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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錢無罪 無錢有罪? 只今도 그렇죠, 장발장처럼…”|신동아

“有錢無罪 無錢有罪? 只今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人質事件’ 마지막 生存者 강영일

  • 강지남 記者 | layra@donga.com

    入力 2013-02-22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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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年 服役 後 滿期出所…“그땐 잡히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
    • “‘條件附 辯護士’ 雇用하면 刑期 줄어드는 世態에 憤怒”
    • “非行靑少年, 長期囚 子女 도우며 社會에 寄與하고 싶다”
    • 2月 末 채널A 回想다큐 ‘그때 그 사람’ 姜 氏 스토리 放映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이란 이름 석 字를 記憶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의 餘興이 채 가시지 않은 1988年 10月, 지강헌을 包含한 12名의 未決囚가 護送 中 脫走해 서울市內 家庭집을 돌며 人質劇을 벌이는 前代未聞의 事件이 發生했다. 마지막 남은 4名의 脫走犯은 북가좌동 家庭집에서 警察과 對峙하다 2名은 自殺하고 지강헌은 警察이 쏜 銃에 맞아 死亡했다. 唯一하게 살아남은 이가 강영일(46) 氏다. 19年刑을 마치고 6年 前 出所한 그를 만났다.

    “于先 커피나 한盞 하자”는 말에 그는 “牛乳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 瞬間 26年 前 그날이 떠올랐다. TV를 통해 全國에 생방송된 事件 現場에서 그는 동생이 사온 빙그레牛乳를 벌컥벌컥 마시며 高喊을 질러댔다. 술에 醉했는지 눈빛은 흐렸고, 不安과 焦燥함이 스물 한 살의 靑年을 짓누르던 모습. 4時間의 인터뷰 後 牛乳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懲役만 오래 살아서 귀가 얇은데, 冊에서 보니 牛乳가 完全食品이라서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綜合編成放送 채널A가 大韓民國 過去 그 時節과 사람을 再照明하는 回想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람’을 선보인다. 2月 末로 豫定된 첫 放送에서 ‘지강헌 人質事件’과 강영일 씨를 다룰 豫定이다. 製作陣에 따르면 出所 後 6年間 杜門不出하던 姜 氏를 說得하는 데 두어 달이 걸렸다고 한다.

    ▼ 出所 後 어떻게 지냈습니까.

    “신학대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노가다도 하고 食堂 일도 하고. 冷溫水機 消毒, 眼鏡알 配達 일도 했고 仁寺洞에서 액세서리를 판 적도 있어요. 겨울엔 군고구마, 여름엔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요. 근데 아르바이트로는 形便이 나아지지 않아서 3學年 때 學校 그만두고 돈을 벌려고 했는데 허리가 아프기 始作했어요. 退行性 디스크라고….”



    ▼ 職場을 가지려고 한 적은 없나요.

    “제가 미싱 技術이 있거든요. 縫製工場에 就職하려고 했어요. 굳이 前科 숨기기 싫어서 오픈하면 ‘다음에 連絡드리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근데 다음에 連絡 주는 일은 없잖아요. 뭐 그렇죠. 아직은.”

    ▼ 다큐 出演을 決心한 契機는.

    “出所한 지 얼마 안 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犯法者가 떳떳한 것 같은 뉘앙스로 記事가 나갔어요. 以後엔 인터뷰를 一切 안 했어요. 그리고 신학대度 抛棄한 狀態라 내세울 게 없어 망설였어요. 하지만 順列이 兄이 繼續 골房 老人처럼 지내지 말고 뭔가 反轉할 機會로 삼으라고 助言해줬어요. 苦悶 끝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番 해보자’ 했습니다.”

    順列이 兄은 이순열 懸進시네마 代表다. 그는 2006年 지강헌 事件을 素材로 한 映畫 ‘홀리데이’를 製作했다. 그 因緣으로 둘은 兄 동생 사이로 지낸다고 한다.

