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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과 宮合 맞는 穩健改革派가 大勢 軍部 掌握 못하고 官僚社會 抵抗에 直面|新東亞

韓國과 宮合 맞는 穩健改革派가 大勢 軍部 掌握 못하고 官僚社會 抵抗에 直面

中國 시진핑 政權 大解剖

  • 홍순도 | 아시아투데이 베이징 特派員 mhhong1@daum.net

    入力 2014-02-20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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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月이면 시진핑 中國 國家主席이 主席 자리에 오른 지 1年이 된다.
    • 中國은 韓國의 第1 交易對象國이다.
    • 南北 問題도 中國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 最近 朴槿惠 大統領-시진핑 主席의 關係가 더 각별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中國은 如前히 北韓의 盟邦이며 美國과 緊張關係에 놓여 있다.
    • 韓國은 시진핑 政權에 對해 좀 더 알 必要가 있다.
    한국과 궁합 맞는 온건개혁파가 대세 군부 장악 못하고 관료사회 저항에 직면
    資本主義와 社會主義는 거의 相剋이다. 韓國과 中國이 修交한 지 22年이 되기는 했으나 兩國 關係가 썩 좋지 않아도 別로 異常할 것이 없다. 더구나 中國은 얼마 前까지만 해도 北韓과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였다. 脣亡齒寒(脣亡齒寒·입술이 다치면 이가 아프다는 意味)이라는 말까지 나올 程度였다. 이때만 해도 韓國과 中國은 運命的으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이로 認識됐다.

    그러나 只今은 狀況이 變한 것 같다. 兩國은 體制 差異와 北韓 變數에도 꽤 좋은 關係를 維持한다. 이는 어렵지 않게 證明된다. 시진핑(習近平·61) 中國 共産黨 總書記 兼 國家主席은 2月 初 朴槿惠 大統領의 62回 生日을 祝賀하는 親筆 書信을 公式的으로 보냈다. 前例가 없는 일이었다.

    中國은 1月 末엔 헤이룽장(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役에 安重根記念館을 開館했다. 朴槿惠 大統領의 安重根 標識石 設置 要請에 통 크게 和答한 것이다. 이를 보면 兩國 關係에 새 地平이 열린다는 分析도 可能하다. 只今의 中國 政權은 ‘親한(親韓) 政權’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더불어 中國의 가슴과 머리에 있는 北韓의 자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할 수 있다.

    中國의 現 政權이 이처럼 韓國에 比較的 友好的으로 다가오는 것은 괜히 韓國이 좋아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 나름의 理由가 있다. 무엇보다 韓國의 政治的, 經濟的 重要性이 부쩍 커진 點과 無關하지 않다. 여기에다 ‘美國의 同盟國인 韓國이 中國의 安保를 威脅한다’는 固定觀念이 많이 흐려진 點도 影響을 준다. 韓國을 ‘對話가 되고 信賴할만한 이웃 國家’로 認識하기 始作한 것이다. ‘日本과 달리 周邊國에 弊를 끼치지 않으면서 文化的으로 洗練된 나라’로 韓國의 이미지를 肯定的으로 그리기도 한다. 또 理念보다는 黨과 國家의 發展과 生存에 더 價値를 附與하는 中國 指導部의 實用主義 스타일과도 密接한 關係가 있다. 다시 말해 韓國과 잘 지내는 것이 여러 面에서 自國에 훨씬 좋다는 自覺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이념적이면 最高 레벨 못 올라”



