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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同體마을 現場을 가다 8]도쿄 오히라 農園|東亞日報

[共同體마을 現場을 가다 8]도쿄 오히라 農園

  • 入力 2002年 8月 11日 17時 43分


오하라농원에서 유기농법을 배우기 위해 연수중인 고바야시 히토미 씨가 개인 소비자별로 야채를 분류해 담고 있다. - 도쿄=이영이특파원
오하라農園에서 有機農法을 배우기 위해 硏修中인 고바야시 히토미 氏가 個人 消費者別로 野菜를 分類해 담고 있다. - 도쿄=이영이特派員
《世界의 農産物이 國境없이 넘나드는 요즘. 날마다 먹는 農産物은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農藥이니 遺傳子 造作이니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消費者는 더욱 神經쓰인다. 生産者인 農民도 갈수록 걱정이다. 얼마나 팔릴지 모르는 農産物을 栽培하면서 受給을 따져보느라 不安해하느니 손쉽게 大量栽培해서 中間業者에게 넘기는 게 속 便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消費者 安全은 漸漸 멀어져간다.》

▽400年 以上된 都心農場〓도쿄(東京)市內 高級住宅地가 密集한 세타伽倻(世田谷)區. 오야마다이(尾山臺)驛에서 5分 程度 걸어가면 갑자기 鬱蒼한 古木과 함께 只今까지와는 全혀 다른 綠色 風景이 눈앞에 펼쳐진다. 看板도 없이 소담스럽게 자리잡은 ‘오히라(大平)農園’. 30餘年 前 無農藥 栽培를 始作한 以來 地域住民과의 直去來를 試圖, 生産者와 消費者間 提携 시스템을 만들어낸 發祥地다.

6日은 野菜를 出荷하는 날이었다. 農場主 오히라 히로시(大平博·79)는 오이, 토마토 等의 무게를 재서 封套에 나눠 담느라 한창 바쁘다. 家族이라곤 夫人과 둘뿐이지만 農事일을 배우러 온 硏修生들이 끊이지 않아 일손이 달리지는 않는다. 이날도 男女 硏修生 5名이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野菜出荷 作業에 熱心이었다.

‘農莊’ 하면 都市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오히라氏는 “먹을거리란 消費者 곁에서 提供해야 生産이 安定的으로 되고 保管이나 流通도 安全해진다”고 强調한다.

▽얼굴 맞대는 生産者-消費者〓이곳에서 生産하는 것은 토마토 洋배추 가지 피망 等 年間 30餘種. 오히라農園과 直去來하는 와카바카이(若葉會)라는 消費者 모임에 每週 火, 金曜日 野菜를 供給한다. 會員은 大部分 半頃 5㎞以內 居住者로 5名씩 小그룹을 만들어 共同으로 注文, 配達받는다. 勿論 直接 野菜를 사러 오는 個人會員들도 있다. 멀리 있는 消費者들이 購買를 希望하면 그곳에서 가까운 有機農家를 紹介해주기도 한다.

와카바카이는 小그룹別 代表가 每달 한番씩 이 農園에 모여 어떤 野菜가 얼마나 必要한지 等을 論議하고 새로 栽培한 野菜를 試食한 後 品評會도 갖는다. 오히라農園은 그때그때 消費者 要求를 把握해 出荷量을 調節할 수 있어 安定的으로 生産活動에 專念할 수 있다. 消費者 立場에서도 “오히라農園 野菜라면…”이라며 安心하고 먹을 수 있다. 이곳에서 나지 않는 野菜는 오히라農園과 提携한 隣近 다른 有機農家에서 配達받는다.

▽近代農法의 弊害, 農藥의 恐怖〓오히라氏가 1968年 無農藥 栽培를 始作했을 때는 有機農法이란 用語조차 生疏했다. 그 自身이 農藥의 恐怖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목숨을 지키려던 切迫한 몸부림이 始初였다.

