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年 日本 프로 野球 再編 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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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年 日本 프로 野球 再編 問題 日本 프로 野球 組織이었던 ‘ 日本 野球 聯盟 ’의 球團 數 擴大를 두고 旣存 球團들이 對立하여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로 分裂된 1949年에서 1950年 사이에 일어난 一連의 事件을 가리킨다.

背景 [ 編輯 ]

太平洋 戰爭 이 끝난 1945年 프로 野球는 곧바로 活動을 再開했고 같은 해 11月 23日 메이지 진구 野球場 에서 東西 對抗戰이 열린 것을 始作으로 기후縣 新카와 球場 에서 1競技, 니시노미야 球場 에서 2競技가 열렸다. [1] 메이지 진구 野球場의 1競技와 니시노미야 球場의 4競技에는 5千 名이 넘는 觀衆이 몰렸다. 1946年부터 8個 球團으로 本格的인 시즌이 再開된 프로 野球는 占領 政策의 뒷받침을 받으며 急激한 成長을 이루었다.

戰爭 前까지 野球는 ‘學生의 趣味’이라는 생각이 一般的이었으며 [2] 프로 野球 選手는 “아이들의 趣味를 成人이 되어도 繼續 生計 手段으로 삼는 사람들”로 一般 職場人에 비해 侮蔑的인 存在였다. 그러나 戰後 日本을 主導 統治한 聯合軍 最高 司令官 總司令部 (以下 GHQ)는 “敗戰에 빠진 日本 國民에게 娛樂을 준다”는 方針 아래 메이지 天皇 을 모신 메이지 진구 가이엔 의 外郭에 있으나 특별하게 神聖視된 메이지 진구 野球場에서 위와 같이 蔑視했던 프로 野球의 興行으로 使用 許可가 내려 [3] 以前의 狀況과는 急速히 變化를 이루었다.

1947年의 닉네임 導入, 1948年의 프랜차이즈第 假執行과 같이 메이저 리그 野球를 模倣한 活動도 이루어졌다. 한便 종이가 不足해 占領軍 當局으로부터 用紙 割當 制限을 받은 新聞社들이 發行 許可 用紙 割當을 늘리기 위해 스포츠 新聞들을 잇따라 創刊했으며, [4] 以前엔 거의 없다시피 했던 라디오 中繼들도 民間 情報 敎育局에서 餘裕 放送 時間을 없앤 NHK 亦是 빈 時間을 채우는 素材로 프로 野球를 中繼하는 等 [5] 큰 影響을 가져왔다.

‘붉은 배트’의 가와카미 데쓰하루 , ‘푸른 배트’의 오시타 히로시 의 打擊 對決, ‘빨래장대의 豪傑’이라 불리었던 후지무라 후미오 等 人氣 選手들의 出現도 있어 蔑視받던 野球는 單숨에 前後 苦難에 허덕이는 日本의 몇 안 되는 엔터테인먼트로 人氣가 急成長한 것이다.

이 結果 一流 레저 産業으로 成長한 프로 野球는 1948年에는 折半 以上의 球團들이 黑字를 記錄했고, 이 成長이 持續되면 이듬해에는 全 球團 黑字라는 樂觀的인 展望이 나오는 等 [6] 準事業化되었다. 戰爭 以前부터 아무도 關心을 가져주지 않아 苦生하던 것이 結實을 맺었으니 野球는 企業化해야 한다는 [7] 關係者도 있었다. 한便 프로 野球의 成長은 다른 企業들의 耳目도 集中시켜 參加를 希望하는 企業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發端 [ 編輯 ]

1949年 2月 4日에서 2月 5日, 이틀 동안 聯盟 使用者 會議가 열렸다. [8] 機構 改革 方案의 하나로 聯盟 커미셔너 職責을 新設하는 안이 採擇되었다. 招待 커미셔너는 요미우리 新聞 의 社長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의 所有者였던 쇼리키 마쓰打로 가 聯盟 名譽 總裁도 겸하고 있었지만 민정국 法務部 特別 審査局으로부터 쇼리키는 公職 追放 된 身世였고 GHQ에서도 禁止했기 때문에 5月 13日附로 커미셔너職을 辭任했다.

