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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臺灣 斷交 25周年… “韓國은 背信者”|新東亞

特別企劃 韓中修交 25年

韓國-臺灣 斷交 25周年… “韓國은 背信者”

6·25 派兵 血盟에서 時期·嫉妬의 關係로

  • 최창근|代만 專門 著述家, 한국외국어대 博士課程 caesare21@hanmail.net|

    入力 2017-08-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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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愛憎 交叉한 옛 親舊… 敎學상장(敎學相長)해야
    • 韓國·臺灣 企業이 벌인 치킨게임
    • 獨立의 길로 가는 序幕 열어준 나라
    • 臺灣 社會 基底에 흐르는 反韓感情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막스 뮐러의 ‘獨逸人의 사랑’에 나오는 이 句節처럼 韓國人의 눈에서, 마음에서 멀어진 나라가 있다. 臺灣(臺灣), 嚴密히 말해 中華民國(中華民國)이다.

    1992年 8月 24日, 베이징에서 李相玉 韓國 外務長官과 첸치천(錢其琛) 中國 外交部長이 韓中修交 協定書에 署名했다. 韓國은 冷戰體制 속에서 持續된 敵對關係를 公式 終了하고 ‘죽(竹)의 帳幕’을 넘어 中國의 손을 잡았다. 치러야 할 代價도 있었다. 韓國은 ‘새로운 親舊’를 맞는 代身 ‘옛 親舊’ 臺灣과 强制로 헤어져야 했다.?



    中國 얻으면서 臺灣 잃어

    베이징에서 韓中 兩國 外務長官이 感激의 눈물을 흘리던 날, 서울 明洞의 駐韓中華民國大使館에서는 2000餘 華僑의 눈물 속에서 ‘靑天白日旗 下降式’이 열렸다. ‘마지막 駐韓國 大使’ 진수지(金樹基)는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로 參席者들을 慰勞했다. 그 말은 韓國·臺灣 斷交 25周年인 올해까지도 空虛한 메아리로 울린다. 눈물 속에 내려진 靑天白日旗는 公式 席上에서 揭揚되지도, 돼서도 안 되는 存在다.



    中國의 對外 原則인 ‘하나의 中國 政策(一個中國政策)’은 中華人民共和國이 全(全) 中國 唯一 合法 政府라는 게 骨子다. 臺灣·홍콩·마카오에 關해서는 ‘나눌 수 없는 中國의 一部分’이라는 條件도 붙는다. 베이징은 中國과 修交하는 모든 나라에 臺灣과 斷交할 것을 要求했다. 原則 適用에는 例外가 없었다.

    大韓民國과 中華民國의 因緣은 日帝强占期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4年 4月 29日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公園에서 尹奉吉의 義擧가 있었다. 韓國 獨立運動史의 一大 快擧인 이 事件 背後에 大韓民國 臨時政府와 金九가 있었다. 尹奉吉의 擧事 後 國民政府(國民政府·中華民國의 當時 公式 名稱) 指導者 장제스(蔣介石)는 “4億 中國人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朝鮮 靑年이 해냈다”고 賞讚했다. 大韓民國 臨時政府에 對해 冷淡하던 態度도 바꿨다. 1932年 8月 金九와 첫 만남을 가진 後 장제스는 臨時政府 支援을 約束했다. 장제스와 國民政府의 도움下에 大韓民國 臨時政府는 異域萬里에서 抗日運動을 持續했다. 1940年 創設된 光復軍은 장제스의 心腹 후쭝난(胡宗南) 麾下에서 訓鍊받았다. 金九의 次男 김신(後날 駐臺灣 韓國大使를 지냄)은 陸軍航空學校 卒業 後 戰鬪機 操縱士가 됐으며 後날 大韓民國 空軍 創設의 밑거름 구실을 했다.

    장제스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正統性도 認定했다. 1943年 카이로에서 聯合國 삼거두가 만났다. 카이로會談에서 장제스는 美國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英國의 윈스턴 처칠을 說得해 ‘日本 敗戰 後 朝鮮 獨立’ 宣言을 이끌어냈다. 當時 大韓民國 臨時政府는 國際社會의 承認도 받지 못한 狀態였다. 弱小國 臨時政府의 앞날을 神經 써주는 나라는 없었다. 强大國들은 “韓國을 信託 統治해야 한다”고도 했다. 結果的으로 ‘카이로 宣言’은 終戰 後 韓國의 運命을 左右할 唯一無二한 國際法的 根據가 됐다. ‘獨立의 길’로 가는 序幕이었다.



