는데 이 亦是 이 會長이 日本 오사카 간사이 空港 建設 過程에서 보고 들여온 公法이었습니다. 李 會長은 直接 空港 建設 現場에 가보고 管制塔까지 둘러보았습니다.

    간사이 空港은 뻘밭이 空港으로 變身한 것인데 敷地 造成에서부터 바람과 地震에 對備하는 深海 建築技術이 總動員된 最尖端 技術의 集合體입니다. 會長은 이 空港의 建設 公法을 徹底히 工夫한 뒤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신호工團에 適用했습니다. 땅을 다지는 日부터 設備까지 當時 最高 技術이 總動員됐습니다.”

    마침내 1998年 3月 첫 自動車 SM5街 世上에 나왔다.

    하지만 三星은 外換危機 앞에 結局 自動車 事業을 접어야 했다. 1998年 5大 그룹의 系列社를 서로 交換하는 이른바 ‘빅딜’을 推進하는 過程에서 삼성차와 大宇電子를 맞바꾸는 1次 實行計劃案을 確定했지만 政府-三星-大宇가 意見 一致를 보지 못해 빅딜이 깨지면서 1999年 法定管理에 들어가고 말게 된 것이다.

    第一 失望한 사람들은 釜山市民들이었다. 地域經濟를 위해 삼성차를 살려야 한다고 들고일어났는데 當時 ‘삼성자동차問題解決對策委員長’을 맡은 사람이 人權辯護士로 活躍하던 盧武鉉 前 大統領이었다. 삼성차는 2000年 4月 르노가 引受한다. 다시 이 代表 말이다.


    “只今이야 電子와 自動車가 함께 가는 걸 너무 當然하게 생각하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던 時節 이 會長의 꿈이 霧散돼 너무 안타깝지요. 삼성자동차가 存續했다면 釜山 慶南 地域 일자리가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李健熙 會長은 但只 車를 만드는 것을 넘어 더 큰 꿈이 있었다고 한다.

    “交通 인프라에서부터 交通文化까지 바꾸고 싶어 하셨습니다. 先進國 交通安全 시스템을 硏究하는 ‘三星交通硏究所’ 創立이 代表的 象徵이죠. 硏究팀의 結果物을 交通警察들과 共有했습니다.

    自動車産業에 進出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職員들에게 全 世界 모든 車를 運轉해 報告 長短點을 把握하는 프로젝트도 進行했는데 여기에는 該當國의 交通安全 시스템을 비롯해 道路交通 體系를 비롯한 새로운 旅行 文化 構築까지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道路 狀態도 細心하게 살펴보라고 했는데 例를 들어 비가 왔을 때 路面에 그려진 車線이 어떻게 보이는지, 빗물은 잘 빠지는지, 交通事故가 잦은 地域에서는 어느 地點부터 警告 案內를 해주는지 等에 對한 情報를 데이터化해 報告하라고 말씀했지요. 會長이 이렇게 熱心히 하시니 構成員 모두 自動車産業과 交通文化 인프라 發展에 寄與하겠다는 使命感이 컸습니다.”

    나는 왜 自動車에 매달렸나

    1995년 11월 일본 닛산 한국사무소 개소식. [삼성 60년사]

    1995年 11月 日本 닛산 韓國事務所 開所式. [三星 60年史]

    李健熙 會長은 半導體 事業처럼 自動車 事業에 進出할 때에도 全 職員에게 ‘왜 우리가 이 事業을 하느냐’에 對한 共感帶 形成, 卽 業의 槪念을 整理하고 說破했다(이 會長의 이런 일하는 方式은 自營業者는 勿論 뭔가 創業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靈感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三星 60年史’를 引用한다.

    “事業 初期부터 李健熙 會長은 ‘自動車 業의 槪念’의 重要性을 强調했다. 1995年 2月 20日과 21日 美國 LA에서 開催된 戰略會議에서는 ‘電子와 自動車가 21世紀 韓國 經濟를 責任질 兩大 山脈이다. 21世紀型 自動車는 움직이는 生活空間으로서 情報化 自動車, 無公害 自動車와 같은 尖端 하이테크 技術이 接合된 槪念으로 生産되어야 한다. 任職員들은 自動車 專門誌를 熟讀해서 早期에 業에 對한 理解를 갖추도록 하라’고 指示했다.”

