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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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협
權?
권협 영정(국립민속박물관)
권협 影幀( 國立民俗博物館 )
朝鮮 禮曹判書
이름
四星(思省)
石幢(石塘)
身上情報
出生日 1553年
死亡日 1618年
國籍 朝鮮
性別 男性
本館 安東
父親 勸相 (權常)
母親 安定 羅氏
徐薰 宣武功臣(宣武功臣)

권협 (權?, 1553年 ~ 1618年 )은 남强攻(南崗公) 勸相(權常)李 安定羅氏(安定羅氏) 夫人에게서 얻은 다섯째 아들이다. 諡號는 忠情公(忠貞公), 字는 사성(思省), 號는 石幢(石塘)이다. 길創軍(吉昌君)에 封해지기도 하였다.

生涯 [ 編輯 ]

1553年( 明宗 8) 5月 24日 서울 主動(鑄洞) 生이다. 順川郡 (順天君) 移管(李琯)에게서 受學하고 成均館 에 들어가 1577年( 宣祖 10) 9月 9日의 謁聖試에 遊學(幼學)으로 乙과 第 4人으로 及第하였다. 全的·사예· 承文院 · 春秋館 等의 벼슬을 거쳐 『 明宗實錄 (明宗實錄)』의 編纂에 參與하였다. 1589年 各 道에 怪疾이 發生하자 咸鏡道 에 派遣되어 百姓들을 돌보고 祭祀를 올렸다.

壬辰倭亂 에 代가(大駕)가 西北으로 播遷하려 하자 집의(執義)로서 죽기로써 서울을 지켜야 할 義理를 逆進(力陣)하니 賃金이 가탄(嘉歎)하고 佩劍(佩劍)을 내렸다. 1596年에 敎理·侍講官을 거쳐 이듬해 應敎로 있을 때 丁酉再亂 이 일어나자 高級社(告急使)로 明나라에 가서 事態의 時急함을 알리고 援兵을 請하였다. 이때, 明나라 兵部侍郞 李霆(李楨)李 朝鮮의 地勢를 알고자 하므로, 山川의 形勢와 遠近을 圖面에 그려가며 說明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因해 步兵科 水軍을 얻고 軍糧을 調達하게 하였다. 名 管理는 "온나라를 통틀어 이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라 하며 讚歎하였다.

권협이 明나라에 援兵을 請하러 간 100餘日 間의 記錄이 傳하는데 《燕行錄》이라 하며 國文 飜譯이 韓國古典飜譯院 韓國古典綜合DB에 登載되어 있다. 《燕行錄》은 권협 一行이 1597年(宣祖 30) 2月 10日 義州 에서 出發하여 鴨綠江 을 건넌 날부터 5月 20日 使命을 마치고 다시 義州에 到着하기까지의 記錄을 싣고 있으며, 國內의 旅程은 省略하고 義州에서부터의 旅程만을 記錄한 것이다. 太平한 때 蛇行(使行)들이 有力觀光(遊歷觀光)을 겸하던 境遇와는 달리, 純粹한 書寫體로 事實의 記錄에만 充實하였다. 권협은 돌아와서 禮曹 參判· 好調 參判이 되었으며, 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갔다. [1]

1604年 大司憲 이 되었고, 特命을 받아 宣武功臣(宣武功臣) 3等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길創軍(吉昌君)에 封해졌으며 全羅道監査가 되었다. 1607年 禮曹判書를 거쳐 1609年 宗廟營建을 甘受한 공으로 正憲大夫가 되었으나, 光海君 때에 弘文館의 彈劾을 받아 官職을 버리고 杜門不出하였다. 1614年(光海君 6)에 崇政大夫(崇政大夫)로 숭질(崇秩)되고 1616年(光海君 8) 여름에 宗系辨誣(宗系辨誣)에 對한 謝恩使(謝恩使)가 되어 明나라에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 이듬해 겨울에 疳疾(感疾)이 들어 1618年(光海君 10)에 졸하였다.

各州 [ 編輯 ]

  1. “燕行錄” . 《韓國古典綜合DB》. 1976年 12月 30日 . 2021年 6月 14日에 確認함 .