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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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 戰鬪
丙子胡亂 의 一部
날짜 1637年 1月 26日
場所
京畿道 光州市 쌍령동
結果 淸나라의 勝利
交戰國
朝鮮 청나라 淸나라
指揮官
허완  
民營  
선약해
윤여임  
선세강  
손종로  
백선남
김충선
도경유
朴忠兼 ?
要土
惡다귀
失投 
兵力
束伍軍 2000名 起兵 3000~7500名
被害 規模
指揮部 全滅, 戰死者 不明 不明

쌍령戰鬪 (雙嶺戰鬪)는 丙子胡亂 이 進行되던 中 1637年 1月 2日에 쌍령 에서 벌어진 朝鮮軍과 靑軍의 戰鬪이다. 이 戰鬪에서 朝鮮軍은 靑軍에 大敗하였으며, 結局 남한산성에서 抗戰하고 있었던 仁祖가 淸나라에게 降伏하는 契機 中 하나가 되었다. 韓國 歷史 4代 敗戰 ( 龍仁戰鬪 , 七千輛海戰 , 쌍령戰鬪 , 현리戰鬪 ) 中 하나로 꼽힌다.

戰鬪 戰後 狀況과 經過 [ 編輯 ]

1636年 淸 太宗 이 朝鮮의 無禮한 態度를 問題삼아 直接 12萬 大軍을 이끌고 朝鮮을 侵略하였다. 靑軍의 갑작스런 大規模 攻擊에 朝鮮軍은 곳곳에서 무너졌다. 瞬息間에 鴨綠江을 突破한 靑軍은 平壤을 지나 不過 열흘만에 朝鮮의 首都 漢陽에 肉薄하였다. 이에 놀란 朝鮮 朝廷은 江華島로 避身을 試圖했으나 이미 淸의 騎兵들이 길목을 遮斷하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向하였다.

當時 남한산성에는 1萬3千 名의 兵士들이 있었으나 淸의 大軍이 곧 城을 包圍하여 狀況이 多急해졌다.

經過 [ 編輯 ]

남한산성에 孤立되어 있던 人組 를 救援하기 위해 經常 座兵士 허완(許完)과 右兵士 民營(閔?)은 急히 軍士들을 募集하여 出發하였다. 이 當時 募集된 朝鮮軍의 數字는 正確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大略 2千名 程度였다는 推測이 有力하다. 남한산성으로 向하던 이들은 1月 2日 쌍령(雙嶺)에 到達하였고, 各各 허완과 民營이 이끄는 두 무리의 朝鮮軍은 各各 고개 兩쪽에 陣을 쳐 木柵을 세워 敵의 攻擊에 對備하였다. 이에 南漢山城 隣近에 駐屯하던 6千名의 淸軍이 只今의 昆池岩人 현산을 占領한 뒤 朝鮮軍의 動態를 살피기 위해 쌍령으로 約 30餘名의 騎馬兵들로 構成된 斥候를 보냈다. 淸의 斥候兵들이 朝鮮軍 木柵에 다다르자 이를 發見한 朝鮮軍은 곧바로 發砲하여 敵 斥候兵의 士氣를 꺾었다. 그러나 이 當時 大部分의 兵士들이 鳥銃으로 武裝하고 있었지만 아직 鳥銃에 熟鍊되지 못했던 兵士들이 相當數였던 朝鮮軍은 첫 發砲에서 所持하고 있던 모든 彈丸들을 거의 다 消盡해 버렸고, 朝鮮軍 陣營은 彈丸 再補給을 要請하는 수많은 兵士들로 인해 混亂이 惹起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淸軍이 朝鮮軍의 木柵을 넘어 急襲하였고, 이에 놀란 朝鮮軍은 彈藥을 다 써버린 鳥銃들을 내던지고 無秩序하게 逃走하기 이른다. 이 過程에서 數 많은 兵士들이 넘어져 自己들끼리 밟고 밟혀 죽는 慘劇이 벌어졌고, 허완은 쌍령의 싸움에서 敗하자 分前 하였으나 스스로 목을 찔러 自決하였다.( 人組 36卷, 16年(1638 無人 / 名 숭정(崇禎) 11年) 3月 28日(辛卯) 2番째記事)

한便, 反對쪽 고개에 陣을 치고 있었던 民營의 朝鮮軍은 靑軍의 攻擊에 그런대로 잘 對應하고 있었다. 그런데 亦是 兵士들의 彈丸 濫用을 막기 위해 너무 적은 量의 彈丸을 分配한 나머지 兵士들의 彈丸은 瞬息間에 消盡되었고, 彈丸과 火藥을 再分配 하기 위해 陣營 한가운데에서 彈藥을 分配하는 過程에서 모아놓았던 火藥이 鳥銃의 和承 불꽃에 닿아 大爆發이 일어났다. 갑작스런 暴飮에 朝鮮軍은 右往左往하기 始作했고, 混亂에 빠진 朝鮮軍에게 淸나라의 팔起兵代가 突進하여 닥치는대로 攻擊하여 瞬息間에 朝鮮軍의 先頭陣營을 뭉개버렸다. 先頭隊列이 무너지자 朝鮮軍의 隊伍는 瞬息間에 무너졌으며, 大部分의 兵士들이 戰意를 잃고 逃走하다가 밟혀죽거나 捕虜로 잡혔다. 그리고 民營은 軍士가 敗하게 되자 軍官과 下卒이 부축하여 말을 태웠으나 이를 뿌리치고 끝내 逃亡하지 않고 싸우다 戰死하였다. 또한 喪主 令狀(尙州營將) 윤여임(尹汝任), 安東 令狀(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等은 自身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여 싸우다 戰死하였다.(인조 34卷, 15年(1637 丁丑 / 名 숭정(崇禎) 10年) 2月 26日(病身) 2番째記事)

結果와 影響 [ 編輯 ]

戰爭의 轉換點이 될 수도 있었던 허완과 民營의 朝鮮軍이 潰滅된 狀況에서 남한산성을 救援할 軍隊는 事實上 全無한 狀況이었다. 남한산성에서 40餘日을 버티던 仁祖는 結局 淸 太宗에게 三田渡에서 屈辱的인 降伏을 하게 되었다.

死傷者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 怔忡墓 - 光州市 鄕土文化遺産(類型文化遺産) 第1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