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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푸(豆腐)의 歷史 造作, 비빔밥의 글로벌 鎭火|新東亞

더우푸(豆腐)의 歷史 造作, 비빔밥의 글로벌 鎭火

먹을거리史로 ‘장난’치지 말지어다!

  • 주영하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敎授·民俗學 duruju@aks.ac.kr

    入力 2008-04-05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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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아는 수많은 前近代 時期 飮食은 ‘近代’라는 全혀 다른 패러다임을 通過하면서 ‘鎭火’를 거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옛날부터 存在한 飮食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飮食에 民族의 正統性을 附與하려는 努力은 國家나 民族 사이에서 特定 飮食의 旣得權을 確保해야 한다는 名分 싸움의 하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歷史나 正統性을 따져가며 飮食을 먹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은 趣向에 따라, 或은 새로운 맛을 좇아 倍加된다. 生命과 같은 飮食을 두고 공연히 正統性이나 歷史를 내세워 ‘장난’을 치면 안 된다.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日本의 칭기즈 칸 料理店. 어린 羊고기가 나온다고 宣傳한다.

    2006年 가을, 매우 흥미로운 電話 한 通을 받았다. 電話를 건 사람은 大邱의 某 新聞社 記者였다. 그는 最近 大邱에 ‘칭기즈 칸’이란 이름을 붙인 飮食을 파는 食堂이 몇 군데 생겼는데, 그 食堂에 가면 몽골帝國의 大帝(大帝) 칭기즈 칸이 먹던 飮食이라는 文句가 붙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飮食이 正말 칭기즈 칸이 發明한 것이냐고 물었다.

    이런 電話를 받으면 正말 難堪하다. 飮食文化를 硏究主題로 거의 20年을 沒頭해왔지만 特定 飮食의 歷史를 묻는 質問에는 自身이 없기 때문이다. 世上의 어느 누가 特定 飮食의 歷史나 起源을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까.

    몽골共和國 울란바토르에서 牧畜學을 專攻한 몽골人 바토르氏에게 ‘칭기즈 칸 料理’라는 것이 몽골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는 대뜸 火부터 냈다. 왜 몽골人의 歷史的 英雄인 ‘칭기즈 칸 大帝’의 이름을 飮食에 붙였느냐는 것이다. 그는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이 붙은 飮食이 있다는 事實을 日本에 와서 처음 알았는데 氣分이 相當히 좋지 않았단다. 그러면서 韓國에도 그 飮食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거꾸로 내게 質問을 쏟아 부었다. “羊고기를 즐겨 먹지도 않는 日本人들이 왜 그런 飮食을 먹는지 아느냐”고.

    韓國人은 ‘칭기즈 칸’에 羊고기를 넣지 않는다. 主로 쇠고기를 쓴다. 日本에서는 어떨까.

    日本 ‘칭기즈 칸 料理’ 誕生 背景



    내친김에 인터넷에서 ‘칭기즈 칸 料理’라는 키워드를 쳐보았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興味를 끄는 것은 ‘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에 2003年 1月7日부터 11日까지 連載한 ‘探險團이 찾아 나서다(探險團がたどる), 칭기즈 칸 이야기(ジンギスカン物語)’라는 記事였다. 男女 記者 2名으로 探險團을 組織, 홋카이도를 代表하는 飮食인 ‘칭기즈 칸’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取材한 內容이다. 이 記事와 나의 다른 硏究를 結合시켜 바토르氏 質問에 答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19世紀末 日本은 메이지 維新 以後 養母(羊毛)를 軍服의 素材로 使用했다. 그러나 日本에서는 羊을 키우지 않았으므로 養母를 中國이나 러시아 等地에서 輸入했다. 그런데 1914年 第1次 世界大戰이 勃發하면서 養母 輸入이 쉽지 않았다. 結局 1918年 日本 政府는 養母를 自給하기 위해 ‘緬羊백만두計劃(綿羊百万頭計劃)’이란 政策을 施行했다. 이로부터 홋카이도의 多키카와(川)·삿포로(札幌)·쓰키사무(月寒)와 시코쿠(四國)의 고치(高知) 等地에 專門的으로 羊을 키우는 牧場이 들어섰다.

    羊毛만을 利用하던 牧場에서는 늙어서 쓸모가 없어진 量의 處理에 苦心했고, 羊고기를 食用으로 싼값에 팔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이지 維新 以前까지만 해도 日本 支配層에서는 公開的으로 肉食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이지 維新 以後 ‘文明開花’를 위해서는 西洋 사람들처럼 肉食을 해야 한다는 認識이 널리 퍼졌다. 그때부터 各種 肉食 飮食이 開發됐는데 가장 人氣를 모은 飮食이 一種의 전골人 ‘規那베(牛鍋)’였다. 日本에서 ‘나베(鍋)’라고 하면 普通 우동이 담긴, 鐵帽처럼 생긴 냄비를 가리킨다. 當然히 ‘요나베(羊鍋)’도 만들어졌다. 羊고기는 거의 버리는 고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價格도 매우 쌌다. 그래서 一般 庶民의 肉食에 羊고기가 한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이 바로 日本의 ‘칭기즈 칸’이 誕生하게 된 背景이다.