    大韓民國 第1號 在外公館

    1945年 8月 15日 日王 히로히토(裕仁)의 無條件 降伏으로 韓國은 獨立했다. 1945年 11月 4日 장제스는 光復을 맞이해 祖國으로 돌아가는 金九와 臨時政府 要因들을 위해 歡送宴을 베풀었다. 歸國 便宜를 위해 專用機도 내주었다.

    中華民國 政府는 유엔韓國臨時委員會(UNTCOK) 7個國 中 하나로 大韓民國 政府 樹立에도 힘을 보탰다. 大韓民國 政府는 장제스에게 1953年 11月 25日 ‘大韓民國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授與로 報答했다. 中華民國 政府는 新生 大韓民國이 國際社會 一員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寄與했다. 1949年 1月 4日 中華民國은 美國에 이어 世界 두 番째로 大韓民國을 國家로 承認하고 公式 外交關係를 樹立했다. 그해 6月 10日 샤오위린(邵毓麟)을 初代 韓國大使로 임명했다. 後날 ‘韓國大使 回顧錄(使韓回憶錄)’을 執筆한 그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와도 因緣이 깊은 人物이다.

    韓國 政府는 國共內戰의 승기가 共産黨으로 기울어가던 1948年 11月 정환범을 駐中華民國 初代 特使로 任命해 광저우(廣州)에 ‘大韓民國特使館’을 開館했다. 大韓民國의 첫 在外公館이다. 같은 해 8月 7日 장제스는 慶南 鎭海를 訪問해 李承晩 大統領과 頂上會談을 가졌다. 8月 26日 申錫雨가 初代 大韓民國 大使로서 리쭝런(李宗仁) 副總統에게 信任狀을 提請했다. 1949年 12月 中華民國의 臺灣 遷都 後 大韓民國 大使館은 타이베이에서 再開館했다.

    6·25戰爭의 砲火 속에서도 大韓民國과 中華民國의 友好關係는 이어졌다. 戰爭 勃發 이틀 後인 6月 27日 美國 大統領 해리 트루먼은 武力干涉을 宣言한 後 美國 海軍 第7艦隊에 臺灣海峽 進入을 命令했다. 第7艦隊 司令官 아서 스트러블, 太平洋地區 司令官 더글러스 맥아더가 次例로 타이베이를 訪問했다. 장제스는 臺灣軍의 中國 本土 派兵, 第3戰線 形成을 提案했다. 具體的으로 3個 戰鬪師團 兵力 3萬3000名 提供을 提議했다. 맥아더는 懷疑的이었다. 美軍 合同參謀本部 意見도 否定的이었다. 무엇보다 트루먼은 臺灣軍 參戰으로 인한 第3次 世界大戰 勃發을 憂慮했다.


    아시아民族反共聯盟 結成

    1950年 9月 15日 仁川上陸作戰 成功으로 유엔軍에 不利하던 戰勢가 逆轉됐다. 美軍은 38度線을 넘어 北進을 繼續했다. 10月 19日, 中共軍이 ‘人民支援軍’이라는 이름으로 參戰하면서 傳貰는 再逆轉됐다. 11月 美國 合同參謀本部는 臺灣軍 派兵을 正式 要請했다. 臺灣軍은 中共軍 捕虜 審問과 情報 蒐集을 위한 小規模 部隊를 派兵했다.

    1953年 7月 6·25戰爭 停戰(停戰) 後 李承晩과 장제스는 ‘아시아版 나토(NATO)’를 構想했다. 共産主義 威脅 속에서 地域 國家들이 集團防衛體制를 構成하는 게 骨子였으나 美國이 反對했다. 워싱턴은 韓國·日本·臺灣·필리핀 等과 相互防衛條約을 締結하는 것으로 安全保障을 約束했다. 이런 가운데 1953年 11月 타이베이에서 會同한 李承晩과 장제스는 아시아民族反共聯盟(APACL) 結成에 合意했다. 이 聯盟은 이듬해 6月 15日 慶南 鎭海에서 民間機構 形式으로 公式 出帆했다. 1966年 아시아民族反共聯盟은 世界反共聯盟으로 擴大·改編됐다.