400年 以上 이어져 내려오던 오히라農園은 1950年을 前後로 農藥과 化學肥料를 使用한 ‘近代農業’으로 轉換했다. 害蟲과 雜草를 除去해주고 땅을 肥沃하게 하는 各種 藥品의 魔力은 대단한 것이었다. 農藥을 안 쓰면 農産物의 品質이나 收穫量이 떨어져 다른 農家와 競爭할 수 없다고들 믿었다.

大學 卒業 後 父親을 도와 農事를 짓고 있던 그 亦是 값비싼 農藥을 듬뿍 使用했다. 父親은 일찌감치 비닐하우스를 利用한 ‘日本 第一의 오이生産者’로 名聲이 높았다. 農藥에 묻혀 살다시피 하던 父親은 갑자기 胃癌으로 死亡했다. 얼마 後 그도 白內障으로 視力을 잃고 왼쪽귀까지 멀었다. 手術을 받고 나서도 콘택트렌즈에 眼鏡까지 써야 艱辛히 볼 수 있게 된 그는 1967年 ‘사람잡는 近代農業’을 中斷했다.

農産物 고르는 消費者 - 도쿄=이영이特派員

▽1300坪의 ‘작은 宇宙’〓農藥으로 찌든 땅을 살리는 데만 4, 5年이 걸렸다. 于先 智力(地力)을 되살리기 위해 化學肥料 使用을 中斷하고 끊임없이 堆肥를 덮어두었다. 堆肥는 隣近 造景業體들로부터 處置하기 困難한 나뭇가지나 落葉을 얻어다가 粉碎해 直接 만들었다. 堆肥는 ‘썩히는 것이 아니라 發效시키는 것’이라는 것도 이 當時 알았다. 農藥 使用을 中斷하자 처음엔 害蟲이 들끓었지만 땅이 살아나면서 益蟲과 들새들度 徐徐히 되돌아왔다. 自然系에는 益蟲과 害蟲이 共存하기 마련이었다.

씨앗도 自身이 기른 野菜에서 되받아 使用했다. 種子會社에서 파는 씨앗은 비싸기도 하지만 1大橋배라서 씨를 받지 못한다. 每年 種子를 팔아먹기 위해 人工的으로 만든 만큼 사람 몸에 좋을 理도 없었다. 밭에서 거둔 씨앗이 餘裕가 생기면서 다른 農家에도 나눠주고 있다.

이렇게 되살아난 農場은 씨앗에서 堆肥, 生産에서 消費까지 먹을거리에 關聯되는 全過程을 地域 內에서 解決하는 地域循環型 農場의 成功事例로 꼽힌다.

▽‘못나고 矮小한’ 有機農産物〓消費者와의 提携는 偶然히 始作됐다. 無農藥 栽培를 始作하긴 했지만 市場에 내다 팔 程度의 收穫量에는 턱없이 不足했다. 게다가 벌레가 먹어 模樣이 좋지 않거나 크기도 작았다. 하는 수 없이 이웃집 主婦들에게 거저 나눠주었다. “模樣이 이래서…”라며 未安해하면서….

그러나 오히라氏가 農藥 때문에 눈과 귀가 나빠졌다, 自己 몸을 지키기 위해 無農藥 再拜를 한다는 所聞이 퍼지자 ‘못나고 矮小한’ 野菜를 購入하고 싶다는 注文이 急激히 늘었다.

그때 단골 主婦 20餘名이 모여 ‘와카바카이’를 만들었다. 오히라農園이 販賣에 對한 걱정없이 有機農法을 繼續할 수 있도록 支援하자는 趣旨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規模의 擴大’를 꾀하지는 않았다. 오히라氏는 自身이 농사지을 수 있는 만큼만 지어 消費者에게 供給하는 代身 有機農法을 다른 農家에 傳播하는데 專念했다. 와카바카이는 한때 會員이 400名까지 늘었다가 只今은 高齡化 等으로 300餘名으로 줄어든 狀態다.

