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켄 天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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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켄=쇼토쿠 天皇
孝謙 / 稱德 天皇
第46代 日本 天皇
在位 749年 8月 19日-758年 9月 7日
前任 쇼무 天皇
後任 準닌 天皇
第48代 日本 天皇
在位 764年 11月 6日-770年 8月 28日
前任 準닌 天皇
後任 고닌 天皇
宰相 태정대신船社 有게노 도쿄 (765年-766年)
이름
아베 (阿倍)
시호 寒風: 고켄 (孝謙), 쇼토쿠 (稱德)
畫風: 야마토네코노 스메라미코토 (倭根子天皇)
尊號 步子稱德孝兼皇帝 (寶字稱德孝謙皇帝)
陵號 打카 陵 (高野陵)
年號 덴표쇼號 (天平勝?), 덴표호지 (天平?字)
덴표晉鼓 (天平神護), 晉鼓케이韻 (神護景雲)
身上情報
出生日 718年
死亡日 770年 8月 28日
王朝 야마토 王朝
父親 쇼무 天皇
母親 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

고켄 天皇 (孝謙天皇, 718年 ~ 770年 陰曆 8月 4日 )은 日本 의 第46代 天皇 (在位: 749年 陰曆 7月 2日 ~ 758年 陰曆 8月 1日 )이다.

아버지는 쇼무 天皇, 어머니는 후지와라 집안 出身으로는 最初로 皇后가 된 告廟 皇后이다. 日本 歷史上 여섯 番째 女性 天皇으로 덴무界(天武系) 마지막 天皇이기도 하다. 卽位하기 前의 이름은 아베 內親王(阿倍內親王)으로, 生前에 步子稱德孝兼皇帝(寶字稱德孝謙皇帝)라는 尊號를 받았으며, 《속일본기》에는 고야天皇(高野天皇) 또는 야마토네코노스메라미코토(倭根子天皇)이라 불린 것도 있다.

第47代 天皇인 準닌 天皇 이 廢位된 뒤 第48代 쇼토쿠 天皇 (稱德天皇)으로 다시 卽位하였다.(재위: 764年 11月 6日 ~ 770年 8月 28日 ). 이 天皇 以後 에도 時代 初期에 제109대 메이쇼 天皇 이 卽位할 때까지 日本에서는 850餘年 동안 女子 天皇이 卽位하지 않았다.

略歷 [ 編輯 ]

歷史上 最初의 女性 皇太子 [ 編輯 ]

쇼무 天皇과 告廟 皇后 사이에는 皇子가 없었다. 唯一한 아들이었던 모토이王(基王)도 夭折하면서 膝下의 子息이라고는 딸인 아베 내친왕이 있을 뿐이었고, 後宮인 阿伽陀老이누카이노 히로토地(?犬養?刀自) 사이에 餓死카(安積) 親王이 있었지만 後見 勢力이 없었으므로 卽位할 可望은 없었다. 마침내 덴표 10年( 738年 ) 1月 13日(陽曆 2月 6日)에 아베 내친왕이 日本 歷史上 前無後無한 '女性 皇太子'로 冊封되었다. 덴표 14年( 738年 ) 5月 5日에는 겐메이(元明) 狀況 앞에서 誤절무(五節舞)를 추어보였다는 記錄이 있으며, 덴표 17年( 744年 )에 餓死카 親王이 죽은 뒤 쇼무 天皇의 唯一한 子息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中 갑자기 쇼무 天皇이 쓰러져 重態에 빠졌을 때,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가 "黃沙(皇嗣)가 서있지 않다"며 키부美王(黃文王)을 擁立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當時 女帝는 모두 獨身(未婚이나 未亡人)이었던 데다 아베 내친왕이 卽位한다 해도 다음 皇位를 누가 이을 것인가에 對한 展望도 서지 않았고, 그女를 代身할 다른 天皇 候補를 要求하는 움직임이 그女가 崩御한 뒤에까지 繼續되었다.