    시진핑 政權이 이처럼 以前의 中國 政權과는 달리 韓國에 柔軟하다는 點을 念頭에 두면서 시진핑 政權의 面面을 살펴보기로 하자. 시진핑 政權의 核心人士들은 시 主席과 7名의 黨 政治局 常務委員, 黨政 最高 指導部, 人民解放軍 首腦部로 構成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權力 序列 1位인 시 主席의 境遇, 그는 1949年 共産 中國 建國 以後에 태어난 이른바 黨 第5世代로 불린다. 黨政 元老들의 後世를 意味하는 태자당(太子黨)은 그의 政治的 故鄕이다. 그는 1953年 副總理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어린 時節 아버지의 後光을 全혀 입지 못했다. 태자당으로 누려야 할 特權도 거의 經驗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反對라고 할 수 있었다. 1966年 勃發한 文化大革命으로 인해 學業을 中斷한 채 故鄕인 산시(陝西)省 옌안(延安)의 輛자허(梁家河)로 내려가 無慮 7年 가까운 歲月 동안 隱忍自重의 勞動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勞動은 無意味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精神的으로 成熟하게 만들었다. 밑바닥 生活을 할 수밖에 없는 社會的 弱者들의 苦衷을 理解할 수 있게 됐다. 經濟 全般에 對해서도 눈을 뜨도록 만들었다. 그가 名文 칭화(淸華)大學을 卒業한 다음 1983年부터 2007年까지 24年 동안 허베이(河北), 푸젠(福建), 貯藏(浙江)城과 상하이(上海)市 等을 옮겨 다니며 成功한 地方 指導者로 活動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때의 經驗 德分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實用主義的인 性向이 剛하다. 社會主義 根本主義를 追求하는 强勁 左派라고 하기 어렵다. 非理 嫌疑로 無期懲役을 宣告받고 收監 中인 보시라이(薄熙來·65) 前 충칭(重慶)市 書記가 在任 時節 共産革命 노래 부르기를 主唱한 것과 比較된다. 그러나 이런 시진핑도 黨과 國家가 이슈가 되면 확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多少 國粹主義的 態度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중궈멍(中國夢·富强한 中國이 되고자 하는 꿈)’이나 ‘위저우멍(宇宙夢·宇宙 强國을 向한 꿈)’이라는 常套的 用語를 달고 다닌다. 이 亦是 그의 ‘黨과 國家 于先’ 傾向性을 反映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궁합 맞는 온건개혁파가 대세 군부 장악 못하고 관료사회 저항에 직면


    그는 2012年 11月 第18期 全國代表大會에서 總書記에 就任하자마자 改革에 積極 나섰다. 이 亦是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改革에 나서지 않으면 黨과 國家의 生存이 쉽지 않다고 自覺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腐敗한 黨政 管理는 파리든 虎狼이든 때려잡는다”는 말을 대놓고 한 것은 그다지 異常할 것도 없다.

    그는 最近 소치 冬季올림픽 開幕式 參席次 러시아에 들렀다. 現地 言論 인터뷰에서 “맛있는 고기는 이제 다 먹었다. 앞으로는 딱딱한 뼈를 씹을 次例다”라고 했다. 이 말 亦是 旣存 脈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쉬운 改革은 끝났으니 向後 어려운 改革에 나서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實用主義的 穩健 改革派’로 分類할 수 있다

    權力 序列 2人者인 리커창(李克强·59) 總理는 스펙만 보면 市 主席보다는 보시라이 前 충칭 書記에 가깝다. 베이징대학을 卒業한 直後인 1982年부터 이념적 色깔이 濃厚한 共産主義靑年團에 들어가 無慮 16年 동안 活躍했다. 1993年부터 5年 동안 中央서기처 第1 書記를 지냈다.

    하지만 그는 1998年 공청團을 나온 以後 ‘너무 强性’이라는 自身에 對한 偏見을 씻어내기 始作했다. 허난(河南), 랴오닝(遼寧)省의 成長과 書記를 次例로 歷任하면서 民生經濟에 注力하는 等 理念의 그림자를 자연스럽게 벗어던진 것이다. 2008年 3月 11期 全國人民代表大會를 통해 經濟를 總括하는 常務副總理에 就任한 以後 더욱 그랬다. 法學을 專攻한 博士임에도 테크노크라트(技術 官僚) 出身인 것처럼 積極的으로 經濟에 올인했다. 硬直된 左派的 이미지가 全혀 없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시 主席과 ‘實用 穩健 改革’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장더장과 張成澤의 因緣

