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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 하면 커피, 커피 하면 이 사람? [브랜더쿠]|東亞日報

江陵 하면 커피, 커피 하면 이 사람? [브랜더쿠]

  • 東亞日報
  • 入力 2023年 8月 25日 10時 00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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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더쿠’는 한 가지 分野에 沒入해 自身만의 世界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傳합니다. 自身이 가장 깊게 빠진 領域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形成해 自身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以上의 價値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關心 付託합니다.
“出勤 前 카페인 輸血은 必須, 點心食事 後 카페에 들러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盞은 國룰.”

하루 中 많게는 3盞 적어도 1盞, 비가 오나 눈이 오나 K-職場人들에게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는 必須템이 됐다. 이제 點心 食事 後 커피 한 盞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흔하다. 한때 ‘커피=믹스 커피’가 基本이었던 우리나라는 全 世界에서 프랑스에 이어 두 番째로 커피를 많이 消費하는 나라가 됐고(1인당 커피 消費量 基準) 全國에 커피숍만 10萬 個에 肉薄할 程度로 커피 産業 亦是 發展했다. 이제 커피는 더 以上 單純 嗜好食品이 아닌 하나의 文化로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不過 10餘 年 前만 해도 커피라곤 커피 둘, 雪糖 둘, 프림 둘을 넣은 둘둘둘 믹스 커피가 全部였던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原豆커피가 流行할 수 있었을까?

출처: 보헤미안박이추커피
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달달~한 커피 맛에 中毒돼 있던 韓國人의 입맛을 바꾸는데 가장 크게 寄與한 것은 亦是 스타벅스多. 하지만 韓國에서 드립커피 大衆化를 이뤄낸 人物을 꼽자면 우리나라 1世代 바리스타 朴泥鰍 보헤미안커피 代表를 들 수 있다. 2000年代 初盤 韓國스페셜티커피協會(SCAA)에서 韓國 커피 歷史의 脈을 지켜온 名人들에게 ‘1서3박’(고 서정달, 故 박원준, 고 박상홍, 박이秋)이라는 愛稱을 붙여줬는데, 朴 代表는 이들 中 唯一하게 現役 바리스타로 如前히 커피를 내리고 있다.

그는 特히 원두를 볶는 로스팅과 다양한 맛을 내기 위해 여러 園頭를 配合하는 블렌딩,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抽出하는 핸드 드립 分野에서 가장 뛰어난 바리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인지 일흔이 넘은 現在도 週 3日 하루 100~200盞 커피를 내린다. 드립커피가 흔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 드립커피를 알리고 또 江陵 커피 거리 形成에 크게 寄與한 커피 代價인 박이秋 代表. 隱隱한 香을 풍기면서도 强烈한 맛을 내는 커피와 닮아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헤미안 박이추 대표_출처:보헤미안박이추커피
보헤미안 박이秋 代表_出處:보헤미안박이秋커피

外食業을 꿈꾸던 牧場 靑年, 偶然히 接한 커피에 빠져들다
平生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가 커피를 始作한 過程은 多少 現實的이다. 在日僑胞 2歲로 日本에서 태어난 朴 代表의 오랜 꿈은 協同農場을 運營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땅에 씨앗을 뿌려 栽培하고 放牧하는 過程들을 좋아했던 그는 日本에서 牧場 일을 배워 1974年 韓國으로 와 京畿道 抱川에 8萬 2,644㎡(2萬 5,000坪)의 牧場을 일궜고 京畿道 光州를 거쳐 江原道 原州 문막에서도 소를 키웠지만 끝내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 過程에서 낯선 시골에서 農場을 運營하며 周邊 사람들과 땅 所有權을 둘러싼 法的 問題로 葛藤을 겪었다. 시골 生活에 신물이 난 朴 代表는 “아 이제 都市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都市에서 살기 위해서는 技術이 必要하다는 생각에 技術을 배우기 위해 日本으로 돌아간다.

牧場을 관두고 日本으로 건너가 처음 생각한 것은 外食産業. 하지만 外食産業은 飮食을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배워야 할 일이 많았다. 한가지 特技에 集中하는 것이 競爭力 있다는 생각에 分野를 縮小해 나가다 찾은 것이 바로 커피였다. 마침 그 當時 日本의 핸드드립 커피 技術이 잘 發達해 있었기도 했고, 在日僑胞였던 朴 代表에게 日本은 言語的인 어려움 없이 技術을 배울 수 있는 좋은 環境이었다.

“처음 커피를 始作할 땐 感興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熱心히 앞만 보고 달렸어요. 結果는 생각하지 않고 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달렸습니다.”

커피에 對해 全혀 無知했던 그는 커피를 抽出하는 가장 基本的인 方法부터 사이폰, 프레스 커피와 紅茶 抽出 方法 等을 배우고 익혔다. 더불어 가게의 인테리어, 帳簿 作成法 等 全體的인 가게의 經營과 關聯된 授業도 받았다. 돈이 없어 割賦로 學院費를 決濟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낮에는 工事판 덤프트럭 運轉을 해 돈을 벌고 저녁에는 學院을 다니며 晝耕夜讀할 程度로 커피에 對한 그의 熱情은 남달랐다.

