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 때릴 때가 가장 짜릿하다는데 저의 境遇엔 斷然 盜壘할 때죠. 힘껏 달려 온 彈力으로 空中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미끄러지며 베이스를 터치합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審判이 兩팔을 쫙 벌려 세이프를 宣言하죠. 그때 正말 氣分 끝내줍니다.” 아직 여드름 자국이 채 사라지지 않은 앳된 얼굴의 윤승균(22). 올해 初 홍익대를 卒業하고 두산에 入團한 프로 새내기인 그는 專門 代走者지만 12日 現在 盜壘 27個로 LG 박용택(31個)에게 4個 뒤진 2位에 올라 있다.》
打席보다는 베이스에 서는 일이 더 많은 ‘半쪽 選手’인 代走者가 盜壘王까지 넘보는 프로野球 史上 初有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實際로 그는 打席에선 打率 0.153에 그나마 홈런 한 개 없이 11安打 4打點 3볼넷에 三振은 30個인 慘澹한 成跡을 記錄 中이다.
“氣分 나쁘긴요. 競技에 뛸 수 있다는 것 自體가 기쁩니다. 入團 後 한 2年 程度는 1군 競技에 서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윤승균의 入團 條件은 契約金 없이 年俸만 달랑 2000萬 原因 事實上 訓鍊生 出身. 신일고 卒業을 앞둔 2000年 현대가 2次 마지막인 12라운드에서 指名했지만 指名權을 抛棄하자 어렵사리 두산에 入團했다.
하지만 그의 달리기 實力 하나만큼은 群鷄一鶴이었다. 初等學校 時節 이미 100m를 14秒에 끊었고 高校 때에는 11秒臺 中盤까지 나왔다. 184cm, 80kg의 호리호리한 體格에 워낙 ‘롱다리’라서 實際보다 훨씬 커 보인다.
윤승균은 시즌 前 演習競技에서 뛰어난 走壘 實力으로 코칭스태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機動力은 野球에서 重要한 要素. 相對 投手를 흔드는 데 있어 效果的인 데다 薄氷의 接戰에서 勝負를 가를 수 있기 때문. 오죽했으면 1984年 롯데가 비록 失敗로 끝나긴 했지만 100m 韓國 記錄 保有者(10秒 34)인 서말구 氏를 迎入했을까.
윤승균에겐 든든한 後援者가 있다. 아버지가 7歲 때 肝癌으로 世上을 뜨는 바람에 美容室을 하며 외아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 박영숙(54) 氏. 어머니는 아들의 景氣를 빼놓지 않고 錄畫하고 種種 競技場도 찾는다. 윤승균은 집에서 錄畫 테이프를 보며 投手들의 投球 폼을 分析하고 自身의 플레이도 되짚어본다.
“올해 프로野球 選手의 꿈을 이룬 것도 기쁘지만 이제 어머니를 내 힘으로 모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좋았다”고 그는 말했다.
베이스에 서기만 하면 신나고 마음이 설렌다는 윤승균. “두고 보세요. 打擊도 끌어올려서 1, 2年 안에 主戰 톱타자 자리를 따내고 말겁니다.”
한화 장종훈 코치의 뒤를 잇는 윤승균의 訓鍊生 神話 꿈이 무르익고 있다.
김성규 記者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