    ‘아시아 反共戰線’ 下에서 韓國과 臺灣 關係는 더욱 가까워졌다. 戰爭 中이던 1952年 3月 航空協定이 締結됐다. 1961年 3月 3日 貿易協定, 1965年 文化協定 署名이 이어졌다. 韓國과 臺灣이 戰後(戰後) 復舊와 經濟開發에 힘쓸 무렵 經濟·貿易 協力 關係도 緊密해졌다. 1962年 3月 商工部 商務官이 美國·西獨·泰國·홍콩과 더불어 臺灣에 첫 派遣됐다. 1965年 11月 韓國·臺灣 貿易會談, 1968年 5月 韓國 全國經濟人聯合會와 臺灣 中華民國國際經濟合作協會(CIECA) 間 經濟協力委員會가 開催됐다. 韓國과 臺灣을 가리켜 ‘血盟(血盟)’ ‘兄弟의 나라’라는 表現이 登場했다.

    高位層 間 交流도 活潑했다. 1966年 2月 17日 朴正熙 大統領이 臺灣을 公式 訪問했다. 그해 4月 장제스의 長男 장징궈(蔣經國) 國防部長이 答訪 形式으로 韓國을 찾았다. 그는 3年 後인 1969年 2月 再次 來韓(來韓)했다. 1975年 4月 장제스 總統 國葬(國葬) 時 韓國 政府는 大統領 名의 弔問 談話를 發表했다. 김종필 國務總理, 정일권 國會議長 等이 弔問使節로 타이베이를 찾았다.



    돌팔매질 當한 韓國大使館

    臺灣이 內憂外患(內憂外患)을 겪던 1970年代 들어서도 韓國과 臺灣은 友好關係를 持續했다. 1971年 10月 中華民國(臺灣)의 유엔 退出, 1972年 臺灣·日本 斷交, 1979年 臺灣·美國 斷交 等으로 臺灣의 外交的 孤立이 極甚해졌다. 이런 狀況에서 韓國은 ‘自由中國’ 卽 臺灣의 正統性을 認定하고 國交를 維持했다. 그 무렵 臺灣에 있어 韓國은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3大 核心 修交國이었다.

    韓國·臺灣 關係에 根本的 變化가 생긴 것은 1980年代 들어서다. 1983年 5月 5日, 中國 民航機 拉致事件이 發生했다. 春川 美軍 空軍基地에 不時着한 拉致犯들은 臺灣으로 政治的 亡命을 要求했다. 事件 解決을 위해 공로명 外務部 次官補와 善投(沈圖) 中國 民用航空局腸이 만났다. 1949年 中華人民共和國 樹立 後 兩國 間 첫 公式 接觸이었다. 會談에서 韓中 兩國 代表團은 氣體 및 人質 中國 送還, 拉致犯들의 韓國 內 裁判 後 臺灣 送還에 合意했다. 臺灣은 拉致犯들을 ‘反共 醫師’라 稱하며 卽刻 送還을 要求했다.

    韓國 政府의 決定에 臺灣은 政府 次元에서 抗議했고, 타이베이 市民들은 韓國大使館 앞에서 太極旗를 찢으며 示威를 벌였다. 이듬해 4月 7日, 아시아 靑少年 籠球選手權大會가 서울에서 開催됐다. 臺灣은 이때 ‘中華 타이베이(Chinese Taipei)’ 國號로 國際 스포츠 舞臺에 復歸했다. 中國과 臺灣이 同時 參加한 大會 開幕式에서 大會運營委員會는 中國代表팀의 五星紅旗 使用을 許諾한 反面 臺灣代表팀에는 國際올림픽委員會(IOC) 規定을 援用해 靑天白日旗 使用을 不許했다. 臺灣代表팀은 이 같은 措置에 抗議하면서 大會를 보이콧하고 撤收했다. 이 事件은 臺灣 言論에 大大的으로 報道됐으며 反韓(反韓) 感情이 들끓었다. 다시금 타이베이 韓國大使館은 示威隊의 돌팔매질을 當했다. 4年 後인 1988年 7月 노태우 政府는 從前의 ‘中共(中共)’을 中國으로, ‘中國’ ‘中華民國’ ‘自由中國’을 ‘臺灣’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臺灣 政府는 “公式修交國을 無視하는 處事”라며 强力하게 抗議했다.