卽位 初期의 治世 [ 編輯 ]

덴표쇼號(天平勝寶) 元年( 749年 ) 7月에 아버지 쇼무 天皇의 양위로 卽位했다. 治世 初期에는 告廟 皇太后의 後見을 받았는데, 皇太后를 위해 是非츄다이(紫微中臺)가 設置되고 그 長官으로 太後의 조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를 임명하면서 나카마로의 勢力은 急速히 擴大된다. 덴표쇼號 8年( 756年 ) 5月 2日에 아버지 쇼무 太上天皇이 崩御하면서, 니이打베(新田部) 親王의 아들 후나도왕(道祖王)을 皇太子로 삼으라는 遺詔를 남겼지만, 이듬해( 757年 ) 3月, 女帝는 후나도왕의 行實이 皇太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후나도왕을 廢하고, 代身 道네리(舍人) 親王의 아들로 나카마로의 後援을 받고 있던 오오이王(大炊王)을 새로운 皇太子로 삼았다. 여기에는 女帝와 나카마로의 意向이 作用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날이 强해지는 나카마로의 權勢에 多急해진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나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 等은 厲祭를 廢하고 새로운 天皇을 擁立하려는 쿠데타를 計劃했다.

다치바나노 나라로亂 [ 編輯 ]

6月 28日(陽曆 7月 22日)에 皇族 야마베王(山背王)으로부터 "나라마로가 軍士를 거느리고 나카마路를 除去하려 한다"는 密告가 女帝에게 들어왔지만, 女帝는 나흘 뒤인 7月 2日(陽曆 7月 26日), 太後와의 共同聲明으로 "母斑 所聞이 돌고 있지만, 모두 某叛心을 품지 말고 調整을 따르도록 하라."는 詔勅을 내렸을 뿐인데, 그 날 밤 후지와라노 나카마路에게 中位府使인 카미츠미치노 아야타로(上道斐太郞)가 찾아와, "前任 非젠老카미 人 오노노 아즈마히吐(小野東人)로부터 謀反에 加擔해줄 것을 付託받았다"는 密告가 들어왔고, 나카마로는 中尉部 軍士를 움직여 후나도왕의 邸宅을 包圍하고 아즈마히吐 等을 잡아 左衛師父에 가두었다.

다음날 후지와라노 도요나리와 주나곤 후지와라노 나街테 等에 依해 아즈마히吐 等에 對한 審問이 이루어졌는데, 이때까지 女帝는 "母斑 計劃이 있다는 報告를 받았으나 짐은 믿지 않는다"는 鮮明을 내리고 있었지만, 바로 그날 아즈마히吐는 여태껏 母斑 嫌疑를 否定하던 態度를 바꾸어 母斑 計劃이라는 것을 후지와라노 나가테에게 털어놓았다. 그가 털어놓은 母斑 計劃이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와 오오토모노 고마로, 아스카베王ㆍ寄附未往 等이 함께 軍士를 출발시켜, 나카마로의 邸宅을 덮쳐 그와 오오이王을 除去한 다음 太後에게서 逆令(驛鈴)과 玉璽를 빼앗아, 고다이진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를 받들고 天下에 檄文을 띄워 厲祭를 廢位한 뒤 덴무界 皇族들 가운데서 새로 天皇을 推戴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히吐의 陳述에 따라 7月 4日(陽曆 7月 28日)부터,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를 비롯해 皇族인 후나도왕과 寄附美王과, 오오토모노 고마로ㆍ타지히노 코시카이(多冶比犢養)ㆍ가모노 쓰노타리__301/ 等 이름이 擧名된 者들이 잡혀들어왔고, 全員은 몽둥이로 온몸을 몇 次例나 두들겨 맞는 等 酷毒한 拷問 끝에 全員이 母斑 事實을 認定했으며, 후나도왕이나 寄附未往, 고마로와 아즈마히吐, 코시카이, 쓰노타리 等은 拷問 後遺症으로 모두 같은 날 次例대로 숨을 거두었다. 나라마로도 이 渦中에 죽었으며, 살아남은 아스카베王과 오오토모노 高慈悲는 道士로 流配되었다가 赦免되고 시오야키王은 直接 關與한 證據가 없다는 理由로 皇籍을 剝奪하고 神的降下시키는 것으로 罪를 묻지 않았다. 마타나리 亦是 붙들려와서 나라마로로부터 들었다는 謀反計劃의 顚末을 自白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等, 事件에 連累되어 刑을 받은 官印은 443人에 達했다(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便). 나가테를 시켜 關聯者들에 對한 苛酷한 審問과 拷問을 恣行했던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도 아들 오토쓰구(乙繼)와 함께 事件에 關聯되었다는 理由로 多者이노곤老所致(大宰員外帥)로 좌천당했다. 自身의 靜寂을 모조리 除去하는데 成功한 나카마로의 權勢는 더욱 剛해졌다.

