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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新東亞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鐵巖의 ‘까치발’

  • 정윤수│文化評論家 prague@naver.com

    入力 2014-02-19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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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川邊의 집들이 서로를 依支하면서 서 있다.
    • ‘까치발’李 坊과 房, 집과 집을 잇댄다. 줄지어 서 있는 家屋들이 鐵巖의 오래된 記憶을 떠받친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江原 태백시 철암동 ‘까치발 집’.

    鐵巖에 가기로 했다. 鐵巖이라, 奧地다. 멀고도 깊고 아득해 自動車로 그곳에 가려면 몇 군데 重要한 據點을 거칠 수밖에 없다. 寧越, 旌善 다 지나서 鐵巖인데 그 사이를 그냥 지나칠 만한 勇氣가 없다. 그래서 몇 군데를 들러보기로 했다. 寧越과 旌善 그리고 太白 사이의 작은 마을들, 옛 炭鑛地域, 只今은 廢鑛된 곳이 많고, 스키場과 콘도와 카지노와 모텔이 峽谷을 따라서 줄지어 선 곳들, 그러니까 함백, 告한, 사북, 정암을 따라 鐵巖에 가기로 했다.

    ‘힐링 時代’의 시골과 都市

    堤川에서 38番 國道를 타고 旌善 쪽으로 달리면서 김동완(45) 氏와 通話를 했다. 建國大 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Community Business, 以下 CB센터)에서 일하는 金 氏는 내게 CB센터가 하는 일과 最近의 成果, 앞으로의 課題에 對해 槪括해 說明했다. 나는 겉으로 CB센터에 關한 說明을 들으면서 속으로는 金 氏를 暫時 생각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後輩지만, 그 믿음직스러운 성실함과 끈氣는 오히려 나를 가르치는 바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廢墟가 된 곳에서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일하는 强者다.

    “鐵巖으로 가기 前에 告한시장에 한番 들러봐요. ‘市場에 처음 와본 초콜릿’이라고 괜찮아요.”

    “뭐, 초콜릿. 市場에 처음 와본….”



    “예, 우리 CB센터에서 直接 支援하는 事業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거예요. 마을 가꾸기 事業을 곳곳에서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眞짜 生活環境 改善이 돼야 하거든요. 單純한 環境 美化나 地域 特産品 販賣가 아니어야 해요. 基本的으로 直接 住民이 參與해야 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아이디어가 提供되고 初期 세팅이 可能한 財政 支援도 이뤄져야 합니다.”

    “이미 崩壞할 대로 다 崩壞해 마을을 再生하고 가꾸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요즘 힐링이다 歸村이다 해서 農村에 對한 關心이 많은데, 浪漫的이고 非現實的이고 그렇죠. 어쩌다 觀光하러 온 사람들이야 그렇다 해도 地域에 깊숙이 들어가보면 어디서부터 始作해야 할지 難堪한 곳이 많아요. 며칠 힐링 旅行하는 사람이야 잘 보이지 않겠지만, 마을의 施設도 그렇고 關係도 그렇고 가슴 아픈 일이 많죠. 이걸 차근차근 再生하고 가꾸는 게 CB 事業이에요. 고한市場에 가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 거예요.”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講院 旌善郡 고한市場에서 초콜릿 가게를 運營하는 박은주 氏.

