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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軍 왜 서울에서 3日 虛送했나[정전 70年, 끝나지 않은 6·25]|東亞日報

北韓軍 왜 서울에서 3日 虛送했나[정전 70年, 끝나지 않은 6·25]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6月 23日 11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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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回] 北韓軍 ‘서울 3日’ 미스터리

동아일보 傘下 花亭平和財團은 停戰(停戰) 70周年을 맞아 6·25 戰爭 3年을 再照明하는 企劃 ‘停戰 70年, 끝나지 않은 6·25’를 連載합니다. 아픈 過去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趣旨로 回顧錄과 硏究資料를 바탕으로 戰爭을 통해 各國이 追求했던 目標의 虛實을 眺望하고 아울러 全國에 散在한 6·25 激戰 現場을 찾아 當時 激戰 狀況도 再構成합니다.
“北傀軍의 ‘서울 3日’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南韓 各地에서 共産黨 地下組織이 一齊히 暴動을 일으키는 ‘붉은 叛亂’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主張이 있다. 北傀軍이 서울을 占領한 餘勢로 밀어붙였다면 美 地上軍 參戰도, 仁川上陸作戰도 없었을 것이다.” (정일권, 29쪽)

北韓軍은 1950年 6月 25日 38線을 넘어 南侵을 開始한 뒤 3日 만인 28日 서울 漢江 以北을 占領했다. 그런데 北韓軍은 7月 1日 漢江을 넘을 때까지 3日間 서울에서 더 以上 進擊을 하지 않고 머물렀다. ‘北韓軍 서울 3日’ 滯留가 왜 發生했는지 다양한 解釋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南侵 承認과 支援을 얻어내기 위해 ‘電擊戰’을 主張한 것과는 다른 行步였고 戰爭의 樣相에도 큰 影響을 미쳤다는 點이다.

서울 영등포에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서울 영등포에 맥아더 將軍이 漢江 防禦線을 視察했다는 標識板이 세워져 있다.


● ‘서울 3日’이 美 地上軍 派兵 앞당겼다
北韓軍이 漢江 以北에 머무르는 3日間 國軍은 ‘始興地區 戰鬪司令部’를 設置하고 漢江 以南에 首都師團, 2師團, 7師團 等 3個 師團을 配置해 時間을 벌었다. ‘北韓軍 서울 3日’ 期間 中인 6月 29日 맥아더 司令官이 도쿄에서 專用機 바탄號를 타고 水原 飛行場에 내린 뒤 李承晩과 만난 뒤 곧바로 漢江 防禦線까지 왔다.

北韓軍이 漢江 北쪽에서 南쪽으로 120mm 迫擊砲彈을 퍼붓는 가운데 맥아더는 영등포의 한 防禦線 個人壕에서 一等中士에게 묻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壕 속에 있을 셈인가?”

“撤收 命令이 없었다. 命令이 내려지든가, 죽는 瞬間까지 塹壕를 지킨다.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다. 武器와 彈藥을 달라”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美 地上軍 2個 師團 派兵을 要請했다. 트루먼 大統領은 7月 1日 日本 駐屯 美 24師團을 緊急 投入했다. ‘北韓 서울 3日’이 美 地上軍의 迅速한 派兵에 도움이 됐다며 戰死(戰史)에 傳해지는 에피소드다.

1951年 5月 15日 者 美軍 情報誌에는 “(北韓이 迅速히 南下하지 않아) 洛東江 防禦線을 뚫지 못한 데는 서울 占領 뒤 漢江 渡河를 遲滯한 것 때문”이라는 김일성의 歎息이 있다.

38線에서 서울까지는 約 45km. 國軍의 散發的인 저 航速에 北韓軍은 하루 15km씩 進軍해 3日 만에 서울을 占領했다. 서울에 머문 3日이면 7月 1日 水原, 7月 4日에는 鳥致院까지도 進擊할 수 있었다. ‘北韓軍 서울 3日’은 南쪽으로의 進擊이 며칠 늦어진 以上의 6·25 戰爭 全體의 樣相을 바꾸는데도 影響을 미쳤다는 分析도 있다. 그래서 왜 3日을 漢江 以北에서 머물렀는지 다양한 解釋이 나온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자 1950년 6월 28일 새벽 폭약을 터뜨려 파괴한 한강 인도교
北韓軍이 미아리고개를 넘자 1950年 6月 28日 새벽 爆藥을 터뜨려 破壞한 漢江 人道橋


