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천 戰鬪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험천 戰鬪
丙子胡亂 의 一部
날짜 1637年 1月 21日
場所
結果 淸나라의 勝利
交戰國
조선 朝鮮 청나라 淸나라
指揮官
정세규
최진립  
권임길  
이민진  
김홍익  
슈무루 量구리
兵力
忠淸道 勤王軍 8000名
義兵 2400名
正確하지 않으나 大甁
被害 規模
約 2,000名~3,000名 不明

험천 戰鬪 1637年 丙子胡亂 當時 南漢山城 으로 向했던 忠淸道 勤王軍과 淸軍이 벌인 戰鬪로, 士氣가 낮았던 朝鮮軍은 이 戰鬪에서 慘敗하고 정세규 는 退却하였다. [1]

背景 [ 編輯 ]

勤王의 命을 받은 忠淸道 監査 정세규 는 七旬에 가까운 老將 최진립 과 함께 8,000名의 勤王兵을 組織하여 進軍하였다. 勤王軍은 남한산성으로 進軍 中이라는 信號를 알리는 불화살을 쏜 뒤 험천까지 進軍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埋伏하고 있던 淸 太宗 의 妹夫이자 靑軍의 名將인 量고리 가 朝鮮軍을 奇襲하였다.

戰鬪 [ 編輯 ]

士氣가 낮았던 勤王軍은 갑작스러운 靑軍의 奇襲에 戰意를 喪失하여 大擧 脫營하였으나 靑軍에 依해 退路가 막혔고 뒤로는 絶壁이 가로막았으므로 多數의 兵力이 落仕했다. 이민진 김홍익 의 義兵들은 싸우고자 하는 意志가 있었으나 脫營하는 勤王軍에 밀쳐져 함께 絶壁에서 떨어져 落仕했다. 亂廛 中에 최진립 李 戰死하고 令狀 권정길 의 아우인 권임길 또한 戰死했다. 義兵將 김홍익 또한 戰死하고 이민진 은 捕虜로 붙잡힌 뒤 抗拒하다 處刑되었다.

정세규는 戰鬪에 勝算이 없다고 判斷하여 絶壁으로 몸을 던졌으나, 軍士들에게 救出되어 水原으로 退却하였다. 정세규를 除外한 多數의 將帥들이 戰死하고 兵力의 大部分을 잃는 等 이 戰鬪의 被害가 莫甚하였다. 그러나 정세규는 이때의 忠誠心을 認定받아 敗戰의 罪를 免罪받았다.


各州 [ 編輯 ]

  1. “公廳 感謝 정세규가 험천에 陣을 쳤으나 全君이 敗沒하다” . 朝鮮王朝實錄 仁祖實錄 33卷, 仁祖 14年 12月 27日 精油 4番째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