    李 會長 말에서 가장 注目되는 키워드는 ‘21世紀型 自動車는 움직이는 生活空間이 될 것’이란 밀이다. 이런 豫想은 그때로부터 꼭 29年 만인 올해 世界 最大 電子·情報技術(IT) 展示會 ‘CES’에서 그대로 確認됐다.

    本來 家電이나 IT 新技術을 紹介하는 張인 CES는 올해의 境遇 ‘모터쇼’를 彷彿케 할 만큼 自動車 關聯 新技術을 大擧 선보였다. 곧 나올 未來 自動車는 車 안에 챗GPT가 搭載되고 버튼 하나로 映畫館·게임·레스토랑·쇼핑몰로 變하고, 運轉者의 目的에 따라 呼出·配達 等 맞춤型으로 만들어진다. 經路 안내, 危險 警告, 遠隔 발레파킹, 셀프 週次도 멀지 않았다. 電子技術과 自動車가 하나로 된다는 이 會長의 말이 머지않아 實現되는 것이다.

    李 會長의 冊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를 읽어보면 只今으로부터 거의 30餘 年 前, 그가 꿈꾸던 未來 自動車에 對한 想像力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의 書頭에는 왜 그가 自動車産業을 始作하려 하는지 理由가 잘 담겨 있다. 冊에 실린 ‘自動車 事業에 거는 期待’라는 글 全文을 나눠 읽어보자.


    自動車를 ‘世界를 변화시킨 機械’라고 한다. 自動車産業의 重要性과 影響力을 端的으로 드러낸 말이다.

    한 臺의 自動車를 만드는 데는 2萬餘 個의 部品이 必要하다. 自動車産業은 鐵鋼, 金屬, 機械, 電氣, 電子 産業 等과 密接하게 聯關된 複合的인 組立産業이기 때문에 産業 間 波及效果가 크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道路며 交通, 에너지 等의 國家 인프라를 强化하는 觸媒 役割을 한다.

    우리나라가 自動車를 만들기 始作한 것은 길게 잡아야 40年이 채 안 된다. 이렇게 짧은 歷史에도 不拘하고 自動車 保有 1000萬 臺, 生産量 世界 5位에 올라섰다.

    겉으로 드러난 成果와 달리 技術力, 質的 競爭力은 世界 水準과 比較해서 많이 떨어진다. 先進國 技術 水準을 100이라고 할 때 韓國의 境遇 生産技術은 80, 設計技術은 60으로 評價받고 있는 實情이다.

    그뿐만 아니라 1994年 現在 우리 自動車 輸出額은 51億 달러로 總 輸出額의 6%에 不過하지만 日本은 823億 달러로 23%나 된다. 自動車産業이 國家 經濟에서 차지하는 比重에 비해 제 役割을 充分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自動車 事業 進出을 두고 오랫동안 苦心했다. 半導體를 비롯한 旣存 事業들이 잘되고 있는데 왜 어려운 事業을 새로 始作하려 하느냐는 反對도 있었고, 莫大한 投資에 따른 危險을 甘受해야 하는 問題도 있었다.

    더욱이 旣存 業體들이 決死的으로 反對하고 있는 데다 社會 一角에서는 마치 큰 利權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負擔이었다.


    事實 나 個人이나 三星의 處地만 생각하면 自動車 事業 때문에 苦生을 사서 할 必要가 없다. 그러나 輸出로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 經濟構造와 自動車産業 水準을 볼 때, 누군가는 반드시 새로 參與해서 그 水準을 한 次元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世界 自動車産業 主導權은 유럽에서 美國으로, 다시 美國에서 日本으로 그 흐름이 옮겨갔는데, 나는 21世紀에는 그 主導權을 우리가 잡을 수 있다고 確信했다.

    우리의 敎育·知識·技術 水準을 볼 때 集中해서 育成할 戰略 分野가 電子·半導體·自動車·朝鮮·鐵鋼 等 重化學工業이다. 이들 産業의 基礎가 되는 것이 機械工業이고, 機械工業의 꽃이 바로 自動車産業이다. 自動車産業이 發達하면 工作機械, 産業電子, 制御技術이 發展해 全體 産業의 技術 水準이 向上되고, 國家競爭力이 한 段階 높아질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이렇듯 國家的 次元에서 自動車 事業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히면서도 果然 三星이 해낼 수 있을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自動車에서 電場品이 차지하는 比重이 漸漸 높아지고 있으므로 三星이 그間 蓄積해 온 電子 分野의 技術力을 性能 差別化의 포인트로 삼고, 全 世界에 걸친 輸出網과 關聯 分野에서 폭넓게 確保한 內部의 技術 人力을 제대로 活用하면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自信感이 생겼다.