    富國强兵의 이미지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中國人들의 食事에선 豆腐飮食이 빠지지 않는다.

    ‘요나베’를 ‘칭기즈 칸’이라 부르게 된 緣由는 뭘까. 日本은 1931年 只今의 中國 東北地方에서 滿洲事變을 일으켜 傀儡國家人 滿洲國(滿洲國)을 세운다. 以後 많은 日本人이 中國에 갔다. 知識人들은 ‘滿洲鐵道株式會社’에 所屬됐고 軍人들은 關東軍(關東軍)이 됐다. 事業을 하러 中國에 간 日本人도 많았다.

    1910年代 日本에서는 自身들이 騎馬民族의 後裔라는 主張이 强力한 支持를 받았다. 祖上들이 시베리아에서 말을 타고 日本列島에 왔다는 생각이다. 이런 認識은 韓半島와 大陸侵略을 合理化하는 데 適切하게 利用됐다. 日本의 近代化論者들은 ‘西洋을 배우자’며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人이 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지만, 유럽은 日本을 아시아의 하나로 보았다. 거기에서 생겨난 스트레스가 1930年代 初盤, ‘요나베’에 ‘칭기즈 칸’이란 이름을 붙이는 決定的 背景이 됐다.

    ‘滿洲 開發’을 위해 1920年代부터 꾸준히 中國 東北地域에 進出한 日本人들이 廣闊한 大陸에서 들은 이야기 中에 가장 感銘 깊은 것이 유럽까지 한손에 거머쥔 ‘칭기즈 칸’이었던 것. 앞서 言及한 ‘홋카이도신문’의 連載物에서는 ‘富國强兵’의 ‘日本 近代’와 ‘칭기즈 칸 料理’가 一脈相通한다고 했다. 記事를 쓴 記者는 기름氣가 흐르는 칭기즈 칸 料理를 먹으면 마치 유라시아 大陸을 掌握한 칭기즈 칸이 自身을 품어주는 느낌마저 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羊고기는 쇠고기에 비해 누린내가 많이 나기에 그것을 解決하기 위한 調理法이 必要했다. 홋카이도에서는 칭기즈 칸 요리 調理法으로 羊고기를 各種 과일汁에 재워 하루 程度 절이는 方式이 採擇됐다. 特히 沙果·洋파·橘 汁을 利用하면 매우 단맛의 羊고기 料理를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을 숯불에 구워 먹는 方式이 생겨났다. 이에 비해 1930年代 도쿄의 羊고기 專門店에서는 소금물에 절이는 方法을 썼다. 當時 資料를 보면 단맛보다는 짭짤한 맛이 羊고기에 스며들어 마치 소금구이를 먹는 氣分이 든다고 했다.

    이에 비해 시코쿠의 ‘고치’에서는 쇠로 된 전골냄비에 羊고기를 구웠다. 이 냄비는 1950年代 初盤 ‘고치’의 칭기즈 칸 料理店에서 처음 導入했다고 알려진다. ‘홋카이도신문’ 記事에 따르면 2003年 92歲의 나이로 生存했던 요시모토 겐지(吉本健兒)가 바로 그 主人公이다. 그는 1939年에 滿洲에 가서 事業을 하다 失敗를 거듭하던 中, 終戰으로 中國에 抑留됐다가 1949年에 故鄕인 고치로 돌아왔다. 그 後 滿洲에서의 經驗을 바탕으로 ‘칭기즈 칸나베(成吉思汗鍋)’를 開發, 1953年 싼값의 羊고기 飮食을 販賣하는 食堂을 열었다고 한다.

    요사이 日本에서는 홋카이도나 도쿄, 고치와 같은 都市를 除外하면, 칭기즈 칸 料理를 먹기가 쉽지 않다. 적어도 1950年代까지는 前後의 가난을 解決하는 데 羊고기는 매우 適切한 飮食이었다. 하지만 1960年代 以後 經濟復興의 단맛을 맛본 日本人들이 下級으로 여겨지던 羊고기를 消費할 理由가 없어졌다.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그들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99% 以上의 羊고기를 輸入에 依存하는 日本에서 칭기즈 칸 料理의 消費가 그前만 못한 것은 當然하다.