    다시 찾은 북가좌동

    脫走 8日째인 1988年 10月 15日 밤, 지강헌 강영일 한의철 眼光術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姑母 氏의 家庭집을 侵入, 다섯 番째 隱身處로 삼는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高 氏가 몰래 빠져나가 申告함으로써 警察의 包圍網에 둘러싸였다. 집 안에는 高 氏 夫人과 4名의 딸, 막내아들이 남은 狀況. 正午 무렵 一黨은 高 氏 婦人과 막내아들을 풀어주며 逃走를 위한 봉고차를 要求했고, 봉고차를 求하러 강영일이 셋째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사이 한의철 眼光術은 지강헌에게서 銃을 빼앗아 自殺한다. 이어 지강헌이 警察이 쏜 銃에 맞음으로써 9日에 걸친 逃走는 끝이 났다.

    북가좌동 집은 事件 이듬해인 1989年 2月 財團法人 矯正協會에 賣買됐다. 아무도 이 집에 살려고 하지 않아 矯正協會가 引受한 뒤 現在까지 地方 矯導官 子女들의 寄宿舍로 活用하고 있다고 한다. 姜 氏는 얼마 前 製作陣과 함께 이 북가좌동 집에 다녀왔다. 그는 “高 氏네 집과 그 건너 搜査本部가 차려졌던 집 두 個만 기억나더라”고 했다.

    ▼ 다시 가보니 어떻던가요.

    “그間 가보고 싶어도 맘 아플까봐 못 갔어요.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 親舊들한테 너무 未安해서…. 제가 ‘失敗하면 無條件 죽는 거다’라고 철이와 廣荗이를 세뇌시킨 건지도 몰라요. 只今은 40, 50代도 한창때지만 그땐 마흔 넘으면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逃走罪까지 刑을 살고 나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겼어요.”

    ▼ 人質로 딸들을 잡고 있었죠.

    “特히 둘째와 넷째 딸에게 未安해서…. 철이와 狂술이가 그 아이들 앞에서 自殺했거든요. 저도 한동안 선잠만 들어도 애들이 꿈에 나와 ‘야, 뭐해? 빨리 와, 가자’ 그랬거든요. 근데 죽는 걸 봤으니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을까 싶어요.

    큰딸은 女傑이었어요. 그날 職場에서 會食이 있어 늦게 들어왔는데, 대뜸 우리한테 한 말이 ‘잘 왔어요’였어요. 會食하면서 ‘脫走犯들이 왜 우리 집엔 안 올까’ 弄談했대요. 아버지가 申告한 後에도 ‘正말 罪悚하다. 하루이틀 便하게 있다 가시면 좋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요. 우릴 刺戟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狀況 判斷도 빨랐고 대처도 잘 했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1988年 10月 16日, 서울 북가좌동의 家庭집에서 人質劇을 벌이고 있는 지강헌.

    북가좌동 高 氏 큰딸을 비롯해 人質犯으로 잡혔던 被害者 中 몇몇은 以後 法廷에 歎願書를 提出하고 證人으로 나서는 等 姜 氏 便에 서줬다. 姜 氏는 “人質과 人質犯 모두 서로를 刺戟하지 않으려고 努力했고, 傷害나 强姦 等 罪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人質犯과 人質은 서로를 ‘오빠’ ‘누나’ ‘아가씨’ 等으로 呼稱했고, 한 女中生은 人質로 붙잡혀 있으면서 高入 試驗을 보러 學校에 다녀오기도 했다. 첫 番째 隱身處였던 성북구 안암동의 被害者는 歎願書에 ‘罪悚하다고 몇 次例 말했고, 食口들에게 毆打하거나 辱說하지 않았으며 處女인 나를 絶對 안정시키려 했다’며 ‘가장 안쓰럽게 느꼈던 것은 아버지와 술을 들면서 後悔의 빛을 보이며 울었던 것이었다’고 썼다. 두 番째 隱身處인 성동구 행당동 被害者가 쓴 歎願書의 一部는 이랬다.

    自己네가 떠나면 곧 申告하라고 하였으며 저의 男동생한테 工夫 熱心히 하고 自己네처럼 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아울러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었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後 率直히 우리 네 食口 모두 울었습니다. 罪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8年 12月 歎願人 朴○○

    ▼ 被害者들의 證言이 도움이 됐나요.