    냐는 三星이 이러한 技術力과 人力을 바탕으로 地動次産業에 進出하면 旣存 業界에 善意의 刺戟을 주어서 國內 技術 水準을 끌어올릴 수 있을 뿐 아니라 消費者 福祉에도 크게 寄與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1996년 국내 최초로 중국에 수출되는 삼성트럭. [삼성 60년사]

    1996年 國內 最初로 中國에 輸出되는 三星트럭. [三星 60年史]

    이 글은 삼성자동차의 첫 車가 나오기(1998년 3月) 直前인 1997年 11月에 發表된 글이다. 李 會長은 新車 出市를 앞두고 感懷가 새로웠는지 自身의 哲學과 信念을 世上이 몰라주는 데 對한 서운함과 向後 未來에 對한 期待를 함께 披瀝한다.

    이렇게 나름대로 21世紀 國家 將來를 위해 愛國心으로 始作했던 事業이 世間에서 政經癒着이니 個人的 趣味에서 始作한 것이니 하는 誤解를 불러일으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구나 不可能하다고 했던 半導體 事業을 성공시켜 엄청난 利益을 내고 있고, 앞으로 自動車에 投資할 資金을 半導體에 投資하면 便하게 經營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또다시 어려운 길을 擇했나 하는 懷疑가 들 때도 있었다.

    一例로 1兆 원을 半導體에 投資하면 每年 9000億 원 賣出에 2000億 원의 利益을 낼 수 있다. 反面 이 돈을 自動車에 投資하면 賣出은 1兆1000億 원 程度 되지만 利益은 94億 원으로 半導體의 24分의 l에 不過하다.

    自動車 事業을 제대로 일으켜 세우려면 數兆 원에 이르는 莫大한 投資와 오랜 時間이 必要하고, 任職員의 피나는 努力이 없이는 不可能한데 이걸 어떻게 利權 事業이라고 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自動車에 趣味가 있다지만 個人的인 關心으로 事業을 始作했다는 一部 世評에 對해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失望感마저 든다.

    나는 自動車産業에 對해 누구보다 많이 工夫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全 世界 웬만한 自動車 雜誌는 다 購讀해 읽었고 世界 有數의 메이커 經營陣과 技術陣도 거의 다 만나보았다. 卽興的으로 始作했다는 世間의 憂慮도 있으나 1998年 3月에 出市될 삼성자동차의 品質과 서비스 水準이 이런 誤解와 憂慮를 拂拭해 줄 것이다.

    三星이 醫療事業에 參與해서 病院의 槪念을 바꾸고 病院 全體의 서비스 水準을 끌어올렸듯이 三星이 새 車를 出市함에 따라 旣存 業體의 品質과 서비스 水準이 向上될 것으로 期待하고 있다.

    이와 같은 善意의 競爭을 통해 業界 全體의 競爭力을 强化하고. 輸出 擴大와 消費者 利益을 높이려는 것이 三星이 自動車 事業에 進出한 目的이다.

    삼성자동차 釜山工場에는 ‘우리가 왜 自動車 事業을 해야 하는가’라는 글이 붙어 있다. 나는 그처럼 自動車 任職員에게 우리가 事業을 始作했을 때의 初心을 잃지 않고, 더욱 精進해서 韓國 自動車産業社에 새로운 里程標를 세워가자고 激勵하고 있다.


    삼성차 살리기에 孤軍奮鬪한 李健熙

    1997년 9월 국내 언론에 첫 공개된 삼성자동차 신차 공개 시승회. [삼성 60년사]

    1997年 9月 國內 言論에 첫 公開된 삼성자동차 新車 公開 試乘會. [三星 60年史]

    李 會長의 꿈은 霧散됐다. 世上 사람들은 그의 唯一한 失敗作으로 自動車 事業을 꼽는다. 돌이켜 보면 運이 너무 나빴다고밖에 할 수 없다. IMF 外換危機만 없었어도 成功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關聯해서 흥미로운 資料가 있어 紹介한다. 2021年 1月 ‘월간중앙’ 記事다. ‘월간중앙’은 DJ 政府 時節 世上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규선 게이트’의 主人公 최규선(63·前 유아이에너지代表, 現在 服役 中) 氏 回顧錄 一部를 單獨 入手했다며 揭載한다.

