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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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승
出生 1961年 9月 3日 ( 1961-09-03 )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中區
死亡 2007年 8月 13日 ( 2007-08-13 ) (45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職業 俳優
活動 期間 1980年 ~ 2007年
宗敎 改新敎
學歷 국민대학교 史學科 學士 (卒業)
子女 膝下 1女

김주승 (金周承 [1] , 1961年 9月 3日 ~ 2007年 8月 13日 )은 大韓民國 俳優 였다.

生涯 [ 編輯 ]

국민대학교 在學 中 아르바이트 等을 하며 彷徨하다 映畫 出演이 因緣이 되어 3學年에 在學 中이던 1983年 MBC 16期 公採 탤런트로 正式 데뷔하였다. 1986年 MBC 드라마 《 첫사랑 》에서 4,5回 쯤에 사라지기로 되어 있었던 端役이었으나, 漸漸 視聽者들의 呼應을 얻어 主人公 황신혜 의 相對役으로 昇格되어 終盤까지 出演하였다. 이 드라마에서의 人氣를 발板으로 靑春 스타로 자리매김한 그는 1987年 以後 《 순심이 》, 《 野望의 歲月 》, 《 달빛 家族 》, 《 戀人 》等 많은 멜로드라마의 主人公으로 活躍했다.

1990年 에는 1980年代 ‘長安의 큰손’으로 第5共和國 權力型 金融非理事件의 中心人物이기도 한 張玲子 의 큰 딸 김신아와 結婚 하면서 世間의 話題를 모았다. 그때부터 演技 外 다양한 事業에 손대기 始作했으며 1994年 에는 張玲子 不渡事件의 餘波로 美國으로 逃避하는 等 試鍊을 맞았다. [2] 잘나가던 事業이 不渡가 나고, 40餘億원이라는 巨額의 詐欺嫌疑로 手配를 받은 채 美國으로 期約 없이 逃避生活을 떠났던 그는 1996年 2年間의 美國生活을 끝내고 SBS 드라마 《 兄弟의 江 》으로 再起에 成功했다. [3]

1997年 腎臟癌 判定을 받아 鬪病을 해왔으며 2002年 病勢가 好轉되는 듯 하여 演藝界 復歸와 事業 再開 等으로 積極的인 再起의 意志를 보였다. 2003年 에는 第18代 한국방송演技者協會 會長으로 選任되고 2005年 에는 드라마 프로덕션 디지털돔을 設立하였다. KBS 미니시리즈 《 그女가 돌아왔다 》, MBC 아침드라마 《이제 사랑은 끝났다》, SBS 金曜드라마 나도야 간다 》 等을 製作하고 自社 製作 作品 《 그女가 돌아왔다 》 에도 出演하는 等 마지막까지 煙氣와 事業에 對한 熱情을 불태웠다. 病勢가 惡化되자 2007年 1月 結婚 17年 만에 離婚을 했고, 以後 周邊과 連絡을 끊고 鬪病 生活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7年 1月 부터 다시 癌이 再發하면서 膵臟癌 으로까지 이어져 같은 해 8月 13日 死亡하였다. [4]

學歷 [ 編輯 ]

出演作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公演 [ 編輯 ]

  • 1987年 演劇 《19 그리고 80》 ... 해롤드 驛
  • 2001年 樂劇 《무너진 사랑塔아》
  • 2005年 뮤지컬 《카츄社의 노래》

CF [ 編輯 ]

受賞 [ 編輯 ]

以外 履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 配偶者: 김신아 - 張玲子 의 맏딸 (1990年 結婚, 2007年 1月 離婚)
    • 딸: 金某氏 (1998年 ~ )

各州 [ 編輯 ]

  1. “幕내린 MTV「첫사랑」병식役 金周承氏 "端役이었지만 큰 愛着 " . 《경향신문》. 1986年 8月 19日 . 2016年 12月 13日에 確認함 .  
  2. 김주승 波瀾萬丈한 삶 드라마처럼 막 내리다 《헤럴드經濟》, 2007年 8月 15日
  3. "人生 밑바닥까지 가보니 演技도, 事業도 알겠더군요" 《이코노믹리뷰》, 2005年 2月 21日
  4. '큰손의 사위' 김주승 10年 癌 鬪病 끝에 死亡 《주간한국》, 2007年 8月 2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