狀況으로서의 時代 [ 編輯 ]

덴표호지(天平寶字) 2年( 758年 ) 8月 1日에 고켄 女帝는 병든 告廟 皇太后를 모시기 위해 五五이왕에게 讓位하고 물러났다. 이 날 女制에게는 '寶字稱德孝謙皇帝', 告廟 皇太后에게는 千坪應眞인정황태후(天平應眞仁正皇太后)란 尊號가 내려졌다. 나카마로도 '후지와라노 에미노 아손(藤原惠美朝臣)'이라는 카바네(姓)와 '午時카쓰(押勝)'라는 이름이 주어지면서 '후지와라노 에미노 午時카쓰'라 稱하게 되었고, 나카마로는 主要 官廳 및 官職의 이름을 黨風으로 바꾸는 等 더욱 權勢를 떨치게 되었다.

女帝는 讓位한 뒤에도 덴표호지라는 年號를 바꾸는 것을 끝내 拒絶했고, 準닌 天皇의 生父(度네리 親王)와 生母에게 天皇이나 皇后 追封을 하는 것도 反對했다. 덴표호지 3年( 759年 ), 告廟 皇太后가 天皇의 親아버지인 道네리 親王에게 尊號를 줄 것을 提案했는데, 이를 相談하러 온 天皇에게 고켄 狀況은 皇太后에 對해 辭退를 아뢰도록 하라고 助言하였지만, 結局 皇太后의 거듭된 說得으로 道네리 親王에게 '숭도진경皇帝(崇道?敬皇帝)'라는 尊號를 주게 되었고 이는 女帝의 影響力의 크기가 어느 程度인지를 分明히 보여주었다.

덴표호지 4年( 760年 ) 7月 16日에 告廟 皇太后가 崩御하면서, 狀況과 나카마로, 天皇의 關係는 微妙한 것이 되었다. 8月에 고켄 狀況과 天皇은 오하리多노미야(小治田宮)로 옮겼다가 덴표호지 5年( 761年 )에는 호라노미야(保良宮)로 옮겼다. 여기서 病을 얻게 된 狀況은 그 看病을 맡았던 流憩氏 出身의 僧侶 도쿄(道鏡)를 寵愛하게 되었다. 덴표호지 6年( 762年 ) 5月 23日(陽曆 6月 23日)에 天皇은 헤이조쿄 로 돌아갔지만, 狀況은 헤이조쿄에 돌아가지 않고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이 時點에서 "고야天皇과 미카도(帝)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속일본기》가 말한 고켄 狀況과 天皇ㆍ나카마로의 不和가 表面으로 떠올랐다. 6月 3日에 狀況은 5位 以上의 官印을 불러 天皇의 不孝를 말하며 自身은 不問에 들어 別居할 것을 表明하고, 나아가 "天皇은 恒例의 祭祀 같은 些少한 일이나 맡으라. 國家의 大使와 賞罰은 짐이 맡을 것이다."라고 宣言해버렸다. 이 不和의 原因은 도쿄를 排除하려는 天皇과 나카마로의 움직임, 自身이 쇼무 天皇의 赤字이자 皇統의 正統 繼承者라는 意識을 갖고 있던 고켄 狀況이 天皇에게 不滿을 품게 된 것 等이 擧論된다. 이러한 對立은 덴표호지 7年( 763年 )부터 8年( 764年 )까지 도쿄나 基非盧 마키非 等의 狀況派가 要職을 맡고 나카마로의 아들들은 軍事要職을 차지하는 等 狀況과 天皇ㆍ나카마로의 勢力 다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繼續되고 있었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 編輯 ]

