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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하루 24時間 꼭 붙어 排球에 웃고 排球에 우는 우린 닭살夫婦다|동아일보

[Narrative Report]하루 24時間 꼭 붙어 排球에 웃고 排球에 우는 우린 닭살夫婦다

  • 東亞日報
  • 入力 2012年 7月 5日 03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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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內 唯一 監督 男便-코치 아내… 安山 원곡中 排球部 이끄는 김동열-홍성령 氏

#1.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보는 것이다.(생텍쥐페리)

“이 사람, 보는 瞬間 너무 예뻤어요. 愛人 삼아야겠다고 생각했죠.”(김동열 監督·52)

“이 男子, 젊었을 때 잘생겨 人氣가 많았죠. 只今은 좀… 아닌가?”(홍성령 코치·49)

男子와 女子가 처음 만난 건 1983年 10月 仁川 全國體育大會에서였다. 全北大 4學年이던 男子는 選手로 大會에 出戰했고 實業팀 한일합섬 所屬이던 세 살 아래의 女子는 全北OB팀 매니저로 參加했다. 》
女高 時節 男子로부터 ‘排球 課外’를 받은 女子의 同僚들이 다리를 놨다. 둘은 마주 보며 서로 만족해했다. 以後 바빠서 자주는 못 만나도 戀人 關係를 이어갔다.

大學을 卒業하고 實業팀 韓電에 暫時 몸을 담았던 男子는 軍 服務를 마친 뒤 1986年 태광産業 코치로 就職했다. 태광産業 監督은 젊은 男子가 女子팀 코치로 일하는 게 神經이 쓰인 듯했다. 男子에게 대뜸 結婚 相對가 있느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있다”고 한 男子는 다짜고짜 女子를 壓迫했다. 狀況이 이러니 結婚을 빨리 해야겠다고. 女子도 엉겁결에 承諾했다. 그해 11月 結婚할 當時 男子 나이 스물여섯, 女子는 스물셋. 그때는 둘 다 몰랐다. 나이 쉰이 돼서도 하루 스물네 時間 함께 같은 곳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2. 그 얼마나 많은 夫婦가 結婚으로 인해 서로 멀어지게 되었던가.(앨프리드 카퓨)

“수지 엄마, 내 얼굴 봐서라도 좀 도와주라.”

“排球를 그만둔 게 언젠데. 自身 없어요.”

大學에서 體育敎育을 專攻한 男便은 1988年 9月부터 敎鞭을 잡았다. 1993年 發令을 받은 곳이 安山 原曲中學校였다. 赴任과 함께 男便은 女子 排球部 創團 監督을 맡았다. 男便은 敎師와 監督 일을 함께 하느라 바빴지만 結婚과 同時에 專業主婦가 됐던 아내는 ‘家長은 다 그러려니’ 했다.

아내 人生의 轉換點은 豫期치 않게 왔다. 원곡중 옆 初等學校 女子팀 監督으로 있던 男便의 親舊 때문이었다. 다른 學校로 發令을 받은 그는 自身이 없는 동안 팀을 돌봐달라고 付託했다. 아내는 辭讓하며 다른 코치를 求해 보라 했지만 쉽지 않았다. 50萬 원도 안 되는 手當을 받으며 일할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男便 親舊의 付託에, 男便의 說得에 結局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排球공을 놓은 지 7年 만에 ‘初等學校 指導者’로 復歸했다.

1995年 마침 ‘巡廻 코치’라는 게 생겼다. 市敎育廳에서 補助金을 支援해 젊은 코치들을 活用하는 制度였다. 문득 男便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른 코치를 그 初等學校로 보내고 아내를 원곡중 코치로 끌어들였다.

“挽留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집에서 보는 것도 모자라 밖에서도 보냐고. 잠깐 苦悶했지만 그래도 已往이면 이 사람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죠.”(김 監督)

創團 이듬해까지 實績이 없었던 원곡중은 1995年 ‘監督 男便-코치 아내’ 體制를 갖춘 뒤 달라졌다. 그해 無登記 大會에서 2位에 오르며 첫 入賞에 成功했고 1996年 全國少年體育大會 3位, 無登記 大會에서 優勝하며 이름을 알렸다.