    運轉 때문에 主로 金 氏가 얘기를 하고, 나는 가만히 듣는 쪽이었는데, 들으면서 거의 同時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力作 ‘시골과 都市’가 떠올랐다. 윌리엄스는 이 著作에서 資本主義 産業 文明이라는 이름의 都市化를 問題 삼는다. 그는 시골과 都市에 關한 簡便한 二分法부터 解體한다. 卽, 落後하고 前近代的인 시골이 都市라는 未來로 發展해왔다는 式의 簡便한 圖式 말이다. 資本主義 經濟體制는 産業化와 都市化라는 雙頭馬車로 發展했다. 곧 都市는 欲望의 集散地가 되고 羨望의 對象이 됐다. 그 過程에서 시골은 破壞돼 버렸다. 시골과 都市는 直線上의 時間 軸에 있는 게 아니라 全혀 다른 地點에 있으며 都市의 發達이란 끊임없이 시골을 억누르고 搾取해서 이룩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小說이나 映畫에서처럼 시골에서 都市로 돈 벌러 간 靑年이 後날 크게 事業을 일으켜 自己 故鄕에 學校도 세우고 會館도 세우는 式의 이야기란 浪漫化한 虛構라는 얘기다.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말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近代 잉글랜드의 産業化는 大都市의 新興 資本家들이 시골의 農地를 强壓的으로 私有化하고 農民을 土地로부터 이동시켜 都市의 賃金 勞動者로 만드는 過程이었다. 그는 ‘시골에 對한 殘酷한 侵奪’이라고 表現했다.

    重要한 것은 이 같은 現象을 中和하는 文化的 作用이 벌어진다는 點이다. 19世紀 中葉 以後 런던이나 맨체스터의 都市 文化人들이 自己들의 生産物인 惡魔의 맷돌(産業化)과 惡魔의 巢窟(都市化)을 批判하면서 오래된 시골 마을을 ‘有機的 共同體’로 理想化하는 現象이 일어난 것이다. 시골을 浪漫的으로 追憶하는 現象에 對해 윌리엄스는 當場 두 時間만 車를 타고 시골로 가보라고 말할 程度다. 그때나 只今이나 시골은 牧歌的인 田園 共同體가 아니라 莫强한 都市에 압도당한 채 빼앗기고 衰退해 呻吟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힐링 文化’도 한便으로 그런 要素가 없다고 全혀 壯談할 수가 없다. 金 氏는 바로 그런 點을 指摘하면서 旌善, 太白 一帶의 마을 再生 事業을 제대로 凝視할 것을 當付했던 것이다.

    市場에 처음 와 본 초콜릿

    고한市長은 어두컴컴했다. 비가 내렸다가 갑자기 눈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탓에 市場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어두워 보였다. 그래도 市場 한복판은 몇 해 前과는 달라 보였다. 5年 前 고한市場에서 라면을 먹었는데, 그때는 허름한 施設에 비가 새는 遮陽에 군데군데 逆한 냄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많이 달라졌다. 于先 커다란 採光窓이 고한市場의 한복판을 산뜻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採光窓은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자연스럽게 하늘 全體를 가리는 雨傘이 되고 아마도 빛이 따사로운 때에는 고한市場을 차분하면서도 환하게 해줄 것이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講院 旌善郡 고한읍 三歎 아트마인 垂直坑道塔 操車場에 붉은 蓮꽃이 피어 있다. 옛 鑛夫들에게 바치는 設置藝術 作品이다.

    그 한복판에 ‘想像초콜릿’이 있다. 가게 이름이 想像초콜릿인데 더불어 딸린 이름이 더 印象 깊다. ‘市場에 처음 와본 초콜릿’이다. 이 작지만, 素朴하고 아름다운 가게를 運營하는 박은주(35) 氏의 일곱 살 먹은 딸이 지은 이름이란다. 이름도 짓고 直接 글씨도 썼는데, 귀여운 딸의 소담스러운 글씨를 朴 氏는 看板 삼아 달았다.

    朴 氏가 在來市場 한복판에 초콜릿 카페를 연 것은 建國大 CB센터와 하이원리조트가 協力한 結果다. 하이원리조트의 財政 支援과 CB센터의 事業 槪念, 그리고 朴 氏의 아이디어가 化學 結合해 이뤄진 所重한 成果다. 이 카페는 요즘 社會的 이슈가 되는 經歷 斷絶 女性의 社會 進出의 한 模型이라는 點에서도 意義가 있다. 이 重要한 이슈는 社會가 함께 解決하지 않으면 안 되는 難題다. 能力과 意志만으로는 解決이 어렵다. 地域과 企業과 槪念과 아이디어가 結合돼야 한다.