辭任 前인 4月 15日 [9] 名譽 總裁였지만 實質的인 影響力을 미쳤던 쇼리키가 聯盟 總裁 就任 記者 會見에서 “旣存의 6個 球團을 8個 球團으로 擴大한다(참고로 밝혔던 이 時點에서는 이미 8個 球團이었다). 그래서 安定되면 10球團으로 擴大하고, 다음에는 12球團으로 擴大한 뒤 兩大 리그로 나눈다 [10] ”는 이른바 美國 메이저 리그 野球 를 模倣한 兩大 리그制 導入 構想인 一名 ‘쇼리키 構想’을 意見으로 表明했다. 이때 同時에 美國에서 팀을 招待, 도쿄의 專用 球場을 1球場 追加 建設하는 세 番째 意見도 表出했다. [11]

쇼리키는 두 個의 리그 中 한 리그의 기둥이었던 요미우리 新聞 을 母企業으로 하는 巨人으로, 다른 리그의 기둥으로써 當時 프로 野球의 急速한 成長과 함께 擴大를 繼續하고 있던 요미우리 新聞을 라이벌視 하고 그에 따라 프로 野球 進出을 노리고 있던 마이니치 新聞 에 화살을 돌렸다. 마이니치 新聞은 7月에 非公式的으로 加入을 打診, [12] 9月 21日 마이니치 오리온스(現在의 지바 롯데 마린스 ) 加入을 聯盟에 申請했다.

9月 22日, 마이니치 新聞은 “本社에서 以前부터 國內·外的인 渴望으로 職業 野球 팀 編成을 計劃했으며, 관계있는 다른 方面과의 意見 折衝을 하고 있었으나, 9月 21日 公式的으로 日本 野球에 加入 申請을 했다”라고 밝혔다. [13]

旣存 球團들의 期待 [ 編輯 ]

쇼리키 構想이 提示되기 以前의 旣存 球團들은 여기까지 키워 艱辛히 軌道에 오르게 된 프로 野球가 事業이 될 것으로 判斷해 새삼 새로 들어오려는 行爲는 到底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또한 球團 增加에 依해 觀客의 不均衡이 發生한다면 프로 野球의 人氣 下落을 招來할 수 있다고 反對하는 목소리가 컸고, 1948年에는 다이에이 나가타 마사이치 의 加入 申請을 물리치는 等 [14] (나가타는 以後 旣存 球團에 投資하여 結局 加入) 新規 加入은 認定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리키 構想이 밝혀지자, 特히 요미우리 新聞 側에서 보면 마이니치 新聞의 프로 野球 進出은 戰爭 以前부터 十數年 間 犧牲하면서 成長했고 艱辛히 販促 手段이 되었던 프로 野球에 競爭社가 끼어드는 것은 認定하지 못하며 猛烈히 反對했다. [15] 當時 요미우리는 勞動 爭議 의 影響으로 本社에서 退陣했던 公職 追放된 쇼리키 代身 副社長인 야스다 쇼지를 中心으로 한 ‘飯 쇼리키’派가 實權을 쥐고 있어 쇼리키의 影響力을 排除하기 위해 쇼리키 構想에는 同意 할 수 없다는 意圖도 있었다. [16] 또한 주니치 드래곤스 의 母會社인 主婦닛폰 新聞 亦是 요미우리와 비슷한 理由로 反對하였으며 다이요 로빈스(以後 쇼치쿠 로빈스 , 現在는 消滅)는 마이니치의 球團 賣却 이야기로 因해 요미우리·주니치와 同調했다. [17]