● ‘漢江 다리 끊어져서 넘지 못했나’
北韓軍은 6月 27日 4時 창동 防禦線, 28日 1時에는 미아리 防禦線을 넘었다. 國軍은 미리 設置해 둔 爆藥을 터뜨려 28日 새벽 2時 半 漢江 人道橋와 京仁 鐵橋를 끊고 廣津橋는 4時에 爆破했다. 漢江鐵橋는 一部만 破損됐다. 北韓軍이 서울 中心을 占領하기 前 漢江 다리가 끊어져 迅速히 渡河를 못 했다는 視角이 있다.

當時 漢江은 水深 3m, 江幅 700?1500m假量이었다. 北韓軍은 漢江을 渡河할 裝備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當時 漢江에는 麻布나루 等 6個 나루터에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1個 小隊 兵力도 탈 수 있는 ‘늘배’라는 木材 運搬先導 있었다. 길이가 12m假量이다.

漢江에는 4個의 다리가 있었는데 廣津橋 漢江 人道橋 京仁 鐵橋는 破壞됐으나 漢江鐵橋는 一部 鐵路 레일과 枕木만 損傷됐다. 레일과 枕木 交替는 數 時間이면 可能했다. 낮 攻襲을 避해 北韓軍은 夜間 補修 作業을 거쳐 이틀 만에 鐵路를 補修해 3日 새벽 前車道 건너게 했다. 漢江 以南에서 國軍이 防禦線을 펴고 있었지만 3日間 넘지 못할 만큼 强力한 抵抗이라고 보기 어렵다. 漢江 以北의 主力 部隊가 撤收 命令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부서져 重裝備, 車輛, 曲射砲와 迫擊砲, 機關銃 等을 大部分 버리고 漢江을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金日成이 서울에 들어온 뒤 漢江 다리 掌握에 疏忽한 것도 初期 作戰의 失策으로 指摘된다. 27日 서울로 進入한 105 戰車餘團은 漢江 다리보다는 中央廳, 西大門刑務所, 放送局, 新聞社 等을 最優先으로 接受하라는 命令을 받았다. 백선엽 將軍은 金日成이 3日 만에 서울을 占領한 기세대로 漢江을 넘어 南進을 繼續했다면 아주 不利했을 것인데 天幸으로 김일성이 주춤거리고 말았다고 回顧했다. (白善燁 1卷, 294쪽)

● ‘서울만 占領하면 戰爭 끝으로 誤判?’
‘北韓軍 서울 3日’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學界에서는 北韓軍의 ‘서울 制限占領論’도 提起됐다. 北韓 人民軍의 南侵 目標가 서울을 占領하는 것에 制限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占領한 뒤 뭔가를 기다리며 遲滯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年 러시아 옐친 大統領이 김영삼 大統領에게 傳達한 1949年 1月 ? 1953年 7月 蘇聯 外交文書 中 김일성과 스탈린 間에 오간 書翰에는 서울 制限占領에 關한 內容은 全혀 없었다. 박헌영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을 만났을 때 “北韓이 南侵했을 때 20萬 名이 蜂起하고 南韓 內 빨치산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勃發 當時 韓國軍이 保有한 8個 四端 中 4個 師團은 後方에 配置되어 있었다. 一部는 빨치산 討伐 任務를 맡았다. 하지만 1948年 10月 旅順 事件 以後 빨치산 數字는 2500餘名까지 크게 줄었다가 그 後 다시 늘어나기도 했으나 大規模 掃蕩 作戰으로 1950年 初에는 智異山의 빨치산이 大部分 討伐됐다. (KBS 歷史스페셜 1999年 6月 22日). 北韓軍이 서울에서 머무르며 빨치산의 呼應을 기다릴 狀況이 아니었다.