    韓國의 大邱에서 ‘칭기즈 칸’이란 飮食이 새로운 人氣를 누린다고 하니 疑訝할 따름이다. 지난 20餘 年 동안 韓國의 一部 知識人들은 몽골이 마치 ‘民族의 故鄕’쯤 되는 양, 너무나 熱心히 그들과 韓國人의 닮은 點을 찾아다녔다. 甚至於 몸에 있는 ‘몽골 斑點’과 歷史的으로 元나라와의 交流 經驗을 내세워 無限한 愛情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1920年代 日本에서 流行하던 ‘大陸風’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 ‘칭기즈 칸’ 이름이 붙은 飮食도 韓國式으로 만들어냈으니 그 ‘大陸風’李 侵略的 ‘富國强兵’으로 가지 않을까 두렵다.

    칭기즈 칸 料理는 歷史가 造作된 飮食은 아니다. 이에 비해 特定 飮食의 歷史나 起源을 言及하면서 歷史的 時間을 可能하면 古代로 끌어올리거나, 아니면 그 起源이 아주 먼 곳에서 出發했다는 主張이 飮食의 歷史를 論하는 글에서 亂舞한다. 民族의 歷史的 神祕感을 飮食에 담으려는 이러한 努力들이 지난 100年 사이에 世界 各地에서 일어났다. 特히 世界的으로 流行하는 飮食에 對해서는 더욱 强烈하게 ‘歷史 만들기’ 作業이 이뤄졌다. 代表的인 事例가 바로 中國語로 ‘더우푸(豆腐)’라 불리는 豆腐의 起源에 關한 論議다.

    ‘더우푸(豆腐)’의 歷史 歪曲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全州韓食포럼 行事의 하나로 參席者들이 大型 솥에 비빔밥 材料를 넣어 비비고 있다.

    北宋(北宋) 때 사람인 道谷(陶穀·?~970)은 그의 冊 ‘請移錄(淸異錄)’에서 當時 사람들 사이에 傳해지던 에피소드를 整理했다. 그 冊에 豆腐를 만든 이가 漢나라 때 사람인 회남왕(淮南王) 劉安(劉安·BC 176~123)이라고 적었다. 硫安은 한나라를 세운 乳房(劉邦)의 孫子다. 그가 어떤 緣由에서 豆腐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以後 수많은 冊에서 豆腐는 그의 發明品이라 따라 적었다. 最近까지 아주 當然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豆腐가 漢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면 以後의 文獻에 登場해야 옳지 않은가. 그러나 ‘請移錄’에 豆腐의 이름이 나오기 以前 이와 비슷한 飮食을 紹介한 中國文獻은 아직 發見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 冊을 疑心할 수밖에 없다. 豆腐는 칭기즈 칸 料理와 달리 發明을 爲해 특별한 努力이 必要한 飮食이다. 豆腐는 콩 속의 水溶性 蛋白質을 抽出해 그것을 소금물이나 石灰를 녹인 물, 아니면 葡萄糖 等을 넣어 凝固시켜야 만들어진다. 只今 基準으로 보면 그다지 複雜한 工程이 아닐 수 있지만, 1000餘 年 前 事情은 달랐을지 모른다.

    나는 豆腐의 發明은 중원의 北쪽에 살면서 遊牧을 하던 사람들과 關聯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遊牧民들은 牛乳를 利用해 치즈와 같은 젖酸醱酵 飮食을 많이 만들었다. 그들이 只今의 베이징 南쪽으로 本格 進出하기 始作한 때는 唐나라 以後다. 特히 五代 때는 그들이 只今의 華北(華北) 地域을 掌握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중원 사람들이 모두 南쪽으로 移動하지는 않았다. 結局 遊牧民과 農耕民이 서로 만나는 地點이 只今의 華北이다.

    農耕民들은 擡頭(大豆)를 利用해 간醬이나 된醬을 만들고 穀食의 하나로 使用했다. 그런데 이것을 삶고 빻아서 汁을 만들어 먹는 方法을 遊牧民들이 가르쳐줬다. 그것이 바로 ‘두유’다. 豆乳를 그냥 먹으면 비린내가 많이 나서 소금을 쳐야 했다. 이러한 過程에 自然스럽게 豆腐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豆腐가 流行하기 始作한 時點도 宋나라가 華北을 掌握한 때와 一致하기에 그랬을 可能性은 充分하다. 그래서 北宋 때의 文獻에 豆腐가 처음 登場했고, 以後인 12世紀에 東北아시아 各地에서 豆腐와 關聯된 文獻資料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北宋 때 사람 道谷은 왜 豆腐의 起源을 漢나라 때로 올려 잡았을까. 道谷은 只今의 산시(陝西)省 出身으로 北送 以前에 華北에 있었던 王朝인 後進(後晋) 때 官吏를 지냈다. 그의 性은 元來 黨(唐)이었는데, 後進의 賃金 이름에 같은 글字가 있어 ‘道’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의 處地에서는 중원 사람이 세운 宋나라는 正統性이 있지만 以前의 여러 나라들은 正統性에 問題가 있다고 봤다. 結局 歷史를 거슬러 올라가 한나라가 宋나라와 連結되는 正統性을 지녔다고 생각했고, 漢 高祖의 孫子인 硫安에게 豆腐를 만든 名譽를 안겨줬을 可能性이 크다.