그러나 다른 5個 球團은 以前과 다른 反應을 보였다. 當時 간사이 地域에서는 요미우리 新聞이 販賣되지 않아 간사이 地域에서 프로 野球의 弘報 機能이 없었지만 오사카 마이니치 新聞 을 母體로 한 마이니치 新聞이라면 이 機能을 충족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期待했다. [18] 以外에도 난카이 호크스(現在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는 벳쇼 빼내기 事件 으로 대표되는 요미우리에 對한 反感이 있었고 오사카 타이거스(現在의 韓信 타이거스 )는 한신 고시엔 球場 을 使用하는 選拔 高等學校 野球 大會 의 主催이며 事故가 發生하기 쉬운 電鐵의 業務에서 오는 일들 等 各各의 狀況으로 간사이 私有 鐵道 세 球團은 마이니치의 加盟에 同調, [19] 다른 두 球團도 各其의 理由를 들어 이에 同調했다. 그 意圖는 野球界의 요미우리 中心主義에 對한 反撥이라는 色彩가 있었던 것도 否認할 수 없었다. [20]

요미우리와 마이니치의 對立 [ 編輯 ]

2004年 10月 11日 TV 도쿄 系列에서 放送되었던 프로그램에 依하면 마이니치의 加盟 申請 直前인 1949年 7月 當時 日本國有鐵道 의 總裁 시모야마 社다노리 가 失踪된 後에 朝飯 선 의 線路에서 歷史體로 發見된 이른바 ‘ 시모야마 事件 ’이 發生했다. 警視廳은 自殺과 他殺 兩面에서 調査를 實施했지만 日本을 代表하는 3代 新聞 中 요미우리 新聞과 아사히 新聞 은 他殺이라고 報道한 것에 비해 마이니치 新聞은 自殺이라고 報道했다. 이것이 마이니치 新聞과 요미우리 新聞의 對立을 깊어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잇따른 加盟 申請 [ 編輯 ]

쇼리키 構想의 本來 目標였던 ‘漸進的인 擴大 路線’과는 달리 마이니치 加盟 事態가 表面化되면서 프로 參與를 노리고 있던 企業들에서 加盟 申請이 잇따랐다. 當時 記錄에 依하면 마이니치 新聞, 긴키 닛폰 鐵道 , 교토 新聞 , 구마가이龜尾 , 日本國有鐵道 , 쇼치쿠 , 다이요 漁業 , 나고야 鐵道 , 서일본 鐵道 , 서일본 新聞 , 세이부 鐵道 , 히로시마 , 벳푸 호시노龜尾 , RICCAR 等의 이름이 擧論되었다 [21] (이들 中 現在까지 球團을 保有하고 있는 것은 히로시마와 세이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이니치 新聞이 9月 21日 正式的으로 加入 申請을 했지만 이에 앞서 9月 14日에는 긴키 日本 鐵道가, 9月 20日에는 서일본 鐵道가 各各 申請을 했다. 以後에도 24日 하야시카네 , 28日에는 호시노龜尾와 히로시마가 加入 申請을 하면서 [22] 쇼리키 構想은 完全히 무너지게 되었다.

聯盟 分列 [ 編輯 ]

9月 29日 새로운 球團의 加入 問題에 對해 聯盟의 最高 顧問 會議가 開催되었고 이어서 9月 30日부터는 球團 代表者 會議가 열렸다. [23] 여기서 요미우리·주니치·다이요가 新規 加盟에 反對 立場을 보인 反面, 阪神·한큐 브레이브스(現在의 오릭스 버펄로스 )·난카이·도큐 플라이어스(現在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다이에이 스타스(以後 다이에이 유니온스 , 現在는 消滅)는 新規 加盟에 贊成했다. 1946年 聯盟에서 “더 以上 球團 增加는 없다”라고 밝혔지만 [24] 贊成 側의 5個 球團은 이미 狀況이 달라졌다고 主張했다.