7月 1日 스탈린은 北韓 駐在 大使 스티코프에게 보낸 電文에서 “朝鮮司令部가 어떤 計劃을 하고 있는지 全혀 通報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南韓을 빨리 ‘解放’시킬수록 美國이 參戰 可能性이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1992년 8월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한 ‘조선인민군 제1 타격계획 작전지도’. 중부 전선의 북한군이 서울 남쪽에서 국군 퇴로를 차단한 뒤 포위 공격하는 작전이 표시되어 있다.
1992年 8月 聯合通信이 러시아 軍 歷史硏究所 硏究員으로부터 入手한 ‘朝鮮人民軍 第1 打擊計劃 作戰地圖’. 中部 戰線의 北韓軍이 서울 南쪽에서 國軍 退路를 遮斷한 뒤 包圍 攻擊하는 作戰이 標示되어 있다.


● 霧散된 ‘首都圈 包圍 殲滅 作戰’
‘北韓軍 서울 3日’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北韓의 南侵 構想을 볼 必要가 있다. 南侵 開始 直前인 6月 22日 作成된 것으로 開戰 後 北韓軍에게서 鹵獲한 文書 ‘北韓軍 情報計劃’에 따르면 南侵은 3段階로 進行된다.

  • 1段階 防禦線 突破 및 主力 殲滅
  • 2段階 前과 擴大 및 豫備隊 殲滅
  • 3段階 掃蕩作戰 및 南海岸 到達

核心은 1段階로 서울을 占領한 主力軍과 春川 原州 等을 占領하고 國軍의 後方으로 온 北韓軍이 水原 以北에서 韓國軍을 包圍 殲滅하는 것이다. 그 後 南海岸까지 3個 方向으로 進擊한다. 이 作戰이 成功하려면 北韓軍 1軍團 等 主力 部隊가 迅速히 서울을 占領하고, 中部 戰線의 北韓 2師團과 7師團은 원주와 洪川을 占領한 뒤 南쪽 後方에서 漢江 以南 地域을 封鎖 包圍해야 한다. 計劃대로 進行돼 首都圈에서 國軍 主力을 殲滅하면 1個月 以內에 戰爭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北韓은 생각했다. 美國이 介入할 時間을 주지 않는 速戰速決 戰略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作戰이 蹉跌을 빚은 것은 作戰上 住公(主攻)이 아닌 朝貢(助攻)을 맡은 中部 戰線에서 發端이 됐다.

● 國軍 6師團의 서전(瑞戰), 春川 洪川 戰鬪
北韓은 西部戰線에서 1軍團 等 主力이 서울을 攻略하는 동안 中部 戰線인 春川?洪川에서는 朝貢 部隊를 迂廻 南珍시켜 首都圈 國軍의 退路를 遮斷하는 作戰을 세웠다. 首都圈 包圍 殲滅 作戰이다. 春川 洪川 地球는 國軍 第6師團(淸聲部隊)李 맡고 있었는데 北韓 精銳 2軍團을 맞아 善戰하면서 計劃은 틀어지기 始作했다. (남도현, 47쪽)

6師團이 春川에서 사흘, 洪川에서 이틀을 버텨 30日까지 北韓軍을 沮止한 뒤 戰略的 後退를 하면서 北韓軍은 ‘首都圈 殲滅 作戰’에 投入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됐다.

中部 戰線으로 내려온 北韓軍은 2軍團 隸下 2師團과 12師團이었다. 6師團은 7聯隊가 玉山砲, 19聯隊가 洪川 말고개에서 肉彈突擊까지 敢行하며 敵의 自走砲를 막아냈다. 師團의 第16砲兵大隊는 春川과 洪川을 오가며 猛活躍했다.

春川地球 全的記念館에 訪問客이 寫眞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春川=구자룡 記者 bonhong@donga.com


● 休暇도 줄이고 平素에도 徹底한 訓鍊
6月 24日 0時 全軍 非常警戒令이 解除돼 25日 前方 部隊의 外出 外泊 休暇 將兵이 많았다. 하지만 6師團은 戰爭 直前 歸順한 北韓軍 自走砲 部隊 兵士가 ‘곧 北韓軍이 내려올 것’이라고 證言해 外出 外泊을 制限하고 警戒를 强化했다. 16砲兵 大隊는 敵의 豫想 主要 接近路에 火力을 集中하는 練習을 反復했는데 實際 狀況에서 그대로 適用해 不足한 裝備에도 不拘하고 큰 效果를 봤다.

北韓軍의 住公은 洪川의 12師團, 朝貢은 春川의 2師團이었다. 먼저 制動이 걸린 것은 春川이었다. 春川의 國軍 7聯隊는 1個月 前 高等學生과 住民들의 도움까지 받아 陣地를 構築했다.