    ‘만들어진 傳統’ 論難

    最近 世界 人文學界에서는 英國의 歷史學者 에릭 홉스봄(1917~ )이 主張限 ‘만들어진 傳統(making tradition)’이란 文句로 인해 많은 論難이 일고 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傳統’ 中에 相當히 많은 內容이 近代에 와서 만들어졌다고 主張한다. 例를 들어 英國 王室의 各種 行事 內容은 19世紀 以前 앵글로색슨의 ‘傳統’을 ‘繼承’하여 只今까지 ‘持續’시킨 것이라고 宣傳하지만, 實際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卽, 19世紀 末부터 20世紀 初盤에 英國 王室의 正統性을 確保하기 위해 當時 사람들이 以前의 여러 資料를 參考해 새로 디자인한 結果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만들어진 傳統’이라 일컬었다.

    19世紀 中盤 以後 登場해 只今까지 이어지는 ‘近代國民國家’가 自身의 正統性을 確保하기 위해 部分的으로 存在한 現象들을 擴大시켜 거짓으로 그 歷史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앞에서 밝힌 豆腐의 起源과 關聯된 論議는 ‘近代國民國家’ 以前에 行해진 ‘만들어진 歷史’였다. 중원의 韓人(漢人)李 세운 宋나라에 正統性을 附與하기 위한 目的으로 거짓된 事實을 記錄에 남겼을지도 모른다. 홉스봄의 主張처럼 近代에 만들어진 傳統이 多數라면 적어도 中國에서는 以前부터 이러한 傾向이 存在했음을 ‘硫安의 豆腐 發明론’을 통해 確認할 수 있다.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日本 가고시마百貨店 내 日本式 ‘돌솥비빔밥안녕’ 賣場.

    成功的인 經濟成長과 베이징올림픽 開催에 들떠 있는 中國人들은 世界의 모든 飮食이 元來 中國에서 發明됐다는 主張을 活潑하게 開陳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考古學 專攻 敎授인 王런샹(王仁湘)은 술을 만드는 누룩곰팡이度 漢나라 以前에 이미 存在했고, 와인도 唐나라 때 그 製法을 中國式으로 完成했다고 主張한다. 唐나라 때에는 와인을 主로 西域(西域)에서 輸入했다. 當然히 그 量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唐 太宗은 이 問題를 解決하기 위해 本人이 直接 와인을 만드는 데 關與했고, 마침내 와인을 만드는 데 成功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皇帝의 欲求를 충족시킨 以後 暫時 流行했을 뿐 와인은 더 以上 全體 社會를 貫通하는 술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일찍이 中國科學史를 整理한 英國의 科學史學者 조지프 니덤(1900~1995)은 中國에서 이뤄진 偉大한 發明은 모두 皇帝의 權力을 維持하기 위한 道具로 利用됐다고 했다. 唐나라 와인 또한 니덤이 말한 ‘皇帝를 爲한 科學’이었던 것이다. 但只 와인이 存在했다는 事實 하나만으로 只今의 現象과 無條件 連結시키기는 어렵다.

    비빔밥과 ‘骨董飯’

    2005年 10月 全州市에서 열린 ‘全州韓食포럼’에 參席해 討論을 한 적이 있다. 全州大 송화섭 敎授가 全州 韓食(韓食)의 歷史를 言及하면서 비빔밥의 發生說에 關한 다양한 論議를 紹介했다. 그는 全州 南門市場에서 市長사람들이 簡單하게 끼니를 解決하던 飮食에서 全州비빔밥이 始作됐다는 主張을 펼쳤다. 그런데 客席에 앉은 外食業 從事者들이 이에 問題를 提起하고 나섰다. 全州비빔밥이 世界的인 名物이 돼가는 中인데, 어떻게 市場飮食에서 出發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抗議였다. 한 外食業體 社長은 적어도 全州비빔밥이 朝鮮時代 임금님이 드시던 飮食이라는 論證 程度는 해줘야 地域大學의 敎授로서 資格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뜯어고쳐서라도 임금님의 水剌床에 特別히 비빔밥이 올라갔다고 해야 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게다. 世界 곳곳에서 流行하고 있는 비빔밥의 正統性을 電柱에서 確保해야 한다는 바람이 그 抗議에 담겨 있으리라. 하지만 全州비빔밥의 起源을 그의 바람처럼 記錄한 歷史 資料는 아직 發見되지 않았다.