    “檢事가 脫走罪에 對해 15年을 求刑했는데 7年이 宣告됐어요. 행당동 아주머니가 證人으로 나와 證言이라기보다는 辯論을 해줬어요. ‘강영일 저 親舊 自首하려고 했는데 지강헌이 윽박질렀다’고 하도 얘기하니까 裁判長이 中間에 끊으면서 ‘證人, 僞證하면 處罰받는 거 아시죠?’ 했어요. 그러자 대뜸 ‘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셨어요. 그 말이 제겐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善한 거짓말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들렸어요. 正말 고마웠어요.”

    ▼ 自首하려 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니죠. 그저 失敗하면 죽는 거라고만 覺悟했지, 刺繡는 생각조차 안 했어요.”

    有錢無罪 無錢有罪

    姜 氏의 回顧에 따르면 1988年 當時 2審을 앞둔 未決囚들을 모아놓은 영등포교도소에는 長期囚가 많았다고 한다. 大部分 20代 初盤의 젊은이들이었다. 工事場 하루 日當이 8000원이던 그때, 젊은이들은 遊興費를 벌 目的으로 竊盜나 强盜짓을 했고, 그렇게 붙잡혀 와 10~15年刑에서 많게는 無期刑을 받았다. 全斗煥에서 노태우로 政權이 넘어가던 時期, 온 社會가 民主化 熱氣로 들끓던 때라 政府는 不法集會와 犯法行爲를 嚴斷하겠다고 闡明한 狀況이었다. 姜 氏는 “運動時間에 모이기만 하면 ‘靑春을 이 안에서 보내야 하다니…’ 하며 矯導所 담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自然스럽게 ‘야, 우리 逃亡 안 갈래?’ 하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姜 氏는 7件의 强盜를 저지른 嫌疑로 1審에서 15年型, 2審에서 12年型을 宣告받았다. 한의철, 眼光術은 親舊이자 共犯이었고, 그보다 14살 位인 지강헌은 拘置所에서 眼光술로부터 紹介받았다. 姜 氏는 “拘置所에서 矯導官들 理髮해주러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헌이 兄이 ‘어이 아우, 꼬바리(담배꽁초를 뜻하는 隱語) 좀 갖다줘’하고 付託하곤 했다”고 回想했다.

    ▼ 刑期에 不滿이 있었다고요.

    “拘置所에서 蠶室 살던 兄과 같이 있었는데, 2000萬 원을 주고 辯護士를 사서 執行猶豫로 풀려나는 걸 봤어요. 1審에서 無期刑을 받고도 짱짱한 辯護士를 써서 刑期가 5~7年으로 줄어드는 것도 봤고요. 當時엔 約束한 만큼 刑期를 줄여주면 돈을 더 받는 ‘條件附 辯護士’가 있었어요. 主로 檢事, 判事 그만두고 開業한 지 얼마 안 된 辯護士들이었죠. 그런 걸 보고 鬱火가 치밀었어요. 只今 생각해보면 卑怯한 辨明이지만….”

    지강헌이 警察과 對峙 中에 ‘有錢無罪 無錢有罪(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쳤다고 알려졌지만, 事實 이 말은 이들 日當의 슬로건 같은 것이었다.

    “拘置所에 같이 있던 어떤 兄이 돈 있고 빽 있는 者들에게 기우는 社會 風潮에 對해 熱을 올리며 얘기하곤 했어요. 그러면서 ‘有錢無罪 無錢有罪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저도 正말 ×같다며 不滿이 많았는데, 簡單하게 8글字로 壓縮해주니까 마음에 깊게 와닿았어요.”

    이 表現은 그가 脫走 中에 동생에게 보낸 便紙에도 나온다. 그는 ‘나는 法에 對해 큰 不滿을 품고 있단다. 無識해서 漢字는 잘 모르지만 ‘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우리나라 法에 큰 不滿을 품고 있단다. ○○야, 放送에서 떠드는 만큼 우리는 凶惡犯이 아니란다…’라고 썼다. 7~15年에 걸쳐 있던 이들 日當의 刑量은 當時 數十億 원 橫領 嫌疑로 7年型을 받은, 전두환 前 大統領의 동생인 전경환 새마을運動 中央本部會長과 자주 比較되곤 했다. 지강헌度 마지막 瞬間에 “돈 없고 權力 없이 못 사는 게 이 社會다. 전경환 刑量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제 살기에 지쳤다”고 외쳤다.