커피를 工夫 中인 過去 朴 代表의 모습_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바리스타로의 첫 始作, 迂餘曲折의 連續
그렇게 東京에서의 留學 生活을 마치고 韓國에 돌아온 朴泥鰍 代表는 1988年 혜화동에 첫 가게 ‘加倍 보헤미안’을 차린다.

“事實 創業 場所로 汝矣島, 國立醫療院, 혜화동 로터리 3가지 候補가 있었어요. 그中 國立醫療院 맞은便 建物에 들어가려고 인테리어 補修를 하고 있던 渦中 바로 옆에서 茶房을 運營하고 있던 社長이 本人 가게 옆에 카페를 차리면 告發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工事가 中斷됐고, 汝矣島에서는 週末 장사가 힘들어 抛棄하고 結局 3番째 候補地였던 혜화동으로 오게 됐습니다.”

迂餘曲折 끝에 가게를 오픈했지만, 카페 運營도 쉽지는 않았다. 一旦 當時 韓國에선 드립커피 自體가 매우 生疏했다. 그렇다 보니 原豆커피를 찾는 消費者도 적었다. 또한 價格을 얼마로 策定할지도 苦悶이었다. 茶房에서 파는 커피보다 원두 等 材料費가 많이 들지만 무턱대고 價格을 높여 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朴 代表는 日本에서 原豆커피 市場이 成長하는 모습을 보며 韓國에도 언젠가는 原豆커피가 大衆化될 것이라 確信했다. 當時 朴 代表가 할 수 있는 것은 原豆커피 大衆化를 위해 꾸준히 커피 내리는 技術을 갈고닦고 品質을 높이는 것뿐이었다.

“그 當時에 韓國과 日本을 往來하는 在日僑胞를 통해 韓國에서 生産되는 原豆커피를 日本에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日本에서 커피로 有名했던 깃샤텐 學院의 가라사와 副校長에게 韓國에서 生産한 原豆커피를 보내 커피 원두를 檢査받았어요. 콩에 어떤 異常이 있는지, 좋은 원두는 어떤 特徵을 띄는지 물어보고 배우면서 그렇게 하나씩 技術的인 克服을 始作했습니다. 그때는 보람보다 어려웠던 時節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工夫하지 않고서는 解決을 할 수 없었죠.”

출처: 보헤미안박이추커피
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같은 在日僑胞 出身들과 交流를 하기도 하고, 東京 커피 學院을 卒業한 커피 先輩님들에게 알음알음 물어가며 어드바이스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問題點들을 하나씩 고쳐나가며 30年이 넘는 時間 동안 默默히 그리고 굳건히 커피를 내렸다.

“오랜 時間 커피를 내려보니 커피만으로는 맛있는 커피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材料가 맛있으면 좋은 커피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材料와 技術만으로는 좋은 커피를 만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材料와 技術로는 限界가 있다고 봐요. 커피에는 마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몸과 마음, 그리고 커피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가장 맛있는 커피라고 할 수 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커피를 내린 지도 벌써 30年이 넘었네요.”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박 대표_출처: 보헤미안박이추커피
커피를 내리고 있는 朴 代表_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커피 不毛地 韓國에 원두 커피를 開拓者
온 마음을 담아 커피를 내리는 그의 眞心이 통했던 걸까. 朴 代表가 내린 原豆커피의 名聲은 하루가 무섭게 입所聞을 탔고,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當時 커피라곤 믹스커피뿐이었던 우리나라에 原豆커피의 登場은 센세이션 그 自體였다. 그동안 韓國에서 맛볼 수 없었던 原豆커피를 처음 接해본 사람들이 고소한 원두 맛에 中毒되기 始作했다. 달달한 커피 맛에 익숙해 있었던 탓에 씁쓸한 原豆커피의 첫맛이 낯설기도 했지만 이내 부드럽고 豐富한 風味에 눈을 뜨게 된 것. 그렇게 漸漸 原豆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以內 마니아層이 形成됐다.

朴 代表의 보헤미안은 韓國의 全般的인 커피 文化를 뒤집었다. 只今은 너무나 當然하게 우리 日常에 자리 잡은 아메리카노는 事實 朴 代表의 보헤미안으로부터 始作됐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만큼 當時의 人氣도 대단했는데, 손님이 많이 몰려 하루에 많게는 300盞의 커피를 내릴 때도 있었다. 그에게 커피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989年 혜화 ‘加倍 보헤미안’ 草創期 時節, 보헤미안이 입所聞이 타자 朴 代表는 社報와 인터뷰를 進行하기도 했다._출처: 보헤미안박이秋커피

그 사이 가게에도 變化가 생겼다. 1990年, 잦은 示威로 혜화동에서 高麗大 隣近으로 가게를 옮겨 安岩에서 10年을 보냈다. 하지만 時間이 흐를수록 몰려드는 人波에 疲勞를 느낀 朴 代表는 高麗大 隣近에서 平昌으로 한 番 더 가게를 移轉한다. 以後 소금강 近處 진고개와 警砲를 거쳐 2003年 閑寂한 江陵 앞 바다에 定着하게 된다. 장사가 잘되다 못해 大舶이 나고 있던 狀況에서 서울權도 아닌 地域으로 移轉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朴 代表가 굳이 江陵을 固執한 理由는 무엇일까.

