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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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옥
朴南玉
出生 1923年 月 日 ( 1922-11-30 )
日帝强占期 慶尙北道 慶山郡 下兩面
(現在의 大韓民國 慶尙北道 慶山市 )
死亡 2017年 4月 8日 ( 2017-04-08 ) (94歲)
美國 캘리포니아州 로스앤젤레스
國籍 大韓民國
職業 映畫 監督
活動 期間 1944年 ~ 2017年
宗敎 無宗敎 改新敎
學歷 이화여전
配偶者 이보라 (離婚)

박남옥 (朴南玉, 1923年 ~ 2017年 4月 8日 )은 大韓民國의 映畫 監督이다. 1923年 慶尙北道 하양 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전 을 中退하였다. 1944年 大邱에서 暫時 新聞 記者를 지내다가 辭職 後 서울로 다시 上京하였다. 1955年에 映畫 《 未亡人 》을 發表하여 大韓民國 最初의 女性 映畫 監督으로 評價받고 있다. 2017年 美國 로스앤젤레스 에서 老患으로 別世하였다. [1]

生涯 [ 編輯 ]

박남옥은 1923年 慶尙北道 하양에서 태어났다. 布木商을 하던 아버지 박태섭과 어머니 이두리 사이의 十男妹 가운데 세째였다. [2]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多才 多能한 面貌를 보였으며 特히 體育에 뛰어났다. [3] 1936年 慶北女學校에 入學한 뒤 陸上部에 들어가 높이뛰기, 投砲丸 等의 種目에 出戰하였다. [2] 1938·39年 前朝鮮陸上選手權大會에 投砲丸 選手로 出戰하여 [3] 3回 連續 朝鮮 新記錄을 記錄하며 優勝하였다. [4] 박남옥은 繼續하여 陸上選手를 하고 싶었으나 父母의 反對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

어려서부터 美術을 좋아한 박남옥은 우에노美術學校(現 도쿄美術大學)에 入學하고 싶었으나 學校에서는 卒業後 敎師가 되는 奈良女高師(現 나라女子大學) 外에는 推薦狀을 써주지 않았다. 몰래 準備하였던 우에노美術學校의 入學書類가 學校로 配送되자 問題가 생겼고 박남옥은 留學을 抛棄하고 [2] 1943年 이화여전 家事科에 入學하였다. [3] 1943年 동아일보의 大學入試 合格者 名單에 박남옥의 이름이 記錄되어 있다. [3] 박남옥은 이화여전 時節 寄宿舍에 살면서 時間이 날 때마다 映畫를 보았다. 後날 感銘 깊게 본 映畫로 베를린 올림픽 을 記錄한 레니 리펜슈탈 의 《올림피아》를 꼽았다. [5] 張大한 다큐멘터리를 女性이 만들었다는 것에 큰 衝擊과 感銘을 받았다고 한다. [6] 이화여전에 다니던 박남옥은 父母가 結婚을 强要하자 學校를 中退하고 美術을 배우기 위해 日本으로 密航하였다가 배가 坐礁되어 日本의 收容所에 收監되기도 하였다. [4] 以後 大邱每日新聞 에서 記者로 勤務하였다. [7]

박남옥은 日帝時期 日本語로 發刊되던 映畫 雜誌였던 《新映畫》에 실린 映畫俳優 김신재 의 인터뷰에 魅了되어 映畫에 關心을 갖게 되었다. 박남옥은 김신재가 出演한 모든 作品의 스틸 寫眞을 모으고 便紙를 써 보내는 熱誠 팬이었다. [5] 박남옥은 大邱每日新聞에서도 映畫 關聯 記事를 作成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日帝 末 學校 敎育은 韓國語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맞춤法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2] 解放이 되자 다시 서울에 간 박남옥은 親舊의 男便인 윤용규 (그는 1949年 《 마음의 故鄕 》을 監督한 뒤 越北하였다.)의 紹介로 朝鮮映畫社 광희동 撮影所에 入社하였고 꿈에도 그리던 김신재와 直接 만나 親分을 쌓게 되었다. [3] 박남옥은 최인규 의 《 自由萬歲 》(1946年) 後半 作業에 合流하였다. [2] 編輯助手로 일하던 박남옥은 신경균 의 《 새로운 盟誓 》 스크립터를 맡으며 映畫 經歷을 쌓았다. [6] 광희동撮影所에서 일하던 그는 또 다시 父母의 反對에 부딛혀 歸鄕하게 되었다. [3]

