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心)속 깊은(深) 것에 關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면서 ‘都大體 이건 왜 이러지?’ ‘왜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될까?’ 하고 생겨난 궁금症들을 메일(best@donga.com)로 알려주세요. 함께 苦悶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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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여러 마리가 體溫을 나누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런데 가시가 서로를 찔러대 到底히 가까이 있을 수 없어 금세 흩어지고 말았다. 또다시 날씨가 추워져 고슴도치들이 모여들었지만, 亦是나 서로의 날카로운 가시를 被害 흩어지기를 反復했다.
獨逸의 哲學者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851年 發表한 著書 ‘小品과 附錄(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人間關係의 特徵을 고슴도치에 比喩했다. 그는 冊에서 “社會의 必要가 ‘人間 고슴도치들’을 함께 몰아가지만, 그들 本性의 까칠하고 不快한 特性 때문에 서로 反撥할 뿐”이라고 一喝했다. 相當히 冷笑的이기는 하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혼자 있자니 외롭고, 다른 이와 함께 하자니 疲困한 內的 葛藤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連結되고 싶은 두 狀態를 모두 渴望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애初에 아무와도 엮이지 않으면 傷處받거나 골치 아플 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왜 이렇게 人間關係 때문에 人生의 많은 時間을 苦悶하며 보내게 되는 걸까.
사는 내내 繼續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
親密感에 對한 欲求와 傷處받지 않고 싶은 欲求가 兩立할 수 없다는 意味에서 이를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精神分析學者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21年 著書 ‘集團 心理學科 自我의 分析’에서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寓話를 紹介한 以後 心理學에서 이와 關聯한 많은 硏究가 이뤄졌다.
여러 硏究에 따르면 親密感과 所屬感에 對한 欲求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强力하다. 進化論的으로 봤을 때, 集團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外部 危險에 그대로 露出돼 곧 죽는다는 것을 意味한다. 그래서 對人關係에 問題가 생기면, 腦에서 危機 警報가 울린다. 이를 擔當하는 腦 部位는 몸이 아플 때도 類似하게 活性化되는 곳이다. 腦에서는 對人關係 問題를 몸이 아플 때만큼 生存에 큰 威脅이 생긴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仔細한 內容은
‘사람에게 傷處받았을 때, 鎭痛劑 ‘한 알’李 效果 있다?’
記事 參考)
現代 社會에서는 對人關係의 孤立이 곧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몸과 마음 健康에 致命打를 준다. 올해 初 美國 公衆保健서비스團은 외로움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健康에 害롭다는 硏究 結果를 發表하기도 했다. 또 마크 里어리 美 듀크大 心理學科 敎授 硏究에 따르면, 親密한 對人關係가 不足한 사람들은 외로움이나 罪責感, 嫉妬, 憂鬱, 不安 等을 훨씬 더 많이 經驗한다. 더 나아가 높은 比率로 精神 病理的 問題가 생기기도 하고, 免疫 體系 機能이 떨어지기도 한다. 골치 아픈 對人關係 問題를 뒤로 하고 永永 혼자 살 수만은 없는 理由다.
“넌 내게 侮辱感을 줬어” 비뚤어지고 싶은 마음
이런 渴望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對人關係에서 傷處받고 排斥당했을 때 關係 回復을 위해 애쓰는 것이 當然해 보인다. 好感을 사려고 努力해야 아무래도 關係를 잘 이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人間에게는 이럴 때 오히려 正反對로 더 攻擊的이고 利己的으로 굴게 되는 特異한 구석이 있다. 마치 “나에게 傷處 줬으니 난 더 비뚤어지겠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面貌다.
네이선 드月 美 켄터키代 心理學科 敎授 硏究팀은 對人關係에서 傷處받았을 때 사람들이 어떤 態度를 보이는지 觀察했다. 서로 初面인 實驗 參加者들을 5人 1組로 나눠 서로 人事하고 自己 紹介하는 時間을 줬다. 그리고 各自 兆원 中에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2名씩 이름을 써서 내라고 했다. 一種의 人氣 投票 같은 것이었다.
暫時 뒤 各自에게 結果가 通報됐다. 누군가는 나머지 兆원 4名 모두에게 選擇받았다는 氣分 좋은 消息이 傳해졌고, 또 다른 이들은 各各 3名, 2名, 1名에게 選擇받았다는 結果를 傳해 들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 中에는 아무에게도 選擇받지 못 한 사람도 있었다.
事實 이들이 通報받은 結果는 實際 投票 結果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소외당한 狀況을 만들어 내기 위해 硏究팀이 任意로 아무 結果나 通報해준 것이었다. 假짜 人氣 投票인지 알 理 없는 參加者 中 ‘0票’를 받은 이들의 氣分이 좋을 理 없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選擇받지 못했다는 事實에 꽤 不快하고 感情 傷하지 않았을까.
이런 狀態에서 硏究팀은 앞서 같은 조가 아니었던 다른 사람과 2人 1組로 짝을 이루고 簡單한 게임을 하도록 했다.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罰則으로 듣기 싫은 騷音 버튼을 눌러 膺懲하는 規則이 適用됐다. 騷音의 强度와 持續 時間도 이긴 사람 마음대로 定하게 했다.