    “저 나름대로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엄두도 낼 수 없었죠. CB센터 분들이 槪念과 節次를 맡아주고 하이원리조트에서 支援해줘 일이 可能해졌어요.”

    朴 氏의 말이다. 솜씨 있고 意志가 있어도 賃借料 때문에 카페를 할 만한 場所조차 求하기 어려운 게 現實이다. CB센터와 하이원리조트가 高韓市場 商人會와 만나 持續的으로 論議한 結果 市場 안의 空間 하나를 제공받았고 이로써 달콤한 초콜릿과 隱隱한 커피香이 衰落해가던 高韓市場 안에 번지게 됐다.

    建大 CB센터와 하이원리조트가 協力한 마을事業은 想像초콜릿 外에도 다양하게 번져가고 있다. CB센터 硏究陣이 直接 企劃해 推進한 ‘炭鑛 記念品 事業’은 이 地域의 歷史와 鑛夫의 삶을 섬세한 스토리텔링을 거쳐 記念品으로 製作해낸 일이다. 産業化 時節의 힘겨운 經驗을 忘却하거나 化石化夏至 않고 오늘의 삶에 持續的으로 影響을 미칠 수 있는 價値 있는 記憶으로 再生하는 作業이기도 하다. 地域 特産物을 바탕으로 眞짜 로컬 푸드를 내놓는 ‘동강할미꽃마을’, 旌善 一帶의 殷盛한 숲을 文化 資源으로 삼아 疏通과 治癒의 關係 맺기를 推進하는 ‘아이아리 숲e랑’, 1年의 折半 以上 暖房을 해야 하는 이 地域 날씨의 特性에 注目해 調理用 改良火덕이나 暖房用 太陽溫風器, 暖爐튜닝 等 에너지 效率이 뛰어나고 費用이 低廉한 製品을 製作하는 ‘마을에너지攻防’ 等도 進行되고 있다.

    廢鑛 選炭場에 핀 蓮꽃

    이 事業들의 槪念을 確定하고 그 意味를 全國 곳곳으로 擴散하는 김재현 建國大 環境科學과 敎授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一定 地域 안에서 △地域住民이 主導的으로 運營하되 △營業行爲로 獨自的 收入과 自立性을 確保하고 △雇傭擴大·環境改善 等 地域課題 解決에 도움이 되는 事業이어야 한다고 主張한다. 이렇게 展開되지 않으면 持續的인 關係 맺기가 아니라 반짝 아이디어에 卽興的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일이 發生하게 된다. 地域 住民이 主體가 돼 持續 可能한 마을 事業을 만들어내는 일, 그것은 곧 崩壞된 마을共同體를 長期的으로 復元하는 일이 되며 이로써 한 나라의 뿌리와 줄기가 剛健해지는 것이다. 그런 點에서 고한市場의 한 귀퉁이에 자리한 예쁘장한 카페 ‘想像초콜릿’은 眞짜 마을 가꾸기를 꿈꾸는 全國 곳곳의 사람들에게 所重한 씨앗이 될 것이다.

    고한市場에서 灣港재 쪽으로 5分쯤 가다보면 오른쪽 기슭으로 巨大한 垂直坑道塔(垂坑塔)李 보인다. 이 垂坑塔 位置가 只今은 廢鑛된 三陟炭座 정암鑛業所다. 1962年 設立됐다가 2001年 廢鑛됐다. 그로부터 12年 만인 2013年 5月 美術 展示를 中心으로 한 複合 文化施設 三歎 아트마인(代表 金民錫)으로 變貌해 새로 門을 열었다.

    巨大한 垂坑塔 안으로 들어가면 作業用 鑛車를 위한 操車場 施設이 그대로 保存돼 있다. 그 레일 위에 붉은 蓮꽃들이 피어 있다. 이 垂直 坑道에서 人生의 絶頂期를 보낸 옛 鑛夫들에게 바치는 美術作家의 作品이다. 검은 線路 위의 붉은 蓮꽃은 强健한 빛을 發하고 있었다.