덴표호지 8年( 764年 ) 9月 11日, 나카마로의 軍事 動向을 把握한 狀況은 야마무라王(山村王)을 시켜 天皇이 가지고 있던 軍事 指揮權의 象徵인 英人(鈴印)을 回收하게 했다. 이를 奪還하려는 나카마로 側과의 衝突이 벌어졌으나 結局 영인은 狀況의 손에 넘어가고 나카마로는 組積(朝敵)으로 몰리게 되었다. 나카마로는 태정官人(太政官印)을 奪取해 오미 國으로 逃走했지만, 9月 13日에 殺害되었다.

나카마로가 敗死하였다는 通知가 到着한 9月 14日에는 앞서 나카마路에 依해 左遷되었던 후지와라노 도요나리(藤原豊成)를 右大臣(右大臣) 으로 삼고, 6日 뒤인 20日에는 도쿄를 代身船社(大臣禪師)로 삼는 한便, 22日에는 나카마로가 黨風으로 바꾸었던 官職과 官廳의 이름을 모두 예전의 것으로 되돌리고, 10月 9日에는 天皇을 廢하여 오오이 親王으로 삼았다가 아와지老幾微(淡路公)에 封하여 流配해버렸다. 이로써 天皇은 廢位되었다.

復位한 뒤의 治世 [ 編輯 ]

天皇의 廢位로 狀況은 事實上 復位했다. 後世에는 고켄 狀況이 中朝(重祚)韓 以後로는 쇼토쿠 天皇으로 불린다. 以後 쇼토쿠 女帝와 도쿄에 依한 政權 運營이 6年에 걸쳐서 繼續되지만, 皇太子는 適格인 人物이 나타날 때까지 決定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덴표晉鼓(天平神護) 元年( 765年 )에는 全國的인 飢饉이나 카즈키王(和氣王)의 母斑 事件이 일어나는 等 復位 뒤의 情況은 不安定했다. 10月에 쇼토쿠 女帝는 도쿄의 故鄕인 가와치(河內) 의 유게데라(弓削寺)에 行次했다. 이 行次 中에 도쿄를 태정대신船社(太政大臣禪師)로 任命하고 本來 臣下에게는 行하지 않던 君臣의 拜賀를 도쿄에게 하도록 命했다. 또한 이 때의 行宮을 增築해 유이노미야(由義宮)을 지었다. 한便으로 거의 같은 時期에 아와지에 流配되어 있던 幣制가 갑작스럽게 辨似한다. 11月에는 本來 天皇 卽位와 함께 行해지는 對象會(大嘗會)를 實施했는데, 예전에는 參加하지 않던 僧侶에게도 出席하게 許諾하는 等 異例的인 것이었다(다만 卽位式은 行해지지 않았다). 또힌 이 해에는 先代 쇼무 天皇이 制定했던 間전영년私財法(墾田永年私財法)에 따라 開墾이 過熱된 것에 對해 지샤를 除外한 一切의 墾田 事由를 禁止하고 있다.

덴표쇼號 2年( 766年 ) 10月에는 海龍王社(海龍王寺)에서 佛舍利가 出現한 일을 契機로 도쿄를 法王(法王)으로 삼았다. 도쿄 아래에는 法身(法臣)ㆍ法參議(法?議) 같은 僧侶 大臣들이 두어지고, 도쿄의 동생인 有게노 기요히吐(弓削?人)가 주나곤 이 되는 等 도쿄의 勢力이 擴充되었다. 한便으로 태정官의 首席은 左大臣(左大臣) 후지와라노 나街테(藤原永手)였지만 基非盧 마키非(吉備眞備) 를 右大臣으로 拔擢하는 等 異例的인 人事任命이 例事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쇼토쿠 女帝와 도쿄 法王의 兩頭體制가 確立되었다.