‘江陵’에 쏘아 올린 커피
“只今에야 커피가 사람들에게 다가왔지만, 그 當時에는 커피가 사람들에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커피에 對한 저의 哲學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과 커피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이 없는 閑寂한 江陵에서 커피를 販賣해야겠다고 생각했었죠.”

過去에는 커피가 사람들한테 다가오지 않았다는 朴 代表. 그도 그럴 것이 當時 서울 外 地域에서는 커피를 專門的으로 하는 가게가 드물었다. 2000年度 7月에 들어서야 江陵에도 커피가 다가오기 始作했는데, 朴 代表는 그 時期부터 開設된 大學校 커피 專門課程 授業과 聯關이 있다고 說明했다.

“2000年度 2學期에 단국대학교에 커피 專門 課程이 開設됐어요. 이를 始作으로 2000年度 秒에 原州 강릉대學校에도 커피 專門 過程이 생겼죠. 各 大學의 社會敎育 및 平生敎育院에서 指導敎授로 活動하며 바리스타 養成을 위해 協助했습니다. 檀國大에서는 커피 關聯 敎育 프로그램 等을 編成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그렇게 2000年度에서 2005年 사이에 서울, 天安, 江陵, 原州 사이에 커피 專門 課程이 活潑해지면서 커피가 함께 流行했고, 그즈음부터 커피가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강릉 영진해변 앞에 위치한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본점_출처: 보헤미안박이추커피
江陵 榮進海邊 앞에 位置한 보헤미안 박이秋 커피 本店_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비슷한 時期에 江陵에서의 定着을 準備하며 江陵을 轉轉하던 朴 代表는 2004年 江陵 연곡에 보헤미안 커피를 開店한다. 서울에서 커피로 입所聞을 크게 탔던 朴 代表의 以前은 當時 커피人들에게 큰 消息이었다. 그의 名聲과 實力이 藉藉해지자 ‘1世代 커피 匠人이 내려주는 커피 맛’을 맛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江陵을 찾았고, 이와 더불어 커피를 始作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江陵에 定着한 朴 代表를 따라 하나둘씩 江陵에 카페를 차리기 始作했다. 朴 代表의 보헤미안이 말 그대로 江陵 커피 거리의 始初가 된 것.

以後 2009年, 江陵에서 第1回 커피 祝祭가 開催되며 江陵 커피 붐이 本格的으로 터지기 始作했다. 2000年 初盤 當時 서른 군데 程度였던 江陵의 커피숍 數는 해를 거듭할수록 無數히 늘어났고 現在는 500餘 곳이 넘는다. 커피 祝祭도 地域의 年例 行事로 자리 잡았고, 그렇게 江陵은 커피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커피가 닿지 않은 곳으로
그는 2030年에 慶尙北道 蔚珍으로 터를 옮기고자 한다.

“元來는 2025年 程度에 移轉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5年 程度 늦어졌어요. 다른 곳에서 運營하다 蔚珍으로 移轉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는데 具體的인 時期와 日程은 아직 未定입니다. 다만, 사람이 없는 데 가서 커피하고 가까워져야 한다는 제 信念, 그것 하나는 確實합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스스로가 發展하고 싶어도 發展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 때문에 커피를 내린다는 생각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憂慮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가장 큰 變化가 있다. 라오스에 땅을 빌려 박이秋 커피를 本格的으로 生産하게 된 것이다. 2017年 苗木을 만들어서 2018年부터 海拔 1,600m 높이에 6,000坪 規模의 農場에 커피나무를 심기 始作했고 2021年부터 每年 數百 kg의 커피를 直接 生産하게 됐다. 젊은 時節 품었던 農場主의 꿈이 現實이 된 것이다.

라오스 農場에서 커피나무를 심고 있는 朴 代表_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그렇다면 30年이 넘는 時間 동안 커피를 내려온 그에게 커피는 무슨 意味일까.

“커피를 내릴 때 저는, 사람이 아닌 커피를 위해 커피를 뽑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커피는 한 番만 와서 마시면 된다고 생각해요. 커피 한盞에 ‘손님이 커피를 마시는 그 瞬間부터 未來까지 幸福하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을 담거든요. 커피 한盞에 그 모든 것들이 담겨있죠. 그래서 한 番으로 充分하다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위한 커피를 내리기 위해 朴 代表는 오늘도 閑寂한 海邊 앞에서 默默히 커피를 내린다. 향긋한 커피의 香이 모든 사람에게 닿을 때까지.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 본점에 부착된 안내문_출처: 보헤미안박이추커피
보헤미안 박이秋 커피 本店에 附着된 案內文_出處: 보헤미안박이秋커피


인터비즈 방지혜 인턴 記者 bjh2972@naver.com
인터비즈 이한규 記者 hanq@donga.com
#브랜더쿠 #커피 #박이秋 #보헤미안박이秋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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