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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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
基本 情報
本名 금난새 [1]
出生 1947年 9月 25日 ( 1947-09-25 ) (76歲)
大韓民國 釜山廣域市
性別 男性
職業 指揮者
活動 時期 1967年 ~ 現在
配偶者 홍정희
家族 아버지 금수현
어머니 전혜금
金나라
누이同生 금내리
妹弟 황남일
男동생 금누리
男동생 금노상
外할아버지 전상범
外할머니 김말봉
所屬社 (株)
關聯 活動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城南市立藝術團

금난새 ( 1947年 9月 25日 ~)는 大韓民國 의 指揮者이다.

1967年 클래식 音樂 編曲家 첫 데뷔한 그는 서울藝術高等學校 서울大學校 音樂大學 作曲科를 卒業했고 韓國에서 指揮를 배울 수 없던 時節 베를린 音樂大學의 Hans-Martin Rabenstein 敎授에게 찾아가 指揮를 배우기 始作했다. 1977年, 4年 만에 베를린 音大를 卒業하고 카라얀 國際 指揮 콩쿠르에서 4位로 入賞하며 指揮者로 正式 데뷔했다.

KBS 交響樂團 을 12年間 이끌었고, 1992年 수원시립교향악단 의 常任 指揮者로 電擊 赴任했다. 年間 10回의 演奏에 머물던 수원시香을 年間 60餘回 以上 연주하는 樂團으로 발전시켰고, 以後 예술의전당 企劃프로그램人《解說이 있는 靑少年 音樂會》를 企劃하여 6年 間 全回 全席 賣盡을 記錄했다. 1998年에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現,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創團하여 《로비 音樂會》, 《圖書館 音樂會》, 《갤러리 音樂會》, 《鬱陵島 音樂會》等 場所에 拘礙받지 않고 全國 坊坊 曲曲을 다니며 클래식 大衆化에 앞장섰다. 無一푼으로 始作한 오케스트라를 8年만에 年間 135回 公演, 觀客 12萬名을 動員하는 國民 오케스트라로 發展시켰다. [2] 2006年~2010年 景氣필하모닉, 2010年~2014年 仁川 市立交響樂團을 거쳐 2015年부터 城南市立交響樂團의 常任指揮者 및 藝術 總 監督을 맡고 있다. 2015年부터 韓國 經濟新聞社에서 創團한 韓經필하모닉의 初代 指揮者 兼 藝術監督으로도 委囑되어 企業의 文化藝術 參與에 새로운 모델을 提示하고 있다. [3] 2013年~2019年 서울藝術高等學校 校長을 歷任하고, 2019年부터 名譽校長으로 委囑되었다.

學窓 時節 [ 編輯 ]

《그네》를 作曲한 아버지 금수현 이 지은 이름 ‘금난새’는 大韓民國에 登錄된 最初의 純 韓國語 이름이다. 금난새의 兄은 1945年生으로 아버지가 韓國語 이름 ‘뿌리’로 兄의 出生 申告를 하려는데 漢字 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拒否當해 어쩔 수 없이 ‘나라’라는 漢字 이름으로 했다. 解放된 以後에도 日帝 殘滓가 남아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新聞에 寄稿를 통해 純 韓國語 이름을 認定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以後 政府에서 認定하여 制度가 바뀐 後 금난새는 순 韓國語 이름으로 登錄됐다. 금난새 동생으로 태어난 3名은 모두 한글이름으로 ‘ ’字 돌림으로 지었고 금난새의 子女들은 ‘ ’字 돌림으로 지었다. [4] 아버지의 性格이 獨特해 ‘ 돈키호테 ’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금난새는 이러한 아버지를 닮아갔다. [5]

