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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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Henri Emile Benoit Matisse
身上情報
出生 1869年 12月 31日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르샤토캄프레시스
死亡 1954年 11月 3日
프랑스 니스
職業 畫家 , 彫刻家 , 版畫家 , 석판화가 , 그래픽 藝術家 , 데생畫가 , 陶藝家
스승 귀스타브 모로
弟子 마르셀 그로메르 , Patrick Henry Bruce , Ludvig Karsten , 악셀 레볼 , Jane Gumpert , Arvid Fougstedt , Carl Palme , Sigfrid Ullman , Filip Wahlstrom , Ingegerd Beskow , Milly Sloor-Tjader , Nina Simonovich-Efimova , Hadar Jonzen , Brita Lagerstrom-Hald , Sigrun Steenhoff-Hjerten , Maj Bring
思潮 印象主義 , 分割主義 , 野獸派 , 新印象主義 , 後期印象主義
受賞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配偶者 아멜리에(Amelie Noellie Parayre): 1898年 ~ 1939年; 離婚
子女 3名
主要 作品
푸른 누드 , 푸른 누드 II , 로사리오 禮拜堂
影響
署名
墓碑

앙리 마티스 ( 프랑스語 : Henri Emile Benoit Matisse , 1869年 12月 31日 ~ 1954年 11月 3日 )는 20世紀 野獸派 프랑스 畫家이다. 파블로 피카소 와 함께 '20世紀 最高의 畫家'로 꼽힌다. 22歲 때 파리 로 나가 그림 工夫를 하고, 1893年 파리 國立 美術 學校에 들어가 귀스타브 모로 에게서 배웠다.

1904年 무렵에 前부터 親分이 있는 피카소 · 드랭 · 블라맹크 等과 함께 20世紀 繪畫의 第一步로 불리는 野獸派 運動에 參加하여, 그 中心 人物로서 活躍하였다. 그러다, 1954年 11月 3日에 85歲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生涯 [ 編輯 ]

1933年, 칼 半 베흐텐 이 撮影한 앙리 마티스
1913年, 앙리 마티스

第1次 世界 大戰 後에는 主로 니스 에 머무르면서, 모로코 · 타히티 섬 을 旅行하였다. 타히티 섬에서는 再婚을 하여 約 7年 동안 居住하였다. 末年에는 色도 形體도 單純化되었으며, 밝고 純粹한 빛의 光輝와 淸純 明快한 線에 依하여 훌륭하게 構成된 平面的인 畵面은 '世紀의 驚異'라고까지 評價되고 있다. 第2次 世界 大戰 後에 始作하면서 1951年에 完成한 半(Vannes) 禮拜堂의 裝飾은 世界 畫壇의 새로운 記念物이다. 그는 조각·銅版畫에도 뛰어났고, 織物의 디자인, 揷畵 等 새로운 分野도 만들었다. 그리고 代表作으로 <춤> <젊원>이 있다. 피카소는 "앙리 마티스의 배 속에는 太陽이 들어 있다. "라고 말하며 色彩 感覺을 認定했다. 앙리 마티스는 色彩의 魔術師로 불린다.

畫風의 發展 [ 編輯 ]

印象派 硏究 [ 編輯 ]

1892年에는 兩親을 說得하여 다시 파리에 나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門下生이 되었다가 이어서 美術學校의 모로에게 배웠다. 同門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校友는 이 때에 始作하였다. 루브르에서 故人(古人)을 배웠고 印象派·新印象派를 한 발짝씩 硏究해 갔다. 畫像(畵商) 볼라르의 店鋪에서 세잔 , 고흐 , 고갱 의 데생을 購入하였고, 런던으로 旅行,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印象派의 遺産을 繼承하여 우키요에 에 熱中한 것도 初期 마티스에 있어서는 必要한 營養이 되었다.

포비즘 [ 編輯 ]

1896 ~ 1897年頃부터는 原色의 對比에 依하여 鮮明한 表現을 試圖하였고, 앙데팡당 美術展의 出品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色彩는 더욱 鮮明해졌다. 이렇게 그는 젊은 畫家들의 先頭에 서서 포비슴 의 旗幟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依하면 포비슴의 運動은 무엇보다 먼저 表現手段의 純粹함을 再發見하는 勇氣를 鼓吹하고 推進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繪畫에서 求한 또 하나는 '表現'이다. 그가 말하는 表現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强烈한 銅雀乙 誇示한다든지 하는 激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畫家가 主體的으로 畵面에 만들어 내는 色과 模樣의 配合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緊密한 秩序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年 以後 그는 이러한 意味에서의 秩序 있는 造形을 探究하였는데, 例를 들면, 室內靴(室內畵)와 靜物畫에는 人物이 그려져 있으며, 議長, 裝身具, 家口 꽃, 꽃甁, 絨緞 等이 描寫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人物이 議長보다 重要하다든가 絨緞의 色彩가 다른 形態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觀點은 成立되지 않는다. 畵面은 모든 構成 要素의 均等한 比重에서 또 그 比重의 하모니에서 成立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單一한 것, 秩序·調和의 創造가 그의 課題였다. 그는 '桐比重(同比重)·旬日(純一)·竊盜(節度)'를 自己 스스로 表現의 3原則이라 말했다. 마티스의 이러한 秩序에 對한 感覺은 自然法則을 最上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立場에서 본다면 길에서 벗어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本質的으로는 明晳한 形式感情을 尊重하는 라틴的인 造形精神의 傳統을 繼承하고 있다.

나는 均衡이 잡힌 巫具(無垢)韓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休息處를 提供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 말이다.
 
— 앙리 마티스

參考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