贊成 側 球團들을 모아 多數決로 强行 突破하려고 했던 쇼리키는 “2個 球團의 參加를 認定하고 1리그 10球團을 目標로 한다”라는 盟約書를 整理해 노다 세이조 阪神 電氣 鐵道 社長의 署名을 받았다. [25] 그러나 參與 希望이 잇따랐기 때문에 거기서 2球團을 選擇(實質的으로는 마이니치와 나머지 한 球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兩者가 尖銳하게 對立했기 때문에 쇼리키의 ‘1리그 10球團’ 構想도 現實的인 限界에 부딪혔다. [26] 그래서 贊成 側 5個 球團은 “兩大 리그로 分裂하고 마이니치는 같은 리그에 參與한다”라는 內容의 새로운 協定을 맺었다. 이 協定에도 노다는 署名했고 捺印까지 하였다. [27]

11月 12日에 戰後 처음으로 마이너 리그의 트리플 A 팀인 샌프란시스코 실즈 가 招待된 狀態였는데, 손님을 맞이하는데 內部가 分裂되어 있는 것은 失禮라고 하여 加盟 問題를 保留로 두고 一旦 會議가 解散되었다. [28]

그런데 親善 競技가 끝난 11月 22日에 열린 球團 代表者 會議에서 韓信이 갑자기 動向을 바꾸었다. “兩大 리그로 分裂하지만 한神은 마이니치의 리그로 옮기지 않고 요미우리의 리그에 남는다”는 도가시 고이치 球團 代表의 通報였다. [29]

새로운 球團과 選手 分離 [ 編輯 ]

퍼시픽 리그는 같은 리그에 參與를 約束했던 마이니치·니시테쓰 클리퍼스(現在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긴테쓰 펄스(後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에서 現在는 消滅)에 旣存의 한큐·난카이·도큐·다이에이의 7球團으로 定해졌다. 한便 센트럴 리그는 旣存의 요미우리·韓信·주니치·쇼치쿠 로빈스의 4個 球團 뿐이었다. 리그 分裂 以前에 새로운 球團의 加入에 反對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리그가 分裂 以後 球團 수가 極端的으로 減少했기 때문에 分裂 以前의 8個 球團 程度까지 늘릴 必要가 있었다. 또한 새로운 팬 開拓을 위해 주고쿠·규슈 兩 脂肪 球團의 創設을 要求했다. 시모노세키視 의 다이요 웨일스(現在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와 히로시마시 의 히로시마 카프(現在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의 2個 球團이 센트럴 리그에 加入해 주고쿠는 센트럴 리그가 先行했지만 규슈 地方은 니시테쓰가 후쿠오카를 緣故로 했기 때문에 퍼시픽 리그가 先行되었다.

규슈 地方의 相對를 强하게 하고자 했던 요미우리는 니시테쓰가 서일본 鐵道 서일본 新聞 의 共同 出資인 것에 注目, 서일본 新聞을 分離해 센트럴 리그에 끌어들여 니시닛폰 파이레츠 (現在는 消滅)을 結成했다. 以後 고쿠테쓰 스왈로스(現在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가 加入하면서 센트럴 리그는 8個 球團 體制로 1950年 시즌을 進行했다.

한便 마이니치는 韓信의 監督으로 軋轢이 끊이지 않았던 와카바야시 다다시 를 選手 兼任 監督으로 招聘해 벳土 가오루 , 도이街키 다케시 , 고 쇼세이 , 와카바夜市를 尊敬하거나 球團에 不滿을 가지고 있던 韓信의 主力 選手들을 次例대로 끌어왔다. 또한 요미우리는 한큐와 도큐의 選手들을 끌어내 니시테쓰와 分離되어 電力이 弱했던 니시닛폰에 넘겼고, 센트럴 리그의 常任 理事로 就任한 아카美네 마사시 는 다이에이의 高즈루 마코토 로 대표되는 ‘아카美네 파’의 選手들을 빼내고 쇼치쿠에 入團시켰다( 아카美네 旋風 ). 이렇게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의 熾烈한 選手 빼내기 戰爭이 일어났다.