    비빔밥의 漢字語는 ‘骨董飯(骨董飯)’이다. 中國 明나라 때 사람 董其昌(董其昌·1555~1636)李 쓴 ‘骨董十三설(骨董十三說)’이란 冊에서는 分類가 되지 않는 옛날 物件들을 통틀어 骨董이라 부른다면서, 이 뜻을 利用하여 여러 가지 飮食을 混合해 調理한 국을 ‘骨銅坑(骨董羹)’이라 하고, 밥에 여러 가지 飮食을 섞어서 익힌 것을 ‘骨董飯(骨董飯)’이라 한다고 했다.

    注目할 點은 ‘骨董十三說’에서 說明한 骨董飯은 韓國의 비빔밥처럼 잘 지어진 밥에 여러 가지 材料를 비벼서 먹는 飮食이 아니라는 事實이다. 그보다는 먼저 여러 가지 材料와 穀物을 함께 넣어 섞은 다음에 밥을 안친다. 아마도 ‘콩나물밥’이 그 冊에서 말한 骨董飯의 한 種類이고, 中國에서 ‘車誤判(炒飯)’이라 하는 볶음밥이 여기에 該當될 듯하다. 韓國의 過去 文獻에서 骨董飯이란 飮食 이름이 적힌 冊은 1890年代에 쓰여 1910年代에야 世上에 알려진 筆寫本 ‘시의전서(是議全書)’가 있다. 이 冊에는 漢字로 ‘骨董飯’이라 쓰고, 한글로 ‘不밥’이라 적었다. 만드는 方法은 다음과 같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고 干納은 부쳐 썬다. 各色 나물을 볶아놓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서 부숴놓는다. 밥에 모든 材料를 다 섞고 깨소금·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雜湯거리처럼 달걀을 부쳐서 骨牌짝 크기로 썰어 얹는다. 완자는 고기를 곱게 다져 잘 재워 구슬만하게 빚은 다음 밀가루를 若干 묻혀 달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床에 醬국은 雜湯국으로 해서 쓴다.”

    分明히 中國의 ‘車誤判’과는 그 材料를 섞는 方法이 다르다. 特히 注目해야 할 點은 익힌 밥과 다른 材料를 먼저 妃嬪 後 그 위에 고명으로 地震 달걀과 완자를 올려서 내놓는다는 데 있다. 전북대에서 日本文化를 가르치는 임경택 敎授는 1990年代 日本 도쿄대에서 博士課程을 밟았다. 留學生活 中 그가 日本 親舊들을 집으로 招請해 비빔밥을 待接했는데, 아무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시의전서’에 나오듯이 미리 모든 材料를 비벼놓았는데, 이것을 본 日本 親舊들이 飮食이라기보다는 쓰레기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규슈의 ‘돌솥비빔밥안녕’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베이징의 솬양러우 飮食店 食卓에 놓인 羊고기 슬라이스.

    2007年 10月, 日本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市 外郭에 있는 한 百貨店 3層 食堂街에서 意外의 光景을 目擊했다. 한 日本 女性이 나무로 짠 四角桶 뚜껑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食器를 들고 食卓에 앉았다. 무슨 飮食인지 살펴보니 韓國에서 자주 보던 돌솥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흰 달걀 하나와 비닐 팩에 담긴 고추醬도 놓였다. 그 女性은 너무나 익숙하게 달걀을 깨서 돌솥에 넣고 고추醬도 뿌렸다. 그리고 韓國人들이 使用하는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들고 돌솥 안의 밥과 材料를 비볐다.

    아, 이럴 수가! 1990年代만 해도 비벼놓은 비빔밥을 쓰레기에 比喩하면서 입에 대지도 않던 日本人들이 어떻게 스스로 비벼서 비빔밥을 먹을 수 있는가. 더욱이 숟가락을 使用하지 않는 그들이 너무나 익숙하게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다니. 나는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實例를 무릅쓰고 그 맛에 對해 물었다. 그의 對答은 簡單했다. “맛있다.” 이름이 ‘아유미’라는 그는 아직 韓國에 가본 적이 없단다. 하지만 가고시마 市內에 있는 韓國飮食店에서 이 비빔밥을 먹어본 以後, 한 달에 한 番 程度는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밥과 飯饌을 함께 ‘비빈다’는 行動이 異常하게 생각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돌솥에서 지글지글 익는 밥에 各種 飯饌과 날달걀, 그리고 매운 고추醬을 함께 비비는 그 自體가 매우 재미있단다. 그렇다면 ‘카레라이스’를 먹을 때도 이렇게 비비면 맛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아유미는 難色을 표했다. 어떻게 카레라이스를 비빔밥처럼 비빌 수 있느냐며, 그것은 먹을 수 없단다. 日本人들은 카레라이스나 덮밥을 먹을 때 韓國人처럼 마구 비비지 않는다. 접시에 담긴 그 狀態에서 마치 칼로 豆腐를 자르듯 ‘스푼’으로 區劃을 지어가며 먹는다.