    韓國의 國會에 該當하는 全國人民代表大會의 常務委員長人 權力 序列 3位 장더장(張德江·68)도 비슷한 性向이다. 장더장은 젊은 時節 强勁 左派가 될 素地가 多分한 經驗을 主로 쌓았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는 北韓과 國境을 마주한 지린(吉林)省의 옌볜(延邊)大學 朝鮮語科를 나왔으며 1978年 30代 初盤 北韓의 김일성종합대학 經濟學科에 遊學, 數年 동안 主體思想의 影響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留學을 마친 1980年 以後 줄곧 지린省의 黨政 主要 補職을 거치면서 中國의 對北 關係 强化와 交流에 積極 나서기도 했다. 지린省의 書記가 된 1995年부터는 아예 中國 黨政을 代表하는 親北 實權者로 꼽혔다. 當時 그의 파트너가 金日成綜合大學 同窓이며 韓國과 中國의 張氏 性을 共有한 張成澤이었다. 韓國 政府가 이 무렵 中國의 高位級 人物 中에서 다른 人事는 몰라도 장더장만큼은 親韓派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예 지레斟酌해 分類한 것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이렇게 社會主義 理念에 忠實했고 北韓과 가까웠던 그도 1998年부터 2007年까지 中國 經濟를 代表하는 地域인 저장省과 광둥(廣東)省 書記를 歷任하면서 相當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改革·開放을 더욱 加速化해야 할 必要性을 切感했다. 또 ‘너무 이념적이면 最高 레벨의 指導者가 되기 어렵다’는 點을 깨닫게 됐다. 以後 그는 左右 均衡이 꽉 잡힌 中道 性向의 人物로 確實하게 자리를 잡았다. 只今은 더 말할 나위 없다. 一部에서는 그를 ‘장쩌민(江澤民·88) 前 國家主席의 政治的 아들’이라는 意味에서 ‘장더장(江的張·장쩌민의 腸)’으로도 부른다. 그는 든든한 政治的 背景에다 中道로의 轉向을 통해 시진핑 政權의 核心으로 자리했다고 할 수 있다.

    以外 權力 序列 4~7位인 위정성(兪正聲·69) 政治人民協商會議 主席, 류윈산(劉雲山·67) 黨 中央서기처 西紀 兼 중앙당교 校長, 왕치산(王岐山·66) 黨 中央紀律檢査委員會 書記, 장가오리(張高麗·68) 商務部總理도 크게 다르지 않다. 程度의 差異는 있겠으나 大體로 이념적인 色깔이 옅은 中道 性向이다. 左派와는 일정하게 距離를 둔다. 시 主席과 코드가 맞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 7名의 常務委員을 除外하면, 25名 定員의 政治局을 構成하는 나머지 黨政 高位級 人士들 中 汪洋(汪洋·59) 副總理, 후춘화(胡春華·51) 광둥省 書記, 쑨정차이(孫政才·51) 충칭市 書記가 이런 性向의 人物들로 꼽힌다. 이들은 2017年 열리는 第19次 黨 全國代表大會에서 常務委員會에 進入해 次期 黨政 指導者로 浮上할 것이 確實視된다. 이는 能力도 能力이지만 시 主席과 一致하는 性向과도 無關하지 않다.

    이러한 分析 結果에 따르면, 시진핑 政權에선 ‘實利를 優先하는 穩健 改革派’가 大勢를 掌握했다고 規定할 수 있다. 이러한 路線은 社會主義 理念을 優先하는 路線과 比較할 때 韓國과 宮合이 훨씬 잘 맞는 便이다. 시진핑 政權이 韓國과 그 어느 때보다 좋은 關係를 維持하는 것엔 이런 背景이 있다. 또한 시진핑 政權이 穩健 改革派를 次世代 走者로 育成하는 點으로 보아, 시진핑 政權 以後의 韓中 關係도 그리 어둡지 않을 것으로 展望된다.

    한국과 궁합 맞는 온건개혁파가 대세 군부 장악 못하고 관료사회 저항에 직면

    2013年 6月 27日 中國 베이징 人民大會堂 앞에 서 있는 박근혜 大統領 儀典車輛.



    “天下大亂 일어날 수도”

    한국과 궁합 맞는 온건개혁파가 대세 군부 장악 못하고 관료사회 저항에 직면

    오바마·시진핑 頂上會談을 다룬 ‘이코노미스트’ 表紙.