금난새는 音樂家인 아버지를 보며 漠然히 音樂家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TV에서 레너드 번스타인 이라는 作曲家가 美國 카네기 홀 에서 《靑少年을 위한 音樂會》를 하는 것을 보고 指揮者의 꿈을 키웠다. [2] 1960年代 秒였던 大韓民國에는 指揮者가 아예 없던 時節이었는데 누구에게도 指揮를 배울 方法이 없어 혼자서 獨學을 했다. 그러다가 서울大學校 音樂大學에서 作曲과 指揮를 배우던 中 直接 指揮를 하겠다고 挑戰했다. 大學校 2學年 時節 금난새는 親舊들 스무名 假量을 모아 《서울 영 앙상블》을 만들어 演習室을 찾다가 세종로에 있던 美國 公報院 의 講堂이 비어있다는 것을 確認했다. [6] 西쪽에서 연주하면 한양대학교 學生들이 안오고, 東쪽에서 연주하면 延世大學校 , 이화여자대학교 學生들이 안올 것이 憂慮됐는데 美國 公報院은 中間즈음에 位置하여 最適이었다. 그리하여 美國人이었던 院長에게 面談을 要請해 2層 講堂을 演習室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院長은 시큰둥한 反應이었으나 금난새가 2달에 한 番쯤은 美國 作品도 연주하겠다고 하자 院長은 欣快히 承諾해 그 곳에서 練習할 수 있게 되었다. [6] 學校를 卒業하고 音樂敎師 生活을 하다가 1年 만에 그만뒀다.

音大를 卒業했으나 指揮者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無條件 外國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70年代였던 時節 留學이 쉽지 않았었는데 偶然히 《世界 靑少年 音樂 聯盟》이라는 곳에 參加할 機會를 얻어 留學을 간 後 現地에서 指揮 先生님을 찾을 셈이었다. [7] 20代 後半이었던 금난새는 그렇게 音樂의 都市로 알려진 獨逸 베를린 으로 留學을 가 베를린 音樂大學 을 無酌定 찾아갔다. 그 大學의 指揮科 敎授 두 名인 알렌도르프와 라벤슈타인 敎授의 連絡處를 받았는데 將軍 이름같은 알렌도르프 보다는 音樂家같은 이름의 라벤슈타인 敎授를 選擇해 連絡하자 敎授는 다음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금난새는 敎授에게 그동안의 音樂 工夫를 한 旅程을 仔細하게 說明했다. 라벤슈타인은 나이가 너무 많아 늦었다며 歸國해 留學 手續을 밟고 獨逸로 다시 오려면 1~2年은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바로 工夫하는게 좋겠다고 助言하면서 받아주겠다고 말했다. [8] 금난새는 바로 工夫를 始作했고 資金이나 아무것도 없이 始作한 금난새를 授業料도 받지 않고 도와준 敎授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後에도 學生이나 學父母가 도움을 要請해오면 그때를 떠올리며 도와준다고 했다. 금난새가 發見해 有名한 音樂家로 成長한 사람으로는 代表的으로 장한나 가 있다. 수원시香을 이끌던 時節 11살이던 장한나가 오디션 보러 왔는데 實力이 좋아 協演을 시켜 音樂家로 成長하는데 도움을 줬다. [9] 금난새는 “才能을 봤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機會를 줘야 하는게 當然하다”고 생각했고 “偉大한 社會란 누구든지 꿈을 가질 수 있게 機會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指揮者 데뷔 [ 編輯 ]

베를린 音大를 卒業하고 大韓民國 最初로 카라얀 國際 指揮 콩쿠르 에서 4位로 入賞하여 指揮者로 데뷔하게 된다. 카라얀 國際 音樂 콩쿠르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이 指揮者를 데뷔시키기 위한 目的으로 1969年에 만든 콩쿠르다. 이곳에서 入賞한 사람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를 指揮할 수 있는 機會를 갖게된다.