韓國戰爭 이 일어나자 박남옥은 國防部 撮影臺에 들어가 다시 映畫 作業을 하게 되었다. [4] 1953年 함께 從軍映畫를 만들던 이보라와 結婚하였다. [6] 戰爭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박남옥은 1954年 딸 이경주 [2] 를 낳은 지 사흘만에 知人들과 술자리를 갖은 자리에서 戰爭中에 男便을 잃은 아내에 對한 映畫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남옥은 시나리오를 맡기고 撮影, 俳優의 涉外와 같은 일을 進行하면서 出版社를 하던 親언니에게 映畫 製作 費用을 빌렸다. 박남옥은 아기를 업고 15名이 되는 스테프의 食事를 直接 차리면서 映畫를 製作하였다. [8]

未亡人 》은 1955年 12月 10日에 開封하였다. 박남옥은 "映畫 製作에 들어가기 前에 나는 藝術을 論했지만, 막상 映畫 製作에 들어가니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半年을 미친년처럼 이리 저리 뛰며 보냈다"고 回想하였다. [8] 서울 중앙극장에서 開封한 《未亡人》은 不過 3日만에 看板을 내리고 말았다. [5]

박남옥은 映畫의 失敗와 離婚이 겹쳐 한동안 몸져 누웠다. 1957年 父母가 大邱 生活을 淸算하고 서울로 올라 온 뒤 함께 살았으며 언니가 運營하던 《동아출판사》에 勤務하였다. 1959年 박남옥은 映畫雜誌 《씨네마팬》을 製作하며 다시 映畫를 만들 뜻을 보였지만 結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2] 1992年 美國으로 移住하였으며 2017年 4月 8日 別世하였다. [7]

作品 [ 編輯 ]

《未亡人》李 製作된 時期는 戰爭 直後여서 제대로 된 製作 環境을 갖출 수가 없었다. 박남옥은 製作者이자 '밥車 아줌마' 노릇까지 하며 映畫를 製作하였다. 《未亡人》의 配給社 이름이 〈姊妹映畫社〉가 된 것은 언니에게 製作費를 빌렸기 때문이다. [8] 박남옥은 映畫의 製作 過程에서 女性이라는 理由로 많은 差別을 받았다. 錄音室은 錄音을 拒否하기 일쑤였고 完成後에도 上映館을 잡을 수 없었다. 當時 商業映畫는 이미 35 mm 카메라로 製作되던 데 反해 16 mm 로 撮影된 《未亡人》은 大衆的이지 않다는 理由도 있었다. [6]

映畫는 美麗한 몽타쥬 技法으로 關心을 받았으나 興行은 極히 低調하여 3日만에 幕을 내렸다. [6] 잊혀졌던 박남옥의 《未亡人》은 1997年 第1回 서울女性映畫祭를 契機로 再評價를 받게 되었다. 韓國 最初의 女性監督으로 再照明되어 開幕招請作으로 上映된 것이다. [5] 박남옥의 別世를 契機로 서울女性映畫祭는 2008年 限時的으로 授與하였던 박남옥映畫賞을 2017年 다시 制定하여 해마다 受賞하기로 하였다. [9]

映畫는 戰爭에서 男便을 잃은 女性이 男便의 親舊로부터 도움을 받아 삶을 維持하면서 겪는 哀歡을 新派的 構造로 그리고 있다. 映畫의 네거티브 필름에서 結末部는 消失되었다. [6]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