    시 主席을 主軸으로 한 中國 黨政 指導部의 性向이 크게 다르지 않은 事實은 ‘中國이 相當히 一絲不亂하게 움직인다’는 點을 말해준다. 하지만 黨政軍의 內部를 細密하게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派閥이 분명하게 存在하며 이들 間 헤게모니 掌握을 위한 暗鬪가 없지 않다.

    于先 黨政의 컨트롤타워인 黨 政治局 常務委員會를 들여다보면 이런 事實을 實感할 수 있다. 外見的으로 태자당人 시 主席이 같은 派閥인 위정성 정인협 主席과 왕치산 中央紀律檢査위 書記의 後援을 등에 업고 權力을 掌握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權力 序列 2位인 리커창 總理는 후진타오(胡錦濤·72) 前 主席 系列인 공청團의 核心 指導者여서 시 主席과는 결이 다르다. ‘리틀 후진타오’라는 別名을 가진 野心家인 리 總理가 시 主席에게 繼續 납작 엎드릴 것이라고 斷定할 수는 없다. 機會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공청團 이름을 앞세워 黨政의 헤게모니 掌握에 나설 可能性도 없지 않다.

    또한 장더장 全人代 常務委員長은 장쩌민 前 主席이 이끌던 상하이방(上海幇)의 直系다. 상하이방의 相當한 影響力을 勘案하면 시 主席이 黨政의 全權을 完璧하게 掌握했다는 말은 하기 힘들다.

    류윈산 中央서기처 書記와 장가오리 常務副總理의 存在도 變數가 아닐 수 없다. 流 書記는 어느 派閥에도 붙을 수 있는 無色無臭의 無黨派로, 張 常務副總理는 상하이방 系列로 分類된다. 시 主席의 處地에서는 向後 이들의 存在도 負擔이 될 수 있다. 政治局으로 範圍를 넓히면 더욱 複雜해진다. 常務委員 7名을 除外한 나머지 18名은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團 歲 派閥로 거의 正確하게 黃金分割이 돼 있다. 시 主席은 이 中 自己 派閥인 태자당 쪽만 確實하게 틀어쥔 셈이다. 黨政의 헤게모니 掌握을 위한 最高 指導者들 間의 물밑 暗鬪는 分明히 存在한다고 斷言해도 괜찮지 않나 싶다.

    中國에서 權力의 또 다른 한 軸은 軍部다. 只今의 中國을 建國한 마오쩌둥은 “權力은 銃부리에서 나온다”고 일찍이 喝破한 바 있다. 그런데 軍部도 狀況은 비슷하다. 公式的으로 230萬 名에 達하는 人民解放軍을 指揮하고 核武器를 統制하는 最高 司令官은 말할 것도 없이 中央軍事委員會 主席인 시진핑이다. 權威에 挑戰할 勢力이 있어서는 안 되는 絶對的 位相이다. 게다가 그는 黨 總書記에 就任한 以後 10餘 次例에 이르는 將星 人事를 통해 自身의 側近을 軍 要職에 많이 앉혔다.

    類위안(劉源·63) 中央軍事委 寵厚根部 政治委員, 류샤五臟(劉曉江·65) 海軍 政治委員, 류줘밍(劉卓明·60) 海軍 中將, 親웨이張(秦衛江·58) 난징軍區 副司令官 等 相當數의 將星이 시 主席의 確實한 側近이다. 언뜻 보면 軍部 내 詩 主席의 權力은 搖之不動이다.

    하지만 軍 內部를 仔細하게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軍部 內에 主席을 지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人脈을 어렵지 않게 發見할 수 있다. 于先 장쩌민 人脈이 相當하다. 祕書室長에 該當하는 中央軍事위 主席辦公室 主任을 지낸 者팅안(賈廷安·62) 上場을 비롯한 高位 將星 10餘 名이 장쩌민系다. 이들은 시진핑 政權 出帆 以後에도 눈을 시퍼렇게 뜬 채 如前한 影響力을 發揮한다. 그것도 大部分 最高 階級에서 말이다.