“創團 初期에는 初等學校 學父母님들이 우리 學校를 못 믿었어요. 좋은 選手들이 올 理 없었죠. 제가 온 뒤 認識이 바뀌었어요. 夫婦가 監督과 코치를 하니 安心하고 맡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홍 코치)

統計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 平均 840雙이 結婚하고 그 折半에 가까운 398雙이 離婚했다. 한 해 約 15萬 雙이 結婚으로 더 멀어진 셈이다. 그들이 訣別한 重要한 原因 中 하나는 對話의 斷絶이었다. 金 監督-洪 코치 夫婦로서는 想像조차 할 수 없는 理由다.

#3. 男子가 가지고 있는 最高 또는 最惡의 財産은 바로 그의 아내다.(토머스 풀러)

18년째 안산 원곡중 여자 배구부에서 ‘감독 남편-코치 아내’로 함께하고 있는 김동열(앞줄 오른쪽)-홍성령 부부. 사진기자의 요청에 따라 부부가 포즈를 취하자 지켜보던 14명의 선수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배구공 하트’를 만들어 줬다. 선수들은 “훈련할 때는 무섭게 시키신다”면서도 촬영이 끝나자 배구공을 부부에게 던지며 즐거워했다. 안산=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8年째 安山 원곡중 女子 排球部에서 ‘監督 男便-코치 아내’로 함께하고 있는 김동열(앞줄 오른쪽)-홍성령 夫婦. 寫眞記者의 要請에 따라 夫婦가 포즈를 取하자 지켜보던 14名의 選手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瞬息間에 ‘排球공 하트’를 만들어 줬다. 選手들은 “訓鍊할 때는 무섭게 시키신다”면서도 撮影이 끝나자 排球공을 夫婦에게 던지며 즐거워했다. 安山=박영대 記者 sannae@donga.com
創團 初期, 環境은 劣惡했다. 當時만 해도 選手들은 大會를 앞두고 學校에서 먹고 자며 訓鍊을 했다. 1999年 全國大會 4冠王을 차지한 뒤 學校에서 宿所를 지어 줬지만 그 前까지는 體育館 脫衣室에 보일러 溫突을 깔아 學生들을 재웠다. 잘 곳이 不足해 脫衣室에 金 監督이 直接 다락房도 만들었다. 夫婦도 아이들과 함께 잤다. 體育館 補助 玄關 바닥 위에 마루를 깔고 잠을 請했다.

“不便함을 따질 狀況이 아니었어요. 빨리 基盤을 잡고 成跡을 올려야 했으니까요. 夫婦라 믿었다지만 夫婦라 괜한 말도 나올 수 있잖아요. 큰딸 水枝(25)와 작은딸 재영이(24)가 初等學校 入學 前後였는데 排球部에 매달리다 보니 애들을 放置하다시피 했어요. 只今도 그때만 생각하면 未安하죠.”(홍 코치)

“혼자일 때보다 훨씬 便해졌어요. 공을 때려주는 것부터 밥해 주는 것까지 이 사람이 다 했으니까요. 얼마 안 되는 코치 月給 털어 애들 副食費로 쓸 때도 많았죠. 그러면서도 저한테는 不平 한 番 안 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이 사람과 結婚하고 싶어요.”(김 監督)

夫婦는 ‘監督 男便-코치 아내’가 排球에서는 自身들이 처음이라고 했다. 以後 몇 커플이 나왔지만 只今은 唯一한 ‘監督 男便-코치 아내’라고 했다. 夫婦에게는 이런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家族 全部가 같은 코트에 있어 봤다는 것이다. ‘放置하다시피’ 키운 수지와 재영은 父母를 닮아 키가 컸다. 運動 神經도 좋았다. 排球 選手로 제格이었다. 재영은 프로팀에 入團한 뒤 進路를 바꿨지만 큰딸 收支는 프로排球 현대건설의 主戰 센터로 活躍하고 있다.