쇼토쿠 女帝는 隨時로 大使(大寺)에 行次했는데, 사이다이지(西大寺)의 增築이나 사이류지(西隆寺)의 築造, 塔 百萬 個 製作을 實施하는 等 佛敎를 重視하는 政策을 推進했다. 한便으로 神社에 對한 保護 政策도 두터웠지만, 二世 神宮이나 尤史 하치만區 境內에 진구지(神宮寺)를 짓는 等 神佛習合이 더욱 進行되었다.또한 紳士의 位階인 新溪(神階) 制度도 施行하였다.

《속일본기》는 政治와 刑罰이 어려웠고 些少한 일로 極刑에 處하거나 멀리 流配보내기도 했다고 酷評하고 있다. 晉鼓케이韻(神護景雲) 元年 陰曆 7月 10日, 女帝는 일찍이 오시카츠가 總責任을 맡아보던 是非츄多이를 模倣한 獨自的인 軍事 組織으로서 常設職 英外觀인 나이쥬쇼(??省)를 設置했는데, 《속일본기》는 長官格인 警(卿) 밑에 대보(大輔)ㆍ少保(少輔) 各 한 名, 大勝(大丞)ㆍ小乘(少丞) 各 두 名, 대록(大錄) 한 名에 小祿(少錄)이 세 名이라 記錄했다. 나이쥬쇼의 最高 長官으로는 도쿄의 親아우人 有게노 기요히吐가 任命되고, 大寶와 少保에는 各各 鐘4位相 좌위사독이던 후지와라노 고레키미(藤原是公)와 種5爲하 優位四瀆 후지와라 乳牛의(藤原雄依)가 兼任했다. 나이츄쇼는 軍事 機關으로서 구상되어 태정官을 據點으로 政權과 潛在的인 競爭 關係에 있는 후지와라氏 酒類나 皇親 勢力에 對抗할 政治ㆍ軍事力을 保管 維持하기 위해서 組織된 機關으로, 이곳의 要因들은 政權의 核心을 擔當하는 사람들이자 宮廷의 軍事 組織인 委付(衛府)를 指揮했다. 또한 女帝와 도쿄의 政權 中樞를 支持하는 經濟 機關으로서 쵸쿠시쇼(勅旨省)도 設置되었다.

晉鼓케이韻 3年( 769年 ) 5月에는 異腹 女同生 後와(不破) 內親王과 히카미노 시케緦麻로(氷上志計志麻呂)가 天皇을 詛呪했다는 嫌疑로 그 이름을 强制로 고친 다음 流杯하였는데, 이때 또다른 이福 女同生 이노우에(井上) 內親王을 아내로 삼았던 주나곤 시라카베王(白壁王 , 後날의 고닌 天皇)은 女帝의 嫉視를 警戒하여 일부러 술에 빠진 모습으로 亂을 避하려 했다고 한다.

尤史하치만區 信託 事件 [ 編輯 ]

尤史 神宮 南門

한便 이 무렵, 多子以後 의 責任者였던 有게노 키요히吐와 칸즈카사(主神) 나카토미櫓 스게노 아소마로(中臣習宜阿曾麻呂)가 "도쿄를 皇位에 앉히면 天下가 太平해질 것이다"라는 尤史 하치만區의 信託을 알렸다. 이를 確認하기 爲해 尤史하치만의 法菌(法均) 와케노 히로무視(和氣廣蟲)의 男동생인 기요마로(淸麻呂)가 勅使로서 尤史하치만區에 보내졌는데, 8月에 尤史하치만區에 參拜하고 寶物을 바친 뒤 鮮明의 文章을 읽으려는 기요마로 앞에, 神이 神觀 카라시마노 스九里要素메(辛嶋勝與曾女)에게 내려 鮮明을 宣布하기를 拒否했다고 한다. 이에 疑心을 품은 기요마로는 再次 스九里要素메에게 鮮明을 請했고, 스九里要素메가 다시 神에게 現身을 請하자 키가 석 張(大略 9m)이나 되는 僧侶의 모습을 한 하치만신이 기요마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再次 鮮明을 내리기를 拒絶했고, 기요마로는 이를 "하늘로부터 이어진 天皇家의 자리는 반드시 미카도의 一族에게만 잇게 하라는 계시다!"라는 代身의 信託을 갖고 돌아가 아뢴 다음 "앞서의 信託은 虛僞"라고 復命했다. 怒한 쇼토쿠 女帝와 도쿄는 기요마로의 이름을 强制로 고치게 한 다음 이나바勞困노스케(因幡員外介) 로서 左遷시켰다가 다시 이름을 '와케베노 케가레마로(別部穢麻呂)'로 强制로 바꾸게 한 뒤 오스미(大隅) 國 에 流配해버렸다(우사하치만구 信託事件). 比丘尼였던 기요마로의 누나 히로무試圖 强制로 還俗당하고 '와케베노 히로무시메(別部廣?賣)'라고 이름이 고쳐진 채 貧苦(備後) 로 流配되었다.

