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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晩熙 監督 오래 살았으면 韓國映畫판이 달라졌을 것”|東亞日報

“李晩熙 監督 오래 살았으면 韓國映畫판이 달라졌을 것”

  • 東亞日報
  • 入力 2015年 5月 20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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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周忌 맞은 映畫監督 李萬熙의 痕跡 좇아
映畫俳優 딸 이혜영과 詩人 김지하의 만남

이혜영 씨가 직접 고른 아버지 이만희 감독 사진. “손으로 반쯤 가린 아버지 얼굴이 신비해서 좋다”고 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혜영 氏가 直接 고른 아버지 李晩熙 監督 寫眞. “손으로 半쯤 가린 아버지 얼굴이 神祕해서 좋다”고 했다. 한국영상자료원 提供
《 “열 살 나던 해부터 몇 해간 잊을 수 없는 傷處로 남은 時間이 이어졌어요. 그 時節 一 年에 한 番 아버지 얼굴 보기도 힘들었죠. 바깥에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 늘 궁금했어요.” 13日 映畫俳優 이혜영 氏(53)는 서울을 出發해 江原道 原州로 함께 타고 가던 車 안에서 입을 열었다. 그의 아버지 李萬熙 映畫監督(1931∼1975)은 韓國 映畫社에서 가장 個性 있는 監督의 한 사람이자 ‘天才’로 꼽혔다. 바깥에선 映畫 ‘晩秋’를 만든 作家主義 監督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집에서는 장난氣 많은 아빠였다. 그는 三男妹를 지프車에 태워 南山으로 데려가 케이블카를 태워주고, 집에서 쉴 때면 손수 볶음밥도 해줬다. 그런 아버지가 1970年 以後 ‘映畫판’李 沈滯되고 健康까지 나빠져 三男妹를 거의 돌보지 못했다. 그러다 1975年 4月 映畫 ‘삼포 가는 길’ 編輯 中 쓰러져 病院에 入院했다가 갑작스레 世上을 등졌다. 不過 마흔넷이었다. 》
13일 강원 원주시 토지문화관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왼쪽)과 영화배우 이혜영 씨. 이날 김 시인은 1974년 경찰에 체포되던 자신을 보며 오열하던 이만희 감독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외아들이라 형제가 없어 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인간 이만희의 인간성이었다.” 원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3日 江原 원주시 土地文化館에서 만난 金芝河 詩人(왼쪽)과 映畫俳優 이혜영 氏. 이날 金 詩人은 1974年 警察에 逮捕되던 自身을 보며 嗚咽하던 李晩熙 監督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兄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내가 외아들이라 兄弟가 없어 그 마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게 人間 李萬熙의 人間性이었다.” 原州=김경제 記者 kjk5873@donga.com
李 氏의 原州行은 몇 해 前 金芝河 詩人(74)의 回顧錄 ‘흰 그늘의 길’을 읽다 發見한 ‘그 무렵 내가 좋아하던 映畫監督 李萬熙 兄님’이란 글句에서 始作됐다. 李 氏가 平生 늘 궁금해하던 그 時節 아버지와 金 詩人은 가까웠다. 金 詩人이 열 살 아래였지만 呼稱은 이 兄, 이 監督이었다. 1973年 金 詩人이 明洞聖堂에서 結婚할 때 이 監督이 結婚式 場面을 카메라에 담았다. 金 詩人은 民靑學聯 事件 等에 連累돼 獨裁 政權에 쫓기던 中 1974年 이 監督이 映畫 ‘靑女’를 찍고 있던 全南 紅島의 撮影場에서 檢擧됐다.

아버지의 別世 40週期를 맞아 勇氣를 낸 이 氏는 原州 土地文化館을 찾아가 金 詩人을 만났다. 李 氏는 冊 ‘映畫監督 李萬熙’ ‘映畫天才 李萬熙’와 ‘靑女’ DVD를 건넸다. 그러면서 金 詩人에게 “直接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請했다.