    ▼ 전경환 氏와 比較해 抑鬱한 마음이 있었나요.

    “북가좌동에서 警察과 對峙할 때 記者들이 警察 몰래 담 너머에 숨어 이거저거 물어봤어요. 제가 ‘나는 칼을 들었을 뿐이고 그는 權力을 들었을 뿐인데 뭐가 次이냐’고 했더니 記者들이 ‘그래도 强度가 더 나쁜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꺼져!’ 하고 辱했을 거예요.”(웃음)

    ▼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고요.

    “冊을 봤는데, 사람을 찔러 피를 보면 확 돈다고 해요. 찔린 사람은 살려고 소리 지르고, 찌른 사람은 조용히 하라고 繼續 찌르고…. 그래서 罪를 저지를 때도, 逃亡 다닐 때도 恒常 親舊들에게 ‘칼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때려라. 絶對 칼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少年院에서 배운 게 어때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26年 前 事件 現場이었던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家庭집. 只今은 地方 矯導官 子女들의 寄宿舍로 活用되고 있다.

    姜 氏는 19年 긴 歲月 동안 空冊 3卷 分量의 手記를 썼다. 脫走事件에서부터 幼年時節까지 기억나는 대로 詳細하게 記述했다. 手記를 쓰게 된 動機에 對해 그는 “1988年 檢擧된 뒤 서울拘置所 獨房에 갇혔는데, 거기서 獨房 同期로 만난 出版社 푸른숲 社長(現 강태형 文學동네 代表)이 써보라고 勸했다”고 했다.

    “그분이 ‘글재주 없어도 對話한 건 對話대로, 생각한 건 생각대로 쓰라’고 하셨어요. 두어 페이지 써서 그분 房으로 올려 보냈더니 좋다고, 이 程度면 된다고 해서 쓰게 됐습니다.”

    手記에 따르면 姜 氏는 서울 안암동에서 4男妹 中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10歲 때 아버지가 世上을 떠난 뒤 家勢는 더욱 기울었다. 어머니는 布帳馬車를 하며 子息들 뒷바라지를 했고, 姜 氏는 中學校 1學年 때 自退하고 洋襪工場에 들어갔다. 學校 다닐 땐 어머니가 쥐여준 50원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빵 하나 살 돈으로 배부를 理 없었다. 市場에서 謝過나 배를 한두 알씩 훔쳐 먹었고, 그러다 걸리면 꿀밤을 맞았다. 그는 “못된 짓이란 건 알았지만 犯罪란 생각은 못했다”며 “그렇게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犯罪에 耐性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親舊들과 牌싸움한 일로 法院에서 繼續 出頭하라는 告知書를 보내왔지만, 어머니는 布帳馬車 때문에 罰金 내라는 告知書와 함께 찢어버리곤 했다. 어느 날 끌려간 警察署에서 ‘그間 잘못한 일을 다 쓰라’는 刑事의 윽박지름에 과일 훔친 일, 公衆電話 銅錢을 턴 일 等을 써냈다. 거기에 法院 出頭 忌避 件이 나와 처음 拘束됐다. 14歲 때다. 家庭法院에 假委託돼 있다가 4個月 後 나왔다. 더는 洋襪工場에서 일할 수 없었다. 以後 竊盜와 强度로 少年院과 矯導所에 한 番씩 다녀왔다.

    ▼ 제대로 職場을 다녀본 적 있나요.

    “1987年 8月에 8·15 特使로 假釋放되고 장안동 頹廢理髮所에 就職했어요. 仁川少年矯導所에서 利用技術을 배웠거든요. ‘오토코’라고, 日本 헤어패션地 보면서 練習해서 포마드 기름 바르는 角진 머리도 할 줄 알았고, 기름 없이 손 드라이度 할 줄 알았어요. 日當을 1萬8000원 받기로 했어요. 근데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仁川 어디에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懲役에서 배웠다’고 말해버렸어요. 다음 날 主人이 日當을 1萬2000원으로 깎자고 하더라고요. 技術을 어디서 배웠는지가 重要합니까? 어릴 때니까 빈정 傷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 뒤론 職場 求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前科者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럼 돈 적게 받을 텐데? 性質도 나고 苦悶도 되고….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무렵 親舊들이 한 건 하자고. ‘1人當 1000萬 원 떨어진다’는 말에 흔들렸습니다.”