    北方政策의 畫龍點睛

    1988年 2月 노태우 大統領이 就任했다. 1987年 大選 過程에서 ‘大(對)共産圈 國家 國交正常化’를 闡明한 그는 就任辭에서도 ‘任期 內 中國과 修交’를 暗示했다. 같은 해 7月 7日 ‘民族自存과 統一繁榮을 위한 特別宣言(7·7宣言)’에서 ‘남·北韓 雙方의 相對側 友邦國들과 關係 改善에 協力’을 闡明했다. 노태우 政府의 新(新)外交政策은 西獨 總理 빌리 브란트의 ‘東方政策(Ostpolitik)’에 빗대 ‘北方政策(Nordpolitik)’으로 命名됐다. 大統領外交安保首席祕書官 김종휘가 主導한 臺(對)共産圈 包容政策은 加速度를 냈다. 1988年 駐蘇聯 領事事務所가 設置됐으며 1989年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等 東유럽 共産國家와 外交 關係를 正常化했다. 1990年에는 蘇聯,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 等과 修交했다. 이듬해 南·북한이 유엔에 同時 加入했으며 臺(對)中國 關係에서도 進陟을 이뤄 1991年 서울과 베이징에 相互 貿易代表部를 設置했다. 韓中修交는 北方政策의 對美(大尾)요 畫龍點睛(畵龍點睛)이었다.

    1980年代 들어 破裂音을 내기 始作한 大(對)韓國 關係에서 臺灣은 危機感을 느꼈다. 韓國·臺灣 斷交는 ‘時間問題’로 비쳤다. 韓中 關係 變化 推移를 注視하던 臺灣은 公式·非公式 外交 채널을 통해 中國과의 修交 可能性과 日程을 問議했다. 1990年 讓受룽(梁肅戎) 입법원장(國會議長 該當)을 團長으로 한 立法院 代表團이 韓國을 찾았다. 노태우 大統領을 豫防한 자리에서 한 立法委員이 ‘韓中 關係의 未來, 中國과 修交 時 臺灣과 外交關係’에 關해 물었다. 노태우는 私見(私見)을 前提로 “새로운 親舊를 사귀어도 옛 親舊를 더욱 所重히 여기는 것이 道理라고 생각한다”고 答辯했다.

    ‘옛 親舊론’으로 臺灣을 안심시킨 노태우는 極祕에 부친 韓中修交 協商에 拍車를 加했다. 1991年 10月 李相玉과 첸치천은 첫 韓中 外交長官 會談을 開催했다. 같은 해 11月, 이듬해 4月에도 會談을 가졌다. 세 番째 會談에서 兩國 外交長官은 修交를 위한 實務交涉에 合意했다.

    권병현 外務部 本部大使를 代表로 한 協商팀은 1992年 5月, 6月 베이징과 서울에서 各各 두 次例, 한 次例씩 祕密交涉을 벌였다. ‘東海’라는 作戰名이 붙은 修交 協商은 臺灣, 北韓의 눈을 避해 極祕裡에 進行됐다. 7月 29日 노창희 外務次官이 베이징을 訪問, 쉬鈍神(徐敦信) 外交部 副部長(次官)을 만나 最終 談判을 벌였다. 修交 日程, 聲明 門안, 公式 發表 날짜 等을 合意했고 修交協定書에 가(假)서명했다.



    ?“3日 內로 韓國 땅 떠나라”

    1992年 5月 臺灣 政界 實力者 腸옌스(將彦士) 總統府 祕書長(大統領祕書室長 該當)李 리덩후이(李登輝) 總統 特使 資格으로 노태우 大統領을 豫防해 韓中修交 進陟事項을 問議했으며 中國과 外交 關係를 맺는 게 不可避할 境遇 ‘臺灣과 修交 1年 延長’을 要請했다. 大統領과 韓國 政府는 經濟·貿易商 最惠國 待遇를 約束하면서 韓中修交說을 公式 否認했다.

    韓中修交 協商을 極祕에 부친 까닭은 中國 側의 强力한 要求 때문이다. 리덩후이 總統 就任 後 臺灣은 莫大한 外換保有高를 基盤으로 한 ‘銀彈外交(銀彈外交)’를 展開하며 外交 孤立을 打開해가고 있었다. 그 成果로 라트비아, 니제르와 外交 關係를 樹立했다.

    이는 中國을 刺戟했고 ‘外交的 報復’을 부추겼다. 臺灣에 있어 韓國은 아시아 最後의 外交 據點이었다. 鳴動 大使館 問題도 無視할 수 없었다. 大使館은 歷史的 象徵性과 더불어 財産價値도 높았다. 臺灣은 韓中修交가 이뤄질 境遇 國際法에 따라 大使館을 中國 側에 넘겨줘야 할 것을 憂慮해 數次例 賣却·所有權 移轉을 試圖했다. 中國 側은 修交 條件으로 大使館 讓渡를 要求했다. 韓國 政府는 公式·非公式 經路를 통해 臺灣 側의 大使館 賣却·所有權 移轉을 沮止하던 形便이었다. 中國으로서는 ‘血盟’ 北韓도 配慮해야 했다.