    예전에 鑛夫들이 使用하던 샤워室, 化粧室, 歲火葬 等도 地域 歷史와 文化 藝術 展示館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地域의 歷史性이 消去된, 희멀건 藝術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鑛夫들이 몸을 씻던 샤워室에 걸려 있는 作品들은 鑛夫들의 엑스레이 寫眞이다. 塵肺症이라는 致命的인 病과도 싸워야 했던 鑛業人의 苦痛이 담겨 있는 것들이다.

    垂坑塔과 맞붙은 옛 事務棟의 施設도 入住 作家 스튜디오, 現代美術 展示, 美術 體驗 空間, 옛 鑛業所 資料 收藏庫 等으로 變貌했다. 資料 收藏庫의 記錄物은 21世紀 들어 脚光받는 ‘아카이브 展示’라는 觀點에서 볼 때도 價値가 相當하다.

    “누군가에게는 골치 아픈 廢鑛 施設이겠지만 藝術家들의 눈과 熱情으로 보면 이만한 오브제가 달리 없습니다. 허허벌판에 일부러 이렇게 짓는 것은 不可能한 일이죠.”

    김진만 三歎 아트마인 專務理事는 유럽의 다양한 事例를 擧論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또 이 空間이 새로운 生命 空間으로 되살아나는 中이라고 强調했다. 그는 外交官 出身으로 全 世界가 20世紀의 産業化에서 21世紀의 文化化로 變貌하는 것을 直接 目擊했다.

    “유럽 産業革命의 根據가 되는 곳이 獨逸 루르 炭鑛地帶입니다. 그곳의 卒버레인 보쿰 博物館은 年間 250萬 名 넘는 觀光客이 찾습니다. 스페인의 炭鑛 地帶 빌바오度 구겐하임 美術館으로 인해 世界的인 觀光都市로 成功했습니다. 産業의 視線으로 보느냐, 文化의 視線으로 보느냐가 關鍵이지요. 예전에는 낡고 오래된 것이면 無條件 부수는 게 能事였지만 이제는 새로운 視線으로 再活用하자는 共感帶도 커졌습니다. 三歎 아트마인이 바로 그 證據입니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三陟炭座 정암鑛業所의 옛 坑道.

    金 氏의 말처럼 保存하고 再活用하는 것이 一種의 흐름이 됐다. 多幸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내디뎌야 한다. 그저 그런 追憶 博物館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當代性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졸버레인이 代表的 事例다. 졸버레인은 産業革命의 絶頂期인 19世紀 中葉, 그러니까 1847年 採炭을 始作해 1986年에야 廢鑛된 곳이다. 우리나라의 派獨 鑛夫들이 일했던 곳이 바로 졸버레인이다. 유네스코는 2001年 졸버레인을 世界文化遺産에 登載했다. 獨逸 重工業과 유럽의 産業革命 歷史를 象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바탕 위에서 졸버레인은 文化 空間으로 變貌했다. 世界 最高 權威의 ‘레드닷 디자인 어워즈’ 受賞作을 展示하는 空間이자 크고 작은 博物館, 藝術學校, 커뮤니티 作業場, 作家 스튜디오 等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空間이 됐다.

    이처럼 옛 記憶을 保存하되 ‘只今 우리의 삶’李 同行해야 한다. 그래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共感帶도 넓어진다. 全國 곳곳에 追憶이라는 테마의 空間은 많아지고 있지만 只今 우리가 살아가는 當代의 現實과 苦惱까지 담아내지는 못한다.

    鑛夫의 노래

    眞짜 힐링은 過去를 되새김질하는 데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只今 우리가 겪는 當代의 問題를 함께 省察할 때 可能해진다. 그런 點에서 三歎 아트마인이 매우 現代的인 作家들의 作品을 展示하고 當代를 苦惱하는 이들에게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提供하는 것은 鼓舞的이다. 그런 當代性이 現在의 空間 槪念에 投射됐기에 三歎 아트마인은 지난해 9月 公共디자인 大賞을 受賞할 수 있었다.