    내친김에 韓國의 日本飮食店에서는 ‘膾덮밥’이란 것을 販賣하는데, 그것도 一種의 ‘사시미 비빔밥’이라고 說明해주고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놀라워하며 어떻게 ‘사시미’로 비빔밥을 만들 수 있느냐고 强하게 抗辯했다.

    2000年 여름, 日本 오사카에서 韓國飮食을 專門的으로 體驗하기 爲한 旅行段이 서울에 왔다. 그들이 金浦空港에 내려서 가장 먼저 맛본 飮食은 膾덮밥이었다. 그들은 하얀 밥 위에 올려진 ‘사시미’에 놀라워했고, 거기에 醋고추醬을 뿌려 마구 비벼 먹어야 한다는 說明에 窒塞을 하며 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솥비빔밥은 膾덮밥과는 分明히 다른 느낌을 준다. 이윽고 나도 이 비빔밥을 注文해서 먹어보았다. 콩나물·고사리·시금치·김치·쇠고기구이 等의 飯饌이 올라간 模樣이 韓國에서 보던 돌솥비빔밥 그 自體다. 더욱이 뜨거운 돌솥에서 지글지글 익는 비빔밥은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韓國人 입맛에는 그다지 優秀한 돌솥비빔밥이라 보기 어렵다. 特히 날달걀이 섞이면서 밥이 粥처럼 돼버렸다.

    이 비빔밥을 販賣하는 食堂의 商號는 ‘이시야키비빔밥安寧(石燒ビビンバ あんにょん)’이다. 체인店으로 運營되는 이 食堂의 本社는 규슈의 후쿠오카(福岡)에 있다. 電話로 問議하니 社長도 職員도 모두 日本人이라고 한다. 1997年부터 外食業을 始作했는데, 2005年에 韓國 大衆文化와 飮食이 流行해서 ‘안녕’이란 브랜드를 만들고는 各種 돌솥비빔밥은 勿論이고 冷麵까지 販賣한다고 했다. 돌솥과 숟가락, 고추醬은 韓國에서 輸入하지만, 나머지 材料는 모두 日本産을 쓴다. 通話한 職員은 규슈에만 店鋪가 16곳 있고, 규슈 外의 地域엔 50곳이 넘는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빔밥에 들어가는 콩나물도 규슈의 農家에서 直接 栽培한 것을 購入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가고시마 슈퍼마켓에는 韓國式 비빔밥을 調理하는 데 쓰이는 콩나물을 따로 팔고 있었다. 그 맛도 韓國의 콩나물에 버금갈 程度다.

    前近代 時期에도 마찬가지였지만, 近代 以後 商業化한 飮食은 消費者의 趣向에 맞추면서 그 趣向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無限한 ‘鎭火(進化·evolution)’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뉴욕이나 베이징이나 도쿄에서 만날 수 있는 韓國 비빔밥은 그 進化의 最尖端에 있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뉴욕의 韓國飮食店에서도 돌솥비빔밥이나 鐵板비빔밥의 人氣는 대단하다고 한다. 中國 베이징에서도 韓國飮食店에서 販賣하는 돌솥비빔밥의 人氣는 斷然 김치를 앞선다.

    鎭火해도 變치 않는 ‘元宵’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近代에 誕生한 스시는 1990年代부터 回戰스시로 進化했다.

    韓國에서 돌솥비빔밥이 流行하기 始作한 때는 全州비빔밥이 全國的으로 人氣를 끈 時期와 같다. 1981年 서울 明洞에 進出한 全州의 ‘全州中央會館’에서 全羅北道 長水에서 生産된 곱돌 그릇에 비빔밥을 담아내기 始作하면서 돌솥비빔밥이 全國的인 名聲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全州中央會館 側은 1969年에 ‘全州곱돌비빔밥’을 電柱에서 販賣했다고 밝힌다. 眞僞는 더 따져봐야겠지만, 地域의 名物인 곱돌을 利用해 새로운 비빔밥을 만들어낸 創造力은 높이 살 만하다.