이 콩쿠르 施賞式 當日 3名이 指揮하던 날 금난새는 첫 番째로 指揮하고 時間이 남아 每달 할아버지 合唱團 指揮 아르바이트를하던 곳에 가서 재빨리 指揮하고 돌아와 施賞式에 參與하려고 했는데 當日 파티 兼 音樂會를 하는 날이여서 日程이 늦어져 애를 먹기도 했다. 금난새는 “할아버지 合唱團이나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모두 똑같은 音樂이기 때문에 重要하다”라고 말했다. [10] 歸國 後 첫 番째로 맡게 된 곳이 KBS交響樂團 으로 最年少 指揮者가 되었다. 이 곳에서 12年間 指揮者로 活動하다가 1992年에 수원시립교향악단 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11]

수원시向·靑少年 音樂會 指揮 [ 編輯 ]

수원시香이 금난새에게 連絡해와 “指揮者도 없고 問題가 많다”고 呼訴해왔고 이를 解決하기 위해 指揮者를 自處한 것이었다. [11] 大韓民國 最高의 交響樂團이던 KBS 交響樂團에서 알려지지도 않고 規模도 작은 수원시向으로 가자 사람들은 금난새가 불명예스럽게 나가는걸로 誤解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난새는 “좋은 오케스트라의 指揮者도 좋은 指揮者이지만, 망가진 오케스트라를 살려내는 것도 能力있는 指揮者”라는 생각을 가져 옮긴 것이었다. 當時 水原市響은 1年에 8~10回 程度만 연주하는 活動이 적은 오케스트라였다. 어느 程度인가 알아보기 위해 500席 規模의 水原市響 演奏會에 갔는데 80名이 연주하는데 觀客이 80名밖에 없었다. [12] 그것마저도 2部에서 40名으로 줄었는데 演奏者의 家族들이 왔다가 얼굴만 보고 나가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演奏 實力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좀더 改善시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기 始作했다. 當時 每年 50萬원 程度의 後援金이 들어왔는데 團員들에게 나누니 10萬원도 안되는 水準이었고 차라리 이를 나누기보단 새로운 것을 試圖해보자 하여 오페라를 計劃했다. [8] 製作費가 普通 2~3億원이 드는 오페라를 500萬원으로 만들기엔 太不足이었다. 一旦 聲樂家 한 名當 涉外費 150萬원씩 3名을 涉外하고 나머지 50萬원으로 進行費를 充當하여 始作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舞臺 製作이 가장 큰 問題였다. 水原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큰 家口點 社長에게 連絡해 家口를 빌리고싶다고 付託했다. 社長은 家口 無料貸與를 欣快히 承諾했고 一般的인 舞臺 세트로 만들어놓은 假짜 家口보다 더 現實感 있는 오페라 세트가 完成되어 觀客 1,600席이 모두 꽉차게 됐다. [8]

公演에는 水原市長과 京畿道知事도 왔는데 이들은 단돈 500萬원으로 이러한 舞臺를 만들어 놓은 것에 크게 感動받고 쓰레기 埋立場을 野外 音樂堂으로 만들고 演習室도 만들었다. 새로운 文化空間이 創造되자 水原市民들은 좋아했다. 수원시香이 成功하자 藝術의 殿堂 에서 連絡이 와 금난새에게 靑少年 音樂會를 提案했다. 以前부터 靑少年들을 위한 音樂會를 생각해오던 금난새는 欣快히 承諾하고 《금난새와 함께 하는 世界音樂旅行》이라는 題目으로 演奏會를 始作했다. [13] 그리고 그 때까지 無料로 演奏會를 했는데 이를 바꿔 2,000원을 받아 靑少年들에게 돈을 내고 音樂會를 보는 習慣을 길러주자고 提案했다. 2,400席이었던 이 演奏會는 2001年부터 2006年까지 大韓民國 最初로 有料 音樂會 全席 全回 賣盡 記錄을 세웠다.