    첫 强盜에선 30萬 원, 두 番째엔 70萬 원씩 벌며(?) 遊興費度 쓰고 어머니에게 일해서 벌었다고 속이며 돈도 갖다드렸다. 돈 떨어지면 다시 칼을 들고 家庭집을 털었다. 그러다 親舊들과 함께 檢擧됐다. 總 7件, 被害額은 1000萬 원假量이었다고 한다.

    “한番은 수유리 집을 터는데 通帳에 200餘萬 원밖에 없었어요. ‘집이 이렇게 좋은데 돈이 이거밖에 없어요?’ 하니까 아주머니가 ‘이 돈 모으려면 얼마나 걸리는 줄 아세요? 5年 모은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아요. 當時 普通 月給이 30萬 원이니까 生活費 쓰고 每달 5萬~10萬 원씩 貯金한다면 그 程度 모이는 거죠.”

    李在五 議員과의 因緣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一黨 脫走事件이 終了된 다음 날인 1988年 10月 17日子 동아일보 紙面.

    姜 氏는 脫走 後 붙잡혀 서울拘置所에 收監됐을 때 李在五 새누리黨 議員을 만나게 됐고, 허인회 前 열린우리당 靑年委員會 委員長 等 運動圈 學生들과 因緣을 맺기도 했다.

    “拘置所에 데모하다 잡혀온 運動圈 學生이 많았어요. 이들이 저를 보고 놀라는 거예요. 우리 事件이 國家가 作業한 假짜로 알았대요. 當時 新聞에 5共 非理가 1面에 뜨다가 이게 뒤로 가고 우리 事件이 1面을 차지하니까 運動圈에선 國家 公爵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 李在五 議員이 옆房에 있었다고요.

    “제가 手匣을 채워 허리에 묶어두는 革手匣을 차고 있었어요. 1週日에 한 番 沐浴할 때만 열어줘서 便 누고 닦는 것도 힘들고, 등이 가려우면 바닥에 누워 뭉개댔어요. 學生들과 親해지다보니 저한테 人權辯護士 붙여주겠다고 했어요. 3個月 後에야 一般 手匣보다 무거운 磁石手匣을 차게 됐어요. 제가 이걸 풀어달라고 亂動을 부려서 矯導所에서 器物破損으로 追加 送致하려고 할 때 李在五 先生이 仲裁에 나서 懲罰만 받게끔 해주셨어요. 저한테 相當히 고마운 분이세요.”

    ▼ 19年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서울拘置所를 始作으로 順天, 光州, 大田, 大邱, 安養矯導所를 거쳤어요. 順天矯導所選 檢定考試를 보려면 光州矯導所로 가야 하는데, 脫走 前歷이 있는 저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해서 光州矯導所로 옮긴 뒤에야 檢定考試로 中學校와 高等學校를 마쳤어요. 2006年 映畫 ‘홀리데이’가 開封되고 좀 힘들었죠. 矯導所를 너무 卑下해서 그 影響이 있었거든요. 模範囚라 矯導官 立會 없이 30分씩 面會할 수 있었던 것도 取消되고 直系家族 以外에는 面會가 禁止됐어요. 그러다 2007年 6月에 出所했어요.

    宗敎生活 하며 마음 便해지는 長期囚들을 보고 基督敎 禮拜에 參席하기 始作했어요. 그러다 어느 牧師님과 因緣이 되어 그 夫婦가 저의 收養父母님이 되어주셨어요. 자주 面會 오시고, 領置金도 넣어주시고, 便紙 보내주시고…. 많이 神經 써주셨어요. 그분들 德分에 내가 善한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人性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을 땐 辱쟁이였는데 서른 되면서 辱을 안 쓰는 거 같아요. 어릴 적 親舊들 만나면 ‘이 子息 저 子息’ 하는 程度죠(웃음).”

    ▼ 얼마 前 韓日職業專門學校에서 靑少年들을 對象으로 特講을 했습니다.

