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共同聲明에서 合意된 自主, 平和, 民族大團結의 祖國統一 3大原則은 南北 祕密接觸을 위해 72年 平壤을 訪問한 이후락(李厚洛) 中央情報部長과 金日成(金日成)間의 面談자리에서 卽席 決定된 것으로 알려졌다.
當時 이후락 部長을 遂行했던 이동복(李東馥·南北調節委員會 南側代表) 명지대 敎授는 回顧錄 ‘統一의 숲길을 열어가며’에서 이같이 證言했다.
當時 김일성 首相이 事實上 6·25 南侵事實을 認定하자 李 部長이 “그럼 統一의 原則은 平和的으로 합시다”라고 提案했다는 것.
이에 김일성 首相은 “그럼 平和의 原則은 됐다. 南韓은 美 帝國主義者가 시키는 대로 따라한다고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자주’의 原則도 合意됐다”고 整理한 뒤 “나머지 하나는 ‘民族大團結’”이라고 말해 3大原則의 順序가 만들어졌다고 이 敎授는 밝혔다.
그러나 언뜻 卽興的으로 만들어진 듯한 印象을 주는 祖國統一 3大原則은 事實은 北側의 徹底한 準備의 結果物이라는 게 專門家들의 分析이다. 3가지 統一原則은 金日成이 이미 1961年 9月에 열린 勞動黨 4次 黨大會에서 밝힌 內容과 同一한 것이기 때문이다.
當時 南側 代表團 實務者들은 “共産主義와의 會談에서는 具體的인 內容에 合意해야지 ‘原則’에 合意하면 나중에 딴 소리가 나온다”며 反對했으나 默殺當했다는 後聞이다.
김영식記者 spear@donga.com
▼‘3大原則’ 이후락-김일성 面談서 卽席 決定▼
7·4共同聲明에서 合意된 自主, 平和, 民族大團結의 祖國統一 3大原則은 南北 祕密接觸을 위해 72年 平壤을 訪問한 이후락(李厚洛) 中央情報部長과 金日成(金日成)間의 面談자리에서 卽席 決定된 것으로 알려졌다.
當時 이후락 部長을 遂行했던 이동복(李東馥·南北調節委員會 南側代表) 명지대 敎授는 回顧錄 ‘統一의 숲길을 열어가며’에서 이같이 證言했다.
當時 김일성 首相이 事實上 6·25 南侵事實을 認定하자 李 部長이 “그럼 統一의 原則은 平和的으로 합시다”라고 提案했다는 것.
이에 김일성 首相은 “그럼 平和의 原則은 됐다. 南韓은 美 帝國主義者가 시키는 대로 따라한다고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자주’의 原則도 合意됐다”고 整理한 뒤 “나머지 하나는 ‘民族大團結’”이라고 말해 3大原則의 順序가 만들어졌다고 이 敎授는 밝혔다.
그러나 언뜻 卽興的으로 만들어진 듯한 印象을 주는 祖國統一 3大原則은 事實은 北側의 徹底한 準備의 結果物이라는 게 專門家들의 分析이다. 3가지 統一原則은 金日成이 이미 1961年 9月에 열린 勞動黨 4次 黨大會에서 밝힌 內容과 同一한 것이기 때문이다.
當時 南側 代表團 實務者들은 “共産主義와의 會談에서는 具體的인 內容에 合意해야지 ‘原則’에 合意하면 나중에 딴 소리가 나온다”며 反對했으나 默殺當했다는 後聞이다.
김영식記者 spear@donga.com
7·4共同聲明 以後 主要 南北對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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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時
| 主要 南北對話 또는 合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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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7.4
| 7·4 南北共同聲明 發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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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8.29
| 南北赤十字 1次 本會談(平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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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9.29∼
10.4
| 북적 秀才物資 對南 支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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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9.20
| 南北離散家族 故鄕訪問 및 藝術公演團 서울 平壤
同時交換訪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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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4∼
92.9
| 南北高位級會談(1次-8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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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6.28
| 南北頂上會談 開催 豫備接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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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4.8
| 南北頂上會談 開催 合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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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6.13∼15
| 南北頂上會談(平壤).
6·15共同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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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7.29∼
2001.11
| 南北長官級會談(1次-6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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