萬욱
(萬彧, ? ~
272年
)은
中國
三國 時代
동오
末期의 官僚로,
者
는
문빈
(文彬)이며
丹陽郡
율養賢(?陽縣) 사람이다.
後漢
의 開國功臣
만수
의 後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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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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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令 벼슬을 할 때 오정후(烏亭侯)였던
孫皓
와 親密한 사이가 되었다.
264年
,
經濟
가 世上을 떠나자 當時 左前群(左典軍)이었던 萬욱은
菖蒲
와
福量興
에게
孫皓
의 人品을 稱讚하며 새 皇帝로 推戴할 것을 勸했다. 두 사람은 萬욱의 말을 받아들여 太後 朱氏에게 아뢰고
孫皓
를 새 皇帝로 登極하게 했다. 그러나
孫皓
가 暴惡한 짓을 일감高 酒色을 좋아하자 크게 失望하여 後悔하는 생각을 가졌다. 萬욱은 이 事實을
孫皓
에게 告했고, 怒한
孫皓
는 두 사람을 귀양보내게 했다가 다시 사람을 보내 죽이고 그들의 三族을 滅했다.
266年
8月 右丞相으로 任命되었으며,
267年
孫皓
가 首都를 다시
建業
(建業)으로 옮기자 武昌에 남아 지켰다.
268年
10月에는 軍士를 이끌고 襄陽(襄陽)을 攻擊하였다.
272年
萬욱은 自殺했다.
271年
孫皓
가 建業의 西쪽으로 오랫동안 遊覽을 나가있자 萬욱은
정봉
, 左將軍 流萍(留平)과
孫皓
가 建業으로 돌아가지 않을 境遇 自身들끼리 建業으로 돌아가 政務를 處理할 것을 議論했는데, 이를 노엽게 여긴
孫皓
는 잔치 때 萬욱에게 獨走를 건네주게 했으나 술盞을 傳하는 사람이 술을 덜어내는 바람에 無事할 수 있었다. 그러나
孫皓
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萬욱은 앞으로 닥칠 火를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以後 萬욱의 子息들은
孫皓
에 依해 餘陵(廬陵)으로 귀양보내졌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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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個는 孫皓에게 올린 上疏에서, 萬욱은 本來 種 노릇을 하던 微賤하고 才能이 보잘것없는 字였으나, 分에 넘치는 地位를 얻었다고 評하였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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酸度
, 《오우승上滿空墓誌銘》(吳右丞相萬公墓誌銘) [《强小非陵만씨종보》(江蘇毘陵萬氏宗譜)에 認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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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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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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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司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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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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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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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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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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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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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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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眞誥) 卷20에 主席으로 引用된 《虛葬사세보》(許長史世譜)에 記錄이 있으나, 在任 時期는 알 수 없다.
年
과 同一人物로 보는 見解도 있다.
- ↑
《
水西
》(隨書) 警적지(經籍志)에 記錄이 있으나, 在任 時期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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