    “애初 構想대로 하면 한 60% 進行됐고 앞으로도 最小 3年은 더 必要합니다. 이제까지 事業이 主로 空間 세팅과 展示 爲主였다면 앞으로는 地域住民을 위한 아카데미 講座를 開設하고 淸淨 地域을 테마로 한 音樂祭나 映畫制度 構想 中입니다. 이곳이 張差 情緖的으로 힐링하고 文化的으로 필링하는 空間이 될 것입니다.”

    이 連載의 꼭지 題目을 正確하게 應用해 풀어낸 金 氏의 說明은 三歎 아트마인이 꿈꾸는 未來가 現實的인 構想임을 雄辯했다.

    “不遠千里 將星땅에 돈벌러 왔다가 / 꽃 같은 요내 靑春 炭鑛에서 늙네 / 昨年 간다 올해 간다 석三 年이 지나고 / 來年 간다 後年 간다 열두 해가 지났네 / 南洋群島 검둥이는 얼굴이나 검다지 / 荒地將星 사는 사람 얼굴 옷이 다 檢네 / 통리고개 송애재는 자물쇠고개인가 / 돈 벌러 들어왔다가 오도가도 못하네 / 文魚 낙지 오징어는 먹물이나 뿜지 / 이내 몸 목구멍에는 검은 가래가 끓네.”

    이런 노래가 있었다. 炭鑛 産業이 活況이었을 때 全國에서 이곳 旌善, 太白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恨이 서린 ‘鑛夫 아리랑’이다. 그 時節에 炭鑛은, 비록 일은 고되고 危險해도 웬만한 職場보다 保守도 넉넉했고 福祉도 괜찮았다. 舍宅이 提供됐고 아이들 學資金도 나왔고 月給도 大都市의 中小企業보다 좋았다. 그래서 많이들 함백, 將星, 鐵巖, 통리로 몰려들었다.

    나는 三歎 아트마인을 나와서, 暫時 고즈넉한 작은 節 淨巖寺에 들렀다가, 눈발로 미끄러워진 灣港재 고갯길을 艱辛히 넘어 鐵巖으로 向했다. 이 一帶의 수많은 炭鑛 마을 中에서 鐵巖은 石炭 貯藏, 경석 選別, 異物質 分離 等이 一貫 作業으로 可能한 國內 最初의 選炭場이 있던 곳이다. 交通도 다른 奧地에 비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내 幼年의 記憶은 鐵巖을 어둡고 깊고 아득하고 먼 곳으로 새기고 있다. 어릴 적, 姑母네가 함백에서 살았다. 姑母夫가 막장 깊이 내려가 石炭을 캤다. 放學 때마다 함백에 갔는데, 奧地였다. 검은 山, 검은 사람, 검은 물이었다. 四寸 동생들과 놀다보면 石炭 캐는 일을 마치고 退勤하던 姑母夫가 웃으면서 우리를 부르던 記憶이 난다. 그때, 姑母夫의 모습은 두 눈 흰자위와 이빨만 하얗게 빛났고 나머지는 온통 검었다.

    悲劇은 1979年 4月 14日 새벽에 일어났다. 함백鑛業所 자미갱 入口에서 鑛夫 110名을 태우고 坑 안으로 進入하던 鑛車에서 다이너마이트가 暴發했다. 22名이 現場에서 死亡하는 큰 事故였다. 不幸 中 多幸으로 姑母夫는 鑛車의 뒤쪽에 앉아 있다가 負傷을 當했다. 病院에서 오랫동안 治療를 받은 後 姑母네 家族은 서울로 移住했다. 딱 그때까지가 내 記憶 속에 남아 있는 炭鑛 마을의 이미지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철암동 中心街.