民間 오케스트라 活動 [ 編輯 ]

수원시립교향악단과는 任期 末期에 樂團과 深刻한 葛藤을 겪으며 不名譽 退陣해 口舌數에 오르기도 했다. 수원시香을 나와 大韓民國 最初의 民間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現,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創團했다. [11] 民間 오케스트라를 運營하려면 月給과 演習室 運營費 等 資金이 必要한게 많았다. 서울 테헤란로 에 있는 포스코 本社를 가면 20미터 높이의 琉璃로 된 로비가 있는데 금난새는 이것이 마음에 들어 弘報팀에 演奏를 提案했고 弘報팀은 승락했다. 1999年 1,000餘席의 座席을 놓고 베토벤 9番 交響曲 合唱을 연주하여 起立拍手를 받았다. 큰 成功에 鼓舞된 금난새는 포스코 弘報팀에 베토벤 交響曲 全曲 演奏를 定期的으로 할 것을 提案했고 合意가 됐다. 9個의 交響曲 定期 演奏가 모두 끝나고 다음해가 되어 차이콥스키 6個 交響曲 演奏도 마쳤다. 이 곳에서 定期 演奏會는 只今까지 演奏가 이어지고 있다. [2]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11年 부터 忠武아트홀 常駐團體가 되어 해마다 忠武아트홀에서 定期的으로 音樂會를 열고 있다.

금난새는 가장 感銘깊었던 演奏會로 2006年 鬱陵島 에서 空然한 音樂會를 꼽는다. 全國을 다 다녀봤지만 鬱陵島는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團員들이 배를 타고 가면 뱃멀미를 하기 때문에 컨디션 問題로 가기 어려웠다. 그러던 中 우연한 機會에 空軍參謀總長을 만나게 되었다. 空軍參謀總長이 全國에 못 가본곳이 있냐고 묻자 금난새는 “鬱陵島 演奏會를 가야 하는데 뱃멀미때문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자 30名이 輸送可能한 헬기 3代 支援을 約束했다. 그러나 떠나기 바로 前날 안개가 끼어서 헬기가 뜨지 못해 浦項 에서 배를 타고 갔다. 이날 《解說이 있는 音樂會》는 500席 規模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를 超過해 1,000名 가까이 사람이 몰렸다. [8]

다양한 페스티벌 [ 編輯 ]

指揮者 금난새는 오케스트라 指揮 活動 外에 다양한 페스티벌의 藝術監督으로도 活動하고 있다.
濟州 뮤직 아일 페스티벌, 釜山 챔버 뮤직 페스티벌, 城南 러브 페스티벌 等 國內는 勿論, 맨하탄 챔버 뮤직 페스티벌, 유로-아시안 뮤직 페스티벌 等 海外에서도 다양한 컨셉으로 페스티벌의 領域을 넓혀나가고 있다. 演奏者 涉外에서부터 프로그램 構成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程度로 매 페스티벌의 意義, 演奏 場所, 觀覽客들의 性向까지 把握하여 最高의 페스티벌이 될 수 있도록 細心하게 準備하고 있다.
濟州 뮤직 아일 페스티벌 (Jeju Music Isle Festival)
그가 2005年 始作한 <濟州 뮤직 아일 페스티벌>은 每年 겨울 濟州와 서울에서 열흘間의 日程으로 펼쳐지고 있다.
國內外 實力派 演奏者들이 大擧 參與하여 댜채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페스티벌이라 많은 室內樂 愛好家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맨하탄 챔버 뮤직 페스티벌 (Manhattan Chamber Music Festival)
世界 經濟, 文化藝術, 外交의 中心地 뉴욕 맨하탄을 舞臺로 펼쳐지는 맨하탄 챔버 뮤직 페스티벌은 2012年 스타인웨이 홀에서 첫 선을 보였다.
'音樂을 통한 사랑의 實踐'에 그 意味를 두고 始作되었으며 페스티벌 첫 募金된 企業 後援金은 UN 반기문 總長에게 傳達하여 아프리카, 南美 等 低開發 國家를 돕는데 使用하기도 했다.
이 後援金 마련에는 4個의 企業과 1個의 都市가 뜻을 같이 했다. (풍산, 三益樂器, 高麗製鋼, 유라시안 코퍼레이션, 仁川市)
文化의 中心地에서 邊方을 돌아보는 意味있는 契機가 되고 있는 이 페스티벌은 音樂과 外交 그리고 企業이 하나된 새로운 形態의 寄附文化를 만들어 가고 있다.
釜山 챔버 뮤직 페스티벌 (Busan Chamber Music Festival)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大學 敎授 電力 [ 編輯 ]