“收支가 우리 學校에 온다고 했을 때 周圍 사람들이 말렸죠. 自己 子息 못 가르치는 法이라며. 이 사람이 한番 해보자고 하기에 따랐지만 마음苦生도 꽤 했죠. 저희 애들은 잘못 안 했어도 다른 아이들 혼낼 때 더 혼냈어요. 逆差別을 받은 셈이죠.”(홍 코치)

“온 家族이 한 코트에서 監督-코치-選手로 뛴 건 世界的으로도 類例가 없을걸요. 어쨌든 저희 家族 以後에 子息 가르치는 指導者들이 늘어난 건 事實이에요.”(김 監督)

큰딸 收支가 2學年이던 2001年 원곡중은 4次例 全國大會에서 優勝 2回, 準優勝 2回의 좋은 成跡을 거뒀다. 樹脂와 같은 學年에는 김연경이, 3學年에는 황연주(현대건설)가 있었다. 只今은 둘 다 韓國 女子排球를 代表하는 最高의 攻擊手다.

“연경이는 그때 키가 너무 작았어요. 세터와 리베로를 시키면서 基本技를 익히게 했죠. 演奏는 키가 컸는데 排球를 中學校에 온 뒤 始作해 神經을 많이 써야 했어요. 둘이 高校 때부터 日就月將하는데 어찌나 氣分이 좋던지.”(김 監督)

이제 ‘100年에 한 番 나올까 말까 한 選手’라는 評價를 받는 김연경은 中學校 時節을 이렇게 記憶했다.

“初等學校 4學年 때 排球를 始作했는데 5年 동안 키가 안 자라 힘들었다. 中學生 때 두 先生님이 ‘너는 손발이 크고 骨格이 좋아 곧 키가 클 것’이라며 勇氣를 주고 熱心히 가르쳐 주신 德分에 只今까지 排球를 할 수 있었다.”

[채널A 映像] 夫婦싸움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4. 結婚은 서로의 困境을 같이 치러주는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18年째 ‘監督 男便-코치 아내’로 살고 있다지만 空白도 있었다. 金 監督이 2007年 한 高校로 轉勤을 가면서였다. 男便이 떠난 뒤 選手들을 돌보던 아내도 몇 個月 뒤 코치를 그만뒀다.

“1年 半 程度 떠나 있는 동안 다른 世上을 만났어요. 排球部가 없는 高校라 體育敎師 役割이 全部였죠. 저녁 時間에 그동안 못 했던 일들 실컷 했어요.”(김 監督)

金 監督은 高校에서 任期를 마치면 隣近 中學校 男子 排球팀을 맡을 計劃이었다. 洪 코치가 男學生들을 指導하는 건 힘에 부쳐 自然스럽게 아내를 쉬게 해 주고도 싶었다. 하지만 豫想치 못한 일이 생겼다. 夫婦가 떠난 뒤 원곡중 排球部가 내리막길을 걸은 게 問題였다. 2008年 9月 學父母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다시 監督을 맡지 않으면 아이들을 轉學시키겠다며 엄포를 놨다.

“一週日만 時間을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苦悶했죠. 내가 만든 排球部가 解體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어요. 周圍에 諒解를 求하고 이듬해 3月에 돌아왔죠.”(김 監督)

任期를 채워야 했던 金 監督은 아내에게 먼저 復歸를 要請했다. 洪 코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다 보니 너무 便하고 좋은 거예요. 十몇 年을 해왔는데 또 그 苦生을 하고 싶겠어요. 이 사람이 一週日동안 肝쓸개 다 빼줄 듯 잘해 주면서 說得하데요. 決定을 못 하다 큰딸에게 물었죠. 엄마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수지는 그 前에도 저보고 ‘이제는 좀 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거든요.”(홍 코치)

豫想과 달리 큰딸은 엄마의 期待를 저버렸다. 洪 코치는 다시 코트에 나와 排球공을 때리기 始作했다. 딸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가면 엄마도 가야지. 엄마 혼자라면 힘들어도 아빠가 옆에 있잖아. 엄마가 아빠 좀 도와줘. 그럴 사람 엄마밖에 더 있어?”

원곡중은 夫婦가 復歸한 뒤 제자리를 찾았다. 2010年 9月 CBS배를 始作으로 出戰하는 大會마다 優勝을 휩쓸고 있다. 지난해 4冠王, 올해는 이미 3冠王이다.

安山=李承乾 記者 why@donga.com
#排球 監督-코치 #김동열-홍성령 夫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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