    1997年 大選을 전후해 마이클 잭슨과 조지 소로스 訪韓을 主導해 DJ와의 만남을 성사시켜 政官界에 彗星처럼 登場, 注目을 받았던 崔 氏는 當時 포브스 選定 世界 4位 大富豪이자 美國 월街의 外國人 投資者로 가장 큰 投資者이기도 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알 왈리드 王子를 國內에 데려와 大宇 投資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過程에서 李健熙 會長도 投資 誘致 次元에서 崔 氏를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回顧錄에는 이 會長이 삼성자동차를 살리려고 百方으로 애쓴 痕跡과 함께 “自動車는 나의 信仰”이라고 말하며 産業의 未來를 바라보는 洞察도 드러낸다. 關聯 內容 爲主로 띄엄띄엄 引用한다.

    한남동 승지원으로 갔다. 승지원은 李健熙 會長이 VIP 人士들을 만나는 接見 場所였다. 約 1500坪 規模 敷地에 왼쪽으로는 創業主 故 이병철 會長께서 머물던 韓屋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新築 2層 洋屋이 있었다. 나는 2層 洋屋으로 案內되었다.

    李健熙 會長은 나를 보고는 “崔 特報, 반갑습니다” 했다. 나는 “會長님, 저는 特報가 아니라 補佐役입니다” 말했다. 첫 對話였다. 李 會長은 웃으시며 “呼稱이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하면서 大選 期間에도 나를 눈여겨보았다며 어떻게 마이클 잭슨을 韓國 大選에 끼어들게 했는지 무척 궁금하다고 했다.

    그의 語法은 一般人의 語法이 아니었고 搜査(레토릭) 또한 아주 特異했다. 그는 나에게 韓國이 現在 겪고 있는 危機는 外換危機日 뿐이며, 韓國 經濟의 펀더멘털 (fundamental)은 堅固하다고 했다. (中略) 내가 알 왈리드 王子도 삼성전자에 投資하기를 願하고 있다고 하자 반색하며 삼성자동차에도 投資해 달라 말해 달라 했다. (中略) 30餘 分 뒤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퀀텀펀드 投資팀長 프라가가 팀員들과 함께 들어왔다. 李 會長은 담배를 태우며 프라가에게 勸했다. 프라가는 禁煙家라며 鄭重히 拒絶했다.”


    崔 氏는 얼마 後 이 會長과 같은 場所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저녁 食事 後 만나자고 한 것이 밤 9時나 돼서야 書齋로 案內됐는데 對話는 새벽 1時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날 李 會長은 自動車産業에 對한 自身의 靑寫眞을 쏟아냈는데 崔 氏가 傳하는 이 會長의 말은 이랬다.

    現 政府에서는 왜 삼성전자가 自動車를 하려 하느냐, 둘은 全혀 다른 事業이라고 하지만 自動車는 앞으로 電子製品이 됩니다. 네 바퀴 위에 컴퓨터가 올라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三星電子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中略) 나는 모두가 反對하는 메모리 半導體를 世界 第一로 만들었습니다. 그때에도 얼마나 많은 反對와 抵抗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銀行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貸出을 꺼렸고 貸出 滿期가 되어 延長해 줄 때에는 우리 任員들이 銀行員들 집 앞에서 비가 오면 雨傘을 받쳐 들고 苦生했습니다. 그런데 只今 보세요. 世界 一流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內燃機關車 時代는 지나갑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未來를 봅니다. (祕書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은 잘 몰라요. 나를 아는 몇몇 사람은 나를 道士, 구루(Guru·靈的 스승)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이 會長은 “自動車는 나의 信仰”이라고까지 했다는 게 崔 氏의 證言이다.