北韓軍 2師團은 開戰 直後 只今은 水沒된 春川의 첫 關門 某진교를 計劃대로 突破했다. 問題는 玉山砲. 北韓軍이 集中 打擊을 받은 玉산포는 논밭 平地로 이곳을 내려다보는 우두산 8部 稜線에 塹壕를 파두었다. 심일 小委는 5名의 決死隊와 함께 對戰車砲와 火焰甁, 手榴彈으로 SU-76 自走砲 2臺를 破壞해 創軍 以來 처음으로 太極武功勳章을 받았다.

北韓軍은 26日 16砲兵 大隊가 平素 主 侵攻路로 豫想하고 射擊訓鍊을 해왔던 北漢江 河川 敷地로 내려와 砲兵大隊의 砲擊 效率을 높였다. 砲兵大隊의 執拗하고 精巧한 砲擊으로 北韓軍이 머리를 들지 못할 程度로 두려움을 느꼈다고 北韓軍 捕虜가 陳述했다고 한다. 北韓軍 2師團은 이곳에서 50%假量의 電力 損失을 봤다. 7聯隊는 이틀間 玉산포를 지키다 素養校로 옮겨 春川의 關門인 素養校에서 다시 激戰을 벌였다. 素養校에는 只今도 銃彈 자국이 남아있다.

春川 戰鬪에서 打擊을 입자 洪川까지 내려갔던 住公 12師團의 2個 連帶와 603모터싸이클 連帶를 春川으로 ‘回軍’시켰다. 그러자 김종오 6師團長은 春川의 7連帶를 후퇴시키고 19聯隊와 16砲兵 大隊도 洪川으로 이동시켰다.

春川地球 戰績碑. 春川=구자룡 記者 bonhong@donga.com


● ‘11名의 肉彈 突擊隊’
一部 部隊를 春川으로 보낸 12師團 亦是 計劃대로 洪川을 占領하지 못했다. 良久를 거쳐 洪川으로 向하던 北韓軍이 말고개에서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이곳을 지키던 19聯隊의 11名 肉彈突擊臺는 굽은 地形을 利用해 숨어있다가 허리에 携帶한 對戰車砲를 發射하거나 SU-76 自走砲에 뛰어올라 手榴彈을 던지고 내려오기도 했다. 突擊隊員 大部分이 犧牲됐다. 戰鬪 現場에는 ‘11勇士 肉彈部隊 戰績碑’가 세워졌다. 고갯길에서 길이 막혀 孤立된 北韓 12師團 兵力은 春川에서 내려온 16砲兵 大隊가 集中 打擊했다.

홍천 말고개  육탄용사 전적비. 군 부대내에 위치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다.
洪川 말고개 肉彈勇士 戰績碑. 軍 部隊內에 位置해 一般人들이 接近하기 쉽지 않다.
말고개 戰鬪의 宣傳은 春川에서 撤收하던 7聯隊의 撤收路를 確保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25日 새벽 東海岸으로 北韓 766部隊가 上陸해 後方이 遮斷됐던 國軍 8師團이 太白山脈을 넘어 堤川으로 安全하게 撤收할 수 있게 했다. 6師團과 8師團이 前歷을 保存한 것은 以後 戰況에도 影響을 미쳤다.(남도현, 66쪽). 後退하면서 敵의 進擊을 沮止하는 ‘地緣 作戰’에 加擔하고 洛東江 防禦線 戰鬪에서도 맡은 役割을 遂行했다.

春川 洪川 戰鬪에서 1個 聯隊級 損失을 입은 北韓軍은 2軍團長, 2師團長을 電擊 交替했다. 戰爭 初期 措置로서는 異例的으로 北韓軍 指導部도 큰 失策이라고 判斷한 것을 보여준다.

6師團은 西部戰線에서 서울이 占領되고 東部戰線의 8師團도 後退하면서 6月 30日 忠州로 移動했다. 北韓軍의 中部戰線 主力을 5日間 沮止한 뒤였다.

