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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는 왜 論語일까|주간동아

週刊東亞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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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포인트 示唆 레슨

‘論語’는 왜 論語일까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道의 停滯로 풀다

  • 권재현 記者

    confetti@donga.com

    入力 2020-01-15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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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27일 중국 베이징 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공자 전시회 [신화=뉴시스]

    지난해 12月 27日 中國 베이징 國立博物館에서 開催된 孔子 展示會 [神話=뉴시스]

    설 名節期間에 많은 사람들이 德談을 주고받는다. 이때 가장 많이 引用되는 古典 中 하나가 ‘論語’다. 四書三經으로 通稱되는 油價經典 中에 가장 오래됐고 한때 儒敎 國家를 標榜했던 韓國에선 그만큼 익숙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論語의 本質을 꿰뚫고 있다고 自負할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주 引用되는 論語 句節 中 하나가 ‘아침에 道(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의 ‘조문도碩士價의(朝聞道夕死可矣)’다. 그렇다면 그렇게 懇切히 懇求하는 깨달음(道)의 實體는 무엇인가. 論語에는 이에 對한 딱 부러진 言及이 없다. 그저 어진 사람이 되는 것 또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란 뜻의 ‘人(仁)’ 아니면 萬物에 內在된 事物의 本性을 뜻하는 ‘性(性)’으로 풀어낼 때가 많지만 如前히 아리송할 때가 많다. 

    論語에는 그런 度의 內容이 아니라 形式에 對한 힌트는 發見할 수 있다. 바로 論語의 맨 마지막 句節에 該當하는 要曰(堯曰)篇 3張에 登場하는 孔子의 最後陳述이다. 

    “名을 알지 못하면 君子가 될 수 없다. 例를 알지 못하면 몸 둘 곳이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3次元의 깨달음

    공자 조각상 [pxhere]

    孔子 彫刻像 [pxhere]

    公子는 여기서 깨달음의 形式으로 3가지 次元을 말한다. 指名(知命) 知禮(知禮) 知言(知言)이다. 이 句節이 論語의 大團圓에 該當하는 點을 念頭에 두고 곰곰이 뜯어보면 새로운 解釋의 地平이 열린다. 



    먼저 名(命) 예(禮) 言(言)을 東洋의 三災(三才)로 불리는 天(天) 지(地) 人(人)에 對應시켜보자. 그와 더불어 앎의 主體로서 나를 代入해보자. 地名은 하늘(天)과 나의 關係맺음에 對한 理解이니 곧 하늘이 나에게 附與한 使命과 限界에 對한 自覺을 뜻한다. 東洋思想에서 千(天)은 곧 詩(時)이니 내가 處한 時代的 狀況에 對한 認識, 곧 ‘時代精神(Zeitgeist)에 對한 理解’를 意味한다. 내가 實現해야할 時代精神이 무엇인지를 自覺해야한다는 말이 된다. 

    東洋思想에서 지(地)는 곧 空間을 뜻한다. 例를 모르면 몸 둘 곳이 없다한 것은 곧 例가 나와 내가 處한 空間에 對한 關係맺음에 對한 理解로 새길 수 있다. 따라서 知禮는 땅(地) 곧 地上에 세워진 文明世界의 原理에 對한 理解를 말한다. 共同體의 運營原理이자 倫理規範으로서 에토스를 攄得하고 그에 符合하는 方式으로 自身의 뜻을 펼쳐야한다는 意味다. 

    마지막으로 他人(人)과 나의 關係맺음, 人間과 人間을 이어주는 最善의 징검다리가 言語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매우 意味深長하다. 斷片的으로만 接하면 論語는 言語에 對한 不信과 厭惡로 가득한 冊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만 번드르르한 巧言令色(巧言令色)을 叱咤하고, 말은 語訥해도 行動은 敏捷한 訥言敏行(訥言敏行)을 君子의 德目으로 꼽은 孔子 아니던가. 

    그런 그가 論語의 末尾에서 言語를 모르면 人間을 알 수 없다고 闡明하다니. 孔子가 畢生의 課業으로 여겼던 좋은 政治란 곧 疏通의 技術이며, 疏通은 結局 言語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逆說的 깨달음의 反證이 아닐 수 없다. 