▽最高 特産物은 ‘農民’〓一介 ‘小農(小農)’일 뿐이었던 오히라氏의 작은 試圖는 日本은 勿論 全世界로 퍼져나가고 있다. 有機農에 對한 關心이 높아지면서 71年 오히라氏를 中心으로 日本有機農業硏究會가 發足, 現在 會員이 2600餘名이나 된다. 와카바카이 같은 直去來 組織도 數千 곳에 이른다.

栽培過程을 直接 보려고 消費者團體, 學校 等에서 年間 1000餘名이 이곳을 찾는다. 有機農法에 共感해 이곳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硏修生들度 끊이지 않는다. 올 4月부터 硏修 中인 고바야시 히토미(小林仁美·27·女)는 “來年 봄 故鄕인 니가타로 돌아가 有機農法 野菜를 栽培하는 게 꿈”이라며 땀을 닦았다. 只今까지 이곳을 거쳐간 硏修生은 150餘名. 그中 30餘名이 農業을 始作했다. 農家에 媤집을 간 아가씨도 3名이나 된다.

“얼마 前에는 硏修生 하나가 靑年海外協力대로 잠비아에 派遣됐답니다. 開發途上國에 有機農法을 傳하기 위해서죠. 그런 事例가 늘면 모두가 農藥의 恐怖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오히라氏의 말을 들으니 이 農場의 特産物은 單純한 有機農産物이 아닌, 그 農産物을 사랑하고 이어가는 ‘眞正한 農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이영이特派員 yes202@donga.com

▼農場主 오히라 히로시 인터뷰

韓國에서도 有機農法을 試圖하는 農家가 많지만 抛棄하는 境遇도 적지 않다. 平生을 有機農에 專念해올 수 있었던 祕訣을 오히라 히로시(寫眞)에게 물어봤다.

“무엇보다 탄탄한 消費者組織의 支援이다. 勿論 經濟的인 部分보다는 精神的인 支援이 크다. 내가 기른 野菜가 消費者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時도 쉴 수가 없었다.”

-一般的으로 有機農을 試圖하다가 販賣에 어려움을 겪는 境遇도 많은데….

“消費者는 一般 슈퍼나 市場보다 비싸면 外面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슈퍼나 市場과 같은 水準의 價格으로 판다. 슈퍼나 市場은 生産者價格의 3∼5倍나 마진을 남긴다. 直去來를 通하면 그 마진이 없기 때문에 農産物을 제값 받고 팔 수 있다.”

-이 農場의 年間 收入과 支出은 어떻게 되나.

“有機農法에 充實하면 農事짓는 데는 費用이 거의 들지 않는다. 氏는 直接 거둔 것으로 뿌리고 堆肥도 直接 만든다. 돈이 든다면 野菜를 담는 包裝材 값과 堆肥原料를 잘게 부수는 粉碎機의 燃料費 程度다. 그저 두 食口 먹고살면 되기 때문에 輸入은 셈해 본 적이 없다.”

-땅값이 비싼 都心에서 農事를 지으면서 땅을 팔고 싶은 誘惑은 없었는가.

“勿論 땅을 팔라는 要求도 많았다. 그러나 이 땅은 祖上 代代로 農事를 지어온 땅이고 큰 돈이 생긴다고 해도 쓸데가 없다. 게다가 땅을 팔거나 用途를 變更할 境遇 稅金이 엄청나다. 綠地를 周邊에 남겨두길 願하는 이웃들도 많다.”

-農事를 지을 때 가장 힘을 쏟는 部分은….

“무엇보다도 堆肥가 重要하다. 都心에서도 얼마든지 堆肥原料를 손쉽게 求할 수 있다. 充分히 발효시켜 1年에도 몇 番씩 밭에 힘을 길러준다. 그래야 健康하고 營養이 豐富한 農産物을 거둘 수 있다.”

-有機農法 擴散을 위해 어떤 일을 해왔나.

“特別히 소란스럽게 해온 일은 없다. 다만 講演을 要請하면 全國 어디라도 달려가 내가 해온 農法을 說明해왔다. 또 씨앗에 餘裕가 생기면 다른 農家에 나눠주는 種子交換을 繼續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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