    ‘鐵巖溪谷의 血鬪’

    그런데 그 오지 사람들도 鐵巖을 더 아득하게 여기는 듯싶었다. 姑母夫가 무슨 일로 鐵巖에 다녀와야 한다고 하니 姑母가 걱정하면서 가면 자고 오느냐고 물었던, 아주 稀微한 記憶이 있다. 勿論 그런 對話가 꼭 鐵巖이 깊고 먼 奧地라서 오간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鐵巖은 漢字(鐵巖)로도 鑛山 地域을 代表하는 데다 鐵道나 市外버스 交通便도 고한이나 함백보다 나았다. 高等學校도 번듯했다. 철(鐵)은 쇠를 뜻하면서 同時에 단단하고 堅固한 것, 짙고 검은빛 等을 가리킨다. 癌(巖) 또한 바위를 뜻하지만 가파르고 險한 곳 或은 깎아지른 낭떠러지를 뜻한다. 果然 炭鑛地域을 代表하는 곳임을 立證하는 地名이다.

    ‘鐵巖溪谷의 血鬪’라는 映畫가 있다. 恰似 데뷔 初期 류승완 監督의 作品을 떠올리게 하는 題目이다. 西部映畫나 武俠誌 올드팬이라면 題目에서부터 뭔가 近似한 復讐 活劇을 聯想할 것이다. 內容도 그렇게 展開된다. 矯導所를 나온 純情派 주먹이 自身의 삶을 망가뜨린 組暴 깡牌들을 뒤쫓아 悽絶하게 復讐한다. 그 映畫의 로케이션 場所가 鐵巖이다. 韓國藝術綜合學校에서 映畫 演出을 專攻한 新銳 지하진 監督의 作品이다. 지 監督은 西部映畫 救助에 復讐 액션 活劇을 담을 만한 場所로 韓半島 山野를 헤매다가 鐵巖을 發見하고는 곧 製作에 突入했다고 한다. 旌善, 太白 地域을 내 故鄕만큼이나 애틋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반가운 映畫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아쉬웠다. 復讐 活劇을 얼개로 삼아 新銳다운 霸氣와 꺾기와 울컥거림을 期待했으나 디테일이 陳腐했고 事緣의 乏盡함도 弱했고 무엇보다 俳優들의 演技가 매끄럽지 못했다. 決定的인 아쉬움은 鐵巖이라는 空間이 背景에 그쳤다는 點이다. 鐵巖 一帶의 選炭場, 工場, 鐵道, 洞窟 等은 切迫한 運命의 힘으로 죄어주는 要素인데 다만 시커먼 背景에 머무르고 말았다. 함백이나 鐵巖 같은 炭鑛 地域에 對한 體驗의 密度나 工夫의 濃度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空間에 對한 美學的 理解가 不足했다. 鐵巖이라는 깊고 아득하고 검은 空間이 無言의 말을 하는 水準에는 이르지 못했다.

    예컨대 ‘깊고 푸른 밤’을 記憶해보자. 배창호 監督은 안성기와 장미희가 當到한 美國 西部의 데스밸리를 다루면서 카메라가 表現할 수 있는 모든 火角을 능란히 使用했다. 그래서 데스밸리가 眞짜 ‘죽음의 溪谷’처럼 여겨졌다. 이명세 監督의 ‘人情事情 볼 것 없다’는 또 어떤가. 李 刑事 活劇의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안성기와 박중훈이 검은 石炭재 위에서 悽絶하게 싸우는 곳이 바로 鐵巖의 選炭場이다. 이 場面에서도 鐵巖은 單純히 검은 背景幕이 아니라 두 사람을 壓倒하는 空間的 힘을 갖고 있다. ‘鐵巖溪谷의 血鬪’가 아쉬웠던 것은 現實의 時空間이 映畫的 時空間으로 置換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카메라가 잡아챌 수 있는, 그리해 觀客의 肺腑를 섬뜩하게 찔러대는, 그런 空間 美學의 密度가 낮았기 때문이다. 鐵巖은 充分히 그것을 提供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발이 흩날리는 鐵巖의 市街地를 걸었다. 鐵巖은 峽谷을 따라 길게 形成된 마을이다. 川邊의 住宅 敷地가 狹小해 집들이 서로를 이고지고 떠받치면서 形成됐다. 一名 ‘까치발’로 불리는 鐵骨 支持대로 房과 房들이, 집과 집들이 서로 잇대고 增築돼 川邊에 늘어선 것이다. 一種의 水上家屋처럼 된 이 까치발 집들이 鐵巖을 象徵한다.