略歷 [ 編輯 ]

  • 2015年 ~ 現在 : 韓經 필하모닉 藝術監督 兼 常任 指揮者
  • 2015年 ~ 現在 : 城南市立交響樂團 藝術監督 兼 常任 指揮者
  • 2011年 : 濟州道 弘報大使
  • 2010年 : 仁川市立交響樂團 藝術監督 兼 常任 指揮者
  • 2010年 : 文化體育觀光部 文化藝術 名譽敎師
  • 2010年 : 結核退治 弘報大使
  • 2008年 : S&T홀딩스 社外理事
  • 2006年 : 京畿道立오케스트라 藝術監督 兼 常任指揮者
  • 2002年 : 韓國企業메세나協議會 弘報大使
  • 2000年 : 淸州市市立交響樂團 常任指揮者
  • 1999年 : 慶熙大學校 音樂大學 敎授
  • 1998年 : 유라시안 필하모닉 音樂 監督 兼 指揮者
  • 1992年 : 수원시립교향악단 常任指揮者
  • 1986年 : 볼프강 자발리쉬 의 招請으로 뮌헨 國立劇場에서 오페라 指揮 硏修
  • 1981年 : KBS 交響樂團 專任指揮者
  • 1980年 : 國立交響樂團 專任指揮者
  • 1976年 : 프랑스 피에르 데르보 마스터클래스 參加

受賞 經歷 [ 編輯 ]

  • 2016年 : 第12回 골든티켓어워즈 클래식·舞踊·傳統 아티스트上
  • 2012年 : 第8回 釜山國際合唱祭 大衆音樂 部門 出戰 (銀賞)-<패밀리合唱團>
  • 2010年 : 第13回 효령上 文化部門
  • 2009年 : 韓國最高經營者會議 文化經營 文化人部門 大賞
  • 1999年 : 第15回 評論家協會 音樂對象
  • 1997年 : 藝術의 殿堂 感謝牌
  • 1995年 : 獄官文化勳章
  • 1977年 : 난파音樂賞
  • 1977年 : 第5回 카라얀 國際콩쿠르 4位 入賞
  • 1970年 : 美國 公報院 어워드 오브 메리트上
  • 1965年 : 서울大 音大 主催 콩쿨 作曲部門 立像

著書 [ 編輯 ]

  • 《나는 작은 새 금난새》 디자인하우스, 1996年 12月 31日 ISBN   9788970410722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旅行 1》 생각의나무, 2006年 10月, ISBN   9788984986190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旅行 2》 생각의나무, 2006年 10月, ISBN   9788984987098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旅行》 생각의나무, 2003年 9月 30日 ISBN   9788984982840
  •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交響曲》 생각의나무, 2008年 12月 23日 ISBN   9788984989238
  • 《모든 可能性을 指揮하라》 禮敬, 2015年 3月 2日 ISBN   9788970845272

音盤 [ 編輯 ]

  • 《금난새의 키즈 클래식》 2006年 10月 24日
  • 《금난새 - Haydn : Symphony No.103 In E, Cello Concerto In C》
  • 《금난새 - Mozart: Symphony No.25, Eine Kleine Nachtmusik》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旅行》2004年 4月 6日
  • 《금난새와 함께 가는 愉快한 音樂旅行 - Opera Overtures》
  • 《韓國의 情 (韓國의 情)》 - 원경수, 금난새
  • 《비발디 : 沙溪 - 금난새》2005年 4月 19日

放送 [ 編輯 ]

廣告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深層 인터뷰
前任
按酒用

1997

大戰 市立 交響樂團 常任 指揮者
1998-1999
後任
함신익

2001-2006

前任
없음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音樂 監督 兼 常任 指揮者
1998-
後任
現在 在職中
前任
없음
韓國 大學生 聯合 오케스트라 音樂 監督 兼 常任 指揮者
2010-
後任
現在 在職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