    1998년 3월 나온 삼성의 첫 자동차 SM522V. [삼성 60년사]

    1998年 3月 나온 三星의 첫 自動車 SM522V. [三星 60年史]

    中古 自動車를 팔다

    李健熙 會長이 自動車를 信仰으로까지 알았다는 건 그가 生前에 밝힌 인터뷰에서도 確認된다. 1989年 ‘월간조선’ 2月號에 실린 오효진과 인터뷰한 內容이다. 이런저런 對話 끝에 이 會長이 좋아하는 개와 自動車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그는 “自動車를 처음 본 건 大邱에서 혜화동으로 移徙(1947年)하고 2年 뒤였다”며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49年에 48年型 시보레를 사셨어요. 運轉手가 요즘 파일럿보다 더 人氣 있는 技術者였지요. 그때 運轉技士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모셨어요. 저도 처음으로 自動車를 만져봤지요.”

    인터뷰에 따르면 그가 自動車와 本格的으로 因緣을 맺는 건 美國 留學時節이었는데 뜻밖에 中古 自動車 장사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日本 와세다 大學을 卒業하고 美國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代 大學院에 進學했다. 이때도 그는 工夫보다 自動車에 더 關心이 많았다.

    “제가 처음 산 車가 이집트 大使가 타던 車였어요. 새 車를 사놓고 50마일도 안 뛰었는데 아랍 戰爭이 터져서 本國으로 發令이 난 겁니다. 새 車가 6600弗 할 땐데 그걸 4200불에 샀습니다. 그걸 서너 달 타고 4800불에 팔았습니다. 600不 남았죠. 또 美國人이 1年도 안 탄 걸 사서 깨끗하게 淸掃하고 왁스 먹여서 타다가 팔았죠. 이렇게 1年 半 있는 동안 여섯 番 車를 바꿨는데 나중에 올 때(1966年)보니 600~700弗 程度가 남았더라고요.”

    놀라워하는 記者의 눈초리를 向해 中古 自動車의 市場原理가 說明된다.

    “中古 自動車 市場原理는 簡單합니다. 넘버를 탁 달면 1마일을 탔든 半馬日을 탔든 그 자리에서 값이 3分의 1로 탁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1年 以內에 팔리는 놈을 골라 斜面 새 車를 헌 車 값에 살 수 있죠. 그런데 美國人은 車를 신발로 알고 淸掃를 잘 하지 않아요. 우린 힘이 남을 때니까 淸掃를 잘 해서 몇 달 타고도 팔 때는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거죠.”


    ‘신동아’ 2005年 5月號 ‘三星의 힘, 李健熙의 競爭力’이란 題目의 記事에도 李 會長의 自動車 사랑에 對한 이야기가 나온다. 于先 이 會長이 後繼者 敎育 時節 이야기가 紹介되는데 興味롭다.

    李健熙 會長은 選對 會長 앞에서는 ‘正規授業’을 받았지만, 뒤에서는 ‘自律學習’에 汨沒했다. 退勤 後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쪽으로는 趣味가 없었던 이 會長은 그럴 時間에 主로 技術 關聯 書籍을 耽讀하거나 電子製品, 各種 機械類를 分解하고 組立하면서 硏究를 거듭했다.

    혼자 解決하기 어려운 問題가 생기면 關聯 專門家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請했다. 그는 三星 副會長 時節 私席에서 “週末에 집으로 招請해 한手 배운 日本 技術者만도 數百 名이 넘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等 世界 有數 企業의 CEO들도 訪韓 時 이 會長 自宅을 主要 訪問地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自宅을 자주 찾는 限 財界 人士는 “李 會長의 書架엔 經營學 書籍은 別로 눈에 띄지 않는 反面 未來科學, 電子, 宇宙, 航空, 自動車, 엔진工學 等 이·工學 關聯 書籍이 櫛比하게 꽂혀 있는데, 全集類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直接 한 卷 한 卷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傳한다.

    自動車 마니아였던 이 會長은 留學 時節부터 中古車를 사서 엔진까지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組立하곤 했다. 웬만한 電子製品은 콩알만 한 部品의 機能 差異까지 꿴다.

    國産 製品과 外國産 製品을 갖다놓고 部品 하나하나를 比較하며 品質 隔差의 原因이 된 部品을 밝혀낸 뒤 系列社 技術擔當 任員을 불러 그것을 쥐여준다. (中略) 이 會長은 副會長 時節에도 隨行員 없이 혼자 海外 出張을 다녔다. 航空便 豫約도 直接 했고, 空港과 會社를 오갈 때도 主로 택시를 利用했다. 그는 “혼자 부딪쳐 봐야 사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고 다양한 經驗을 할 수 있다”는 理由를 내걸었지만, 事業과 關聯해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祕密을 維持해야 했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게 속이 便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祕書室에서도 所在를 把握하지 못하는 境遇가 種種 있었다. 아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아 湖巖이 “건희 어디 갔노?” 하고 물으면 祕書室에선 그제서야 行方을 搜所聞하느라 법석을 피웠다. 어렵사리 動線을 追跡해 보면 周邊에 알리지도 않고 海外나 地方에 가 있기 일쑤였다.