江原道 洪川의 말고개는 當時의 구불구불한 山길에서 往復 6車路로 바뀌었다. 하지만 道路 右側의 낭떠러지는 如前했다. 肉彈勇士의 攻擊을 받은 北韓 自走砲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洪川=구자룡 記者 bonhong@donga.com


● 北韓軍 3日 늦은 漢江 都下 南珍
春川 洪川 戰鬪에서 5日을 묶인 北韓軍 2師團과 뒤에 戰鬪에 加勢한 7師團이 楊平에서 漢江을 넘은 것이 7月 1日이었다. 이날 서울을 占領한 뒤 3日을 遲滯하고 있던 北韓軍 主力 3,4師團도 漢江을 건넜다. 마치 中部 戰線의 2軍團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내려가는 模樣새다.

北韓軍 2師團이 水原에 到着한 것은 7月 5日로 國軍은 南쪽으로 後退해 電力을 補强한 뒤였다. 美軍 第24師團은 7月 1日 投入돼 5日 誤算까지 내려온 北韓軍과 죽미령에서 첫 交戰을 하게 됐다. 春川에서 時間을 遲滯한 北韓軍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後退하는 國軍을 遮斷하지 못했고 美軍이 參戰할 수 있는 時間을 벌어 주었다.(박태균, 192쪽)

<票> 國軍 6師團과 北韓軍 2軍團의 電力 및 人命 被害


國軍
北韓軍
參加 部隊
6師團 2聯隊, 7聯隊, 19聯隊, 第16砲兵大隊
2軍團 2師團, 5師團, 12師團, 第603모터싸이클 連帶
兵力 數
約 1萬 名
約 3萬5千名
主要 裝備
57mm 對戰車砲
122mm 曲射砲, 76mm 野砲, 45mm 對戰車砲
前死傷者
405名(死亡 52名)
6千792名, 砲로 122名
武器 裝備 損失
迫擊砲 16門, 57mm 大戰自暴 1門
SU-76 自走砲 18門, BA-64 裝甲車 2代, 45mm 對戰車砲 2門, 迫擊砲 8門
春川地球 全的記念館에 揭示된 春川 洪川 戰鬪의 主要 指揮官들과 公的. 春川=구자룡 記者 bonhong@donga.com


● ‘地緣 作戰’을 빛낸 韓國軍의 鬪魂
北韓이 T-34 電車를 앞세워 釜山까지 電擊的으로 攻擊해 왔다면 美國의 參戰을 곤란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北韓軍은 서울로 進擊해 서울에서 3日 假量을 南珍夏至 않고 머물렀다. 北韓은 釜山으로 남진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機雷 附設, 空中 또는 海上 攻擊 等으로 釜山港에 對한 美軍의 接近을 沮止하거나 遲延시키지 않았다. 釜山港을 占領하거나 고립시키지 않아 美軍의 橋頭堡가 되게 한 것은 共産側의 決定的인 失手로 指摘된다.(손튼, 250쪽)

北韓의 奇襲 南侵 以後 國軍은 勿論 美軍이 投入된 뒤에도 8月末 洛東江 防禦線을 構築할 때까지 一方的으로 後退하면서 ‘地緣 作戰’을 폈다. 美 女性 從軍記者 마거릿 히긴스는 ‘地緣 作戰’을 이렇게 풀이했다. “天安 鳥致院 錦江 大戰 嶺東 等에서 우리가 當한 敗北를 指稱하는 用語이자, 韓國에서 끔찍한 날들을 實際 目擊한 사람 모두의 歎願이다.” 맥아더 將軍은 共産主義者들이 開戰 初期 몇 週 동안 머뭇거린 것이 그들의 가장 큰 失手라고 보았다. 美軍이 北韓을 過小評價한 것 만큼, 北韓은 美軍을 過大評價했다는 것이다.(히긴스, 98쪽)

初期 戰鬪는 一方的인 後退였고 美軍이 投入된 後에도 當分間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美軍이 投入되기 前 中部 戰線에서 6師團의 奮鬪는 前世에 큰 影響을 미쳤다. 3年間 치러진 많은 戰鬪들 中에서 春川과 洪川 戰鬪를 다시 돌아볼 理由가 여기에 있다.

國軍 6師團과 김종오 師團長의 榮辱

6·25 戰爭이 3年 假量 이어지면서 戰爭에 參加한 部隊와 指揮官들은 숱한 戰鬪 속에 勝敗가 엇갈리고 榮辱이 交叉했다. 代表的인 事例가 開戰 初期 春川 洪川의 中部戰線을 擔當한 國軍 6師團이다. 美軍은 군우리 戰鬪의 慘敗와 지평리 戰鬪에서 雪辱한 陸軍 第2師團이다. 그야말로 地獄과 天堂을 오가는 經驗을 했다.

