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年 天安門 事件
(
中國語
:
天安門事件
) 또는
第2次 天安門 事態
는
中華人民共和國
에서
1976年
4月 5日
에 있었던 群衆 叛亂으로,
文化 大革命
以來
마오쩌둥 思想
의 極左的 絶對化 風潮와
마오쩌둥
式 家父長的 體制에 對한 中國 人民의 抵抗이 나타난 事件이었다.
發端 및 經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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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年 1月
저우언라이
가 死亡하자,
中華人民共和國
에서는 ‘
走資派
(走資派)’
[1]
批判 運動이 다시 일어나, 저우언라이 總理의 죽음을 追慕하려던 中國 人民의 意志가 꺾이고, 다시
화궈펑
을 首腦로 하는
마오쩌둥 思想
의 潮流가 政治權에 擡頭하기 始作했다.
이와 같은 狀況에서 故人을 追慕하기 위해 1976年 4月 4日
淸明節
에,
베이징
의 人民들은 손에 花環과 플래카드를 들고
天安門 廣場
에 있는
人民英雄記念碑
를 向하여
中華소비에트共和國
의 '인터내셔널가' 等을 부르며 示威 行進하였다. 저우언라이의 自筆 碑文이 새겨져 있는 記念碑는 中國 人民들의 花環에 依해서 祭壇으로 變하였다. 그러나 當時 베이징시 當局과 官憲은 이 記念碑에 바친 花環을 모두 撤去하였고, 다음날인 5日 激怒한 中國 群衆들은 叛亂을 일으켜 建物과 自動車 等에 放火를 하는 等 一帶 騷擾가 惹起되었다. 플래카드에는 後에 ‘4人坊’이라 하여 逮捕된 마오쩌둥의 否認
장칭
과 側近인
야오원위안
等을 批判하는 詩가 揭載되기도 함으로써 오랜 마오쩌둥 體制에 對한 反逆 意思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事件은 公安當局과 軍에 依해 反革命事件으로 徹底히 彈壓되었으며,
덩샤오핑
[2]
에게 責任을 물어, 4月 7日 그의 모든 職務를 剝奪함으로써 失脚시켰다. 反面, 이 事件 뒤
화궈펑
은 正式으로 總理의 자리에 올랐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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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華人民共和國
은 그 해 9月
마오쩌둥
이 死亡하고, 10月에는 ‘베이징 政變’으로
四人幇
이 逮捕되는 等 激動의 時期를 體驗하였다. 이 事件은 1976年 當時
화궈펑
에 依해 反革命 事件으로 規定됐으나, 1978年 11月
덩샤오핑
이 執權하면서 合法的인 示威였다고 評價를 뒤집었다.
中國 共産黨
은 그 뒤로 이 事件을 四人幇에 反對하여 中國 共産黨을 支持하고,
文化 大革命
을 不正한 全國的인 群衆 抗議 示威이었다고 宣傳하였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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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資本主義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實權派)를 意味한다.
- ↑
當時 中國共産黨 副主席·副總理였다.
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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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要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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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要 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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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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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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團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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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 主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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