金 詩人은 冊 表紙 속 李 監督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해 金 詩人은 이 監督과 시나리오 作家 김원두와 함께 木浦行 汽車를 타고 紅桃로 내려갔다. 金 詩人은 汽車 안에서 겨울 雪嶽山을 背景으로 絶望的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나리오를 李 監督에게 들려줬다. 金 詩人은 “그때 이 兄이 燒酒 한盞 들이켜더니 運動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나하고 映畫 하자고 했다. 偉大한 監督이 나하고 映畫 하자니 얼마나 近似했던지”라고 回顧했다. 하지만 金 詩人은 “後날 이 監督이 ‘藝術家는 瞬息間에 革命을 한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屈辱的인 韓日會談을 보고선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映畫 캐스팅에 對한 ‘弄半眞半’도 있었다. “當時 내가 워낙 드세고 辱을 잘했는데 그런 날 보고 가만히 웃으며 ‘映畫에 나오면 히트 치겠다’고 한 것도 생각난다. 辱, 막말엔 秋(醜)의 美學이 있다.”(김 是認)

李 氏가 아버지의 시나리오 作家 筆名도 ‘醜男’이었다고 들려주자 金 詩人은 껄껄 웃었다.

李 氏는 “‘晩秋’ 製作者 호현찬 氏가 ‘李晩熙 監督과 하길종 監督이 오래 살았다면 韓國 映畫판이 바뀌었을 거다’고 했는데 同意하느냐”고 물었다. 金 詩人은 “(同意 程度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公公然히 그 말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韓國 傳統의 것을 제대로 살린 이 監督과 美國에서 映畫를 工夫한 하길종이 함께 映畫판을 이끌었다면 내가 꿈꾸던 文化 르네상스가 왔을 것이야. 李 監督을 希望으로 삼았는데 일찍 가시면서 꿈이 사그라졌어.”

李 監督의 墓碑銘은 김승옥 小說家(74)가 썼다. ‘當身은 砲彈 속에 默默히 匍匐하는 兵士들 便이었고 挫折을 알면서도 人間의 길을 가는 戀人들 便이었고 그리고 暴力이 미워 剛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便이었다.’

李 監督은 嚴酷한 反共 이데올로기 雰圍氣 속에서도 作家的 信念을 지키려 애썼다. 1965年엔 映畫 ‘7人의 濾胞로’에서 北韓軍을 人間的으로 그렸다가 容共主義者로 몰려 苦楚를 겪기도 했다. 李 氏는 “아버지는 軍事政權 時節에도 人間 各自의 事情을 細心하게 헤아리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反共이 아니라 反轉을 얘기하다가 苦楚를 겪었다”고 했다. 金 詩人도 “李 監督은 反轉을 이야기했다”고 同意했다.

生前 李 監督은 映畫 51篇을 찍었지만 ‘晩秋’ ‘市長’ 等이 流失돼 26篇만 남아 있다. 別世 以後 오랜 期間 잊혔다가 2000年代 以後 젊은 映畫監督, 評論家들이 그를 다시 呼名하며 再評價되고 있다. ‘晩秋’는 2010年 김태용 監督이 현빈과 탕웨이 主演으로 4番째 리메이크하며 世紀를 뛰어넘었다.

金 詩人은 對話를 마치며 “韓國 映畫史에서 宏壯히 重要한 監督인데 影響力이 漸漸 사라지고 살려내려는 사람도 적다. 當身에겐 아버지지만 追憶의 對象으로만 볼 人物은 아니다”고 强調했다. 그러면서 李 氏의 손을 꼭 잡았다.

李 氏는 原州를 떠나며 “아버지 時代를 함께 산 金 詩人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整理하려고 했는데 새로운 宿題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 50주기엔 사라진 ‘晩秋’ 필름을 꼭 찾겠다고 했다.

原州=-박훈상 記者 tigermask@donga.com
#李萬熙 #이혜영 #金芝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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