그리고 앞서 假짜 人氣 投票 結果와 膺懲의 苛酷함 水準을 比較해봤다. 어떤 結果가 나왔을까? 앞서 ‘0票’를 받았던 사람들이 罰則을 가장 세게 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에게 傷處받아 氣分 傷한 마음을 第三者인 게임 파트너에게 火풀이한 셈이다.
이와 비슷한 條件으로 꾸민 다른 實驗에서도 亦是 對人關係에서 排斥당한 사람들은 第三者에게까지 攻擊性을 드러냈다. 따돌림 狀況을 겪은 實驗 參加者에게 다른 사람이 먹을 飮食에 願하는 만큼 매운 소스를 뿌릴 機會를 줬더니, 마구 뿌려댄 그 量이 엄청났다. 甚至於 飮食을 먹게 될 사람이 매운 飮食을 못 먹는다는 事實을 알면서도 그랬다.
硏究팀은 “누군가가 나를 拒否했다는 느낌을 받으면 一種의 攻擊으로 받아들여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攻擊性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說明했다. ‘묻지마’ 凶器 亂動犯이나 銃器亂射犯 같은 犯罪者 一部는 외톨이 生活로 强化된 攻擊性이 極端的으로 나타난 事例로 볼 수 있다. (關聯 記事
‘연이은 ‘묻지마 칼부림’ 그들은 都大體 왜 世上을 向해 凶器를 휘두르나’
參考)
날 支持해주는 사람 딱 ‘한 名’만 있어도···
‘삐딱船’ 타는 마음은 사람들과 連結되고 싶고, 所屬되고 싶은 强烈한 欲求가 挫折됐을 때 느끼는 不快한 感情이 너무 크기 때문 아닐까. 心術을 많이 부릴수록 더 마음이 아프다는 傍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繼續 攻擊的이고 反社會的으로 굴면 다른 사람들에게 選擇받을 機會는 더 줄어든다. 어쩔 수 없이 疏外가 또 다른 疏外를 낳는 結果로 이어질 可能性이 크다.
이 硏究에서 말하려는 것은 이게 다가 아니다. 위에서 紹介한 두 實驗 모두 1名이라도 自身을 支持해준 사람이 있는 境遇에는 攻擊性이 훨씬 덜 나타났다. 아무에게도 選擇받지 못 한 사람들보다 1名에게라도 選擇받은 사람은 攻擊性이 折半 水準으로 뚝 떨어졌다. 卽, 1名이라도 나를 支持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傷處받고 비뚤어지려는 마음이 훨씬 줄어들 수 있다는 意味다.
勿論 支持해주는 사람의 數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다른 사람에게 攻擊性을 드러내는 水準이 줄어들었다. 周邊 人間關係가 얼마나 ‘支持的’인지에 따라 溫和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豫測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支持者의 數가 한 名씩 늘어날수록 줄어드는 攻擊性 水準의 幅은 그다지 劇的이진 않았다. 나를 支持해주는 사람이 單 한 名이라도 ‘있다’는 것 自體가 重要했다.
가시에 또 찔려도…우리는 새로운 因緣을 渴望한다
사람에게 傷處받았을 때 아무에게나 心術부리고 비뚤어질 수 있는 人間이지만, 다른 한便으로는 새로운 因緣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도 如前히 갖고 있다. 한 番 외톨이가 되는 經驗을 해본 사람들은 새로운 親舊를 사귈 機會가 오면 宏壯히 열린 마음이 된다고 한다.
美 플로리다주립대 心理學科 硏究팀은 앞서 紹介한 實驗에서처럼 人爲的으로 따돌림 狀況을 겪게 한 實驗 參加者들을 觀察했다. 이들은 외톨이가 되는 經驗을 하지 않은 實驗 參加者들보다 새로운 親舊를 사귈 수 있는 環境에 더 積極的으로 나섰다. 이들은 △社交 클럽에 加入하겠다고 하거나 △혼자 作業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協業하는 일을 選擇하거나 △實驗 파트너에게 좋은 印象을 주기 위해 自己 利益(現金)을 抛棄하기도 했다. 새로운 因緣을 만날 수 있다는 希望이 생기자, 攻擊的이고 利己的으로 구는 代身 受容 받기 위해 努力하게 된 것이다.
앞서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安全距離를 維持하면서 머리만 맞대 가시에 찔리지 않고 適當한 溫氣를 나눌 뿐”이라고 敷衍했다. 가시가 무서워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 程度만 서로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現實의 人間關係에서는 언젠가 또 가시에 찔리는 것을 甘受하고 溫氣를 渴望하는 마음이 더 커 보인다. 甚至於 따뜻함을 나눌 對象이 單 한 名이라도 있으면 비뚤어지고 모났던 마음도 너그럽게 바뀐다. 다른 사람과 連結되고, 受容 받고 싶어 하는 人間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갈수록 팍팍해지는 世上에서 나는 只今 외로운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한 사람’이 되어주고 있을까.
最高야 記者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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