    1992年 8月 15日, 李相玉 外務長官은 光復節 리셉션場에서 만난 진수지 臺灣大使에게 韓中修交 臨迫을 暗示했다. 3日 後 李相玉은 롯데호텔(서울 소공동) 客室에서 祕密裏에 진수지 大使를 만나 韓國과 中國이 修交에 合意한 事實을 通報하고 追後 公式 發表 때까지 保安 維持를 當付했다. 진수지는 이를 臺灣 政府에 報告했다. 極祕에 부쳐진 韓中修交가 水面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해 8月 21日 李相玉은 執務室로 진수지를 招致(招致)해 公式 斷交文書를 傳達하면서 3日 以內에 大使館에서 撤收할 것도 要求했다. 이튿날 김석우 外務部 亞洲局長이 公式 브리핑을 통해 8月 24日 韓中修交와 同時에 臺灣과의 斷交를 公式 發表했다. 진수지는 8月 22日 緊急 記者懇談會를 開催해 韓國 側의 處事를 强力하게 非難했다. 鳴動 大使館 處理 問題에서도 ‘臺灣 外交資産 奪取를 막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大勢를 거스를 수 없었다. 진수지는 8月 24日 午後 4時 마지막 國旗 下降式을 치렀다. 그날 午後 10時 20分 中和航空便으로 歸任하는 것으로 ‘마지막 週韓國 中華民國 大使’로서 任務를 끝냈다. 같은 날 타이베이의 韓國大使館도 國旗를 내리고 懸板을 뗌으로써 ‘大韓民國 第1號 在外公館’으로서의 所任을 마무리했다.?


    2005年 國籍機 運航 再開

    斷交 後 韓國의 執權黨이던 民主自由黨 次元의 眞사(陳謝)使節團 訪問이 推進됐다. 使節團長으로 7線 現役議員이자 臺灣과 親分이 깊은 김재순 前 國會議長, 顧問으로 정일권 前 國務總理가 決定됐다. 1992年 9月 15日 타오위안(桃園) 中庭(中正)國際空港에 到着한 陳謝使節團을 章샤오例(蔣孝嚴) 外交部 政務次長, 진수지 本部大使가 迎接했다. 問題는 空港 貴賓室에서 發生했다. 韓國使節團이 貴賓室로 들어가려는 瞬間, 空港 職員들은 “中華民國 國際空港 貴賓室은 背信者들에게는 열리지 않는다”며 制止했다. 김재순은 複道에서 ‘負荊請罪(負荊請罪·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때려달라고 罪를 請한다)’의 聲明을 읽어야만 했다. 下오보춘(?柏村) 行政院長(國務總理 該當)을 만난 자리에서도 使節團은 ‘背信者’라는 叱咤를 當했다. 以後에도 리덩후이 總統과 臺灣 外交部의 使節團에 對한 冷待는 이어졌다.

    1992年 10月 韓國과 臺灣은 非公式 外交 關係 樹立을 위한 協商을 始作했다. 臺灣의 國號 및 國旗 使用 問題, 非公式 代表部 職員의 地位 問題 等으로 協商은 難航을 거듭했다. 臺灣 側은 ‘臺灣’ 名의 代表部 設置를 固執했고, 韓國은 ‘하나의 中國 政策’에 依據해 受容할 수 없다는 見解였다. 數次例 協商과 決裂 끝에 1993年 7月 27日 오사카에서 兩側은 非政府 代表機構 樹立에 關해 合意했다. 오사카會談에서 韓國과 臺灣은 서울과 타이베이에 各各 ‘週韓國타이베이代表部’ ‘駐타이베이韓國代表部’를 設置하고, 代表部 職員에게는 外交官에 準하는 便宜를 提供하기로 했다. 以後 그해 11月 서울, 이듬해 1月 타이베이에 代表部가 開設돼 韓國과 臺灣은 ‘非公式’ 틀 속에서 ‘常駐代表部(Permanent Mission)’라는 同等한 機構를 통해 實質的 外交 關係를 維持하게 됐다.