    이를 綜合하면 論語에서 말하는 道(道)의 內容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지언정 그 形式은 이렇게 整理될 수 있다. 時代精神에 符合하는 自身의 使命을 깨닫고, 이를 地上의 尺度에 맞춰 實現할 方道를 찾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疏通의 끈으로 言語를 끝까지 抛棄하지 말라는 것이다.

    歲 깨달음에 이른 孔子의 나이

    이를 念頭에 두고 孔子의 自傳的 삶이 要約된 論語의 爲政(爲政) 篇 4張을 읽어보면 孔子가 그 3次元의 깨달음을 얻은 時機를 미뤄 斟酌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게 됐다는 ‘知天命(知天命)’의 나이인 쉰은 곧 地名에 該當한다. 또 마음이 確固하게 道德 위에 섰다하여 ‘移入(而立)’이라 부른 서른 무렵이 곧 知禮를 통해 스스로 설 空間을 찾은 것에 該當한다고 보는 것도 無理가 없다. 

    知言(知言)의 境地에 이른 나이가 언제냐가 가장 어렵다. 言語와 관련지어봤을 때 어떤 말을 들어도 거슬림이 없어졌다는 耳順(耳順)李 가장 가깝다. 이에 따르면 예순의 나이에 言語에 通達하게 됨으로써 他人과 意思疏通에 막힘이 없게 됐다고 새길 수 있다. 이를 다시 綜合해보면 知禮(서른)-指名(쉰)-知言(예순)의 順序가 되니 知言이 가장 어려운 셈이다. 

    그렇다면 論語에서 孔子의 言語使用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孔子는 같은 質問을 받고도 質問한 사람이 누구고 그가 處한 狀況이 어떠냐에 따라 全혀 다른 答을 내놓기 일쑤였다. 政治에 對한 質問을 받았을 때 魯나라의 權勢가 契强者에겐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지만 楚나라의 野心家 섭공에겐 “가까이 있는 者들을 기쁘게 하고, 먼 곳에 있는 者들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라 答했다. 電子에겐 政治의 올곧음을, 後者에겐 政治의 후덕함을 强調한 것이다. 

    또 弟子로부터 같은 質問을 받았을 때 者로에겐 “率先垂範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이라고 짧게 答한 反面 磁場에겐 “다섯 가지 美德을 尊重하고 네 가지 惡德을 물리치라”며 無慮 9個에 達하는 指針을 傳했다. 愚直한 初年弟子에겐 單純明快한 答을 주고 英特한 末年弟子에겐 周到綿密한 答을 준 것이다. 

    이렇듯 孔子에게 言語는 固定的인 게 아니라 流動的인 것이다. 樂譜에 맞춰 的確한 音을 내는 것이 아니라 狀況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變奏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適用되는 普遍的 答案이 아니라 相對의 靈魂을 激動시키며 自問自答케 하는 것이다.

    ‘論語’라는 題目이 말해주는 것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공자사당에서 열린 2567번째 공자 생일 기념식 [AP=뉴시스]

    中國 베이징에 있는 孔子祠堂에서 열린 2567番째 孔子 生日 記念式 [AP=뉴시스]

    여기서 論語라는 冊 題目을 다시 注目할 必要가 있다. 가장 一般的 解釋으로는 孔子와 弟子들 間에 오고간 말을 孔子 事後 그 弟子들이 議論해 編纂한 冊이란 것이다. 게다가 大部分의 內容이 ‘孔子가 말했다(子曰)’로 始作한다는 點에서 言語의 問題와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지막으로 3次元의 總論 中에서 가장 어려운 知言의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孔子와 그의 弟子들이 펼친 奮鬪記라는 意味附與도 可能하지 않을까. 

    그런 點에서 孔子의 ‘論語’야말로 ‘말할 수 없는 것에 關해서는 沈默해야한다’는 命題로 끝나는 비트겐슈타인의 ‘論理-哲學 論考’에 對한 가장 强力한 反擊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曲盡한 마음을 담아 對話에 對話를 거듭하다보면 內的인 깨달음과 外的인 疏通의 瞬間이 到來하리라는 믿음을 抛棄하지 않겠다는 決然한 意志가 論語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끊임없이 論語를 引用하고 또 引用하는 無意識的 理由 亦是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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