    機械처럼 規則的인 日課에 따라 움직였던 湖巖으로선 낮도깨비 같은 아들의 行態를 都統 理解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湖巖은 “祕書室은 都大體 뭣들 하고 있노?” 하며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祕書室 任員이 “불러올릴까요?” 하고 물으면 “뛰어다니게 놔둬 봐라. 뭔가 해오긴 할 거다”며 두터운 信賴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들은 忽然히 자취를 감춘 지 며칠 만에 나타나 海外 有數 企業들과의 技術提携 契約書를 꺼내 보이곤 했다. 그 무렵 삼성물산 도쿄支店長이던 호텔新羅 이길현 相談役의 말이다.

    ‘名色이 副會長이라는 사람이 도쿄知事에 電話 한 通 안 해주고 日本을 다녀가는 일이 許多했다. 어느 날 갑자기 事務室에 불쑥 나타나서 ‘나랑 같이 좀 가볼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 보면 日本 企業과 技術提携 契約書에 圖章을 찍는 자리였다.

    혼자서 세이코, 도시바, 미놀타, 歲콤 같은 會社를 휘젓고 다니면서 口頭契約을 해놓고 正式 契約을 맺는 날이 돼서야 우리를 불렀다. 도시바는 18年 前 그렇게 因緣을 맺은 後 只今은 每年 三星과 連席會議를 갖고 相生을 圖謀할 만큼 敦篤한 關係로 發展했다. 술도 잘 못 마시고, 숫氣도 없고, 남들 앞에서 듣기 좋은 소리도 잘 못하는 사람이 都大體 무슨 재주로 혼자 그런 굵직굵직한 契約을 성사시켰는지 只今까지도 疑問이다.


    삼성자동차 위해 私財까지 내놓고

    李健熙 會長의 委任 經營은 여러 사람의 證言으로 紹介한 바 있다. 앞서 紹介한 ‘신동아’ 記事에도 李 會長이 IMF 外換危機로 構造調整에 들어갔을 때도 ‘集中과 選擇’이라는 밑그림만 던져놓고 實務는 構造調整本部에 一任했다는 內容이 나온다.

    “(系列社를) 팔아야 한다고 判斷되면 내 눈치 보지 말고 果敢하게 팔아라”고 분명한 方針을 내놨기 때문에 社長團이 일을 處理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當時 三星과 빅딜 協商을 벌인 企業의 任員들은 이학수 構造調整本部長이 오너로부터 全的으로 委任을 받고 自己 判斷에 따라 協商 條件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을 보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고 한다.

    記事 內容에는 삼성차의 回生을 위해 이 會長이 삼성자동차 借入金 償還을 위해 私財 出演을 決心한 過程을 紹介하는 當時 이학수 構造調整本部長의 證言이 나온다. 內容은 이렇다.

    當時 三星 財務팀은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빅딜 하면 우리 系列社들이 數兆 원臺의 大宇 負債를 떠안게 되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삼성차가 法定管理로 가는 게 낫다고 判斷했다. 하지만 法定管理로 갈 境遇 系列社들엔 別 被害가 없겠지만 會長에게 銀行 借入金을 갚으라는 輿論이 造成될 憂慮가 있었다. 會長에게 그런 事情을 털어놨더니 會長은 ‘빅딜 하면 三星 全體가 흔들린다는데 苦悶할 게 뭐 있나, 내가 갚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빚 갚을 돈은 있느냐’고 물었다. ‘내놓을 건 삼성생명 株式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그걸 팔아버려’라고 했다.

    個人 돈 2兆8000億 원(三星은 삼성생명 株式을 1株當 70萬 원으로 算定해 李 會長이 出演한 400萬 注意 價値를 2兆8000億 원으로 推算했다)을 내놓는 決定을 내리는 데 10分이 채 걸리지 않았다. 事實 私財를 出演하지 않아도 法的으론 問題가 없으니 오너로선 그냥 버텨볼 만도 했던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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