    代表部 設置 後에도 關係 正常化의 길은 險路였다. 關鍵은 서울-타이베이 間 直航路線 問題였다. 斷交와 同時에 ‘航空協定’李 廢棄돼 兩國 國籍機 就航이 不可能해졌다. 1995年 3月 直航路線 復活을 위한 1次 協商이 開催됐다. 臺灣은 ‘民間 航空協定’에 臺灣을 ‘領土(領土· Territory)’로 表記할 것을 主張했다. 韓國은 領域(領域·Area)’이어야 한다고 맞섰다. 以後 協商에서도 臺灣은 經濟的 損失을 甘受하면서도 ‘國家로서의 自尊心’을 지켜야 한다는 態度를 固守해 協商이 連달아 決裂됐다. 그러던 中 2002年 韓日 월드컵 開催로 韓國 訪問 觀光客 需要가 急增했다. 이를 契機로 ‘傳貰機’ 形式의 事實上 定期便이 생겼다. 2年 後인 2004年 9月 航空協定이 締結됐고, 이듬해 3月 國籍機 定期 航空便 運航을 再開했다.



    中國 一邊倒 外交街 看過한 것 ?

    2000年代 들어 韓國과 臺灣은 經濟 部門에서 熾烈한 競爭을 벌였다. 半導體, LCD, LED, 化學, 鐵鋼 等 主力 輸出 品目이 겹쳤다. 大企業 爲主 經濟構造를 가진 韓國 企業들은 브랜드 파워, 規模의 經濟를 利用한 原價 節減 等을 武器로 臺灣 競爭 企業을 壓迫했다. 半導體와 LCD를 中心으로 벌어진 ‘치킨게임’에서 韓國은 臺灣 企業들을 倒産 危機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는 斷交 時 앙금에 이어 臺灣 內 反韓 感情의 震央이 됐다.

    이런 가운데 2010年 광저우아시아競技大會에서 臺灣 跆拳道 代表 讓受쥔(楊淑君)이 規定 違反을 理由로 失格敗 當했다. 이를 發火點으로 跆拳道 宗主國인 韓國을 向한 反韓 感情이 불붙었다. 臺灣 言論들은 煽情的 報道로 이를 부추겼고, 地方選擧를 맞이한 各 政黨과 政治人들도 이를 選擧에 惡用했다. 이 事件은 臺灣 社會 基底에 흐르는 反韓 情緖의 現實을 如實히 보여줬다.

    斷交 以後 關係가 疏遠해졌음에도 民間 部門을 中心으로 韓國·臺灣 關係는 緊密해지고 있다. 2003年 相互비자免除協定이 締結됐고, 2012年 비자 免除 期限을 90日로 延長했다. 航空便도 늘어나 從前 仁川·타오위안 外에 金浦·쑹산(타이베이), 釜山·가오슝, 大邱·쑹산 等을 잇는 定期 航空路線이 增設됐다. 相互 訪問客 數도 刮目할 成果를 내고 있다. 2014年 年間 相互 訪問客 100萬 名 突破 後 急增勢를 이어가 200萬 名을 바라본다. 經濟·貿易 部門 交流도 增加 一路다.

    1992年 斷交 以後 25年 동안 ‘하나의 中國 政策’ 속에서 韓國과 臺灣은 公式 外交 關係를 回復하지 못했으나 斷交 以前보다 經濟·貿易·觀光 等 民間 交流를 基盤으로 實質 關係는 緊密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韓國에 있어 ‘옛 親舊’ 臺灣의 存在感은 낮다. 젊은 世代들은 타이완(Taiwan·臺灣)과 타이(Thai·泰國)를 헷갈리기 十常이다.

    비록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멀어졌지만 臺灣은 無視할 수 없는, 無視해서도 안 되는 가까운 이웃이다. 韓國과 臺灣 關係는 愛憎(愛憎)李 交叉한다. 多幸히 無關心은 아니다. 서로 너무나 닮았기에 嫉妬하고 猜忌하는 게 아닐까? “地球上의 가장 비슷한 두 나라”로 꼽히는 韓國과 臺灣은 서로 배울 點도 많다. 敬遠視하기보다는 敎學상장(敎學相長)李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意味에서 中國을 얻음으로써 强制로 헤어져야 했던 ‘옛 親舊’ 臺灣이 가지는 意味를 되새겨보아야 한다. 中國 一邊倒 外交政策을 펴면서 우리가 看過했거나 잃은 것은 무엇인지도 諮問(自問)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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