    후진타오 人脈도 無視하기 어렵다. 亦是 祕書室長 格인 國家主席 辦公室 主任을 지낸 千스쥐(陳世炬·51)가 2012年 10月 中央軍事委 辦公廳 主任으로 옮겨가면서 친(親) 후진타오 性向의 將星을 많이 育成해놓았는데 이들이 아직 健在하다. 장쩌민 人脈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有事時 이들 軍部 내 兩大 派閥이 목소리를 내기 始作할 境遇 軍部 內 葛藤이 일어날 可能性이 없지 않다. 결론적으로, 시진핑 主席이 完璧하게 軍部를 掌握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셈이다.

    中國의 權府(權府)는 겉보기엔 一絲不亂하게 움직이지만 實際로 그렇지 않다. 시진핑 政權이 當面한 懸案에서 이런 點이 잘 나타난다.

    政治 分野의 境遇 經濟가 發展하면서 政治改革 要求가 커진다. 여기에 適切하게 對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現實이다. 第18次 黨 大會 直後인 2012年 12月 著名한 學者와 法律 專門家 73名은 政治改革 要求 書信을 黨 中央에 보냈다. 우리의 ‘連判狀 돌리기’에 該當하는 公開行動이 나올 程度로 切迫하다는 이야기다. “向後 中國에서 25年 前 수많은 示威參加者가 숨진 톈안먼(天安門) 事件이나 中東의 재스민 革命 같은 政治的 激變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海外의 警告도 나온다.

    經濟 分野에선 골치 아픈 問題가 더 많다. 數億 名의 中國人은 如前히 絶對貧困狀態다. 景氣鈍化, 靑年失業度 深刻하다. 高速成長에 따른 環境汚染은 當場 中國人의 숨筒을 죄여온다. 하나하나가 簡單한 問題가 아니다. 經濟의 體質을 改善하면서 最小限 7% 中盤臺의 成長도 일궈내야 한다. 글로벌 經濟危機가 繼續되는 狀況이어서 쉽지 않다.

    社會 分野의 懸案도 泰山 같다. 黨政 官吏들의 不淨腐敗가 極甚하다. 貧富隔差, 地域隔差, 都農隔差에 依한 不滿과 葛藤이 들끓는다. 여기에 테러와 焚身 事件이 頻發하는 少數民族 問題도 있다. 예부터 中國은 民心을 重要하게 생각하는 나라였고 大規模 民亂으로 有名했다. 하나라도 雷管이 제대로 터지는 날엔 天下大亂이 일어날 수도 있다.

    “改革? 正말 疲困하다”

    시 主席은 이런 政治, 經濟, 社會 問題를 解決하거나 緩和하기 위해 改革을 作心하고 推進한다. 그러나 黨政 官僚들은 積極的으로 改革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 같지 않다. 시진핑 政權 出帆 1年 남짓인 時點에서 官僚들은 되레 改革 疲勞感을 느낀다고 한다.

    시 主席은 줄곧 不淨腐敗 一掃를 부르짖었다. 以後 公金을 使用한 會食, 豪華 接待, 賂物性 金品 收受 같은 慣例가 鐵槌를 맞았다. 最近 離任한 駐中 韓國大使館의 한 高位 外交官 P氏는 다음과 같이 中國 官僚 社會의 雰圍氣를 傳한다.

    “平素 交流하던 中國의 高位 官僚는 내가 떠나는 것이 아쉽다면서 點心을 사겠다고 했다. 나갔더니 過去와는 너무나 다르게 待接이 素朴했다. 그 官僚도 未安했는지 ‘理解해달라. 只今은 狀況이 이렇다. 잘못하다가는 목이 날아간다. 正말 疲困하다’고 말했다. 이게 改革의 現實인 것 같다.”

    只今 雰圍氣로는 改革이 시 主席 在任 期間 내내 이어질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만 되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빈 수레만 搖亂한 꼴이 되면 社會 全般의 疲勞感과 失望感은 極甚하게 된다. 안 건드리는 것만 못한 狀況이 될 수도 있다.

    年初 시 主席 一家 等 最高位層의 親姻戚과 符號들이 最大 4兆 달러(4400兆 원)를 海外로 빼돌렸다는 疑惑이 國際探査報道言論人協會(ICIJ)에 依해 公開됐다. 權力者들이 海外의 租稅避難處에 페이퍼컴퍼니를 設立하는 方式으로 域外 脫稅를 했다는 것이다.

