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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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재
出生 1919年 3月 31日 ( 1919-03-31 )
日帝 强占期 平安北道
死亡 1998年 3月 31日 ( 1998-03-31 ) (79歲)
美國 버지니아州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配偶者 최인규

김신재 (金信哉, 日本式 이름: 星信載, 1919年 3月 31日 ~ 1998年 3月 31日 [1] )는 大韓民國 映畫 俳優 이다.

生涯 [ 編輯 ]

平安北道 녕변군 [2] 또는 義州郡 出身 [3] 으로, 일찍 滿洲 로 移住하여 단둥 의 안동현高等女學校에서 修學했다. 新義州 新演劇場에서 事務員으로 일하다가 劇場 映寫技士로 일하던 최인규 와 만나 結婚했다.

結婚 後 男便 최인규의 勸誘로 1937年 《심청》에 端役으로 出演하면서 映畫 俳優가 되었다. 최인규가 監督으로 데뷔한 뒤로는 男便의 映畫에 主로 出演했으며, 萬年少女로 불릴 만큼 淸純한 容貌로 많은 人氣를 끌었다. 韓國 最初의 女性 監督인 박남옥 이 學生 時節 김신재에 對한 憧憬을 契機로 映畫界에 入門하게 되었다는 逸話가 有名하다. [4]

日帝强占期 末期에 최인규가 만든 《太陽의 아이들( 日本語 : 太陽の子供達 )》, 《사랑의 盟誓( 日本語 : 愛の誓 )》, 《신풍의 아들들( 日本語 : 神風の子供達 )》 等 露骨的인 親日 映畫에 主演으로 出演하여,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演劇/映畫 部門에 최인규와 함께 包含되었다.

日帝 强占期에 맡은 役割은 主로 軟弱한 女性이었다. 《집 없는 天使》(1941)에서 맡은, 동생을 데리고 거리를 떠돌며 꽃을 파는 불쌍한 孤兒 少女 役割이 代表的이다. 김신재는 "코스모스와도 같이 可憐淸楚"韓 引上이 時代的 雰圍氣와 잘 맞아떨어져, 빠른 時日 동안 문예봉 이나 김소영 과 버금가는 朝鮮 最高의 女子 俳優 位置에 올랐다. 이 時期의 强壓的인 展示 雰圍氣 속에서 文盲에 가깝고 日本語를 全혀 驅使하지 못하던 문예봉에 비해 유리한 點도 있었다.

韓國 戰爭 때 최인규가 拉北된 後 김신재는 釜山 避難 生活 中 生活苦로 어려운 生活을 하면서 1男 1女를 혼자 키웠다. 釜山에서는 水仙花라는 茶房을 열어 映畫人들이 모이는 場所가 되기도 했다.

韓國 戰爭 中 한 집에 살게 된 親할머니와 外할머니의 葛藤을 통해 이데올로기 對立의 悲劇을 寓話的으로 그린 윤흥길 原作의 映畫 《장마》(1979)에서 황정순 과 함께 할머니 役割을 맡는 等 1980年代까지 勞役으로 많은 映畫에 出演하며 活動했다. 總 出演作이 數百篇에 이르며, 마지막 作品은 문여송 이 演出한 《雜草들의 봄》(1989)이다.

정진우 監督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로 大鐘賞 女優助演賞을 受賞하기도 했다. [5] 中年에도 젊었을 때의 가녀린 이미지의 延長 線上에서 자애롭고 고운 어머니 役割을 맡았다. 따라서 力作으로 評價되는 《장마》에서의 억척 할머니 延期는 例外的인 境遇에 屬한다.

1983年 딸과 함께 美國 으로 移住해 居住하다가, 1998年 生日에 79歲의 나이로 버지니아州 에서 死亡했다.

各州 [ 編輯 ]

  1. 전승훈 (1998年 4月 1日). “[訃音] 元老 女俳優 김신재氏”. 東亞日報.  
  2. “김신재 [金信哉]”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 2007年 11月 6日에 確認함 .  
  3. “김신재” . DAUM 映畫 . 2008年 6月 2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조윤주 (1997年 3月 25日). “特輯/女性監督 1號 박남옥 - 이 女人을 아시나요” . 씨네21 . 2008年 6月 23日에 確認함 .  
  5.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씨네21.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6月 23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 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李承姬 (2006年 12月 15日). 《植民地時代 大衆藝術人 事前》. 서울: 소도. 45~48쪽. ISBN   978-89-90626-26-4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