6師團은 開戰 初期 春川과 洪川 戰鬪에서 北韓軍 2師團과 7師團을 맞아 사흘 以上 沮止함으로써 서울 陷落 以後 北韓軍 南進의 발목을 잡는데 決定的인 寄與를 했다. 6師團이 洪川에서 撤收해서 後退한 것도 다른 戰線이 밀리면서 不可避한 後退 作戰이었다.

그런데다 後退해 가면서도 7月 5日∼8日 동락리 戰鬪에서 큰 戰果를 거둬 6師團 7聯隊의 聯隊長부터 士兵까지 將兵 全體가 1階級 特診하는 榮光을 누렸다. 같은 時期 京畿道 誤算의 죽미령에서는 美國 24師團의 스미스 特任部隊가 準備되지 않은 傲慢함으로 北韓軍에게 큰 打擊을 받고 있던 때여서 더욱 對備가 됐다.

仁川上陸作戰 成功 以後 北進한 뒤 10月 26日 平安北道 楚山에서 美軍과 國軍을 통틀어 처음 鴨綠江에 到達한 것도 6師團의 한 特供搜索隊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鴨綠江에서 水桶에 물을 받는 兵士가 6師團 7聯隊 所屬이다. 백선엽 將軍은 이같은 6師團의 活躍에는 다른 國軍 事端이 갖추지 못한 長點이 있었다고 紹介했다. 6師團이 駐屯하고 있는 江原道의 寧越 一帶가 日帝 强占期를 거치면서 鑛山開發 붐이 일어 鑛石을 실어 나르는 中小型 트럭이 全國 어느 地域에 비해 많았다는 얘기다. 6師團은 戰爭 勃發 뒤 그 鑛物會社의 트럭을 徵用할 수 있어 機動力이 아주 卓越했다는 것이다. (白善燁 2卷, 219쪽)

그런데 ‘鴨綠江 水桶’은 ‘北進 過速’의 큰 代價를 치렀다. 中共軍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다가 包圍 攻擊을 해 聯隊長이 拳銃도 잃어버릴 程度로 魂飛魄散해서 後退해야 했다. 當時 美軍과 國軍 모두 鴨綠江 進擊 競爭을 벌이는 狀況에서 中共軍 大部隊를 맞은 것이지만 김종오 師團長으로서는 큰 作戰上 失策으로 남게 됐다.

6師團 師團長이 김종오에서 장도영으로 바뀐 1951年 4月 22?24日 사창리 戰鬪에서 部隊의 50% 假量을 잃는 壞滅的인 打擊을 입게 됐다. 江原道 華川郡 화악산과 사창리 一帶에서 中共軍 4個 師團과 벌인 防禦 戰鬪다. 衆寡不敵의 狀況이긴 했으나 防禦線을 줄여 버티면서 我軍의 火力 支援을 받는 戰鬪를 벌이지 않고 事實上 戰鬪를 抛棄한 데다 無秩序한 逃走로 被害가 컸다. 하지만 6師團은 5月에는 師團 單位로는 6·25 戰爭 最大의 成果로도 불리는 龍門山 戰鬪에서 勝利한다. 장도영 師團長으로서도 個人的인 雪辱의 機會가 됐다.

김종오 將軍은 1952年 10月에는 白馬高地 戰鬪에서 9師團長으로서 큰 成果를 올려 初産 戰鬪에서 敗北를 되갚았다.


參考 文獻
  •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戰爭』, 플래닛미디어, 2010.
  •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權慄 옮김, 『强大國 國際政治와 韓半島』, 韓國國防硏究院, 2020.
  •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自由를 위한 犧牲』, 코러스, 2009.
  • 박태균 지음, 『韓國戰爭』, 冊과 함께, 2005.
  • 白善燁 지음, 유광종 整理, 『白善燁의 6·25 戰爭 懲毖錄』 1?2卷. 2020.
  • 정일권 지음, 『戰爭과 休戰- 6·25 비록 정일권 回顧錄』, 東亞日報社, 1986.




구자룡 記者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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