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3~1910 新聞, 近代의 깨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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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45(1) 民間新聞과 民族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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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45(2) 日帝强占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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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8 解放空間의 左右對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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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61 事實報道의 勝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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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71 統制와 擴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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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987 ‘言論의 自由’ 守護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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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以後 미디어産業으로 成長
1883~1910 新聞, 近代의 깨우침
高宗은 國內外 消息을 百姓에게 傳하기 위해 新聞 發行의 勅命을 내렸다. 우리나라 最初의 近代新聞 漢城旬報는 나라의 門戶 開放과 國民 啓蒙을 編輯理念으로 했다. 우리나라 最初의 民間新聞 獨立新聞은 1896年 開化派 知識人 徐載弼이 創刊해 純 한글로 記事를 썼다. 政府 政策을 强度 높게 批判한 獨立新聞은 政府와 熱感의 壓迫을 이겨내지 못하고 3年餘 만에 廢刊됐다. 皇城新聞 主筆 張志淵은 을사늑약이 締結되자 歷史에 남을 名文(名文) ‘이날에 목 놓아 痛哭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라는 社說로 國權 回復을 부르짖었다. 新聞과 言論人들의 努力도 헛되이 朝鮮은 國權을 喪失하고 日帝 强占期로 들어섰다.
1910~1945(1) 民間新聞과 民族意識
朝鮮의 國權을 强奪한 日帝는 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와 日本語로 發行되는 京城日報만 남겨두고 모든 新聞을 없앴다. 그러나 日帝는 1919年 武斷統治에 抗拒하며 朝鮮의 獨立을 要求한 3?1萬歲運動 以後 이른바 ‘文化統治’라는 이름의 宥和政策으로 돌아섰다. 1920年 民間新聞의 發行을 許容해 東亞日報?조선일보?시사신문이 創刊됐다. 民間新聞들은 農村啓蒙과 文字 普及을 통한 文盲(文盲)退治 運動을 벌였다. 特히 동아일보는 日帝의 彈壓 속에서도 檀君 顯揚事業, 忠武公 遺跡保存運動 朝鮮의 노래 公募 等으로 民族意識을 鼓吹했다.
1910~1945(2) 日帝强占의 그늘
民間新聞들은 創刊 直後부터 苛酷한 檢閱 속에서 發賣禁止를 번번히 當했다. 1921年 시사신문이 門을 닫았다. 日本은 1937年 中日戰爭을 일으킨 後 民間新聞 統制를 强化해 協調的인 記事를 强要했다. 日帝의 壓迫 속에서도 新聞은 獨立運動 消息을 重要記事로 다루었다. 獨立軍 武裝部隊가 滿洲와 朝鮮의 接境 地域에 있는 日本警察 駐在所를 襲擊한 事件을 號外로 찍어 報道했다. 學校에서 한글과 우리말을 못 쓰게 하던 日帝는 마침내 1940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켜 光復 때까지 民間新聞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1945~1948 解放空間의 左右對立
解放의 空間에서 呂運亨을 支持하던 朝鮮人民補와 박헌영의 人工 路線을 主張하던 解放日報 等 左翼系가 먼저 言論을 掌握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等 右翼系 新聞들도 續續 復刊했다. 左翼系 新聞들은 蘇聯의 指令에 따라 韓國을 5年 동안 信託 統治하는 案을 贊成했다. 美軍政은 虛僞 誇張記事로 軍政을 攻擊하던 左翼系 新聞을 統制하기 始作했다. 美軍政은 解放日報를 印刷하던 朝鮮정판사에서 僞造紙幣를 찍은 事件이 터지자 解放日報를 廢刊 處分했다. 右翼系 新聞들은 李承晩, 金九의 한민당을 支持하고 信託統治에 反對하면서 自由選擧가 可能한 南韓 地域에서만이라도 總選擧를 實施할 것을 促求하는 論調를 폈다.
1948~1961 事實報道의 勝利
李承晩 政府의 出帆과 함께 左翼系 新聞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自由黨 政權은 右翼系 新聞이라도 政府에 批判的인 新聞은 彈壓했다. 新聞은 政府를 支持하는 與黨者와 그 反對인 野黨字로 갈렸다. 李承晩 政權은 末期로 접어들면서 長期執權?獨裁?腐敗?不正選擧로 얼룩졌다. 1960年 3.15 不正選擧에 抗議해 馬山에서 벌어진 大規模 群衆示威에서 얼굴에 催淚彈이 박힌 채 바다에 水葬됐던 金朱烈君의 주검이 떠올랐다. 言論이 이 寫眞과 記事를 大大的으로 報道하면서 4?19 革命의 起爆劑가 됐다. 新聞은 歷史의 激浪 속에서 勇氣 있는 事實報道로 民衆과 함께 李承晩 獨裁政權을 무너뜨렸다.
1961~1971 統制와 擴張
1961年 5?16軍事政變으로 政權을 잡은 朴正熙 軍事政府는 言論 出版의 事前檢閱을 規定한 布告令 第1號를 통해 言論을 掌握했다. 軍部는 쿠데타의 正當性을 確保하기 위해 經濟復興을 最優先 課題로 내세웠다. 朴正熙 政權은 1962年 初부터 經濟開發 5個年 計劃을 樹立하면서 對日請求權資金을 經濟開發의 種子돈으로 쓰기 위해 韓日會談을 推進했다. 1964年 全國의 學院街가 대일屈辱外交 反對示威로 술렁이고 新聞들이 示威를 連日 크게 報道하자 與黨은 國會에서 單獨으로 言論倫理委員會法을 處理해 報道 規制를 試圖했으나 言論의 끈질긴 抵抗에 부딪혀 留保됐다.
1971~1987 ‘言論의 自由’ 守護運動
朴正熙 政府는 1972年 10月 17日 維新憲法을 制定했다. 維新獨裁는 9次例 緊急措置를 發動해 維新憲法을 批判하는 報道를 一切 禁止했다. 1973年 記者들이 言論自由守護運動을 展開하면서 言論 統制에 抵抗하고 나섰다. 中央情報部의 壓力으로 동아일보에서 廣告가 사라지고 白紙 激勵廣告가 이어졌다. 1979年 10?26事態로 維新獨裁는 終焉을 告했으나 전두환 軍部가 다시 쿠데타로 政權을 잡고 言論 統廢合을 했다. 1987年 서울대生 박종철 君이 警察의 拷問으로 死亡한 事件을 新聞이 連日 크게 報道하면서 6月 民主抗爭이 일어났다. 6?29 民主化 宣言과 함께 民主主義의 言論 自由가 回復됐다.
1987以後 미디어産業으로 成長
1987年 民主化運動 以後 言論基本法이 廢棄됐다. 言論自由와 함께 紙面 統制가 풀리고 뉴스가 量的으로 增加하면서 紙面이 暴發的으로 늘어났다. 新聞市場이 開放돼 한겨례신문?國民日報?世界日報?文化日報 等 새로운 新聞이 續續 創刊됐다. 新聞製作에 電算製作시스템인 CTS 體制가 導入돼 新聞社에서 原稿紙와 납 活字가 사라졌다. 인터넷 媒體와 無價紙의 登場으로 종이新聞의 危機論이 擡頭됐지만 新聞들은 살아남기 위해 미디어의 新技術을 最大限 活用하며 ‘똑똑한 新聞(Smart Newspaper)’을 志向하고 있다. 2011年 東亞日報?조선일보?中央日報?每日經濟 等 有力紙들은 綜合編成 채널 TV에 進出해 綜合미디어 그룹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