餘波 [ 編輯 ]

聯盟 崩壞의 餘波는 1950年 시즌에 들어서도 繼續되었다. 아카美네의 쇼치쿠 移籍 事件은 퍼시픽 리그에서 認定하지 않아 公式戰 始作 以後 高즈루 等의 身分은 暫時 空中에 뜬 狀態가 되기도 하였다. 開催가 檢討되었던 올스타戰 은 取消되었고, 1950年 처음으로 열린 日本 시리즈 의 相對였던 마이니치와 쇼치쿠의 雰圍氣는 殺伐했다. 한술 더 뜬 것은 1950年 시즌 終了 後 定해진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쓰와 센트럴 리그의 니시닛폰의 吸收 合倂이었다.

요미우리의 積極的인 說得으로 니시닛폰은 獨立 球團이 되었으나 시즌이 進行될수록 經濟的인 問題에 直面했고, 니시테쓰는 요미우리의 監督 미하라 오사무 아오타 노보루 를 얻었지만 요미우리가 아오타의 異跡에 反撥했고 센트럴 리그의 다른 球團들도 요미우리에 同調해 니시닛폰을 批判했기 때문에 니시닛폰은 結局 센트럴 리그를 脫退하여 니시테쓰와 合倂했다. 이 合倂에서 요미우리는 니시닛폰의 選手는 센트럴 리그에 優先權이 있다고 主張하면서 히라이 마사아키 미나미무라 후카시 를 入團시켰다. 以外에도 各 球團들의 選手 爭奪戰으로 移轉 年度와 같은 狀況이 다시 發生하게 되었다.

벳쇼 빼내기 事件 , 마이니치 大量 빼내기 事件, 아카美네 旋風 으로 대표되는 球團 間의 選手 빼오기가 過熱化되자 이를 問題삼는 목소리가 커졌고, 結局 統一된 契約書를 文書和解 野球 協約 을 發表했다. 球團 間 選手 保有圈이 만들어졌고 選手가 自意로 팀을 退團하고 다른 球團과 契約을 맺을 때 以前 球團의 諒解를 必要로 하는 것으로, 이렇게 選手 빼오기 戰爭은 끝났다.

리그 分裂의 意義 [ 編輯 ]

兩大 리그 轉換 後 올스타戰 및 日本 시리즈 等의 開催로 日本 프로 野球의 人氣가 높아졌다. 또한 주고쿠·규슈 地方에 새로운 球團이 創設했기 때문에 이러한 地域에서 日本 프로 野球 팬이 急增한 것도 再編의 큰 成果이다. 한便, 漸進的인 兩大 리그로의 發展을 생각했던 쇼리키의 構想과는 달리 急速하게 再編이 進行되었기 때문에 두 리그 分裂의 經緯와 그 選手들을 빼오는 것에 依해 두 리그 사이에 큰 怨恨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兩大 리그의 關係는 共存 關係라기 보다는 競爭 關係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兩大 리그로 轉換했을 때에는 애初에 人氣 球團인 요미우리와 韓信이 센트럴 리그에 所屬되어 있던 것에 對해, 퍼시픽 리그에서는 난카이·니시테쓰가 人氣를 얻고 있었다. 따라서 兩大 리그의 觀客 動員 數는 그다지 差異가 없었고, 퍼시픽 리그의 觀客 動員 數가 센트럴 리그보다 若干 적은 程度였다. 게다가 1951年에 센트럴 리그의 니시닛폰이 퍼시픽 리그의 니시테쓰에 吸收 合倂되어 니시테쓰 라이온스(現在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가 된 데 이어 1953年에는 센트럴 리그 쇼치쿠와 다이요가 合倂한 다이요 쇼치쿠 로빈스(現在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로 6個 球團이 된 센트럴 리그에 비해 1954年에 다카하시 유니온스 (現在는 消滅됨)가 加盟하고 8個 球團이 된 퍼시픽 리그는 逆轉하는 雰圍氣에 있었다.

그런데 다카하시는 팬의 支持를 얻지 못하고 1957年 다이에이에 吸收 合倂되어 다이에이 유니온스가 되었고, 다이에이가 그 해 시즌 終了 後 마이니치에 吸收 合倂되어 마이니치 다이에이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를 거쳐 現在는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어 1리그 6球團 씩 2리그 12球團 體制가 本格的으로 始作되었다. 이 때부터 兩 리그의 觀客 動員 數의 差異가 漸次 擴大되었다.