10月 1日에 女帝는 條를 내려 멋대로 皇位를 求하려 하지 말 것이며, 次期 繼承者는 女帝 自身이 決定할 것임을 再次 表明했다. 그리고 10月부터 11月까지 한 달에 걸쳐 유이노미야에 行次해, 그 땅을 書經(西京)으로 삼는다는 趣旨를 宣言했다.

죽음과 死後 承繼 [ 編輯 ]

이듬해( 770年 ) 2月에 女帝는 다시 留意宮에 行次했지만, 3月 中에 病을 얻어 눕게 된다. 이 때 看病을 위해 옆을 드나든 것은 宮人(宮人)의 基非盧 有利(吉備由利) [1] 뿐이었고 도쿄는 女帝가 崩御하기 前까지 만날 수 없었다. 도쿄의 權力은 금세 衰弱해졌고 軍事 指揮權은 후지와라노 나가테나 基非盧 마키非 等 태정官에 빼앗긴다. 8月 4日, 쇼토쿠 女帝는 헤이조쿄 서궁의 寢殿에서 숨을 거둔다. 女帝의 나이 52歲, 死因은 天然痘로 알려졌다. 病 回復을 바라는 祈禱를 했다는 史料가 없다는 點을 들어 醫療行爲를 하지 않고 意圖的으로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主張도 있으며 [2] , 나아가 暗殺說까지 나오기도 했다.

쇼토쿠 女帝는 平生 獨身으로 살며 子息이 없었다. 女帝 事後 君臣이 모여 後嗣를 議論하였는데, 基非盧 마키費는 덴무 天皇의 孫子로서 神的降下된 勳야노 嗷嗷치(文室大市)나 勳야노 기요미(文室?三)를 候補로 내세웠지만, 후지와라노 나가테나 후지와라노 스쿠나마로(藤原宿奈麻呂)ㆍ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는 주나곤 시라카베왕을 推薦했다. 自身의 主張을 固執하는 마키費에게 나街테 等은 시라카베왕을 後嗣로 指名한 쇼토쿠 女帝의 遺詔를 읽어보였고 때문에 시라카베왕이 卽位했지만, 오늘날 이 留鳥는 僞造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곧 도쿄는 失脚하여 시모쓰케(下野) 國 野쿠시社 別堂에 左遷되고 기요히吐도 道士(土佐) 로 流配되었으며, 墾田 事由도 好키(寶龜) 3年( 772年 )에 再開되었다.

韓國과의 關係 [ 編輯 ]