    권태로운 나날을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

    철암동의 한 住宅 壁에 美術 作品이 그려져 있다.

    峽谷으로 스며드는 새 빛

    그 집들을 보면, 더 以上의 어떤 追加 陳述이나 造形 作業이 無色할 만큼의 强力한 幻聽을 듣게 된다. 삶의 무거운 소리들, 都市의 陳腐한 日常이나 권태로운 나날을 無慘하게 짓눌러버리는 무거운 힘을 느끼게 된다. 한때 3萬 名 넘는 사람이 살았던 삶의 痕跡들이다. 그 川邊의 집들을 境界로 삼아 鐵巖驛과 巨大한 選炭場이 있는 溪谷과 그 反對便의 오래된 家屋들이 只今 鐵巖의 무거운 空氣를 떠받친다. 鑛山 産業이 斜陽길에 접어들면서 殷盛했던 鐵巖의 詩歌도 沈滯됐고 더욱이 지난 2002年과 2003年 이 峽谷에 몰아쳤던 颱風 陋舍와 매미의 橫暴에 依해 數百 채의 빈집이 쓰러지고 떠내려가는 일도 겪었다.

    그랬던 鐵巖이 活氣를 되찾고 있다. 봄이 오기 前에 이 鐵巖 市街地 一部가 ‘鐵巖鑛山逆四寸’으로 바뀐다. 市街地 道路를 4車線으로 넓히는가 하면 鐵巖천 一帶의 災害 對備 整備 作業에 依해 鐵巖市場을 中心으로 撤去 作業이 大大的으로 進行되고 있지만 鐵巖을 代表하는 建物 11채는 保存된다. 湖南슈퍼, 漢陽다방, 奉化食堂 等이 오브제 設置美術을 基本으로 다양한 藝術 空間으로 바뀌는 中이다.

    여기에 더해 코레일의 野心作인 白頭大幹 峽谷列車(V-트레인)와 中部內陸 循環列車(O-트레인)가 鐵巖役을 據點으로 삼는다. 週末이면 수많은 觀光客이 列車에서 내려 鐵巖을 둘러본다. 코레일 集計로 지난해 鐵巖役을 利用한 觀光客은 24萬5000餘 名에 達한다. 그中 峽谷列車 利用客이 13萬8000餘 名이고 循環列車度 4萬5000餘 名이나 利用했다. 이 峽谷列車와 循環列車가 運行하기 前에는 한 달에 고작 100名 程度가 鐵巖役을 利用했다. 列車 觀光 德分에 6個 코스의 ‘鐵巖두멧길’도 造成됐고 河川 위에 鐵骨과 나무 기둥으로 垂直 構造物을 세운 뒤 建築했던 鐵巖천의 까치발 建物 11彩度 살아남게 됐다.

    머지않아 擴張해 包裝한 4車線 道路를 中心으로 鐵巖 一帶가 歷史·文化 觀光의 都市로 殷盛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날을 위해 只今 鐵巖의 中心 市街地는 을씨년스럽다. 撤去가 進行되거나 豫告된 建物들은 安全을 위해 閉鎖됐다. 溪谷의 손바닥만한 터마다 자리 잡은 집들도 凶家로 變한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삶은 모르는 일이다. 稀微하지만 分明히 보이는 未來의 새 빛이 鐵巖의 峽谷으로 스며든다. 鐵巖 사람들의 眞짜 血鬪는 이제 始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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