그 後 1960年代에서 1980年代 後半에 걸쳐 퍼시픽 리그의 觀客 動員 數는 센트럴 리그를 크게 밑돌았다. 퍼시픽 리그의 觀客 動員 數가 주춤한 理由는 新規 加入 한 다카하시의 電力 不足, 요미우리에 對抗할 것으로 期待했던 마이니치의 哲秀와 ‘ 검은 안개 事件 ’의 影響을 들 수 있다. 또한 TV가 大部分의 家庭에 普及 한 것으로 요미우리 新聞 系列의 닛폰TV 系列을 中心으로 放送되는 요미우리 前 텔레비전 프로 野球 中繼는 日本 人氣 프로그램이 되어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相對인 센트럴 리그 各 球團들도 팬層의 擴大 및 放映權料·廣告料 收入 增大 等 다양한 惠澤을 제공받았다. 한便 퍼시픽 리그는 主要 放送局을 그룹에 둔 企業에 있는 球團이 存在하지 않았기 때문에 TV 中繼가 極端的으로 적었고 人氣가 漸漸 떨어졌다.

이러한 隔差를 解消하기 위해 퍼시픽 리그는 센트럴 리그에 對해 交流展 의 導入과 單一 리그로의 轉換을 希望했다. 그러나 퍼시픽 리그에 怨恨이 남아있는 센트럴 리그는 自身들에게 利益이 없는 救濟 行爲를 繼續 拒否했다. 따라서 퍼시픽 리그에서는 球團의 讓渡 및 프랜차이즈의 移動이 잇따르면서 1973年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스(現在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롯데 오리온스(現在의 지바 롯데 마린스)의 球團 合倂 騷動 까지 發生했다.

1990年代 以後 兩 리그의 隔差는 縮小되는 傾向을 보였지만 2004年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現在는 消滅)의 經營難을 契機로 다시 프로 野球 再編 問題 가 불거졌다. 그 結果 2005年 以後 센트럴·퍼시픽 交流展 等이 열리게 되었다.

各州 [ 編輯 ]

  1.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10-111
  2.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91 ~ 192
  3. 戰爭 前의 感覺이라면 “學生끼리의 切磋琢磨라면 몰라도 어른스럽지 않은 프로 野球 興行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된다.
  4.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229
  5.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231 ~ 232
  6.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7
  7.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7
  8. 《戰術 韓信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 p.168
  9. 《戰術 新版 타이거스의 成長》 p.294
  10.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11. 《戰術 新版 타이거스의 成長》 p.294
  12.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戰術 新版 타이거스의 成長》(p.295)에 依하면 8月로 記述되어 있다.
  13. 《戰術 韓信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 p.176
  14.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34
  15.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7
  16. 《戰術 球團 消滅 幻想의 優勝 팀 로빈스와 다무라 雇馬地로》 p.133
  17. 《戰術 球團 消滅 幻想의 優勝 팀 로빈스와 다무라 雇馬地로》 p.134 - 137, 이 冊에 依하면 다이요 오너의 다무라 雇馬地로는 마이니치의 參加 意圖를 누르기 위해 마이니치 新聞에 對해 自救團 後援者가 될( 命名權 ) 것을 몰래 말을 꺼냈지만 마이니치 側은 이에 應하지 않아, 이윽고 ‘賣却’의 所聞이 난 것으로 되어 있다.
  18.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0
  19. 《戰術 新版 타이거스의 成長》 p.296
  20.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1
  21.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14
  22. 《戰術 新版 타이거스의 成長》 p.295
  23.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7
  24.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8
  25. 《戰術 韓信 타이거스 쇼와의 발자취》 p.176 ~ 177,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5
  26.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5
  27.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5
  28. 《戰術 日本 프로 野球 40年史》 p.148
  29. 《戰術 韓信 타이거스의 正體》 p.135 ~ 136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