    “率直히 그런 자리에 나올 資格은 없지만, 잘못된 길을 걸은 사람이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하면 特히 飛行靑少年들에겐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도 機會가 된다면 問題 靑少年들을 相對로 助言해주고 싶어요.”

    그는 이와 함께 長期囚나 死刑囚에게 便紙를 쓰고 그들의 子女를 돌봐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拘置所 있을 때 親한 死刑囚가 있었어요. 그분의 兄 執行이 있던 날, 矯導官이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 손잡고 온 일고여덟 살쯤 된 女子애가 검은色 옷을 입은 사람마다 붙잡고는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발을 동동거리며 매달렸대요. 그 얘기 들으니까 미치겠더라고요. 死刑囚나 無期囚의 子女들은 自己가 罪 지은 것도 아닌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요. 이 親舊들이 脫線하기가 正말 쉽거든요. 가난이 代물림되듯 犯罪도 代물림되지 말란 法이 없잖아요. 이들이 올바른 社會人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 얼마 前 大統領 特別赦免이 있었죠.

    “過去와 別般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人間的으로 보자면 自身과 가까운 사람들이니 제가 權力을 갖고 있다면 저 또한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外의 사람들도 생각해줬으면 해요. 生活事犯들도 赦免해준다든지, 長期受刑者 中에서 更生한 사람들에게는 機會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스크랩해놓은 記事가 있는데, 美國 어떤 州에서는 大企業이 矯導所에 投資했대요. 自己 돈으로 敎化 프로그램을 運營해서 再犯率이 낮아지면 利得을 가져가고, 그렇지 않으면 投資金을 回收하지 못한대요. 金大中 前 大統領도 自己가 그 안에 있어보니까 10年 以上 가둬놓는 건 無意味하다고 하셨거든요. 敎化 프로그램에 對해 너무 神經 안 쓰는 거 아닌가, 前科者에 對한 配慮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有錢無罪 無錢有罪는 只今도 마찬가지죠. 없는 사람은 한番 落伍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어요. 장발장처럼. 更生 意志가 있는 이들이 自活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平凡한 삶에 對한 憧憬

    지강헌은 봉고차를 求하러 나갔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姜 氏를 向해 銃을 한 발 쏘았다. 그 때문에 그는 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姜 氏는 “充分히 맞힐 수 있을 程度로 매우 가까운 距離였다”며 “나중에 강헌이 兄이 ‘너는 살아라’고 했다고 傳해 들었다”고 回想했다.

    ▼ 어떤 때 살아 있음에 感謝하나요.

    “名節 때 故鄕에 내려간 저를 家族親知들이 따뜻하게 반겨줄 때, 우와 이게 바로 家族이구나, 世上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凶惡犯이라 해도 家族은 이런 거구나, 싶을 때요. 그런 거 느껴본 적 있어요? 따뜻한 바람이 후욱 불어와서 마음이 부웅 뜨는 것 같은 氣分. 그런 거 있잖아요.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마음이 眞짜 薰薰해지는…. 前에는 죽지 못한 걸 怨望했어요. 죽을 方法을 찾으려고도 했어요. 只今은 親舊들에게 未安한 게 第一 커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할 수 있는 게 많고, 즐길 수도 있고, 奉仕할 機會도 있는데, 그때는 어려서 몰랐어요. 많이 아쉽고 후회스러워요.”

    人生時計를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진짜요?”라며 悔恨이 담긴 듯한 쓴웃음을 지었다.

    “學窓 時節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 가기 싫은데…. 그때를 빼놓으면 矯導所만 왔다갔다 했네요(웃음). 初等學校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죠. 애들 때리고 놀러 다니는 거 말고, 工夫 좀 해서 平凡하게 사는 거…. 平凡한 분들은 自己 生活이 힘들다고 해요. 結婚하셨어요? 아이 키우면서 職場 다니는 거 힘들죠? 근데 안에 있는 사람들은요, 그 平凡한 삶, 짜증내고 싸우고 다시 웃고 하는 사람들을 가장 憧憬해요. 잘살아서 삐까번쩍 흥청망청하는 사람보다 훨씬 부러워요. 그게 가장 幸福한 삶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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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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