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천 戰鬪
는
1637年
丙子胡亂
當時
南漢山城
으로 向했던 忠淸道 勤王軍과 淸軍이 벌인 戰鬪로, 士氣가 낮았던 朝鮮軍은 이 戰鬪에서 慘敗하고
정세규
는 退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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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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勤王의 命을 받은 忠淸道 監査
정세규
는 七旬에 가까운 老將
최진립
과 함께 8,000名의 勤王兵을 組織하여 進軍하였다. 勤王軍은 남한산성으로 進軍 中이라는 信號를 알리는 불화살을 쏜 뒤 험천까지 進軍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埋伏하고 있던
淸 太宗
의 妹夫이자 靑軍의 名將인
量고리
가 朝鮮軍을 奇襲하였다.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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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氣가 낮았던 勤王軍은 갑작스러운 靑軍의 奇襲에 戰意를 喪失하여 大擧 脫營하였으나 靑軍에 依해 退路가 막혔고 뒤로는 絶壁이 가로막았으므로 多數의 兵力이 落仕했다.
이민진
과
김홍익
의 義兵들은 싸우고자 하는 意志가 있었으나 脫營하는 勤王軍에 밀쳐져 함께 絶壁에서 떨어져 落仕했다. 亂廛 中에
최진립
李 戰死하고 令狀
권정길
의 아우인
권임길
또한 戰死했다. 義兵將
김홍익
또한 戰死하고
이민진
은 捕虜로 붙잡힌 뒤 抗拒하다 處刑되었다.
정세규는 戰鬪에 勝算이 없다고 判斷하여 絶壁으로 몸을 던졌으나, 軍士들에게 救出되어 水原으로 退却하였다. 정세규를 除外한 多數의 將帥들이 戰死하고 兵力의 大部分을 잃는 等 이 戰鬪의 被害가 莫甚하였다. 그러나 정세규는 이때의 忠誠心을 認定받아 敗戰의 罪를 免罪받았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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