    元來 비빔밥은 床에 내기 前에 아예 비벼놓거나, 아니면 鍮器나 自己로 만든 큰 양푼이나 국 대접에 온갖 材料를 담아서 냈다. 只今도 全州에 있는 韓食堂에서는 돌솥보다 遺棄에 담아서 販賣하는 집이 제법 많다. 遺棄 대접에 遺棄 수저를 들고 비빔밥을 먹으면 왠지 地位가 格上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돌솥비빔밥에 비해 ‘재미’가 적은 것도 事實이다. 1990年代 以後 三겹살이나 甚至於 매운湯을 먹고 난 後에 남은 양념에 김치와 참기름을 넣고 卽席 볶음밥을 만들어 먹는 韓國人이고 보면, 直接 飮食을 만들어 먹는 재미가 돌솥비빔밥 流行을 이끈 祕訣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變化를 ‘비빔밥의 鎭火’라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鎭火’란 말 그대로 새로운 個體들이 스스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넣은 古典的인 비빔밥에서 最近에는 멍게를 주된 材料로 만든 멍게비빔밥까지, 비빔밥 種類를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程度다. 여기에 밥뿐만 아니라 국수를 고추醬에 妃嬪 비빔국수나 낙지볶음에 밥을 넣고 비빈 것까지 趣向에 따라 만들기만 하면 새로운 비빔밥이 誕生한다.

    그러나 生物의 進化나 文化的 進化에는 반드시 變하지 않는 ‘元宵’가 있게 마련이다. 비빔밥 進化의 調理學적 最小 元素는 끼니가 되는 밥에 양념을 넣고 ‘비빈다’는 데 있다. 萬若 밥과 여러 가지 材料를 뜨거운 鐵板에 올려놓고 볶으면 그것은 비빔밥이 아니라 볶음밥이다. 앞에서 말한 卽席 볶음밥이 비빔밥의 範疇에 들어가지 못하는 理由가 여기에 있다. 돌솥비빔밥 亦是 너무 뜨거우면 볶음밥이 된다. 볶음밥으로 가기 前에 돌솥의 뜨거운 기운이 사라지기에 비빔밥의 資格을 維持한다.

    變하지 않는 비빔밥의 또 다른 元素는 밥과 함께 섞이는 材料들이다. 그것이 肉膾든 구운 불고기든 아니면 나물이든 밥과 어울려 上昇作用을 할 때만 비빔밥은 비빔밥답다. 이때의 核心은 쌀밥이다. 비빔밥의 副材料는 團地 밥맛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存在하는 附屬物에 지나지 않는다. 쌀밥 맛이 좋지 않으면 비빔밥 맛도 決코 좋을 수 없다. 이런 面에서 비빔밥은 적어도 10가지 以上의 飮食材料가 들어가서 綜合된 結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營養學的 價値가 대단하다는 事實은 두말할 必要도 없다.

    아울러 各種 飯饌의 複合的인 맛이 쌀밥의 낱알에 붙어서 입속에 가득할 때 침에서 나오는 아밀라아제(amylase)가 비빔밥을 더욱 달게 만들어준다. 當然히 고추醬도 쌀밥과 飯饌 다음에 오는 양념에 지나지 않는다. 고추醬 代身 ‘朝鮮간醬’을 넣어도 밥과 飯饌만 맛있으면 一品의 비빔밥 맛이 나온다. 이런 意味에서 비빔밥의 歷史的 悠久함이나 營養學的 優秀性을 밝히려고 너무 애쓸 必要는 없다. 그보다는 進化의 基本 元素를 分明히 알고, 다양한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努力이 더 重要하다.

    書頭에 나는 日本의 칭기즈 칸 料理가 냄비를 利用한 나베(鍋) 飮食에서 進化한 飮食이라고 밝혔다. 韓國에도 알려진 日本의 ‘샤브샤브’ 亦是 中國의 ‘솬양러우(?羊肉)’에서 進化한 飮食이다. 1952年에 오사카의 한 飮食店 主人이 開發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1940年代 初盤에 中國 滿洲에서 軍服務를 했는데, 그때 솬양러우를 알았다. 그 後 歸國해 神仙爐와 비슷한 냄비를 만들고, 여기에 쇠고기를 넣어 익혀 먹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샤브샤브다. 샤브샤브는 국물이 끓는 소리에 着眼해 만들어낸 말이다.

    베이징 겨울 風俗 ‘솬양러우’