    이 疑惑에 對한 理解를 中國 國民에게 어떻게 求할 것인가 하는 問題 亦是 시진핑 政權을 곤혹스럽게 한다. 一旦 中國 政府는 이 內容이 中國 內 인터넷과 言論에 알려지지 않도록 統制한다. 이런 統制로 말미암아 中國 市民이 이 內容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千萬의 말씀이다. 시골 僻村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甚至於 一部 實力이 뛰어난 네티즌들은 天機漏洩의 主人公인 ICIJ의 사이트에 迂廻 接續하는 方法으로 거의 完璧하게 資料를 뽑아내 사이버 空間에다 퍼 나르기도 했다. 當然히 이 資料를 본 大部分의 中國人은 憤怒와 背信感에 齒를 떨었다고 한다. 萬에 하나 이 問題가 中國 社會에서 公論化 된다면 中國의 黨政 指導部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適切한 辨明이라도 만들어 對處해야 할 深刻한 問題가 될 수 있다.

    勿論 이런 山積한 問題와 疑惑에도 시진핑 政權은 中國 國民으로부터 比較的 높은 評價를 받는다. 特히 對外 政策에서 그렇다. 民族的 位相과 自矜心을 높인다고 본다. 中國人이 潛在的 敵國으로 생각하는 美國과 日本에 對한 시진핑 政權의 强勁 對應 基調는 民心의 全幅的 支持를 받는다. 北韓을 冷靜하게 보는 視角, 南北韓 統一을 原論的으로 認定하는 基本 原則 等도 中國 內에서 呼應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元來 中國에 北韓은 血盟이었다. 6·25戰爭에 參戰해 함께 피를 흘렸다는 事實을 商家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關係는 1992年 韓中 修交를 電氣로 금이 가기 始作했다. 只今도 ‘北韓은 中國의 緩衝地帶로 地政學的 利益을 中國에 준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理論에 對한 信賴는 예전 같지 않다. 中國은 如前히 ‘世界에서 北韓과 가장 사이좋게 지내는 國家’이기는 하지만 그 程度가 血盟 水準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面이 있다.

    “北韓 抛棄 안 한다는 誤判 拂拭을”

    이런 點은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太平洋地球 戰略硏究院이 1月 發刊한 ‘2014年 아시아·太平洋 地域 發展報告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報告書는 中國 周邊의 變化를 擧論하면서 시진핑 政權에 “어떤 狀況에서도 北韓을 抛棄하지 않을 것이라는 誤判을 拂拭해야 한다”고 注文했다. 中國의 싱크탱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天方地軸 行步의 北韓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런 認識은 ‘韓國 主導의 統一이 中國의 利益에 어느 程度 符合한다면 굳이 積極的으로 막지 않을 수 있다’는 쪽으로 發展할지도 모른다.

    實際로 韓半島 統一에 對한 中國의 公式 意見은 反對가 아니다. 中國의 一貫된 韓半島 政策은 “韓半島의 平和와 安定이 그 어떤 것보다 重要하다”는 말로 代辯된다. 존 케리 美國 國務長官이 中國과 統一을 論하겠다고 한 것은 中國에 關해 많은 點을 示唆한다.

    시진핑 政權은 北韓이 核關聯 6者會談 復歸에 眞情性을 보이는 措置를 取하면 只今까지 北韓에 微溫的이던 態度를 바꿔 北韓을 政治的, 經濟的으로 積極 支援할 可能性이 높다. 시 主席을 비롯해 大部分의 政治局 常務委員은 北韓과 密接하게 交流한 經驗이 있다.

    그러나 김정은에 對한 支援이 中國의 利益에 얼마나 符合하는지 좀 더 冷靜하게 計算할 것이다. 시진핑 政權은 名實相符한 G2로 國家位相을 키우면서 同時에 內部의 엄청난 難題를 解決해야 한다. 이를 爲해 舊時代의 이념적 遺物보다는 實利에 立脚해 決定하려는 傾向을 보인다. 우리는 시진핑 政權의 이런 特性과 狀況을 잘 理解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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