도다이사의 大佛開眼이 있기 前인 尹3月에, 新羅의 王子를 自處한 한阿飡 (韓阿飡) 官等의 김태렴(金泰廉)이라는 者와 共助社(貢調使) 김훤(金暄), 王子를 모시는 김필언(金弼言) 等 7百餘 名의 新羅人들이 일곱 隻의 배를 타고 와서 多子以後에 碇泊하였다. 이들은 6月 14日에 首都로 들어와서 新羅王의 使命(使命)을 받들고 왔다고 알리면서 人事를 올리고 禮物을 올렸는데, "하늘 아래 모든 땅이 天皇의 땅이 아닌 것 없고, 하늘 아래 모든 百姓이 天皇의 百姓이 아닌 者가 없습니다." 라며 절하는 김태렴 一行에게 日本 調整은 사흘 뒤인 17日에 이들을 組當(朝堂)으로 招請해 잔치를 열어주었다. 여기서 女帝는 "新羅는 먼 옛날부터 大일본국에 朝貢을 바쳐 왔는데, 傳王仁 勝景 (承慶, 효성왕) 때 新羅의 代父(大夫)인 金沙工(金思恭) 等의 言行이 태만하여 禮를 잃었으므로, 짐이 따로 使臣을 보내 罪를 묻고자 하다가 只今 새로 新羅王이 된 헌영 (軒英, 경덕왕)이 그 잘못을 알고 王子를 보내어 禮를 닦으니, 앞으로는 國王이 親히 못 誤겠거든 반드시 表文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태렴 等은 6月 22日에 다이안社(大安寺)와 도다이사에 나아가 禮佛을 드리기도 했으며, 24日에는 나니와館(難波館)에 머무르면서 使臣을 보내 日本 調整에 禮物과 술을 보냈다. 이듬해인 753年 에 女帝는 오노노 茶母里(小野田守)를 新羅에 使臣으로 派遣했지만, 景德王이 오노노 茶母里를 만나주지도 않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이 事件은 日本에 對한 新羅의 態度, 新羅의 日本觀(觀)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事件으로 꼽힌다. 김태렴이 스스로 新羅王의 아들이라고 自處한 것과는 달리 경덕왕에게는 元來 王子가 없었으며, 김태렴은 거짓으로 新羅 王子니 大阿飡이니 하는 管等을 詐稱하여 日本 땅에 와서 그들이 가지고 온 物件을 팔려는 데에 目的이 있었고 日本 調整은 이러한 김태렴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이다.

한便 《속일본기》에 따르면 日本 使臣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는 753年 正月에 唐나라 朝廷에서 열린 조하식戰에서 여러 나라의 使臣들과 함께 唐나라 顯宗 을 만났는데, 이때 고마로의 자리는 吐蕃(티베트) 使臣과 함께 西班 第2席에 있었고, 新羅 使臣은 大食國(페르시아) 使臣과 함께 同伴의 第1席에 있었다. 高馬로는 日本보다 上席에 新羅가 位置한 것을 보고 新羅는 예로부터 日本의 朝貢國이라며 是正을 要求하며 抗議하였다. 이에 將軍 誤회실이 고마로의 눈치를 보며 新羅 使臣과 日本 使臣의 자리를 서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 [3] 하지만 이 事件은 《속일본기》 以外에 中國과 韓國의 史料에는 記錄되어 있지 않다. [4] 그리고 이 해에 新羅 使臣은 조하식展에 參席하지 않았으며, 大食國과 吐蕃은 入黨하지 않았다. 結局 고마로 記事는 《속일본기》의 編纂者에 依하여 造作되어거나 潤色된 것으로 推定된다. [5]

各州 [ 編輯 ]

  1. 基非盧 마키비의 女同生이라고 하나 그의 딸이라는 說도 있다.
  2. 祈禱는 오늘날의 觀點에서는 迷信이지만 當時에는 훌륭한 醫療 行爲의 하나였고, 當時의 人間의 主管에서는 祈禱를 實施하지 않는다는 것은 醫療 行爲를 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자와 모토히코).
  3. 副使大伴宿?古麻呂自唐國至。古麻呂奏曰。大唐天寶十二載。?在癸巳正月朔癸卯。百官諸蕃朝賀。天子於蓬?宮含元殿受朝。▽是日。以我次西畔第二吐蕃下。以新羅使次東畔第一大食國上。古麻呂論曰。自古至今。新羅之朝貢大日本國久矣。而今列東畔上。我反在其下。義不合得。時?軍??實見知古麻呂不肯色。?引新羅使。次西畔第二吐蕃下。以日本使次東畔第一大食國上。(『?日本紀』天平勝?6年正月丙寅?)
  4. SBS (2010年 8月 30日). “〈SBS스페셜〉 ② 新羅가 日本 朝貢國? 거짓된 歷史” . 2013年 2月 13日에 確認함 .  
  5. 변인석 (1987). “當代 外國社의 錚匠事例에서 본 雇馬餘抗議의 再論”. 《東洋史學硏究》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