    事實 솬양러우에 쓰이는 냄비는 只今의 中國語로는 ‘훠궈(火鍋)’라고 한다. 中國 北齊(北齊·550~577)의 歷史書인 ‘魏書(魏書)’에는 “銅으로 만든 그릇으로 입이 넓고 가운데가 비었는데, 이름을 洞贊(銅?)이라 부른다. 얇고 가벼워서 불에 飮食을 익히기 쉽다”고 했다. 그러나 훠궈가 本格的으로 流行한 것은 淸나라에 들어와서다. 淸나라 위안메이(袁枚·1716~1797)가 쓴 ‘水原食單(隨園食單)’(1715)에는 훠궈가 當時 民間뿐 아니라 宮中에서도 많이 使用된다고 적었다. 甚至於 淸나라의 乾隆(乾隆) 皇帝는 530個의 훠궈를 차린 宮中宴會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베이징 사람들이 하듯이 얇게 썬 羊고기 조각을 펄펄 끓는 국에 넣고 살짝살짝 데쳐 먹는 方式은 冷凍庫의 登場과 함께 새로 생겨났다. 中國의 東北地域에서는 20世紀에 들어와서도 겨울에 얼어버린 羊고기를 可能한 限 얇게 썰어서 솬양러우를 만들어 먹었다. 그렇지만 都市에 살던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羊고기를 冷凍시켜 슬라이스 機器에 넣고 아주 얇게 썬 뒤 끓는 국물에 데쳐 먹는 솬양러우가 베이징 市民들의 입맛을 完全히 사로잡은 것은 1990年代 中盤부터다. 改革開放 政策의 成功으로 주머니 事情이 좋아진 베이징 사람들이 값싼 羊고기를 사서 집에서 簡便하게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솬양러우는 베이징의 겨울 風俗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世界人이 즐겨 먹는 日本의 ‘스시’ 亦是 冷藏庫의 登場과 함께 本格的으로 流行한 飮食이다. 1930年代가 되어서야 日本人 中에서 只今과 같은 스시를 먹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 點은 日本人 學者 多數가 認定하는 事實이다. 그런데 日本 스시의 起源을 두고 日本 農林水産省 食品綜合硏究所에서 食品學을 硏究한 적이 있는 요시카와 세이지(吉川誠次)는 그 ‘原形’李 泰國과 미얀마의 北쪽에 있다는 主張을 펼친다. 그곳에서는 只今도 물고기를 잡아서 穀物과 소금으로 貯藏하는데, 그것이 日本에서 말하는 스시의 前身인 ‘나레즈시(なれずし)’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寒心한 ‘援助’ 論爭

    하지만 내가 硏究한 바로는 스시의 原形인 나레즈市는 中國의 古代 文獻에도 곧잘 登場한다. 漢字로 ‘害(?)’라고 적은 飮食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只今도 먹을 수 있는 韓國의 가자미食醢와 비슷하다. 生鮮이나 肉고기를 오랫동안 貯藏하기 위한 方法으로 考案된 食醢(食?) 系統의 飮食은 穀食을 主食으로 먹으면서 生鮮이나 肉고기를 貯藏할 必要가 있던 地域에서 自然發生했다. 그런데 왜 요시카와라는 學者가 生鮮食醢의 一種인 나레즈市의 原形을 굳이 東南아시아에서 찾았을까.

    2000年 國內 한 放送 프로그램에도 紹介됐듯, 韓國人 學者 中에는 나레즈市價 韓半島의 가자미食醢에서 出發했다고 主張하는 이도 있다. 萬若 그의 主張을 따른다면 日本 스시의 元祖는 韓半島에 있다는 結論이 나온다. 요시카와는 이에 對해 問題를 提起하고 東南아시아와 中國 윈난(雲南)에서 나레즈市의 元祖를 찾아낸 것이다. 참 寒心한 일이 아닐 수 없다. 萬若 나레즈市의 援助가 韓半島에 있다는 主張을 펼친 韓國人 學者에게 가자미食醢의 ‘害’가 古代 中國의 文獻에도 登場한다고 하면 그는 어떻게 答할까.

    더우푸(豆腐)의  역사 조작, 비빔밥의 글로벌 진화
    주영하

    1962年 慶南 馬山 出生

    서강대 史學科 卒業, 漢陽大 碩士 (文化人類學), 中國 中央民族大學 博士(民族學)

    現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民俗學 專攻 副敎授

    日本 가고시마臺에서 규슈 地域 飮食文化 現地調査 進行 中

    著書 : ‘飮食戰爭 文化戰爭’ ‘中國 中國人 中國飮食’ ‘飮食 속의 그림, 그림 속의 歷史’ 等


    이처럼 우리가 아는 수많은 前近代 時期의 飮食은 ‘近代’라는 全혀 다른 패러다임을 通過하면서 ‘鎭火’를 거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옛날부터 存在했던 飮食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飮食에 民族의 正統性을 附與하려는 努力은 國家나 民族 사이에서 特定 飮食의 旣得權을 確保해야 한다는 名分 싸움의 하나로 생겨났다. 遺棄에 담은 비빔밥은 ‘傳統’이고 돌솥비빔밥은 ‘假짜’라는 發言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가 모두 存在할 수밖에 없으며, 同時에 더욱 다양한 비빔밥이 생겨나야 한다.

    사람들은 決코 歷史나 正統性을 따져가며 飮食을 먹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은 趣向에 따라, 或은 새로운 맛을 좇아서 倍加된다. 공연히 生命과 같은 飮食을 두고 正統性이나 歷史를 내세워, ‘장난’을 치면 안 된다. 이런 面에서 나는 ‘더우푸’의 造作된 歷史를 非難한다. 이에 비해 날마다 地球村 여기저기서 스스로 進化를 거듭하는 韓國의 비빔밥에 熱烈한 讚辭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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